하의도 앞바다의 일출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하의도 앞바다의 일출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전남 목포에서 쾌속선으로 1시간 30분을 더 타고 들어가야 도착하는 하의도(荷衣島).

섬의 모양이 '물에 떠 있는 연꽃같다'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하여 그렇게 불린다.

능산도가 머리쪽 맨 앞에 있고 꼬리쪽으로는 상태도와 하태도(신의면) 등 크고 작은 여러 섬을 두고 있는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의 본 섬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태어나 11살까지 살았던 생가로 유명한 곳이지만, 이곳은 무려 380여년간 토지탈환 투쟁을 벌여 끝내 자신들의 땅을 찾은, 세계농민운동역사에 빛나는 기념비적 땅이다.

인물에 가려 위대한 역사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거꾸로 위대한 역사가 큰 인물을 냈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내 땅 되찾겠으려 한 당당하고 완강한 역사

하의도 토지반환투쟁은 소작료 삭감이나 소작권 보장을 요구하는 수준의 소작쟁의가 아니라 자신들이 개간한 땅을 돌려 받겠다는 당당한 투쟁이었다.

봉건 왕조의 세도가, 식민지주, 미군정청 등 시대를 바꿔가며 새롭게 등장하는 지주들을 상대로 자신들이 개간한 토지는 끝내 지켜내겠다는 물러서지 않은 완강한 투쟁이었다. 

온 섬 주민이 똘똘 뭉쳐 법정투쟁과 투지유상매수운동, 집단시위, 농민조합결성 등 적시에 필요한 방법으로 흔들리지 않고 함께 했기 때문에 이룰 수 있는 역사적 성취였다. 

근 4세기에 걸쳐 산맥처럼 펼쳐진 하의3도 토지탈환 투쟁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엿보인다.

(사)신안군농민운동기념사업회가 지난 21일 오전 신안군 하의면사무소 강당에서 '하의도 토지탈환 운동-어느 조선농민쟁의기록'을 주제로 '신안군 항일농민운동 인문학 강좌'를 진행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사)신안군농민운동기념사업회가 지난 21일 오전 신안군 하의면사무소 강당에서 '하의도 토지탈환 운동-어느 조선농민쟁의기록'을 주제로 '신안군 항일농민운동 인문학 강좌'를 진행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사)신안군농민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박천우)가 그 일환으로 지난 21일 오전 신안군 하의면사무소 강당에서 '하의도 토지탈환 운동-어느 조선농민쟁의기록'을 주제로 '신안군 항일농민운동 인문학 강좌'를 진행했다.

고승재 상임이사는 "신안군 농민운동이 모두 중요하지만 특히 하의도 토지탈환운동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려는 첫 시발점"이라고 이날 강좌에 의미를 부여했다.

강좌에 참석한 주민들에게는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는 여러 형태의 기록물들에 대해 주의깊게 살펴보아 줄 것을 당부했다.

강사로 나선 이규수 강덕상자료센터장은 하의3도 토지탈환운동에 대해 △380여년에 걸친 장기투쟁 △조선시대 세도가, 일제시기 식민지 지주, 해방 이후 미 군정의 신한공사를 상대로 토지소유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하면서 △동아시아 농민운동사의 금자탑 △토지탈환운동의 본보기라고 총평했다.

이규수 강덕상자료센터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규수 강덕상자료센터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 센터장은 특히 1928년 1월 하의도 농민조합 결성에 깊숙이 관여한 일본 노동농민당 집행위원 아사히 겐즈이(朝日見瑞, 1898~1988)의 활동에 집중하면서 하의3도 주민들이 다양한 세력과 연대를 모색했다는데 주목했다.

1919년 9월 이후 하의3도 대부분의 토지소유권을 쥐게 된 도쿠다 야시치(德田彌七)가 1924년 이후 벌어진 소작료 불납투쟁에 친일폭력조직과 일제 경찰을 동원해 하의소작인회 간부들을 검거하고 테러를 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민들이 일본인 지주와 식민권력이 결탁된 사실을 깨닫는 과정으로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1927년 11월 일본 노동농민당 파견 변호사인 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가 신간회 동경지회 대표인 강소천과 함께 하의도를 방문하고 한달 뒤에는 아사히 등이 하의도에 들어와 하의도농민조합 결성을 지원했다.

조선농민총동맹은 하의도농민조합 결성을 지원하기 위해 박복영을 파견하고 신간회를 비롯해 경성변호사단, 조선기자동맹 등에서도 특파원을 파견하는 등 하의도농민조합은 국내 민족운동진영과의 연대도 강화해 나갔다.

하의도농민조합은 국내외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 단체들과 연대를 통해 반지주투쟁을 전개했으며, 그해 5월 10일 오사카에서 결성된 '하의도 토지회수동맹'은 '전체압박 피정복대중의 공동문제'라는 인식 아래 하의3도 토지탈환 투쟁을 항일민족투쟁으로 완전히 전환할 것을 선언했다.
 
이 센터장은 훗날 원산총파업 응원연설회 연사로 참석하기도 한 아사히 겐즈이가 남긴 회고록인 '어느 조선농맨쟁의 기록'에 담긴 삽화와 증언기록 등을 설명하며, 참가 주민들에게 기록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이제 하의3도의 토지탈환 투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어 380년의 세월동안 이어져왔는지 살펴보자.

하의3도 토지탈환 투쟁 380년 약사(略史)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탑 [사진-이규수]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탑 [사진-이규수]

이 장구한 투쟁의 서막은 선조의 딸이자 인조의 고모인 정명공주(1603~1685)가 뒤늦게 풍산 홍씨 홍주원(1606~1672)과 혼인한 16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복 오빠인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폐서인과 인조반정 후 복권되는 수난사를 겪은 정명공주를 위해 조선 왕실은 하의3도(하의도와 후에 신의로로 하나가 된 상태도와 하태도)의 개간지 20결(약 8만평)을 4대에 걸쳐 무토사패지(無土賜牌地, 농작권은 농민에게 주고 국가가 받을 토지세는 가문에 내도록 한 토지)로 하사했으나, 문제의 토지는 왕실이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섬에 처음 들어와 지금까지 혈맥을 이어온 '입도조'(入島祖)의 자금과 노동력만으로 개간된 것이었다.

섬에서 필요한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황무지를 맨몸으로 개간하거나 개펄에 둑을 쌓아 밀려드는 바닷물을 막아야했다. 둑이 터지기라도 하면 다시 쌓기를 반복해야 했고 다 완성됐다고 하더라도 짠물이 빠질데까지 10여 년 이상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만들어 낸 이 땅은 섬주민들이 농사를 지은 경작지이고 자식들에게 세습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매매도 하며 내려온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더군다나 조선왕조는 고려의 정책을 이어 받아 왜구의 빈번한 침탈로 인한 피해가 반복되는 섬 지역에는 사람이 살 수 없도록 철저히 금지시키다가 임진왜란 이후 규제를 풀었을 정도였으니 섬 지역 경작지에 대해서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매화도 청년들 [사진-신안군농민운동기념사업회]
매화도 청년들 [사진-신안군농민운동기념사업회]
매화도 민가 [사진-신안군농민운동기념사업회]
매화도 민가 [사진-신안군농민운동기념사업회]

피땀을 흘려 비로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만들어지자 왕실, 세도가들이 토지경작권을 내놓던지, 토지세를 납부하라고 윽박지르자 토지 개간 주체이자 경작자인 하의3도 주민들의 끊질긴 저항이 시작됐다.

18세기 초에 이르러 개간된 하의도 전답을 150결로 늘려, 이 모든 전답이 '사패지'라고 주장하며 1결당 쌀 40두를 도조(賭租, 소작료)로 징수했다. 

경종 원년(1720년) 왕실세력인 정명공주방에서 하의3도의 토지는 소작인에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절수지'(折收地)라는 주장을 앞세워 '소지'(所志, 청원서명)을 내자, 하의3도 주민들도 한성부에 '소지'를 접수해 왕실의 면세전은 20결 뿐인데 사유지인 민전(民田)에도 부과하는 세금은 납부할 수 없다고 맞섰다.

당시 민전에 부과되는 조세인 전세(田稅)와 지방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해 바치게 한 대동미를 납부하던 경작 농민들은 홍씨 집안의 도조 징수로 인해 동일 토지에 두번 세금을 내는 이른바 '일토양세'(一土兩稅)를 부담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던 것.

명쾌하게 처리되지 않은 이 소송은 영조 44년(1768) 영의정 김치인이 하의3도에서 발생한 궁방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이중 과세에 따른 원망을 없애도록 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으나 이 역시 흐지부지 되었다.   

하의3도 주민들은 직접 뽑은 농민대표를 한양으로 보내 정조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1870년 전라감사가 홍씨 집안의 도조 징수를 금지시키고 20결에 대해서는 1결에 백미 20두로 인하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20결을 제외한 나머지 120결에 대해서는 하의3도 주민들의 소유권을 인정한 첫번째 승리였으나 처음의 20결도 농민들의 것이었기에 절반의 승리였다.

이후 하의3도 토지문제는 왕실 내장원에서 실시한 국유지 조사사업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901년 문제의 20결을 포함해 하의3도의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키기로 한 궁내부의 조치에 따라 주민들은 토지세를 내장원에 납부하게 했다.

이에 홍씨 집안의 홍우록이 하의3도 토지를 사유지인 것처럼 꾸민 허위 문건을 토대로 1908년 하의3도 토지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그들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하급증'을 교부받아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하의3도 주민들은 1909년 경성공소원에 '부당이득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해 홍씨 집안이 강제징수한 소작료를 반환하라는 명령을 받아낸다. 

이번엔 완벽한 승리였다.

그런데 1911년 경성고등공소원이 하의3도 주민이 승소했다는 판결을 내리기 직전 홍우록은 하의도 토지를 한일은행장 조병택과 백인기에게 팔아넘겼다. 

이들은 다시 목포의 정병조에서 매도하고 정병조는 일본인 지주인 '우콘 곤자에몽'(右近權左衛門)에게 넘겨주는 일이 벌어졌다.

하의3도 주민들의 토지반환 투쟁 대상이 왕실과 세도가인 홍씨 집안에서 일본인 지주로 바뀌게 된 순간이다.

우콘은 식민지 권력인 조선총독부를 이용해 토지분쟁은 '화의'에 의해 처리하도록 규정을 만 든 뒤, 주민 대표 박모를 매수해 주민 위임장을 만들어 제출함으로써 하의3도 토지에 대한 법률적 소유권을 확정했다.

강요당한 '화의' 절차에 주민들의 저항이 멈추지 않자, 우콘은 3.1운동 이후인 1919년 9월 하의도 토지소유권을 소작제 농장경영으로 고수익을 추구하려는 오사카의 도쿠다양행(德田洋行, 대표 도쿠다 야시치, 德田彌七)에 전매한다.

도쿠다 야시치가 목포의 친일 폭력조직인 상애회를 동원해 하의도를 침탈하는 장면을 묘사한 아사히 겐즈이의 회고록 [사진-이규수]
도쿠다 야시치가 목포의 친일 폭력조직인 상애회를 동원해 하의도를 침탈하는 장면을 묘사한 아사히 겐즈이의 회고록 [사진-이규수]

도쿠다 야시치는 목포의 친일 폭력조직인 상애회를 동원해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주민들의 가산을 압류하고 위협하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지르지만, 주민들은 1924년 5월 하의도 토지소작권 보장을 위한 소작인회 창립, 1928년 1월 하의도 농민조합 창립을 끝까지 이뤄냈다.

당시 오사카에 거주하던 최용도, 고장명 등 하의도 출신 121명이 재오사카하의농민회를 결성해 이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조선 왕실과 세도가에 이어 일본인 지주들에 맞선 하의3도 주민들의 토지반환 투쟁은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미 군정청이 들어선 이후에도 지속됐다.

해방 후 일본인 재산에 대한 소유권은 미 군정청이 갖고 일제의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대신할 산하 독립기관으로 '신한공사'가 설립되어 미곡을 수집하고 소작료를 징수하는 체계로 바뀌었다.

주민들은 일본 적산농지를 경작하면서 미군정청이 정한 '3.1제 소작료'(일체의 소작료는 수확량의 3분의 1일 초과할 수 없다)를 납부해야만 했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공무집행방해로 감금되었다.

하의3도 주민들로서는 비록 3.1제 소작료가 나은 것이긴 했지만 조선왕실과 홍씨 집안, 그리고 도쿠다에서 신한공사로 지주가 바뀌었을 뿐 소작료를 납부한다는 것 자체가 토지소유권을 포기한다는 의사표시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한몸처럼 소작료 불납동맹으로 맞섰다.

1946년 8월 신한공사에서 목포경찰서 경찰관 50명을 동원해 소작료 징수작전에 나섰다가 충돌이 벌어졌다. 일부 주민들이 총경상을 입고 청년들이 지서로 연행되었다. 

연행과정에서 25살의 젊은 농부 김지배(또는 김전배)가 경찰의 총격에 사망했다. 이에 분노한 상태도와 하의도 주민 1천여명이 하의지서와 신한공사 하의지부에 불을 지르고,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음력 칠월 칠석(1946.8.3)에 벌어졌다고 해서 '하의도 7.7농민폭동'으로 불린다.  

구 목포경찰서터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구 목포경찰서터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8월 4일 미 군정청은 하의도에서 200여명의 주민을, 5일 무장경찰관들을 증원해 다시 200명을, 6일에는 청년 청년 15~16명을 체포했다.

하의3도 주민들은 멈추지 않았다. 

1949년 7월 국회에 자신들의 억울함을 탄원했고 8월 1일 국회 조사단이 현지에 파견되어 1950년 2월 2일 만장일치로 하의3도 주민들에게 '소유권 무상반환'할 것을 결의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결의 이행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1954년 3월 다시 국회 탄원서를 제출해 1956년 6월 국회는 '평당 200원 가격에 적산을 구입하는 형식'으로 명의 이전 등기를 승인했다.

이후 뒤늦게 도쿠다 명의의 분배농지 9,167필지 중 미등기 토지 600필지가 확인되었으며, 1999년 10월 31일 현재 456필지(76%)가 실질 소유자에게 등기되었고, 등기 미신청 상태인 144필지(24%)도 2006년 12월 5일 현재 84필지가 추가 등기되고 60필지는 국가가 소유권을 취득하게 되었다.

세계사적 가치는 충분...자료는 다방면 보완 필요

하의도와 상태도·하태도(신의도). 하의3도가 하나의 그림에 들어있는 지도.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하의도와 상태도·하태도(신의도). 하의3도가 하나의 그림에 들어있는 지도.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현재 한국이 보유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2011) △새마을운동 기록물(2013) △이산가족을 찾습니다(2015) △4.19혁명기록물(2023) △동학농민혁명기록물(2023) 등 18건이 있다.

유네스코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준으로 세계적 가치, 신빙성, 유일성, 영향력 등을 꼽고 있다. 

세계적 가치가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변화의 시기를 반영하는 시간성 (Time) : 역사적 중요시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하거나 그 시기를 특별한 방법으로 반영하는 자료 △역사발전에 기여한 장소나 지역관련 정보 (Place) △세계사의 주요 주제 (Subject/Theme) △사회적, 정신적, 문화적 중요성 (Social/Spiritual/Community Significance) 등의 기준에 접합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하의3도의 토지탈환투쟁 기록물이 이 기준을 충족시키려면 추가적인 자료 확보가 필수적이고, 앞으로 그에 필요한 작업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등재를 위해서는 우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유산청장이 등재신청 대상으로 선정해야 한다. 이어 등재신청 서류를 유네스코에 제출하고 2년마다 열리는 국제자문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승인하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