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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31일 수요일

미국 SM3-2A 요격미사일 실패에 쉬쉬

미국 SM3-2A 요격미사일 실패에 쉬쉬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8/02/01 [11:3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SM3-2A 이지스 어쇼어 요격미사일 발사시험 

지난달 31일(현지시간) CNN 등 복수의 주요 외신들은 익명의 정부 관리들을 인용하여 이날 미국이 실시한 미사일 요격 시험에 실패했다고 보도했다.

최근 개발하여 연이어 두 번 시험발사에 성공했던 SM-3 블록 2A 미사일을 활용한 지상배치형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를 활용한 시험이었는데 훈련은 비행기에서 발사된 가상 표적을 지상에서 발사한 미사일로 맞추는 것이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 국방부는 실패 원인 분석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실패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미 국방부가 공식 발표를 못하고 쉬쉬하는 것은 북을 의식한 행동으로 보인다는 것이 외신들의 분석이다. 
   
'SM3 블록 2A'는 요격고도 500km인 'SM3 블록 1A'의 개량형으로 요격고도가 1000km를 넘어 탄도 미사일 방호 범위를 획기적으로 확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공동개발했으며 개발비만 3조원이 들었고 미국 의회는 일본에 대한 1억3천300만 달러(1천423억 원)어치의 SM-3 블록 2A 미사일 판매를 승인했다. 북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불안해하는 일본을 달래기 위한 선물인 셈이다.

이 미사일이 일본이 보유하게 될 가장 강력한 최신 미사일요격망인 셈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실패했으니 미국과 일본의 상심이 클 것으로 보인다.
미국도 이보다 요격고도가 더 높은 GBI 요격미사일이 있지만 워낙 실패도 많고 가격이 비싸 이번 이지스 어쑈어에 많은 기대를 품고 있었는데 실패를 하는 바람에 더욱 충격이 클 것으로 보인다.

사실 지난해 북이 SM3-1A 미사일로 요격을 시도할 수 있는 높이에서 일본 열도를 넘어가는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도 미국과 일본은 아예 요격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요격시도를 했다가 실패할 경우 미국과 일본 주민들에게 가해질 공포는 너무 막대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이 500km 이상 높이로 미사일을 날려보낼 경우 일본은 요격할 미사일이 없었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SM3-2A였던 것인데 이것이 요격시험에서 그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으로 보인다.
사실 성공했다고 해도 실제 북의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북의 미사일은 아직 공개하지 않은 여러 요격회피기동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요격한다고 해도 핵을 장착한 미사일이 단 몇 발만이라도 목표를 타격하게 되면 일본과 미국은 치명상을 입게 된다. 핵미사일 요격은 100%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100%는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기술적으로 북의 핵미사일을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은 그래서 전쟁이 날 경우 지상은 포기하고 모두 지하로 대피하여 1년 이상 버틸 수 있게 준비를 해두었던 것이다.

미국이 이제 북의 핵미사일로부터 근본적인 안전을 담보받으려면 북미적대관계를 근본적으로 끝내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해야지 다른 길은 없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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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30일 화요일

“한달 110만원…최저임금 비판하는 분들 이 돈으로 살아보라”

등록 :2018-01-31 05:00수정 :2018-01-31 08:56

최저임금 생활자들에게 들었습니다
전기장판 고장나도 구매 망설여
창피하지만 이게 생계비 전부
‘최저임금 생활자’ 3인의 목소리
“많은 돈 벌겠다는 욕심 없어
삶 지탱하려면 최저임금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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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이 시간당 7530원으로 오른 지 꼭 한달이 됐다. 최저임금 16.4% 인상 뒤 ‘기업 부담이 커지고, 고용이 줄고 있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제기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대통령선거 당시 약속했던 ‘최저임금 1만원’(2020년) 목표가 자칫 흐려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당수 ‘최저임금 노동자’의 목소리는 숱한 논란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구 생계를 대부분 책임지는 ‘핵심 소득원’의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가는 대형마트 노동자와 제조업 사내하청 노동자, 인디뮤지션 등을 만나 그들의 눈에 비친 ‘최저임금 논란’을 따라가봤다.
통장이 아닌 ‘텅장’(텅 빈 통장)이었다. 월급은 매달 10일 꼬박꼬박 통장에 들어왔다. 그러나 입금과 동시에 사라졌다. 꼬박 10년을 일했지만 남는 것은 마이너스 통장 대출 1천만원이 전부다. 올해 마흔여섯, 중학생 아들을 혼자 키우는 여성 마트노동자 박성실(가명)씨의 삶은 팍팍했다.
박씨는 10년 전 남편과 이혼했다. 당시 5살인 아들과 자신의 생계를 위해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30대 중반에 일자리 구하기는 만만치 않았다. 겨우 자리잡은 곳이 대형마트인 홈플러스 매장이었다. 첫 2년은 시간제로 일했다. 이후 무기계약직 자리를 얻었다. 박씨는 마트 영업시간에 따라 하루 7시간씩 3교대로 하루 종일 서서 일했다. 환불과 반품 처리 등 주로 고객상담 업무를 맡았다.
박씨 임금은 늘 시급 기준으로 최저임금보다 고작 몇원 많았다. 지난해 세금 등을 떼고 통장에 찍히는 돈은 한달 110만원 남짓에 그쳤다. 월급은 통장을 ‘스쳐가는’ 것만 같았다. 임대주택 임차료와 관리비 16만원, 아들 학원비 25만원, 보험료·통신비 등 고정지출로만 월급 절반이 훌쩍 날아갔다. 한창 자랄 나이인 아들 식비는 차마 줄이지 못한다. 통장에 현금이 없다는 것이 박씨한테는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최대한 아껴 쓴다고 해도 월급보다 지출이 많으니까 현금 거래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어요. 가끔 경조사 생기면 현금서비스를 받았어요. 저축도 거의 못 했는데 빚만 남았네요.”
2013년부터 경기도 안산의 한 제조업 사내하청업체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 김미애(34)씨도 최저임금 생활자다. 하루 종일 서서 조립과 검수 업무를 한다. 원청업체 쪽의 물량 압박 탓에 화장실 갈 시간도 없어 물도 못 마시고 일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받는 임금은 최저시급보다 50원 많은 수준에 그쳤다. 월급은 130만원 남짓이다.
남편도 학원강사를 하며 한달 120만원 남짓을 벌어, 가구 소득은 250만원을 조금 넘었다. 두 사람이 살기에는 빠듯했다. 신혼집 전세자금 대출 2천만원도 갚는 중이고 최근엔 시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병원비도 보태야 했다. 살림살이는 더 팍팍해졌다.
“월급 받으면 장부터 보는데 먹는 것도 줄여야 했고, 마트를 갈 때에는 늘 할인되는 품목만 샀어요. 병원비도 제법 나갔는데 그럴 때면 휘청하는 거죠.”
김씨한테는 최근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3월 출산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출산·육아용품도 사야 하고, 산후조리원 비용도 엄청 비싸잖아요. 자연분만을 할 수 있으면 다행인데 제왕절개하면 병원비도 만만치 않게 들어갈 테고요.”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고령 노동자한테 노후 준비는 먼 이야기다. 김미애씨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심아무개(56)씨는 1년 넘게 투병하던 남편을 5년 전 떠나보내야 했다. 자녀는 이미 충분히 컸지만, 자신이 퇴직하거나 병원 신세라도 지게 되면 그들한테 짐이 되지는 않을지 그게 걱정이다.
심씨는 “남편의 입원 기간에 정작 치료비보다 간병비가 더 많이 들었다”며 “그 이후 의료실비보험에 간병인보험까지 들어, 매달 빠져나가는 보험료만 해도 꽤 된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도 감당하기 힘든 노동을 11년째 하고 있는 심씨는 손가락·허리 등 어느 한 곳 성한 데가 없다. 빠듯한 생활에 노후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해 걱정이다. 그는 “생계를 꾸려나가기에 바빠 정년퇴직 이후에는 얼마 안 되는 국민연금으로 살아야 할 형편”이라며 “의료비와 노후 준비가 가장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인디뮤지션 임솔잎(가명)씨는 1인 가구다. 음반 작업과 생계 활동을 함께 하려고, 지난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한달 160시간 정도 해서 120만원 정도를 벌었다. 서울에서 혼자 살면서 집세·공과금·생활비를 감당하고 있다. 작업비를 모아야 하는 만큼, 임씨의 살림살이는 더욱 빠듯했다.
“겨울에는 난방비만 해도 아무리 아껴도 7만~8만원씩은 나가서 더더욱 부담이 돼요. 전기장판이 고장났는데도 구매를 망설일 정도였어요.”
최저임금이 곧 임금의 전부이고 이 돈으로 생계를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이들한테 최저임금이 갖는 의미는 더없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한겨레>가 한국노동패널조사 결과를 살펴보니, 최저임금 수준 임금을 받는 노동자 10명 가운데 7~8명은 가구의 ‘핵심 소득원’(가구주나 그 배우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보조 소득원’으로, 최저임금을 ‘알바 시급’쯤으로 여기는 일각의 분위기에 이들은 갑갑함을 느낀다.
“최저임금으로 한달이라도 살아본 뒤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저임금 때리기’에 몰두하는 정치권과 언론 등을 향해 여러 최저임금 생활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형마트 노동자 박씨는 “안 아픈 곳 하나 없이 골병이 들 정도로 몸과 마음을 상해가면서 고작 ‘용돈벌이’에 나서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창피해서 말을 잘 못 한다뿐이지 다들 생계를 위해 나와서 일한다”고 말했다. 사내하청노동자 심씨도 “본인들이 와서 직접 (최저임금만으로) 살아보면 차마 그런 얘기를 못할 것”이라며 “정신 나간 소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이들한테, 이번 최저임금 인상은 어떻게 다가올까? 인디뮤지션 임씨는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라고 답했다. 임씨는 “계속 시급 6500원에 머물러 있었으면 아르바이트를 계속하지 못하고 음악 작업을 미루는 상황이 왔을 것”이라며 “같은 시간을 일해도 한달에 20만원을 더 벌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매우 크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사내하청노동자 김씨도 “주 8시간을 일하면 월 150만원은 벌 수 있으니 생활이 조금은 나아지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대출금 빨리 갚고, 남편과 한달에 하나씩 자신을 위한 선물을 사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청노동자 심씨는 “월 20만원이 오른다고 해도 애초 받던 월급이 워낙 적어 많은 여유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며 “상여금을 기본급에 녹여서 최저임금 인상에도 실제 임금이 오르지 않은 곳도 많은데 정부에서 이런 ‘꼼수’를 규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인원 감축이나 휴게시간 증가 등 ‘꼼수’ 없이 최저임금 인상폭만큼 월급이 많아졌다는 서울 광진구의 한 아파트단지 경비노동자 우아무개(60)씨는 “돈이 모이면 사는 게 생동감 들고 재미있다”며 “그동안 애들 키우느라 노후 준비는 생각도 못했는데, 가족들과 외식도 하고 저축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이 꼭 지켜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빼놓지 않았다. 마트노동자 박씨는 “나처럼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지탱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한테 최저임금은 정말 절실하다”고 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2차례 방북 취재 “있는 그대로 취재해왔다”

재미언론인 진천규 기자의 방북취재기 대전특강
대전=임재근 객원기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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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31  09:3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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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이후 두 차례 방북 취재기, 그리고 차마 방송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 제목으로 1월 30일 저녁 7시에 진행된 재미언론인 진천규 기자 초청 강연회.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교육‧문화 활동을 통해 시민들 속에서 평화와 통일에 대한 관심을 고취하고 민족공동체 정신을 함양시키는 활동을 펼쳐온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이사장 김병국)는 지난 해 10월과 11월 두 차례 방북 취재를 진행했던 재미언론인 진천규 기자를 초청해 신년특강을 진행했다.
‘2017년 10월 이후 두 차례 방북 취재기, 그리고 차마 방송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 제목으로 1월 30일 저녁 7시에 빈들공동체 교육장(대전 중구 대흥동)에서 진행된 이날 강연에서 진천규 기자는 두 차례 방북취재에서 찍어 온 사진 보따리를 풀어냈다.
한겨레신문과 미주 한국일보 기자를 지낸 진천규 기자는 지난 해 10월 6일부터 8박 9일, 11월 10일부터 12박 13일 총 22일 간 신의주, 평양, 원산 등을 취재해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 북한 모습을 여과 없이 국내 언론에 알리면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두 정상이 손 맞잡고 올린 역사적 장면을 기록한 기자’

  
▲ 진천규 기자가 자신이 찍은 ‘2000년 6월 14일 목란관에서 남북 정상들이 함께 손을 맞잡고 치켜드는 장면’을 보여주며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진천규 기자는 자신을 소개하는 일화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흡입됐다. 그는 한겨레신문사 사진기자로 재직하면서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 중 평양에서 열린 6차 회담 당시 2박 3일 동안 방북 취재에 이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에도 방북 취재에 동행했다며 두 차례 방북 취재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그중 2000년 6월 14일 목란관에서 있었던 만찬에서 남북 정상들이 공동선언에 구두로 합의를 하며 박수 소리가 나자 이 역사적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자고 자신이 제안해 남북 정상들이 함께 손을 맞잡고 치켜드는 장면이 나올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큰 소리로 ‘우리 배우한번 합시다’고 말하며 흔쾌하게 호응했다”는 이야기도 소개했는데, 북한에서도 이 일화를 지난 2005년 6월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역사적인 평양상봉의 나날에’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바 있다.
진천규 기자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인 현장을 함께 할 수 있었다”며, 북측에서도 이 내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난해 북측이 자신의 방북 취재를 받아들인 이유 중에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영주권자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이지만 방북 취재 가능
진천규 기자는 2001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지만, 국적은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미국 영주권을 취득했기 때문에 방북취재가 가능했다고 밝혔다. 영주권자들의 방북은 ‘허가’사항이 아니라 ‘신고’사항이라는 것.
또한 지난 해 여름,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시민권자들에게 북한여행 금지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오히려 시민권자들은 북한여행이 불가했지만, 그는 영주권자이기 때문에 방북 취재가 가능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행히 북한 당국에서도 취재를 허용해서 엄혹하던 시절에 운 좋게 북한에 들어갈 수 있었다”며, “2016년 2월 개성공단 폐쇄 이후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방북한 최초의 민간인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자신의 비자를 보여주며 방북 취재 경위를 설명하는 진천규 기자.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 진천규 기자가 방북 취재시 발급 받은 비자에 국적이 ‘남조선’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있는 그대로, 가서 본 것 그대로 취재해왔다”
그는 “두 차례 방북에서 유심히 살펴본 부분은 ‘가장 많이 바뀐 것이 무엇’이며, ‘유엔제재를 비롯해 심지어 중국에서도 제재를 가한 엄혹한 제재 속에서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느냐’였다”며 “이 부분을 유심히 살피면서 취재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광복백화점에서 장을 보는 장면이나 장보면서도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모습들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말이나 글로 백번 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직접 보여 주니 진보, 보수를 떠나서 의외로 놀랐다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있는 그대로, 가서 본 것 그대로 취재해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에 보급된 휴대폰이 400만대에 달한다”며, “북한 사람들이 핸드폰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하나 바뀐 부분은 ‘택시’였다”며, “마트나 역 앞에 심지어 옥류관 앞에도 택시들이 즐비했다”고 밝혔다. 그는 “평양 시내에 ‘려명’, 'KKG' 등 4개의 택시회사가 있고, 6천대 정도의 택시가 운행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평양뿐만 아니라 신의주와 원산에서도 택시를 많이 목격할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진천규 기자는 “비행기를 타고가면 1시간이면 평양에 도착할 수 있지만, 황금벌판의 모습도 보고, 기차 안에서 사람들의 모습도 지켜보고 싶어 두 차례 모두 단둥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며, 자신의 비자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가 보여준 비자는 여권에 도장을 찍은 것이 아닌 별지 비자로 국적에 ‘남조선’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또한 북한의 전기사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가 두 차례 방북한 22일 동안에 “정전이 된 경우는 1~2초간 딱 한번 있었다”며, “그 외에는 정전은 없었고, 밤에도 개선청년공원, 려명거리, 창전거리, 미래과학자거리, 개선문, 평양역 등 야경을 볼 수 있었다”며 관련 사진들을 보여줬다.

  
▲ 진천규 기자 초청강연에 7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북측, “검열 없었다” “있는 그대로 제대로 좀 보여 달라”
진천규 기자는 취재한 사진과 동영상에 대한 북측의 검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사진과 영상에 대한 북측의 검열은 없었다”며, "북측은 '자신들의 ‘최고 존엄’ 영상이 훼손되지 않게 할 것 등 몇가지만 주의해 달라' 말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측에서는 남쪽 언론이 북쪽을 너무 왜곡하기 때문에 억울해한다”며, “‘진 선생은 이점들만 지키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제대로 좀 보여 달라’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진 기자는 “북한 사회의 특징을 생각하면 북측의 그런 요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며, “특히 북한 사회는 광고가 없고, 대신에 야외 선전물의 대부분이 북한 지도자들의 동상이나 그림이 포함된 선전물이기 때문에 차를 타고 이동하거나 지나가면서 사진이나 영상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도 북한이 거리 선전물에 있는 그들의 ‘최고 존엄’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시간에 걸친 이번 강연에서 진천규 기자는 지난 두 차례의 방북취재 동안 찍은 사진 중 300여장으로 추려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단둥에서 신의주를 거쳐 평양에 오는 동안 기차 안팎의 모습과 려명거리, 창전거리, 미래과학자거리를 비롯한 평양 거리뿐 아니라, 려명거리 살림집 내부모습도 소개했다.
또한 중앙동물원, 인민빙상장, 초등학원, 애육원, 양로원을 비롯해 북한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과 옥류관 냉면 등 그가 먹은 음식, 그리고 마식령 스키장과 원산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의 모습까지 그가 담은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진천규 기자는 “아직도 유력지라고 하는 언론에서 북한에 대해 흑색선전 내지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보도하곤 한다”며, “거짓말하지 말고, 확인된 이야기만 해야 한다”며 언론의 문제를 꼬집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 생각보다는 보고 들은 것만 전달하는 기자 본연의 역할만 하면 된다”며 자신의 취재정신을 명확히 했다.

  
▲ 진천규 기자의 방북취재기 강연에 흥미와 관심을 보이는 참가자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통일TV 창간으로 통일의 작은 밑거름이 되고파
방북취재 이야기를 끝마친 진천규 기자는 한동안 기회가 닿는 한 자신의 취재기를 알리는 강연에 매진할 예정이고, 평창올림픽이 끝난 이후는 방북 취재를 지속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케이블 방송 ‘통일TV’를 준비 중에 있다”며, “북한의 주의, 주장은 뺀 역사드라마나 자연다큐멘터리, 스포츠, 어린이 만화영화 등 영상물을 제공하는 케이블 방송을 통해 지난 70여 년 동안 단절된 남과 북의 문화교류를 열어 통일의 작은 밑거름이 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수정-오전 11시 10분)

[현장인터뷰] 연희미용고 학생이 ‘미용사’란 꿈 대신에 마주한 세상

졸업 앞두고 폐교 날벼락… 수업거부에 나선 학생들 “우리 선생님들 돌려주세요”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18-01-30 22:42:46
수정 2018-01-30 22:42:46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30일 연희미용고 상황
30일 연희미용고 상황ⓒ민중의소리


“우리들의 선생님들을 돌려주세요.”
30일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 위치한 미용 전문 고등학교인 서울연희미용고를 찾았다. 학교 입구에서부터 게시판과 계단벽면, 심지어 학교 교무실에도 “선생님을 돌려달라”는 수많은 쪽지와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지난 26일 금요일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은 담임 선생님 다섯 분의 복직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였다. 전날에 이어 이날도 400여명의 전교생은 수업을 거부하고 지하 1층 예배당에 모였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부당한 해고를 철회하고, 학교 법인화를 요구하기 위해 모였다”고 입을 모았다.
이곳에 모인 학생 대부분은 졸업 후 미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진학했다고 말했다. 꿈을 위해 통학시간이 왕복 3시간 가까이 걸리는 군포나 통학이 불가능한 전라남도·광주·제주도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은 하 나 같이 최초로 세워진 미용학교의 명성과 학생들을 위해 온갖 열의와 성의를 다하는 선생님들을 믿고 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 선생님들 중 상당수가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했다. 사실상 학교는 폐교 수순을 밟고 있었다.
학교 졸업식을 앞둔 지난 26일(금요일) 학교 측은 이들 선생님들에게 해고통지서를 나눠줬다. ‘신분증명서 반납과 업무 인수인계, 출근은 29일(월요일)까지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아직 학생들 생활기록부조차 작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해고 선생님 중에는 학생들의 학교생활정보를 담당하는 선생님도 포함돼 있었다. 최근 설립자로부터 학교를 상속받은 박모씨 등은 학생들의 올바로 교육받을 권리나, 선생님들의 교권은 안중에 없었다. 학교를 이어갈 생각이 없던 이들은 부동산 매각하듯 팔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폐교절차를 밟아갔다. 해고사유 또한 황당했다. ‘2018년 학생 수 감원에 따라 학교 존속을 위한 경영상 해고’가 그것이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돌려 달라”며 일어선 이유다.
지난 29일에 이어 30일도 연희미용고 전교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해고 교사들의 복직과 학교 법인화를 촉구했다.
지난 29일에 이어 30일도 연희미용고 전교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해고 교사들의 복직과 학교 법인화를 촉구했다.ⓒ연희미용고 학생 제공
30일 연희미용고 상황
30일 연희미용고 상황ⓒ민중의소리
헤어디자이너를 꿈꾸던 17세 학생의 호소
“우리 선생님들이 왜 해고당해야 하나요”
연희미용고에서 만난 2학년 최은진(17) 양의 꿈 역시 ‘미용사’였다. 경기도 군포에서 통학을 한다는 최양은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 반대하는 부모님을 수차례 설득시켜 지원을 하게 됐다고 했다. 최양은 처음 학교에 합격했을 당시를 심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학교 발표가 있는 날, 시간을 딱 맞춰서 홈페이지에 접속했어요. 합격이었어요. 함께 있던 친구들도 모두 기뻐해주고, 저도 좋아서 부모님께 연락드리고, 담임 선생님도 잘 됐다고 해주셨어요. 꿈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됐다는 희망을 느꼈어요. 그런데…”
그만큼 가고 싶었던 학교이기에, 지각과 결석 한 번 없이 1년을 열심히 다녔다고 했다. 수학선생님은 자신 없던 수학에 처음으로 흥미를 갖게 해줬고, 헤어미용·피부미용·네일아트·메이크업 선생님들은 끊임없이 기술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지도해줬다고 말했다. 그런데 학교설립자이자 교장이 지난해 7월22일 숨지면서 폐교 소식이 돌았고, 불안과 혼란스러운 상태로 그동안 수업을 받아왔다고 지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던 중 지난 26일 선생님 다섯 분이 한꺼번에 해고를 당하면서 “학생들이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폐교 소식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부모님께 어떻게 어디서 어디까지 설명을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졸업은 보장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애들도 다 갈팡질팡 못하고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 7~8월 계속됐어요. 두려움에 떨었어요. 선생님이 수업에 들어오시면 항상 학교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어요. 그러면 선생님들이 저희를 안심시키며 그렇게는 절대 안 될 거라고 했어요.”
30일 오전 서울연희미용고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지하 1층 예배당에 모여있는 모습
30일 오전 서울연희미용고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지하 1층 예배당에 모여있는 모습ⓒ민중의소리
그나마 학교 폐교를 막고자 애썼던 선생님들이 해고를 당하자, 최양을 비롯한 모든 학생들이 분개했다. 최양은 “금요일(지난 26일) 선생님들이 부당해고를 당하고 단톡방에 미안하다는 글을 올렸다”며 “이 소식을 듣고 선배들과 힘을 합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학교에 비리가 정말 심하다는 얘기를 들어왔다”며 “이번에 학교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가 문을 닫는 것은 물론, 선생님들은 계속해서 부당해고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양의 말처럼 학교 설립자이자 지난해 숨을 거둔 박모 교장은 그동안 학교 돈을 자신의 주머니에서 꺼내 쓰듯 함부로 유용해 왔다. 현재 학교를 상속받은 자녀들을 각각 국제협력팀장과 부팀장으로 허위 임명시킨 뒤 학교 돈으로 해외 현장학습에 동행시키는가 하면, 자신이 회원으로 있는 단체에 회비 6천여만원을 냈던 것이 시교육청 실태조사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잠시 교육당국으로부터 받아왔던 인권보조비가 끊기기도 했다. 학교는 뻔뻔하게도 운영을 잘못한 지점은 감추고, 교사들에게 고통분담을 강요하면서 인건비를 삭감했다.
이런 학교의 행태에 분노한 연희미용고 학생들은 주말에 피켓을 만들었다. 한 학년 높은 선배들은 따로 자리를 만들어서 준비를 했다고 최양은 전했다. 그리고 월요일(29일) 선배들을 따라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를 시작했다. 현 교장이 있는 5층 교장실로 올라가 선생님들의 부당해고를 철회하라고 외쳤다. 이 같은 사태를 설명하는 최양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 “선생님들이 잘못한 것도 없고, 해고할 만한 사유도 없는데, 저희와 계속 함께 했던 선생님들인데, 그 선생님들이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까 모두가 울컥하고 슬퍼하고…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에요.”
지난 29일에 이어 30일에도 연희미용고 학생들은 하교 교사의 복직과 학교 법인화를 촉구하며 수업을 거부했다.
지난 29일에 이어 30일에도 연희미용고 학생들은 하교 교사의 복직과 학교 법인화를 촉구하며 수업을 거부했다.ⓒ연희미용고 학생 제공
‘학교의 횡포’, ‘교육청의 무책임’에 짓밟힌 학생들
최양은 답답한 마음에 교육청에 전화를 걸었다. 최양은 담당자를 찾고 “저희 한 번만 더 와주셔서 저희 학교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요청했다. 돌아온 담당자의 답변은 “이 상태로는 안 된다”였다. 다짜고짜 수업에 복귀하란 말 뿐이었다. 이에 최양은 “수업을 하려면 선생님들이 필요한데, 안 계시다”고 했지만, 담당자는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학교기물을 마음대로 부수고, 지금 질서를 유지하지 않기에 학교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고 협박조에 가까운 목소리로 몰아 부칠 뿐이었다. 학교 곳곳에 대자보와 쪽지를 붙이긴 했지만, 기물을 부순 것은 없다고 학생들은 황당해 했다.
또 교육청 담당자는 “교감선생님과 선생님들이 지도하지 않냐, 당장에 모여서 전화만 하라고 지도하고 있나”라며 마치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시켜서 교육청을 압박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쏘아 붙였다. 교육청 담당자와 통화했던 내용을 쏟아내는 최양은 교육청에 큰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최양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는 거고, 이 시위도 그렇고, 선생님들은 학교에 오도록, 수업에 들어가도록 계속 얘기한다. 왜 선생님들이 시키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묻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최양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전날 학교상황을 살피러 온 교육청 관계자의 행동에도 실망하고 있었다. 29일 오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학부모들도 학교에 찾아와 사태해결을 촉구하자, 교육청 관계자들은 이날 학교를 방문했다. 학교 상속자인 현 이사장 두 명도 참석한 자리였다. 학생들과 학부모·선생님들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교육청 관계자들은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은 사유재산이어서 우리가 관여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30일 연희미용고 상황
30일 연희미용고 상황ⓒ민중의소리
꿈을 이루기 위해 진학한 학교에서 최은진 양이 만난 세상은 ‘부당해고로 무참히 짓밟힌 선생님들이 교권’, ‘폐교 수순에 따른 진로진학에 대한 위협’, ‘학교 권력자의 교비유용’, ‘정부기관 관계자의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삼키듯 주먹을 움켜쥔 최양은 “학생들 의견 하 나도 안 들어주는 교육청에 전화를 할 때마다, 제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들 부당해고 당하고, 마음도 추스르기 어려웠을 텐데, 학교는 가족들에게 해고통보사실을 먼저 알려버리고. 가정까지 건드리는 게 너무 속상해요. 그리고 저희도 한 가정의 자녀고 대한민국의 미래잖아요. 이렇게 어렵게 용기내서 아우성 치고 있는데, 이 소리를 듣고 저희에게 좀 관심을 가져줬으면… 응원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한편, 학부모들은 31일 오전 11시 학교에 모여 함께 서울시교육청을 방문할 계획이다. 또한 해고당한 5명의 교사들도 해고철회를 요구하며 계속해서 출근을 이어갈 예정이다. 학생들은 교육청 앞 집회시위를 오는 2월2일 경찰서에 신고한 상태며, 해고 교사들의 복직과 학교 법인화가 해결될 때까지 수업거부와 집회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서지현 검사의 8년과 안태근 검사의 8년

18.01.30 16:15l최종 업데이트 18.01.30 19:10l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한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은 지난해 6월 서울중앙지검 수사팀과의 부적절한 '돈 봉투 만찬' 파문으로 면직 처분됐다. 이전까지 그는 검찰과 법무부에서 주요 요직을 거친 전형적인 '엘리트 검사'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박근혜 정권에서 권력의 핵심과 연결된 검찰 실세였다. 피해자 서 검사가 고통 속에 보냈던 8년 동안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국회의원에게도 뻣뻣했던 검찰 실세
안태근 검찰국장 정상출근 '돈 봉투 만찬사건'의 당사자인 안태근 법무부 검찰국장이 19일 오전 경기도 과천시 법무부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2017.5.19
▲ 안태근 검찰국장 정상출근 '돈 봉투 만찬사건'의 당사자인 안태근 법무부 검찰국장이 19일 오전 경기도 과천시 법무부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2017.5.19
ⓒ 연합뉴스

안 전 국장은 지난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94년 서울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법무부 검찰국 검사,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 2부장, 법무부 정책기획단장, 대검 정책기획단당, 서울서부지검 차장 등을 지냈다. 2013년에는 박근혜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전문위원을 거쳐 법무부 인권국장에 임명됐고, 2015년에는 검찰 인사와 예산을 총괄하는 검찰국장이 됐다. 법무부 검찰국장은 고검장 승진 1순위로 꼽히며, 검찰총장추천위원회에도 참석하는 최고 요직이다. 

안 전 국장이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돈 봉투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2016년 11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법무부 검찰국장으로 출석해 '부산 엘시티 비리 의혹' 사건과 관련해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질문을 받았다. 노 의원이 "엘시티 사건에 대해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보고가 되고 있느냐"라고 묻자 안 전 국장은 "기억이 없다"라고 답했다. 당시 우병우 민정수석의 검찰 수사 개입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에 노 의원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보고 안 했으면 안 한 거지, 보고 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라고 질책하자 "보고 안 했을 수도 있고. 아니, 제가 보고한 기억이 없다"라고 말했다. 노 의원이 "답변을 그따위로 하는가? 보고한 사실이 없는 게 아니라 기억이 없다고?"라고 하자 "그럼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민을 대신해 질문하는 국회의원에게 성의 없는 답변만 늘어놓자 노 의원은 "막장입니다. 막장"이라고 혀를 찼다. 

안 전 국장은 이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도 등장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당시 우병우 민정수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우병우 라인'이었던 셈이다. 그중에서도 안 전 국장은 검찰 인사와 예산을 총괄하는 검찰국장으로 우 전 수석의 최측근 역할을 했다. 그리고 수차례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압수수색 정보가 새어 나가는 등 우 전 수석에 대한 검찰 수사가 번번이 어긋나자 안 전 국장의 이름이 거론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하던 박영수 특검팀은 안 전 국장과 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른 2016년 7월부터 10월 사이에 1000차례 이상 통화한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검찰은 우 전 수석의 가족회사 ㈜정강 등을 압수수색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안 전 국장은 "우 수석과 업무상 통화를 했다"라고 해명했지만, 4개월간 1000차례 통화는 하루 8건 이상을 했다는 것으로 단순 업무상 통화라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회의원 앞에서도 뻣뻣하고, 정권 실세와도 막역했던 안 전 국장이 시련을 겪은 것은 지난해 6월 '돈봉투 만찬' 사건이 터지면서부터다. 지난해 법무부·대검찰청 합동감찰반에 따르면 이영렬 전 서울중앙지검장과 안 전 국장은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했던 검찰특별수사본부(특수본) 간부 6명, 검찰국 과장 2명이 참석한 만찬 자리에서 돈봉투를 돌렸다. 안 전 국장은 특수본 간부들에게 70만∼100만 원씩, 이 전 지검장은 법무부 과장 2명에게 100만 원씩 격려금을 줬다.

이에 안 전 국장은 곧장 사의를 표명했지만, 징계절차가 진행되면서 우선 대구지검으로 좌천됐다. 결국, 지난해 6월 법무부는 이 전 지검장과 안 전 국장에게 중징계인 면직을 의결했다. 면직이 확정됨에 따라 이 전 지검장과 안 전 국장은 퇴직금과 연금은 정상적으로 받지만, 2년간 변호사 개업은 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두 사람은 지난해 9월 "면직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행정 소송을 낸 상태다.

안 전 국장은 이후 최근 종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앤조이> 보도에 따르면 안 전 검사는 지난해 10월 온누리교회에서 간증(신앙고백)을 하며 "30년 동안 공직자로 살아오며 나름대로 깨끗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순탄하게 공직생활을 해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뜻하지 않은 본의 아닌 일로 공직을 그만두게 되었고, 주변의 많은 선후배·동료·친지들이 '너무 억울하겠다'며 같이 분해하기도 하고 위로해 주었다"라고 말했다. 

'돈봉투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공직을 떠났다는 얘기다. 그는 또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이 얼마나 마음고생 많냐고 묻지만, 하나님을 영접할 기회를 주시고, 교만을 회개할 기회를 주신 거라 생각하니 처음 느꼈던 억울함과 분노도 사라졌다"라며 "믿음 없이 교만하게 살아온 죄 많은 저에게 이처럼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해주신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양을 올린다"라고 말했다. 안 전 국장의 간증 영상에는 그가 울먹이는 모습도 담겨 있다. 

"그날 '그 사람'의 그 눈빛이 떠올라..."
 JTBC에 출연한 서지현 검사.
▲  JTBC에 출연한 서지현 검사.
ⓒ JTBC

안 전 국장이 권력을 등에 업고 출세 가도를 달리는 동안 서지현 검사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

그는 3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 지난 8년간 참을 수 없는 수치심에 매일 밤 가슴을 쥐어뜯었다"라며 "그날 '그 사람'의 그 눈빛이 떠오르는데 잠을 이룰 수가 있었겠느냐"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안 전 국장을 뜻한다. 서 검사는 또 "그날 충격이 너무 커 화장실에 쓰러져 있다가 집에 있는 아이 생각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귀가했다"라며 "이후 그날의 트라우마로 유산을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앞서 서지현 검사는 검찰 내부 통신망에 올린 글을 통해 "2010년 10월 30일 한 장례식장에서 법무부 장관을 수행하고 온 당시 법무부 간부 안태근 검사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했다"라며 "소속청 간부들을 통해 사과를 받기로 하는 선에서 정리됐지만, 그 후 어떤 사과나 연락도 받지 못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서 검사는 "갑작스러운 사무 감사를 받은 이후 검찰총장의 경고를 받고, 통상적이지 않은 인사발령을 받았다"라며 "납득하기 어려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이유를 알기 위해 노력하던 중 인사발령의 배후에 안 검사가 있다는 것을, 안 검사의 성추행 사실을 현 자유한국당 의원인 당시 최교일 법무부 검찰국장이 앞장서 덮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에 안 전 국장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오래전 일이고 술을 마신 상태라 기억이 없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라며 "다만 그 일이 검사 인사나 사무감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사실상 성추행 사건 자체는 부정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1987 박종철, 31년만에 경관 자필기록 확인

<단독> 소영환 교도관, 강진규 경사 옥중 최초기록 보관
이승현/김치관 기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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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30  19: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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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박종철!, 아! 1987년!
  
▲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사진출처-박종철기념사업회]
1987년 1월 14일 새벽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생인 박종철이 하숙집에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그곳 509조사실에서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들에게 물고문을 당하던 중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역사적인 87년 6월시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만큼, 당시 폭압적 국가권력에 의해 빈번하게 자행되었던 사건으로는 드물게 널리 알려졌지만, 그날의 전모를 밝혀 진실과 정의를 세우려는 노력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86년 10월 말 건국대에서 1,290명의 대학생을 대량 구속시킨 전두환 세력은 이듬해인 1987년 초반까지 당시 안기부와 보안사, 치안본부 등으로 초법적인 합동수사본부를 만들어 핵심 수배자 검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재집권에 최대 장애가 되었던 학생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허문데 이어 핵심지도부를 파괴하려던 전두환 세력의 계획은 필사적이었고 그만큼 빠른 결과를 얻기 위해 그동안 당연시하던 고문도 더욱 가혹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 고문치사의 발생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도 그들은 정권의 명운을 걸고 악랄하고, 집요하게 사건을 축소·은폐·조작했다.
1월 14일 저녁 시신을 비밀리에 화장 처리하기로 하고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희대의 발표를 계획하면서, 그들은 박종철의 죽음을 ‘단순 쇼크사’로 조작하려고 시도했으나 고문치사를 직감한 검사의 부검 강행 등 양심적인 인사들의 노력에 막혀 실패로 돌아갔다.
1월 15일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고 사건 직후 박종철을 검안한 전문의가 물고문에 의한 사망가능성을 시사하는 증언을 했지만, 안기부 주도의 관계기관 대책회의 결정에 따라 검찰은 17일 오후 수사권을 포기하고 경찰에 자체 조사를 맡겼다.
고문치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경찰은 19일 ‘지나친 직무의욕으로 인한 불상사’ 의견으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2명을 고문경관으로 구속 송치해 마무리를 시도했다.
고문경관 숫자를 5명에서 2명으로 축소한 것은 경찰이 일상적이고 조직적으로 고문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업무과욕으로 인해 발생한 불상사라고 조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끝내 역사로 살아나는 ‘진실’
  
▲ 옛 남영동 대공분실 전경. 지금은 경찰청인권센터가 들어서 있다. [사진출처-박종철기념사업회]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그해 1월 20일~23일까지 진행된 1차 수사뿐만 아니라 이후 재수사, 재재수사, 이듬해 1월에는 재재재수사까지 4차례에 걸쳐 수사를 진행하는 동안 번번이 사건의 진실을 외면했다. 매번 새로운 사실이 폭로되면 재수사가 결정되었고, 그때마다 그동안 진행된 수사는 졸속, 짜맞추기, 축소, 은폐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최근 영화 <1987>이 개봉되고 영화를 관람한 수백만 관객이 30년전 박종철과 6월항쟁에 대해 다시 뜨거운 관심을 보이면서 그날의 ‘진실’이 오늘로 불려 나오고 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으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발표한 성명은 사건의 축소·은폐·조작에 골몰하던 전두환 세력을 궁지에 몰아넣고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해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성명은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부영 민통련 사무처장이 ‘고문경관이 2명이 아니라 3명 더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고는 바깥으로 ‘비둘기’(비밀서신)를 내 보냄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이부영은 영등포교도소 안유 보안계장으로부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해 2월 23일 한재동·전병용 교도관을 통해 이 소식을 외부에 전했으며, 비둘기는 4월 7일까지 3차례에 더 교도소 담장을 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이부영은 훗날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사건 진상폭로는 내가 기자를 그만두고 나서 쓴 특종’이라고 회고하면서 ‘민주교도관들의 용기있는 협력’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31년 만에 드러난 역사의 한 조각, 더 늦출 이유 없다
  
▲ 1987년 1월 20일 당시 영등포교도소 9사 특별사동의 담당 교도관이었던 소영환씨가 31년간 보관하고 있던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특별사동에는 고문경관으로 구속 수감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그리고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의 진실을 밖으로 내보낸 이부영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 등이 있었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통일뉴스>는 박종철을 고문해 치사에 이르게 한 혐의로 구속 수감된 최초 2명의 고문경관 중 한 명인 강진규 경사(당시 30살)가 1987년 1월말께 편지지 10쪽 분량으로 작성한 자필 진술서 원본이 있다는 제보를 오래 전에 확보하고 있었다. 영화 <1987>로 드디어 이 문건이 세상에 드러날 멍석이 깔린 셈이다.
제보자는 당시 강진규가 수감되어 있던 영등포교도소 9사 특별사동의 본무 담당으로 근무한 소영환 전 교도관(당시 30살).
1990년 교도관을 그만두고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법률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소영환 씨는 1987년 1월 말께 자신이 강진규를 설득해 자필 진술서를 작성하게 하고 그 후 31년간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 원본을 보관해 왔으며, 그 내용을 당시 처음으로 이부영에게 구두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지난 16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소 씨가 근무하는 서울 서초구 한 법률사무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 원문과 당시의 복잡한 심경 등을 기록한 소 씨의 일기장 등 자료를 확인하고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원문의 언론 공개는 처음이고, 강진규를 취재해온 <SBS>가 합석했다.
1981년 12월 5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정직 공무원으로 발령받아 일해 온 소 씨는 1987년 한국방송통신대학 법학과 5학년에 다니던 중 휴가를 내고 협력대학인 서울대학교에서 시험을 본 후 1월 19~20일께 업무에 복귀했다.
그때 “한 사람은 자살 가능성이 있으니 특별히 관리하라는 업무지시를 받고 근무에 돌입했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영등포교도소 9사 특별사동은 원래 여사로 사용되던 곳인데, 이부영은 1986년 5.3인천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그해 10월 잡혀와 수감 중이었고 이듬해 1월 20일 조한경 경위(당시 42살)와 강진규가 같은 사동에 수감되었다.
박종철에 대한 고문치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린 경찰 지휘부가 ‘일부 경관의 지나친 직무의욕으로 발생한 불상사’라는 자체 발표와 함께 1987년 1월 19일 조한경과 강진규를 2명의 고문경관으로 지목해 구속 수감했으나 당일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영등포교도소로 온 것이다.
살해 위협을 느낀다며 교도소에서 제공하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등 불안해했던, 특별관리가 필요한 ‘한 사람’이 바로 강진규였다.
고문 가해 당사자가 쓴 최초의 현장 기록
  
▲ 소영환씨는 1987년 2월 27일 ‘眞實’(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당시의 복잡한 심경을 일기로 남겼다. 그는 일기에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지 못하고 시간과 세월 그리고 역사 속에 묻어야 할 일들도 많이 있다”며, “나는 오늘 어려운 부탁을 받았다. 물론 내 자신이 선뜻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라고 썼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강진규는 1957년생으로 자신과 비슷한 연배인데다 법학도였던 소 씨에게 자신은 고문에 가담한 바 없으며 여기 와 있을 이유도 없다는 하소연을 하고 법률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는 평범한 일상을 꿈꾸던 아내와 변변한 외식 한번 하지 못하고 자식들에게도 오명을 남기게 된 데 대해 미안해하면서 급격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스스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수호자’라는 자의식이 강했지만 자신이 적극적으로 하지도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가법 적용을 받아 10년 중형이 점쳐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굉장히 불안해했다.
소 씨는 당시 심각한 불안과 심경변화를 겪고 있던 강진규에게 “박종철이라는 대학생을 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다면 사실대로 진술을 하는 게 좋겠다. 담당검사에게 다시 조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할 테니 조사에 응하라”고 조언했고, 강진규는 구속수감 일주일 쯤 후인 1월 말께 사흘에 걸쳐 10쪽 분량의 자필 진술서를 작성했다. 제출 목적으로 작성된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공식 확인된 바로는 2월 초순 조한경과 강진규 등 고문경관들은 가족과의 면담에서 고문에 가담한 3명이 경관이 더 있다는 사실을 발설했고, 이후 경찰 상급자와의 면회에서도 “억울하다, 사실을 이야기하겠다”며 갈등을 빚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회유와 압박이 가해졌고 그 와중에 2월 23일 이부영의 비둘기가 바깥으로 전해진 것이다.
강진규의 자필 진술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직후 작성한 최초의 기록이며, 자기변호를 위해 쓰인 동기를 감안하더라도 축소·은폐·조작 시도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건현장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당시 현장을 진실에 가깝게 복원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로 보인다.
강진규는 진술서에서 자신은 대공분실 수사 4반 소속으로 여건주 반장과 1월 13일 저녁 전국학생운동지도부 검거를 위한 업무지시에 따라 민식(가명)의 자취방에 잠복근무를 하러 갔다가 자물쇠로 잠겨있어 남영동으로 철수, 당시 영하 14도의 추운 날씨에 중국집에서 고량주를 여러 병 마셨다고 기록했다.
이튿날 아침 8시 55분께 남영동 사무실(공안분실)로 출근하여 10시 20분께 1반 반장인 조한경 경위와 황정웅, 반금곤 등으로부터 5층 8호실에 박종철이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관련 수배자인 박OO 수사를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이후 두 번이나 조사실을 옮겨가면서 고문을 가해 치사에 이르게 된 정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강진규 경사가 1987년 1월말께 영등포교도소에서 자필로 작성한 사건 경위 진술서(요약)
1월 13일 5시-대공3부 5과 2계 사무실에서 박윤택 계장으로부터 전국학생운동지도부 검거를 위한 업무지시를 받았다. 민식(가명) 자취방 잠복근무하며, 중요수배자인 최OO(서울대 81)의 첩보에 따라 여자친구인 OOO(OO대 대학원) 소재파악 검거할 것.
1월 13일 6시-4반장인 여건주와 함께 학생운동 선전책 민식 자취방 갔으나 자물쇠로 잠겨있어 철수. 남영동 사랑방다방 옆 포장마차에서 술 마심. 영하 14도의 날씨. 중국집에서 고량주 5병 마심.
1월 14일 08:55-사무실 출근, 10:00-1반장 조한경, 황정웅 등 사무실에서 (수배자인)박종O에 대해 이야기 함, 10:20-5층 심문실에서 1반 조한경, 황정웅, 반금곤이 학생 1명 데리고 있고, 하종O(서울대학원 인류 1년) 연행, 1반에서 공작첩보 제출해 박종O에 대해 같이 수사하자고 함.
반금곤과 같이 8호실에 가보니 이정호가 있고, 박종철이 있었음.
□ 경찰 : 아버지도 공무원(부산시청 수도과)인데 부모님과 가족들 생각도 좀 해야 되지 않겠나
■ 박종철 : 나는 지금 서울대 민민투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실 외에는 모른다
□ 박종O은 어떻게 알고 있나
■ 선배를 통해 알고 있다
□ 여기에 자세히 써라
본인(강진규)은 14호실에 있다가 8호실로 왔는데 6과 1계 김부O 경장이 어떤 피의자를 데리고 와서 좀 비켜 달라고 하였다. 14호실에 있던 조한경한테 가서 김 경장이 8호실을 비워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자 조한경이 ‘아무 곳이나 옮기지 뭐’ 라고 하여 옆방 9호실을 보니 아무도 없어서 옮겼다. (당시 9호실에는 이정호만 있었음)
박종철이 86년 11월 말에 강OO(서울대 OO학과)이 박종철 하숙방에 와서 자고 가고, 87년 1월 8일 와서 돈 10,000원을 준 사실이 있다고 진술.
14호실에 있던 조한경과 반금곤이 9호실로 왔고, 조한경이 9호실서 신문, 고함소리.
□ 조한경(높은 언성으로 심문하면서) 이놈 혼좀 나봐야 되겠느냐, 이놈 혼좀 내라고 고함.
□ 강진규 : 너 입고 있는 옷 다 벗어
■ 박종철 : (순순히 옷벗으면서)전부 다 벗어야 하느냐
□ 강 : 그래
■ 박 : (옷 전부 다 벗음)
□ 강 : (조한경 반장 앞에 무릎 꿇게 한 후) 네 수사 총책임자이니 사실대로 말씀 드리라
□ 강 :(이때 반금곤은 욕조에 물 채우고 있었음)
□ 조 : 박종운 어디 있느냐
■ 박 : 모른다(계속 대답)
□ 조 : (화가 나서) 이 자식 혼 좀내라 (큰소리치면서) 사람 더 오라.
이때 이정호가 14호실에 있던 황종웅을 불러옴. 반금곤은 수건으로 박종철의 양손을 뒤로 하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고 욕조 앞으로 데리고 감. 물을 먹어보라고 하자 박종철이 욕탕 안으로 머리를 숙여 머리 전부를 물속으로 들어가도록 한 뒤 일으켜 세움
□ 조 : 박종운 어디 있느냐
■ 박 : 요즘 독서실에서 기거하는데 독서실 티켓은 본 사실이 있다
□ 조 : 그 독서실이 어디 있느냐
■ 박 : 모른다
□ 조 : 너 혼 좀 나야 말하겠느냐
■ 박 : (계속) 모른다
-이때 반금곤이 수건으로 박종철의 양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음.
조한경은 “혼 좀 내라”며 나감
욕조 앞의 박종철 왼쪽에 황정웅이, 오른쪽엔 반금곤이 박종철의 팔과 몸 사이로 각각 손을 넣어 양 어깨를 누르고 다른 한 팔은 박종철의 머리를 잡음. 이정호는 박종철의 양 다리를 들고 욕조 안으로 넣음. 본인(강진규)은 이때 바지를 벗고 팬티 차림으로 욕조 안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물이 차가워서(영하 16도) 욕조위에 올라서 있었음.
-반금곤이 약 1분 30초가량 뒤에 박종철의 머리를 들어 “어디 있느냐”고 하자 박종철이 다시 “모른다”고 하여 다시 위의 자세로 욕조 안으로 박종철의 머리를 누르고 있는데 조한경이 들어와 의자에 앉았음(약 20~30초)
-끌어내라고 하여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가 박종철을 잡은 곳을 놓자 힘없이 주저앉는 모습을 보고 조한경이 밖으로 끌어내라고 지시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가 박종철을 밖으로 끌어내어 바닥에 눕히자(이때 11:20경) 조한경이 갑자기 침대위에 눕히라고 함.
-여건주 4반장이 조한경에게 뭐라 말하고(물기를 닦으라?) 나가면서 같이 눕히는데 박종철이 힘없이 축 늘어지는 것 같았음
-조한경이 빨리 의사를 데리고 오라고 하자 황정웅과 이정호가 나감. 조한경은 박종철의 입에 인공호흡을 하고 본인(강진규)은 인공호흡 하는 것에 맞춰 박종철의 가슴을 누르고 반은 전신마사지를 하고 있는데 4반 김기호 경장이 왔음.
-본인(강진규)과 김기호 교대한 후 계장인 박원택과 과장 유정방 등 오고 조금 있다 의사가(중앙대 용산병원 오연상) 도착(11:40)
-조한경이 나가있으라고 하여 5층 14호실에 가 있었음
1월 14일 오후 1시 30분-박종철 사망, 지금 경찰병원으로 옮기고 있다고 함.
1월 14일 오후 3시-황정웅 보고서 작성, 주심문자는 조한경, 부심문관은 강진규라고 기재(계장과 과장 모두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면서 최대한 잘될 것이라고 안심시킴). 박원택 과장이 보고함.
1월 17일(토)-단장, 경무관, 권석진이 조한경과 본인(강진규)를 불러 나감, 강민창 본부장 전화 옴(언론보도가 나와서 형식적으로라도 감찰조사는 해야 한다. 장소를 호텔로 하자. 조사대상은 보고서대로 조한경, 강진규, 계장으로 하자, 보고서 내용도 쇼크사로 하자. 조사관은 감찰담당관, 경무관 조용우외 2명 정도로 간단히 할 것-그러나 토요일에 호텔이 없다고 해서 치안본부 2대(신길동 소재)로 정하고 1518(사무실차) 타고 계장 박원택과 조한경, 본인 강진규이 특수 2대에 도착함)
오후 9시-갑자기 장소 바꾸고 특수대 직원으로 교체, 정신없이 구속
1월 19일-구속영장 발부.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루 잠
1월 20일-영등포교도소로 바로 이관. 부장검사 진창언으로부터 검찰조사 받음, 검사관 상무 검사 박상옥
1월 22일- 다시 검찰 조사
*이 내용은 지난 23일 촬영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열람한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 내용을 메모해 작성되었다.
기록이 기억으로, 기억은 행동과 역사로 이어진다
  
▲ 소 씨가 남긴 또 하나의 기록. 당시 공소장에 기록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의 그림과 조직도 등이 그려져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의 진술서는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자체 인쇄한 편지지에 쓰였다.
편지지 5장의 앞·뒷면 10쪽에 빼곡히 작성되었으며, 여기에 소 씨와 강진규가 사실 확인과 보완을 위해 주고받은 문답 및 남영동 대공분실 조사실 스케치 등을 적은 두 쪽 분량의 메모도 덧붙어 있다. 볼펜으로 양면을 다 쓴 자필 진술서와 달리 메모는 연필로 줄친 편지지의 뒷면만 사용했다.
소씨는 지난 16일 기자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31년 만에 고문치사 가해 경관의 자필 기록을 공개하게 된 데 대해 “역사는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당시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말할 뿐이며, 그대로 기록되어야 한다. 영화 <1987>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비록 조그마한 부분이지만 이번 증언 등을 계기로 당시의 진실이 바로 알려지길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나 16일과 23일 두 차례 이어진 만남에서 “지금까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던 것은 자필 진술서를 작성한 당사자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이라면서 기록 원본에 대한 촬영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기자와 만난 직후 연락이 닿아 지난 17일 31년 만에 처음 만난 강진규가 “편지(진술서)가 공개되면 사돈들에게 면목 없고 아직 자식들의 혼사가 남아있는 동료(황정웅, 반금곤, 이정호)들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했다며, “인권법을 전공한 법률가로서 공개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진규는 이날 소 씨에게 “그 일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일이고 지금은 몇몇 사람만 만날 뿐 은둔생활과 다름없다”고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고 한다.
위에 별도 기사로 소개한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는 23일 촬영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메모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고문 가담한 공안세력의 뼈아픈 자성, 과연 기대할 수 있나
  
▲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은 26일 통일뉴스와 만나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가 사료적 가치가 충분하다면서 하루 빨리 공개되기를 기대했다. 또 경찰을 비롯해 전근대적 고문을 일삼았던 공안세력의 뼈아픈 자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 이후 최초로 고문치사에 가담한 당사자의 입으로 고문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라는 핵심적인 진실을 밝혔다는 점에서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는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무엇보다 고문치사 사건 발생 후 급격한 심경의 변화를 겪던 가해 당사자가 보름 이내의 짧은 시간 내에 그것도 제출 목적이 아니라 직접 증언의 성격을 담아 기록했다는 점에서 당시 상황을 복원하는데 필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26일 오전 광화문 사무실에서 만난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은 “강진규도 그 때 구속되어서 자기가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이행한 것에 대해 뉘우친 것 아니겠나. 그래서 고문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뉘우친 내용을 담은 것인데,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면서도 “이제 정리하는 시점에서 강진규의 문서가 공개되는 것은 사료적으로도 가치가 있고, 의미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과거 공안사건을 다룬 가해자들의 경우 그들만의 오래된 조직과 이권 등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소 씨가 강진규를 설득해 자료 공개를 하도록 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남영동 대공분실에 근무하던 사람의 자료가 이제 그곳 4층에 있는 박종철기념관으로 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경찰이 아직도 스스로 책임있는 정리도 없이 남영동을 관리하는 상황에서 이번 자료뿐만 아니라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넘겨받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이부영 운영위원장은 1987년 1월 수감자 신분으로 영등포교도소 내에서 바깥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관련 소식을 보낸 것과 관련해 최근 제기되는 몇 가지 새로운 주장에 대해서는 “새롭게 검토할 일은 특별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소 씨가 특별사동 근무 교도관이었고 그로부터 박종철 고문치사에 대한 내용을 들은 바 있다”고 확인했지만 “고문치사 사건의 가담자가 3명 더 있었다는 사실은 그 전에 한재동 교도관으로부터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소 씨로부터 전해들은 강진규의 진술은 그가 가해 경관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믿을 수 없어서 안유 보안계장으로부터 다시 확인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소 씨가 당시 법무사 시험을 준비하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상대하지 않고 들은 내용도 가급적 잊어버리려고 했다. 한재동 교도관과 안유 보안계장은 당시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먼저 그들의 안위에 대해 걱정해야 했다”고 덧붙였다.
  
▲ 이부영 운영위원장이 작성한 ‘비둘기’를 밖으로 내보낸 한재동 전 교도관을 29일 안양 근무지에서 만났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부영 운영위원장이 ‘비둘기’를 날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한재동 당시 영등포교도소 교도관은 29일 오후 안양 근무지에서 기자와 만나 강진규 자필 기록에 대해 “며칠 전 이부영 의원과 만나서 처음 봤다”며 “옛날부터 있었던 것은 생각도 못했는데, 자세히 기록해 놨더라”고 말했다.
한재동 전 교도관은 “나는 당시 공장담당이었는데 5시에 폐방하면 특사 바로 옆 직원이발소에서 대기하다 6시에 퇴근하게 되는데, 그 시간을 이용해 이부영 의원을 만나곤 했다”며 “소영환 교도관이 못 오게 했으면 내가 들락거릴 수가 없었는데, 그때 한쪽으로 피해주며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 역시 “자료는 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 보관하는 것이 좋겠다고 소영환 씨에게 조언했다”며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는 권력층에 찍힐까봐 관련 인터뷰나 보도도 없었는데, 매년 기념일 전후라도 기사가 나가서 젊은 세대가 잊지 않고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바람을 전했다.

2018년 1월 29일 월요일

대통령 딸 ‘정의당 당원’ 뉴스, ‘단독’ 붙여야만 했나?

대한민국 언론은 뉴스의 중요성과 가치보다 클릭률이 보도 여부를 결정한다
임병도 | 2018-01-30 08:24:22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또다시 언론의 ‘단독’이 나왔다. 이번에는 무려 ‘문재인 대통령의 딸’이 연관됐다. 비리? 특혜? 사건 사고?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딸 문다혜씨가 ‘정의당 당원’이라는 사실 하나뿐이다.
대통령인 아버지는 민주당 당원이고, 딸은 정의당 당원이라는 사실이 신기한가? 대통령 딸의 개인적 정치 성향에 ‘단독’을 붙여 보도하고 받아쓰기하는 언론사와 기자가 더 이상해 보인다.
별 내용 없는 대통령 딸 ‘정의당 당원’ 뉴스에 ‘단독’은 과대포장이었다. 자꾸 ‘단독’을 남발하면 ‘단독 보도’의 가치가 떨어진다. ‘단독’과 ‘최초 보도’로 구분할 필요도 있다.

‘지상파부터 조선일보, 한겨레까지 천편일률적 복사 보도’
▲경향신문의 <단독, 문 대통령 딸은 정의당원> 보도 이후 비슷한 기사가 지상파와 조중동, 한겨레에서 나왔다.

경향신문 손제민·이효상 기자가 쓴 <[단독]문 대통령 딸은 ‘정의당원’>이라는 기사가 나오자, 비슷한 제목과 유사한 내용의 기사 수십 건이 올라왔다. 언론사 중에는 KBS, MBC, SBS를 포함한 지상파는 물론이고, 종편과 조선일보, 한겨레도 포함돼 있다.
대통령의 딸이 정의당 당원이라는 사실이 대한민국 주요 언론사 모두가 보도할 가치가 있는 뉴스인가? 막무가내로 뉴스라고 우겨보자. 하지만 CTRL+V를 눌러 복사한 듯 작성된 똑같은 기사를 보면 기성품처럼 찍어낸 기사 같다.
문 대통령 딸은 정의당 당원…이정미 대표와 ‘1987’ 관람도 (한겨레 2018-01-29 09:34)
문 대통령 딸은 정의당 당원…지난해 대선 뒤 입당 (한겨레 2018-01-29 10:55)
특히, 한겨레는 연합뉴스 기사를 자사 사이트에 올린 뒤 한 시간여 뒤에 비슷한 제목과 내용의 기사를 또다시 발행했다. 다른 언론사도 마찬가지로 ‘문 대통령 딸 정의당 당원’ 관련 기사를 반복해 보도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딸 다혜씨(35)가 정의당에 입당한 사실 알려짐
-이정미 대표와 영화 <1987> 단체 관람
-청와대 ‘소신에 따라 지지, 문 대통령도 이를 존중’
-지난 대선에서 광화문 유세 깜짝 등장
사실관계 네 줄을 짜깁기해서 기사를 쓰는 기자들도 대단하고, 앞다퉈 제목을 바꿔가며 기사를 발행하는 언론사들도 참 뻔뻔해 보인다.
‘정의당 ‘대통령 딸’ 안았다? 어이없는 기사로 도배된 포털 뉴스’
▲문재인 대통령 딸 문다혜씨 관련 뉴스 ⓒ네이버뉴스 화면 캡처

네이버에 <대통령의 딸>,<문재인 대통령 딸>,<문다혜>,<정의당 당원>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왔다. 그러자 클릭을 유도하는 기사가 쏟아졌는데, 그중에는 말도 안 되는 제목의 기사도 여러 건 보도됐다.
정의당 ‘대통령 딸’ 안았다 (프라임 경제)
→ 문다혜씨는 스스로 당원으로 가입했을 뿐이다. 그런데 제목만 보면 정의당이 대통령의 딸을 영입한 것처럼 보인다.
[영상] 대통령 딸 문다혜 ‘정의당 평당원’ 입당한 이유는? (국민일보)
→ 제목만 보면 문다혜씨의 정의당 입당 이유가 영상으로 공개된 듯 하다. 그러나 클릭해보면 지난 대선 때 광화문 유세 모습과 심상정 대표의 동영상이다. 그냥 기자의 <30대 중반의 육아맘 다혜씨가 이 같은 정의당의 저출산‧육아 정책에 마음이 움직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는 추측성 기사였다.
‘정의당 입당’ 문다혜…박영선 “‘딸에겐 딸의 삶 있다’는 文 대통령 말, 응원” (동아일보)
→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트위터에 올린 짧은 글로 쓴 기사도 여러 건 올라왔다. 지난 광화문 유세에서 잠시 만났고, 응원한다는 내용이다. 뭐 이런 얘기가 기사가 될까 싶을 정도이다.

‘국민이 알아야 할 뉴스를 볼 수 없는 세상’
지상파부터 조중동, 한겨레까지 대한민국 언론이 왜 ‘대통령 딸 정의당 당원’ 뉴스에 목을 매달까? 조회수가 많으면 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기자의 명예’, ‘언론사의 신뢰성’, ‘언론의 공정성’ 다 필요 없다. 오로지 클릭만 유도할 수 있다면 자극적인 제목, 비슷한 기사라도 올려야 한다.
언론사라도 수입이 있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언론사의 클릭 장사에 정작 시민이 알아야 할 뉴스가 뒤로 밀리고 안 보인다.
▲정의당 개헌 시안 공개 관련 뉴스에 ‘문재인 대통령의 딸 문다혜씨”라는 문장이 들어간 서울신문 기사. ⓒ네이버 뉴스 화면 캡처

어제 정의당이 <국민을 위한 헌법 개정안>이라는 개헌 시안을 발표했지만,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언론에서 외면했기 때문이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정의당 개헌 시안>으로 검색해서 나온 뉴스가 20건이 넘지 않았다. 조중동과 MBC, KBS는 아예 보도하지 않았다. (1월 29일 오후 3시 기준)
모르고 지나칠 뉴스가 <문재인 대통령 딸. 정의당 당원>이라는 검색어에 걸리면 그나마 노출이 됐다. 정의당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의 딸이 정의당을 안은 꼴이다.
대한민국 언론은 뉴스의 중요성과 가치보다 클릭률이 보도 여부를 결정한다. 정확한 사실을 근거로 한 기획기사, 깊이 있고 짜임새 있는 분석기사는 버림받고 자극적인 기사만이 살아남는 시대이다. 기자 대신 로봇이 기사를 쓰는 ‘로봇 저널리즘’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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