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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남북, 1일 0시부로 적대행위 중지

국방부,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 발걸음”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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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31  20: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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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11월 1일 0시부로 지상, 해상, 공중에서의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한다. 종전선언에 한층 더 가까이 가게 됐다.
국방부는 31일 “남북군사당국은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 따라, 2018년 11월 1일 00시부로 지상, 해상, 공중에서의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군사분야 합의서’에서 남북은 11월 1일부로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하였다”고 명시했다.
이에 따라, 남북은 군사분계선(MDL)으로부터 5km 안에서 포병사격훈련 및 연대급 이상 야외기동훈련을 중지한다. MDL을 기준으로 10km 지역의 완충지대가 형성되는 것.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 총 96회 발생한 총.포격 도발이 이제 멈추게 됐다.
해상에서는 서해 남측 덕적도 이북으로부터 북측 초도 이남까지, 동해 남측 속초 이북으로부터 북측 통천 이남까지 수역에서 포사격 및 해상 기동훈련이 중지된다. 동.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 80km의 완충수역이 설정돼, ‘분쟁의 바다’에서 ‘평화의 바다’로 전환되는 셈.
또한, 해안포와 함포의 포구, 포신에 덮개가 설치되고, 포문도 폐쇄돼, 동.서해 일대에서의 포성과 총성이 들리지 않게 됐다. 현재 해군은 연평도와 백령도 등에 있는 모든 해안포의 포문을 폐쇄했다.
공중에서의 적대행위도 중지된다. 남북은 MDL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했다. 고정익 항공기 동부 40km, 서부 20km, 회전익항공기 10km, 무인기 동부 15km, 서부 10km, 기구 25km 등으로, 국방부는 기종별 항공고시보(NOTAM)를 발령, 해당 지역에 대한 비행금지구역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 9월 19일 남측 송영무 국방장관과 북측 노광철 인민무력상이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 서명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적대행위 중지에도 불구하고 남북 간 우발적 무력충돌방지를 위해 새로운 작전수행절차도 적용된다.
지상.해상은 경고방송→2차 경고방송→경고사격→2차 경고사격→군사적 조치 등 5단계, 공중은 경고교신 및 신호→차단비행→경고사격→군사적 조치 등 4단계로 남북이 지.해.공 작전수행절차에 합의했다.
국방부는 “합참 및 작전사 야전예규를 수정.완료하였고, 현장부대 교육 및 행동화 숙달 등을 조치하였다”고 밝혔다.
북측도 지난 26일 열린 남북장성급군사회담에서 11월 1일 0시부로 적대행위를 중지한다고 공식 표명했다. 최근 서해 해안포의 포문 폐쇄조치를 이행하는 등 적대행위 중지조치를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고 국방부가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 군은 11월 1일 이후 북측의 MDL 일대 훈련 진행 동향, 동.서해 완충구역 합의 이행실태, 비행금지구역 준수 여부 등을 면밀히 확인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엔사도 계기가 있을 때마다, 남북 간 군사분야 합의서에 명시된 지상.해상.공중에서의 상호 적대행위 전면 중지와 관련된 제반 조치를 지지하고 공감한다고 밝혀왔다.
다만, 대규모 군사훈련 및 무력증강 문제, 다양한 형태의 봉쇄.차단 및 항행 방해 문제, 상대방에 대한 정찰행위 중지 문제 등을 다루는 ‘남북군사공동위원회’가 구성되지 않아 적대행위 중지를 위한 숙제로 남았다.
국방부는 “군사합의에 따라 남북군사당국이 11월 1일부로 이행하는 지상.해상.공중에서의 상호 적대행위 중지조치는 남북 간 군사적 긴장완화 및 신뢰구축을 촉진시키는 실효적 조치가 될 것”이라며 “한반도 비핵화 및 항구적 평화정착을 견인하는 의미있는 발걸음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남북이 군사분야 합의서에 따라 11월 1일 0시부로 적대행위를 중지함에 따라, 종전선언에 한 발짝 더 가가서게 됐다.
최종건 청와대 평화군비통제 비서관은 지난 9월 합의서 서명 직후, “정부가 추진하는 종전선언과 연결돼 있다”며 “남북관계 측면에 있어서도 남북관계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안전핀이다. 이제는 군사적 안전 보장조치를 통해 좀 더 안전하게 남북관계를 견인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특집/ 평양이 왔다] 로금순 특파원의 北 사진전

[특집/ 평양이 왔다] 로금순 특파원의 北 사진전(24) - 미래유치원 체육유희오락경기
  • 로금순조선신보 평양지국 특파원
  • 승인 2018.10.31 15:50
  • 댓글 0
미래유치원
미래과학자거리(2015년11월 준공)에 있는 미래유치원.
2017년 5월31일, 이곳 유치원에서 국제아동절(6월1일)을 기념하여 체육유희오락경기가 있었다.
이날 모음은 원아들의 노래와 춤, 태권도 연무를 비롯한 공연에 이어 롱구공넣기, 무릎싸움, 바줄(밧줄)당기기를 비롯한 체육경기 등 다채로운 내용으로 진행되였다.
높이 울려퍼지는 어린이들의 웃음소리에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하는 시민들의 모습도 있었다.
※ 2015년 평양시 평천구역에 있는 충성의 다리에서 양각다리까지의 대동강 호안을 따라 건설된 미래과학자거리에는 《미래형》의 53층 고층건물을 비롯한 수천 세대가 사는 살림집과 150여개의 상업시설, 학교, 유치원, 공원들로 형성되였는데 미래유치원도 그 중의 하나이다.
로금순 기자는 지난 2003년부터 조선신보 평양지국 특파원으로 해마다 넉 달 가량을 평양에 체류하면서 주로 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인민생활 모습을 취재하고 있다. 지난 6.15시기엔 남북 교류활동을 많이 취재했으며, 평양발 직항편으로 남에도 여러 번 다녀갔다고 한다. 노 특파원은 제2의 6.15시대가 하루빨리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마음을 전해왔다. 현장언론 민플러스는 노 특파원의 허락을 받아 국내언론에선 쉽게 접할 수 없는 북의 다양한 모습들을 게재한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편집자]
로금순조선신보 평양지국 특파원  minplusnews@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의 인어’ 해녀가 사라진다

고령화로 인해 명맥이 끊어질 위험에 처한 해녀 탐사
뉴스프로 | 2018-10-31 16:21:49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한국의 인어’ 해녀가 사라진다 
– 인디아투데이, 제주 해녀 역사에 주목
– 고령화로 인해 명맥이 끊어질 위험에 처한 해녀 탐사
인도의 한 언론 매체가 제주 해녀를 탐사했다. <인디아투데이>지는 뉴욕에서 사진 작가로 활동하는 김미주 작가의 해녀 사진을 통해 해녀의 삶과 역사를 소개한다.
예로부터 해녀는 제주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고, 현대에 들어서도 해녀는 제주 지역경제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해녀는 점차 고령화 되가는 추세다. <인디아투데이>도 현재 해녀 수자는 4,500명 미만이며 전부 50세 이상이라고 적고 있다.
<인디아투데이>의 보도에서는 한때 한국의 ‘인어’로 불린 해녀가 사라져가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마저 느껴진다.
김미주 작가의 사진은 이 같은 안타까움을 더한다. 김 작가의 사진 속 해녀들은 하나 같이 깊은 주름이 패인 노년의 여성들이다. 고령화 추세에 해녀도 명맥이 희미해져감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바, <인디아투데이>의 해녀 보도는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높일 것으로 기대한다. (글, Wycliff Luke)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인디아투데이의 기사 전문이다.
번역 감수: 임옥
기사 바로가기: https://bit.ly/2qddcoS
김미주 사진 작가 홈페이지: http://www.mijookim.com
Korea’s real life mermaids will soon be no more: About the last generation Haenyo
한국의 실생활 인어가 사라진다: 마지막 해녀 세대
For centuries, mermaids of Korea, Haenyo or ‘sea women’ from the Korean island province of Jeju have been diving into the chilly ocean waters to make their living by harvesting abalone, conch, and octopus.
수세기 동안, 한국의 인어, 즉 ‘바다 여인’이라 불리는 해녀들은 한국의 섬 제주도의 차가운 바닷물에 뛰어들어 전복, 조개, 문어 등을 잡아 생계를 유지해 왔다.
IndiaToday.in
New Delhi
October 29, 2018
UPDATED: October 29, 2018 14:47 IST
For centuries, the haenyeo, or ‘sea women,’ from the Korean island province of Jeju have been diving into the chilly ocean waters in order to make their living by harvesting abalone, conch, and octopus. (Image: mijookim.com)
수세기 동안, 한국의 인어, 즉 ‘바다 여인’이라 불리는 해녀들은 한국의 섬 제주도의 차가운 바닷물에 뛰어들어 전복, 조개, 문어 등을 잡아 생계를 유지해 왔다.
Ever seen a mermaid in real life? Visit South Korea before the last generation ceases to exist.
실제로 인어를 본 적이 있는가? 마지막 세대가 끝나기 전에 한국을 방문하시라.
For centuries, mermaids of Korea, haenyo or ‘sea women’ from the Korean island province of Jeju have been diving into the chilly ocean waters in order to make their living by harvesting abalone, conch, and octopus.
수세기 동안, 한국의 인어, 즉 ‘바다 여인’이라 불리는 해녀들은 한국의 섬 제주도의 차가운 바닷물에 뛰어들어 전복, 조개, 문어 등을 잡아 생계를 유지해 왔다.
Now comes the interesting part.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이렇다. All modern diving equipment are available nowadays so it’s not really a difficult task but haenyo never used any breathing equipment in their life.
요즘은 모든 현대식 다이빙 장비들이 있어 그다지 어려운 작업이 아니지만 해녀들은 평생 어떠한 호흡장비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They used to descend up to twenty meters in freezing cold water without any equipment, holding their breath for over two minutes at a time.
그들은 얼음같이 차가운 물 속에서 어떤 장비도 없이 해저 20미터 아래까지 내려가곤 했으며, 한 번에 2분 이상 숨을 참는다.
Who are the Haenyo?
해녀들은 누구인가?
1.They are known as the sea women of Jeju and wear old-fashioned headlight-shaped scuba masks, with lead weights strapped to their waists, so they can sink faster.
그들은 제주의 바다 여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헤드라이트 형태의 구식 스쿠버 마스크를 착용하고 더 빨리 잠수할 수 있도록 허리춤에 납을 매단다.
2. Also known as Korean Mermaids, haenyo are able to dive up to 65 feet (20 meters) under the sea, holding their breath for as long as two minutes at a time.
한국의 인어라고도 알려진 해녀들은 해저 최대 65피트 (20미터) 까지 잠수할 수 있으며 한 번에 2분까지 숨을 참을 수 있다.
Almost 100 per cent of haenyeo are over the age of 50.(Image: mijookim.com)
해녀들의 거의 100 %가 50세 이상이다.
3. Although these women divers were very independent, they were often forbidden to travel outside their villages or reveal their skin.
이 여성 다이버들은 매우 독립적이지만, 종종 자신들이 사는 마을 바깥으로 나가거나 피부를 드러내는 것이 금지되었다.
4. There were over 26,000 haenyo in the 1960s and now there are less than 4,500.
1960년대에는 26,000 명이 넘는 해녀들이 있었으며 현재는 그 수가 4,500 명 미만이다.
5. Almost 100 per cent of these mermaids are over the age of 50.
이 해녀들의 거의 100%가 50 세 이상이다.
How do these mermaids search for their food? 해녀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양식을 찾는가?
The mermaids store their harvest beneath the ‘tewak,’ which is a flotation device left on the surface of the water with a net hanging beneath it.(Image: mijookim.com)
해녀들은 아래에 그물이 달린, 물 표면에 떠 있는 부유 도구 ‘태왁’ 밑에 수확물을 저장한다.
Many of them use various tools to dig conch and abalone from the crevices on the sea floor. Conch and abalone are shellfishes which can be eaten.
많은 해녀들은 해저 틈새의 소라와 전복을 캐기 위해 다양한 도구를 사용한다. 소라와 전복은 식용 조개류이다.
The mermaids store their harvest beneath the ‘tewak,’ which is a flotation device left on the surface of the water with a net hanging beneath it.
해녀들은 아래에 그물이 달린, 물 표면에 떠 있는 부유 도구인 ‘태왁’ 밑에 자신들이 채취한 수확물을 저장한다.
Korea’s diving tradition 한국의 잠수 전통
The Korean tradition of deep-sea diving for oysters, sea cucumbers, abalones, sea urchins, and squid dates back to the fifth century.
굴, 해삼, 전복, 성게, 오징어를 잡기 위해 깊은 바다 속으로 잠수하는 한국의 전통은 5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간다.
By the 18th-century, female divers largely outnumbered the males and thus became primary breadwinners of their families.(Image: mijookim.com)
18세기경까지 여성 잠수부들의 수가 남성보다 훨씬 많았으며 따라서 가족의 주된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Diving was originally considered a male profession, but this changed in the 17th century and by the 18th century, female divers largely outnumbered the males and thus became primary breadwinners of their families.
원래 잠수는 남성의 직업으로 여겨졌으나, 17세기에 바뀌어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여성 잠수부의 수가 남성을 능가했고, 따라서 가족의 주된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History of diving 잠수의 역사
When Korea was ruled by a king, most of the harvest made by these people were given to him as a tribute. But when Japan occupied Korea, this changed
왕이 한국을 다스리던 시절, 이 사람들이 거둔 수확의 대부분은 왕에게 공물로 주어졌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점령했을 때, 이것은 바뀌었다.
The practice was abolished and haenyo were free to sell their harvest on the market
그러한 관행은 없어졌고 해녀들은 자신들이 수확한 것을 자유롭게 시장에 내다 팔았다.
As the years passed, diving became a profitable profession for the haenyo
시간이 흐르면서 잠수는 해녀에게 수익성이 높은 직업이 되었다.
A great number of them were even hired by Japanese merchants to work as wage-laborers in Japan
그들 중 상당수는 일본 상인에 의해 고용되어 일본에서 임금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The outcome of World War II in 1945 brought the end of the Japanese rule in Korea, but women divers continued being an integral part of Jeju’s economy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결말로 일본의 한국 통치가 종식되었으나 여성 잠수부들은 계속 제주 경제의 핵심 부분으로 남았다.
Men took care of the home, looked after the children, and cooked, while women took care of the financial well being of the family
여자들이 가족의 경제적 복지를 책임진 반면, 남자들이 가정을 보살피고, 아이들을 돌보고 요리를 했다.
From cotton suits to wetsuits
면으로 된 옷에서 고무로 된 잠수복으로
For years, Korean mermaids wore homemade cotton suits while diving in the freezing waters of the ocean.
오랫동안 한국 해녀들은 차가운 바다에서 잠수하는 동안 집에서 손수 만든 면으로 된 작업복을 입었다.
The 1970s became a turning point for them as wetsuits became available in the marketplace.
고무로 된 잠수복을 구입할 수 있게 되며 1970년대는 이들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Wetsuits made it possible for haenyo to dive deeper and spend more time underwater, thus increasing their incomes.(Image: mijookim.com)
고무로 된 잠수복은 해녀들이 더 깊이 잠수하고 물속에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함으로써 해녀들의 수입은 늘게 되었다.
However, this led to the decline in income as spending time underwater bought many risks and health problems for haenyo and women slowly abandoned the sea-diving industry.
하지만, 물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해녀들에게 그만큼 많은 위험과 건강문제를 안겨줘 여성들이 서서히 바다 잠수일을 포기하면서 수입의 감소로 이어졌다.
The tradition of haenyo still exists, though perhaps not for long. New York-based photographer Mijoo Kim, set out to document the resilient women, said
해녀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하나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김미주 씨는 이 강인한 여성들을에 대해 기록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These women divers are carrying on a Korean legacy and will be the last of their kind.”
“이러한 여성 잠수부들은 한국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분들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They are the last generation of Haenyo,” Kim told the Huffington Post.
김 씨는 허핑턴포스트에 “그들이 해녀 세대의 마지막”이라고 전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9&table=c_sangchu&uid=938 

징용배상판결 “대법관들 신선(神仙) 입장에서 봤다”

[아침신문 솎아보기] 조선일보 대법원 판결에 여전히 불편한 기색
조선일보 “한국 국가 형체도 못 갖춰” 전 日 외무상 망발 인용보도
중앙일보는 현직 외무상 단독인터뷰해 “한일은 끊을 수 없는 관계”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2018년 11월 01일 목요일
조선일보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대법원의 징용배상 판결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조선일보는 오늘(1일)은 일본학과 교수의 입을 빌려 이틀 전 대법원의 배상판결을 “대법관들이 하늘에 있는 신선 입장에서 본 것 같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1일자 4면 머리에 “국제현실 고려했다면 징용배상 판결 어려웠을 것”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한일협정 연구자인 이아무개 교수를 인터뷰한 기사였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서 “사법부 논리로만 보면 ~ 1965년 한일협정 체제의 근간이 무너지게 된다”고 했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물질적 배상 대신 진정한 사죄를 받아내는 데 주력했는데 이번 사법부 판결은 이런 기조를 정면으로 부정했다는 거다. 
징용배상판결 “대법관들 신선(神仙) 입장에서 봤다” 
▲ 조선일보 4면
▲ 조선일보 4면
1965년 한일협정 체제가 그동안 양국 정부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53년이 지난 지금은 냉정하게 되돌아 봐야 한다. 시작부터 국민적 동의를 받지도 못했고, 이제 반세기가 지난 만큼 1965년 한일협정은 금과옥조가 아니다. 한일협정에 얽매이려면 엊그제 독도 가서 환하게 웃고 돌아온 국회의원들도 비난해야 마땅하다. 
조선일보는 60년대 박정희 정부가 맺은 한일협정을 “(당시) 한국 입장에선 대일외교를 돌파구 삼아 경제와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적 선택을 한 것”이라며 1965년 한일협정의 불가피성을 옹호했다. 
조선일보는 1일자 4면에 이어 5면에서도 대법원 배상판결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조선일보는 5면 머리에 ‘한국 다음 수순은 위안부 재단 해산, 도쿄선 3.1절 행사’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앞으로 양국관계에 민감한 일정이 줄줄이 잡혀 있는데 이런 판결이 나왔다며 대법원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 조선일보 5면의 2개 기사
▲ 조선일보 5면에 실린 2개 기사. 아래는 일본 전 외무상 망발 인용보도
조선일보 “한국 국가 형체도 못 갖춰” 전 日 외무상 발언 옮겨
조선일보는 5면 아래쪽에도 “일본 연일 강경 대응… 전 외무상 ‘한국, 국가로서의 형체 못 갖춘 듯”이란 거친 발언을 그대로 기사 제목에 담았다. 그동안 일본 정부의 행태로 봐서 한국 대법원의 배상판결을 환영할리 만무한 상황에서 “한국을 국가도 아니다”고 맹비난하는 나카소네 히로후미 일본 전직 외무상의 망발이 얼마나 뉴스 가치가 있는지 모를 일이다.  
반면 중앙일보는 일본 전직 외무상이 아닌 고노 다로 일본 현직 외무상을 단독 인터뷰해 1일자 5면에 “고노 ‘징용판결 유감…한일은 끊을 수 없는 관계”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현직 일본 외무상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유감을 표했지만 조선일보가 인용한 전직 외무상의 망발과 달리 달리 “한일은 끊을 수 없는 관계”라며 한일관계의 특수성을 설명했다. 
▲ 중앙일보 5면. 현직 일본 외무상 단독인터뷰
▲ 중앙일보 5면. 현직 일본 외무상 단독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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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중간선거 파고드는 한인들... 그들은 왜 돈 내며 움직이나

 (10/28일, 메넨데즈 상원의원과(오른쪽 양복)과 필 머피 주지사(왼쪽 양복)가 유권자들과 만나고 있다.
▲  (10/28일, 메넨데즈 상원의원과(오른쪽 양복)과 필 머피 주지사(왼쪽 양복)가 유권자들과 만나고 있다.
ⓒ 최현정

"저기 제 아들과 며느리도 왔네요. 난 항상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성적을 받으라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인 난 매년 F, 낙제점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미국 총기협회(NRA)로부터 말이죠. 그래도 난 굴하지 않고 미 총기협회와 계속해서 싸울 겁니다."

유대인 혐오자의 기관총 난사로 11명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온 지난 일요일(10월 28일), 뉴저지주 민주당 상원의원 밥 메넨데즈가 젊은 청중 앞에서 목청을 돋웠다. 휴일 아침 그를 지지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그의 승리를 기원하며 선거 날짜를 헤아렸다. 오는 11월 6일, 미국 중간 선거를 아흐레 앞둔 일요일 저지시티의 풍경이다.

초박빙 지역, 절박한 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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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정치 9단 밥 메넨데즈는 여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언론은 그가 상원으로 있는 뉴저지주를 초 박빙 지역으로 꼽고 있다. 쿠바계 이민자의 아들로 20살에 지역 교육위원으로 선출된 후 시장과 주 의회 상하원을 거쳐  연방하원 그리고 현재의 연방 상원의원까지 오른 그는 '질긴' 정치인이다.

지난 회기 그는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현재 제약회사 CEO 출신의 공화당 경쟁자와 접전중이다. 지역TV는 몇 달 전부터 두 사람의 네가티브 광고로 도배되고 있다. 48:52로 나뉜 미 상원의 민주:공화당의 판세를 좌우할 중요 지역으로 뉴저지주가 초미의 관심 지역이 된 이유다.

그런 이유로 이날 같은 당의 현 뉴저지 필 머피 주지사도 매넨데즈의 지원 유세에 합류했다. 공화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였지만 '브리지 게이트' 등으로 한껏 비난 받던 크리스피 주지사의 뒤를 이어 지난 5월 새로 당선된 민주당 소속 주지사다. 청중들에게 머피 주지사는 지난 47년간 한번도 공화당 상원의원을 뽑지 않은 뉴저지주의 민주당 사랑을 거론하며 "다시 한번 메넨데즈!"를 외치고 다음 행사로 바쁘게 이동했다.
 
이 곳 뉴저지를 비롯해서 텍사스, 노스타코타, 아리조나 등이 지금 상원 의석을 놓고 접전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는 "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이겨도 내 책임은 아니다"라고 미리 엄포를 놓았다. 공화당이 현재의 구조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원과는 달리 하원은 민주당이 우세를 보이는 지역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한국계 앤디 김 후보가 현직 공화당 후보와 접전을 벌이고 있는 뉴저지 제3선거구.

최근 여론 조사에서 두 후보 똑같이 47.45% 를 기록, 부동표의 향배에 관심이 집중되는 지역이다. 무엇보다 앤디 김 후보는 한인, 소수계라는 약점을 무릅쓰고 소액기부금만 443만달러(우리 돈 약 50억원)을 모금 중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10월 16일 현재 민주당 소액 기부는 공화당에 비해 3배 많은 4600만달러(우리 돈 약 500억원)에 이른다고 했다.

우리 집에 도착한 감사 카드 
 
 테트 요호 의원이 보낸 땡큐카드
▲  테트 요호 의원이 보낸 땡큐카드
ⓒ 최현정

지난 목요일(25일) 저녁 우리 집 우편함에도 감사 카드가 배달됐다. 이 '땡큐 카드' 발신인은 플로리다 하원의원인 테드 S. 요호 의원. 이번 중간 선거에서 재신임을 묻고 있는 그에게 남편과 나는 각자 55달러, 45달러의 후원금을 냈다.

굳이 우리 지역구도 아닌 플로리다 의원에게 편지까지 써서 후원금을 보낸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현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 태평양 소위원회 위원장이고, 선거 후 미국 하원의 외교의 향방을 결정하는 외교위원장 확률이 가장 큰 인물이기 때문이다.

UN 총회 참석차 전 세계 정상들이 모였던 지난 9월, 미 영주권자와 시민권자 한인들은 '한반도 평화'라는 명제를 가지고 테드 의원을 만나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북정상회담 당시 4명의 동료 의원들과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그는 한반도 상황에 대한 꽤 폭넓은 이해를 갖고 있어 보였다.

비슷한 행사는 시카고에서도 열렸다. 연방 의회 코리아 코커스 공동의장인 피터 로스캠 의원을 위한 한인들의 펀드레이징. 공화당 내 가장 품위 있는 정치인으로 명성 높은 그에게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많은 한인들이 모여 그의 선거를 응원하고 지지를 다짐하는 행사였다.

뉴욕 롱 아일랜드 지역의 한인들도 지난 15일, 지역의 탐 스와지 하원 의원 후원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지역의 유지가 집을 제공하고 그를 초대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에는 시민참여센터 대표 등이 참여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지지하는 그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난 9월 23일 맨하튼 한국식당에서 열린 테드 요호 의원 후원 행사. 필자도 여기에 참석했다.
▲  지난 9월 23일 맨하튼 한국식당에서 열린 테드 요호 의원 후원 행사. 필자도 여기에 참석했다.
ⓒ 김동석

"부모님이 계시는 한국 땅이 평화로워야 미 시민권자인 저도 더 열심히 이 곳에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Stop the war in Korea Penisulla."
"미국서 태어난 딸 아이가 미국과 한국 모두를 자랑스럽게 하고 싶네요."
"내년엔 올해 아흔인 울 어머니를 노스코리아에 있는 고향집에 모시고 싶습니다."


한반도 정책의 한 축인 미 의회 의원들에게 보낸 체크의 내용은 간결하고 절절했다. 이민 100년을 맞는 미국땅에서 한 사람의 당당한 유권자로서 표하는 이런 정당한 의견들에 반대하는 의원은 찾기 힘들었다. 벌써부터 미 의회의 변화는 감지되기 시작된다.

달라지는 미 의회의 한반도 평화론


"트럼프정부의 완전한 비핵화 요구는 비현실적입니다.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할 수 있을 만큼의 핵은 인정해주고 대북제재를 해제해주는 딜이 이뤄져야 합니다."

작년 7월 트럼프의 탄핵을 발의했던 브래드 셔먼 의원은 하원 외교위원회 아태소위 민주당 간사로 이젠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민주당원으로서 트럼프 승리를 바란다는 게 우스운 얘기로 들리겠지만 북한 핵 이슈는 미국만이 아닌 전세계 현안입니다. 성공한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일 것입니다." 

지난 18일, LA 한인타운에서 열린 한인 후원행사장에서의 발언이다.

제럴드 코놀리, 디나 티투스 의원 등도 미주한인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북한과 협상에서 우선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트럼프 대통령과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에게 각각 발송 했다. 뉴욕주 하원의 탐 스와지 의원도 남북한 통일과 미북간 평화 협정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한인들에게 약속했다.
  
 테트 요호 의원 후원을 위해 모인 소액 체크들
▲  테트 요호 의원 후원을 위해 모인 소액 체크들
ⓒ 김동석

미국 외교와 관련한 역할이 막중한 뉴저지 상원 의원도 최근 입장이 좀 바뀌었다. 트럼프의 북한 정책 전체가 아니라 대통령이 의회와 함께 하지 않는 문제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가까운 인사는 선거 때라는 것 말고도 그의 지역구 뉴저지에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발언들이라고 분석한다. 지난 13일 있었던 한인 후원 행사에서 메넨데즈는 미 각지에서 날아온 100여개의 체크와 편지를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한반도의 평화, 미국과 북한간 관계 변화를 얼마나 열성적으로 원하는지 알게 됐다고. 앞으로 한인들의 요구에 맞게 노력하겠다고.

10월 30일 기준으로 미국 대선이 정확히 일주일이 남았다. 후보만큼이나 바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움직여온 한인들에게도 손에 땀을 쥐는 일주일일 것이다. 부디, 촛불로 민주 정부를 만들어낸 한국인의 의지와 열망이 미국에서도 멋지게 꽃피우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이 살고 있는 우리 한반도의 평화에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8년 10월 30일 화요일

홍사성주간의 님 조오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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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이 만난 사람들을 함께 만나보세요. 또 '인간은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란 인류정신사의 가장 큰 주제를 오해 테마로 한 인터뷰와 이에 대한 목사와 신부, 스님, 주역의 대가와 심리학자 등 10명이 모여 토론한 대담을 선보입니다.

홍사성주간의 님 조오현스님

조현 2018.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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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성--.JPG» 지난 5월 입적한 조오현 스님의 영정 앞에 향을 사른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서울 강남구 압구정 2길 60 엠지타워 3층 <불교평론>은 시인·소설가·불교계 인사들의 사랑방이다. 만해 한용운의 잡지를 복간해 15년간 펴내다 2015년 폐간한 시문학잡지 <유심>의 산실도 이곳이다. 두 잡지 모두 지난 5월 입적한 조오현 스님이 창간했다. 이곳에선 출판기념회 할 곳조차 마땅치않은 시인들이 <유심>의 폐간에도 아랑곳없이 여전히 출간북토크나 문학모임이 잇따라 열린다. 매달 한 번씩 대중들이 세상과 불교계의 이슈를 가지고 모이는 ‘열린논단’도 내년 3월 100회를 맞는다.
 내년이면 창간 20돌을 맞는 <불교평론>을 홀로 지키는 홍사성(68) 주간은 마치 살롱 마담처럼 지금도 시문학인들을 응대하는 게 주업이다. 지난 23일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도 그는 ‘이밥홍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황색인’을 쓴 소설가이자 펜클럽회장을 지낸 이상문 선생의 사무실이 인근에 있는데, 이곳을 찾는 시문학인들에게 주로 그가 점심을 사고, 홍 주간이 차를 산다고 시문학인들이 붙여준 게 ‘이밥홍차’다.

이밥홍차-.jpg» '이밥홍차' 모임 중인 문형렬 소설가와 홍사성 주간, 이상문 전펜클럽회장(왼쪽부터)

 영정사진 모시고 출퇴근 때마다 향
 그런 분주함 속에서도 홍 주간에게선 허허로움이 느껴진다. 조오현 스님이 입적한 뒤 홍 주간은 다비식 때 쓴 영정사진을 가져와 100일만 모셔놓고 치우리라 다짐했다. 차마고도 순례까지 가서 허전함을 달래고도 왔다. 그러나 100일이 지나고 200일이 다 되어가지만 영정은 치우지 못하고 출퇴근 때마다 향을 사른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란 만해의 ‘님의 침묵’이 바로 홍 주간의 마음인 듯하다.
 홍 주간은 승려 출신이다. 그는 “여법하게 사는 스님들에게 도리가 아니다”며 이를 애써 감췄지만 이를 빼고서 그와 조오현 스님의 관계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16살에 금강산 건봉사와 설악산 신흥사 주지였던 성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0여년 동안 출가자로 살았다. 그 시절 홍 주간이 <풀과별>이란 잡지에 ‘내원암’이란 시를 쓴 것을 보고 이미 등단한 시인이었던 조오현 스님이 서울 나들이 길에 일부러 찾아 ‘시를 잘 써보라’고 격려해 준 적이 있었다. 시를 매개로 한 최초의 만남이었다.
 그런데 몇 년 뒤인 1975년 조오현 스님이 홍 주간의 은사인 성준 스님에게 ’건당’을 했다. 동진출가 당시 은사가 대처승이었던 조오현 스님이 성준 스님을 은사로 삼아 조계종 승적을 받은 것이다. 이로써 조오현 스님이 홍 주간의 ‘사형’이 된 것이다. 성준 스님이 1978년 열반한 뒤 49재 때 열린 문도회의에서 홍 주간은 스승을 잇는 신흥사 주지로 조오현 스님이 추천됐다. 홍주간도 뒤늦은 나이로 들어온 조오현 스님은 문도 내에서 기반이 없었지만 최연장자인데다 시를 쓰는 분이 신흥사를 이끌면 멋진 일이 생길 것만같아 행복했다. 그런데 홍 주간은 정작 자신은 환속을 선언했다. 그는 “엄격했던 은사 스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대중들의 눈높이만큼 중노릇을 해낼 자신이 없어서였다”고 했다.

열린논단1-.JPG» 서울 강남구 신사동 <불교평론> 사무실에서 매달 한번씩 사회와 불교계 이슈를 가지고 강연을 듣고 토론을 벌이는 열린논단 모습

 필화 때도 책임지면서 간섭은 안해
 환속한 홍 주간은 반도체회사에서 일하다 1982년 <불교신문> 기자로 ‘불교계’로 돌아왔다. 승복을 입고 조계종단의 학비 지원을 받는 ‘종비생’으로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한 만큼 불교계에 입은 은혜를 4년만 갚자는 생각이었는데, 결국 <불교방송> 설립에 참여하는 등 불교계에 다시 뼈를 묻고 말았다. 그는 불교계에서 일을 하면서 전형적인 일 중독자였다고 한다. 부하들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예전의 그 모습을 잘 아는 지인들이 요즘 그를 보면 “속한이 부처가 됐다”는 농담을 던진다고 한다. 그는 “다 큰스님의 큰 품 덕”이라고 고백한다.
 그가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사실상 <불교티브이> 고위직에서 잘려 설악산에 내려갔을 때였다. 조오현 스님은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이라고 했다. 선어록에 나오는 이 말은 ‘오늘 죽어도 괜찮고, 내일까지 살면 더 좋고’라는 뜻이다. 조오현 스님은 “그대로 다녔으면 술 취해 도로를 건너다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 아니냐”고 했다. 홍 주간이 훗날 낸 첫 시집 <내년에 사는 법>도 이 ‘선어’를 딴 것이다.
 홍 주간은 1999년 불교평론지가 필요하다며 조오현 스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차례의 청에 조오현 스님은 “꼭 필요하다면 절을 팔아서라도 해야지”라며 지원했다. 조오현 스님은 경제적 지원을 하면서도 편집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불교평론>의 비판적 글이 ‘필화’로 번졌을 때도 조오현 스님은 책임은 자신이 졌지만 일체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 <유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불교 얘기를 따로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가 <유심>에서 뛰놀게 했다. 스님들이 “불교 포교도 아닌 데다 무슨 돈을 그렇게 쓰느냐”고 군소리를 하면 “불교계가 세상에 입은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 수 있겠느냐. 이렇게 갚는 것이다”고 했다. 홍 주간은 “큰스님의 그릇은 범인들이 헤아리기 어려웠다”며 일화를 전했다.

유랑승1-.JPG» 조오현 스님이 조실로 있던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의 선방 결제와 해제 때가 되면 찾아와 객비를 받아가던 한 유랑승이 조오현 스님의 다비식장에서 조오현 스님의 무애자재한 삶을 표현하는 무애춤을 추고 있다. 유랑승2-.JPG

홍주간품-.JPG» 다비장에서 무애춤을 추던 유랑승을 꼭 껴안아주며 눈시울을 붉히는 홍사성 주간

 너희는 저들보다 뭐가 잘났노
 “설악산에서 선방 결제나 해제 때면 유랑승들이 몰려들었다. 종단에선 승려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객비를 못 주게 했다. 그러나 큰스님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이를 제지하는 문도에겐 ‘너희는 저들보다 뭐가 잘났노. 저 사람들은 객비 몇 푼 얻으면 그만이지만 너희들은 그 돈 아껴 어디다 쓰노?’라고 오히려 호통을 쳤다."
 또 한번은 사무실 보조원을 채용했는데 엉뚱한 실수 투성이어서 홍 주간이 그만두게 하려 했을 때였다. 조오현 스님은 “너처럼 잘난 놈은 어디 가서든 먹고 사는데, 저 녀석을 여기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겠느냐”고 했다. 홍 주간이 “도저히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하자 “청소라도 시켜라”며 그 청년의 월급은 따로 챙겨주는 것이었다.
 ‘설악산 스님’이란 시에서 ‘속은 진작 다 죽고 껍데기만 겨우 살아 있는, 한 만년쯤 된 고목나무’로 조오현 스님을 표현한 홍 주간이 마침내 눈시울을 적셨다. “늘 외롭게 홀로 지내던 큰스님이 가끔 전화를 했다. 벗들과 술을 마시던 중이어서 ‘여기 지방이다’고 둘러대곤 했는데, 큰스님은  다 알면서도 늘 ‘그러냐’고 했다. 이제 누구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