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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9일 화요일

남북한에 전하는 '통일 선배'의 조언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④] 슈타지 역사기록소의 리히터 씨


독재 정권은 필연적으로 경찰국가 체제를 완성한다. 공권력이 시민을 위협함으로써 독재 체제는 민주주의의 적이 된다. 민주화 전 한국이 그랬다. 현재 북한도 그렇다. 과거 동독이 그랬다. 

슈타지(STASI, 국가안전부)가 동독 일당 독재 체제를 떠받쳤다. '당의 방패와 검'이라는 구호로 1950년 2월 출범한 방첩기관 슈타지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직후인 1989년 12월 14일 해체되기 전까지 동독 인민 1450여만 명을 철저히 감시했다. 1950년 2700여 명이었던 슈타지 공식 요원은 1989년 8만8897명까지 늘어났다.  

슈타지 요원들은 민간인 비공식 협력자(IM, 민간인 비밀정보원)를 활용해 극단적인 시민 감시 활동을 벌였다. 1989년 당시 IM은 무려 18만여 명에 달했다. 그 중에는 동독 포환던지기 대표선수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우도 바이어(Udo Beyer, IM 코드명 캡틴)도 있다. 펑크 밴드의 베이시스트, 동구권 국가의 관광객 등으로 위장한 IM들이 동독 사회 곳곳에서 시민을 감시하고, 이른바 반체제 인사들을 슈타지 교도소(Stasi-Untersuchungshaftanstalt)로 보냈다. 동독 시절, 25만 명 이상의 시민이 슈타지에 의해 정치범으로 몰려 고통 받았다. 이들 중 수천 명은 시베리아 수용소로 추방됐다. 당시 슈타지 감시망은 인구 175명 중 한 명 꼴에 달할 정도였다. 슈타지의 모델이었던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보다 훨씬 강력한 감시 체제였다.  

재통일 후 독일 정부는 동독 시절 슈타지를 포함한 당국의 반인권 범죄 약 7만5000건을 조사했다. 조사를 통해 10만여 명의 혐의대상자가 추려졌고, 이들 중 1737명이 피고인으로 확정, 1021명이 재판을 받았다. 이 중 유죄판결을 받은 이는 756명이었는데, 이들 중 92%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소개할 칼 하인츠 리히터(Karl-Heinz Richter) 씨는 청소년 시절 슈타지 교도소에 끌려갔다. 서독으로 몰래 탈출하려했다는 이유였다. 이때부터 리히터 씨의 평생에 걸친 동독 독재 정부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는 슈타지와 갈등한 자기 삶을 기록한 책을 자비로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본업인 건축업을 하는 한편, 자신이 수감 생활을 했던 베를린 북부 판코우(Pankow) 인근 역사박물관에서 가이드로 활동한다. 독일 언론과도 자신의 경험을 인터뷰한 바 있다.  

▲ 베를린 슈타지의 옛 본부를 개조한 슈타지 박물관에 KGB(왼쪽)와 슈타지(오른쪽) 문양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슈타지는 동독 독재 체제를 떠받치는 기구였다. ⓒ특별취재팀
그의 삶을 정리하자면 자연스럽게 '북한 과거사 청산'이라는, 현재 해빙 분위기의 한반도에서는 거론하기 매우 힘든 주제가 떠오르게 된다. 작은 희망도 소중한 지금의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국가안전보위부(북한의 방첩기관) 문제를 다룰 수는 없다. 가장 바람직한 건 긴 시간을 두고 북한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여러 통일 전문가들이 남북 통일을 긴 호흡으로 보되, 디테일한 문제까지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며, 북한의 문제는 북한 스스로 풀도록 남한이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한국이 북한의 인권 문제를 주도적으로 들고 나온다면, 자칫 한국은 북한 위에 군림하려는 하는 모습으로 오인될 수 있다. 현재 통일 담론에서 한국은 강자고 북한은 약자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해 군림했다는 비판은 지금도 구 동독 지역에서 강하게 나오는 불만의 이유다.  

여러 이유로, 어쩌면 리히터 씨 인터뷰는 여럿에게 불편함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체제와 불화한 이의 목소리 역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특히 리히터 씨의 남북 관계에 관한 관점은 이역만리 외국인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체계적이고, 진지했다. 다음은 리히터 씨의 목소리로 재구성한 그의 이야기다. 

탈출 실패...슈타지에게 끌려가다 

난 1946년 7월 31일, 브란덴부르크 주 동쪽의 슈바르츠하이데(Schwarzheide)에서 태어났어요. 베를린에서 120㎞가량 떨어진 곳이지. 어릴 적부터 난 동독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독재 시스템이 일상에 영향을 미쳤으니까. 이웃끼리, 친구끼리 서로를 평가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이웃 중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그 사람이 서쪽으로 도망친 건지, 감옥에 끌려간 건지 알 수가 있나.  

학교에 다닐 때 사회주의 체제를 찬양하고, 자본주의를 악마화하는 수업을 필수적으로 들어야 했어요. 난 그 따위 수업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래서 1963년, 10학년까지만 마치고 김나지움(Gymnasium, 독일의 중고등학교)을 그만뒀어요. 체제에 신물이 나서 친구 17명과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모색했죠. 탈출 방법은 간단해. 다리에서 서베를린행 기차로 뛰어내리는 거지. 탈출 시도가 흥미로웠는지, 요즘에도 가끔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와요. 첩보영화 같다 생각들 하나봐.  

부모님 생각 안 했느냐고? 물론 마음의 짐이 됐죠. 사회 분위기와 달리 우리 집 분위기는 좋았거든. 그래서 탈출계획을 짤 때 친구들과 이 문제를 많이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어쨌든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하잖아요. 탈출하기로 했지.  

재수가 없었어. 탈출에 나만 실패했어요. 기차에서 떨어져서 팔뼈과 갈비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죠. 이 상태로 슈타지에게 발각됐어요. 동베를린 북부 판코우(Pankow)의 교도소로 끌려갔어요. 6개월 간 수감됐죠. 슈타지가 도망가려던 건방진 젊은 놈을 치료할 필요 없다고 봤는지, 제대로 치료해주지도 않더군요. 그대로 죽을 운명이었죠. 

다행히, 서독으로 도망에 성공한 친구가 기자회견에서 내 얘길 했어요. 나중에야 알았는데, 서독 언론이 엄청나게 몰렸죠. 다른 나라 언론사도 취재 올 정도였어요. 이 기자회견 덕분이었는지, 시간이 좀 지나자 슈타지도 나에게 어느 정도 의료 지원을 해 줬어요. 그래도 수감 초반에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아서 출옥 후 18개월 간 병원 신세를 졌어요. 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이상하게 붙어버렸거든. 골절 부위를 다시 절개하고 새로 붙이는 수술을 했죠. 나이 드니 상처 부위가 쑤셔.  

출옥 후에는 엔지니어 직업 교육을 받았고 기계공으로 일했어요. 1968년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1970년에 결혼했죠. 그러다 친구 소개로 국영 정유회사 미놀(VEB Minol)의 주유소 직원으로 일했는데, 이 때 주유 가격을 조작해 뒷돈을 좀 벌었지. 나쁘다고? 그렇긴 한데, 당시 경제 형편이 다들 어려우니 이런 일이 흔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집단적, 도덕적 타락을 정부에 대한 불신이라는 핑계로 위안'한 거지(인용구는 리히터 씨가 직접 쓴 책의 내용). 대체로 한동안은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죠.  

▲ 칼 하인츠 리히터 씨. 젊은 시절 권투에 빠지기도 했다는 그는 고령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었다. ⓒ특별취재팀
동독과의 싸움 

하지만 난 여전히 체제가 싫었거든. 1974년부터 정부에 서독으로의 출국 허가 요청서를 계속 올렸어요. 나 이 체제 싫으니 서독으로 보내달라고. 그런데, 이번에는 슈타지가 내 아내를 잡아가버렸어요. 내가 주유소에서 부당하게 챙긴 이익을 부인의 혐의라며 잡아간 거예요. 다행히 부인은 6개월 간 수감 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이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어? 

결국 1975년 8월 13일, 난 아내, 딸과 함께 합법적으로 동독에서 '제명'되었고, 서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됐어요. 타이밍이 잘 맞았지. 나 같은 사람이 1975년에 서베를린으로 많이 추방됐어요. 아마 그때 무슨 협약이 있어서 가능했지 싶은데? (1975년 7월 30일부터 사흘간 열린 헬싱키 협정으로, 미국을 포함해 동서방 체제 35개국이 모여 주권존중·전쟁방지·인권보호를 핵심으로 체결한 협정이다. 동독도 이 협정에 서명했다.) 

부모님을 남겨두고 떠났느냐고? 그래, 맞아요. 당시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께는 함께 이주를 권유했지만 당신이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 겁난다며 거부하셨어요. 다행히 당시 어머니는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나고 계셔서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죠. 

서베를린에서는 화물 운전사 일을 구했어요. 이대로 원하는 곳에 정착하고 자유를 얻었으니 좋게 풀렸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서야 아내가 슈타지에게 감금됐을 때 진실을 뒤늦게 알았어요. 성고문을 당했죠. 이후로 아내는 평생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어요(인터뷰 당일에도 리히터 씨의 아내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내가 보기엔, 이미 블랙리스트에 오른 나를 슈타지가 길들이려고 그렇게 한 것 같아요(실제 베를린의 슈타지박물관에는 슈타지가 블랙리스트 길들이기 수법으로 이 같은 방법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내의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어요? 우리 가족은 슈타지 때문에 망가졌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를 해야 했지. 장거리 화물차 뒤편에 운전수가 누워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죠? 그걸 개조해서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들을 서쪽으로 데려왔어요. 탈출하는 사람과 만날 지점을 정하면, 그곳을 지나다가 차를 잠시 정차해요. 그러면 풀숲에서 기다리고 있던 탈출자가 벼락같이 차에 뛰어들어서 숨어 들어가는 거죠. 동독 경찰이 검사 안 했느냐고? 나 이제 서독 사람이야. 국경 경찰이 서독 차량을 함부로 못 뒤졌죠.  

그렇게 21명을 동에서 서로 탈출시켰어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복수였죠. 당시 서독 화물차가 동독 내부로 진입은 불가능했지만, 동서독 교차 지역의 고속도로는 이용 가능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 슈타지 박물관은 슈타지에 협력한 주요 IM들의 실명과 얼굴을 모두 전시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슈타지의 IM이었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우도 바이어. ⓒ특별취재팀
외국 망명... 그리고 귀국 

그런데 일이 또 희한하게 진행되더군요. 이 일을 처음 나에게 제안한 동독 출신 동료가 있는데, 알고 보니 그 놈이 슈타지의 IM이었어. 이 탈출계획도 알고 보니 슈타지가 날 잡으려고 만든 함정이었더라고. 슈타지가 얼마나 무서운지, 요원 두 놈이 서독 경찰로 위장해 우리 집을 찾아오기도 했어요(슈타지는 동독 출신 서독인 약 700여 명을 동독으로 불법 납치했다.). 그 놈들 세계 곳곳에서 첩보 활동을 했어요. 결국, 서독 경찰이 서독을 떠나라고 권고하더군요. 나이지리아로 떠나게 됐어요. 1979년의 일이에요.  

가족이 나이지리아에 정착했지만, 아내와 딸이 지내기 힘들어했어요. 아내와 딸은 베를린과 나이지리아를 오가며 살았죠. 그런데 나이지리아도 안전하지 않았어요. 그곳에서도 슈타지의 납치 시도가 있었거든.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로 또 넘어갔죠.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예멘 등에서 일했어요. 그 나라들에서 위스키 밀수를 해서 돈 엄청 벌었지. 그쪽 나라에서 술 밀수하다 걸리면 사형이야. (웃음) 그러고 보니, 당신들 한국에서 왔죠? 나 중동에서 한국 건설노동자들과 함께 일한 적 있어요. 노예처럼 일하더군. 안타까웠어요. 

외국을 전전하면서도 난 꾸준히 서독 경찰과 연락했어요. 내가 슈타지의 납치 대상이다 보니, 서독 경찰이 정기적으로 연락했어요. 그러다 1989년이 왔어요. 운명의 해지. 

바깥에서도 뉴스로 고국 소식 꾸준히 봤죠. 동독이 심상치 않더라고. 서독 경찰에게 '이제 독일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이제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을 거라 하더군요. 그 말을 믿고 1989년에 고국행 비행기에 올랐어요. 운명처럼, 내가 서베를린 쪽 장벽 부근에 있을 때 장벽이 무너졌어요. 갑자기 사람들이 동쪽에서 마구 밀려들어왔죠.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에요.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두근해. 드디어 저 독재 체제가 무너졌다 싶었지.  

▲ 동독 정부는 사진에서 보듯 펑크 패션도 허용했지만, 그 메시지가 체제에 위협적이어선 안 되었다. 나쁜 메시지의 옷을 입어 슈타지 조사를 받은 당시 젊은이의 모습. 슈타지박물관에 전시. 슈타지는 서구 자본주의의 타락을 인민에게 선전했는데, 록 음악, 선정적 영화 등을 예로 들었다. ⓒ특별취재팀
난 동독과 불화했어요.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지. 나 말고도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문제는 체제 말기가 오기 전까진 용기 있는 사람들이 너무 적었다는 거예요. 더러운 체제에서 침묵한다면, 결국 그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침묵하는 이들이 소시민적인 평화, 나만의 평화를 추구한 걸 지나치게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침묵이 다른 이들에게 억압으로 돌아갔음을 알아야 해요. 

베를린 장벽이 왜 무너졌겠어요? 동독 말기에는 경제적 상황이 너무 안 좋았어요. 판이 바뀌었지. 그러다 보니 입 다물고 살던 사람들까지 목소리를 내게 된 거예요. 예전에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적으니 슈타지가 여러 심리 전략으로 체제를 통제할 수 있었지만, 그게 불가능해진 상황이 온 거죠.  

동독만 변해서 장벽이 무너진 게 아니에요.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면, 동독에서도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 당시 대학살이 일어났을 거예요. 결과적으로 장벽은 운이 좋았기에 무너졌어요.  

▲ 리히터 씨가 자신의 책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특별취재팀
남북한에 전하는 통일 선배의 조언 

아무래도 내가 독재 체제를 살아봐서 그런지, 남북한 소식에 관심이 많아요. 내가 당신들만큼 그 사회를 잘 알진 못하겠지만, 북한은 여러 독재 체제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독특한 사례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항하는 이들이 쉽게 나오지 않겠지. 아마 동독보다 훨씬 강하게 이데올로기 주입 교육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지난 4월의 남북 정상회담은 나도 아주 감동적으로 봤어요. 난 남북이 언젠가 꼭 통일국가를 만들기를 바라요. 헤어졌던 이들이 다시 하나가 된다는 건 아주 중요해요. 

내가 보기에 남북 통일에서 가장 힘든 건 남북한 경제적 격차가 아니에요. 경제적 격차가 있더라도 투자가 이어지면 경제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돼요. 정말 힘들고, 정말 중요한 건 북쪽의 민주화에요. 북한 사람들 사고방식이 남한 사람들과 아주 많이 다를 걸요? 

뭔가를 알아야 그리워할 수 있어요. 나는 베를린 장벽이 생기기 전을 알아서 자유가 뭔지 조금 알았어요. 그러니 자유를 그리워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북한 사람들이 과연 자유가 무엇인지 알까요?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자유를 그리워할 수 있어? 이런 상황에서 자유에 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가 (통일 후) 현실을 마주하면, 그 충격은 엄청나요. 남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 할 거야.  

북한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요. 통일 여건이 조성되면 남한에 기대하는 게 클 텐데, 그건 절대로 충족되지 않을 거예요. 이게 충족되지 않음을 알게 되면, 크게 상처받을 수 있어요. 주제넘긴 하지만, 동독 출신으로서 내 경험을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야 해요. 당이 도와주지 않아요. 동독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통일 후 매우 힘들었어요.  

남한의 젊은 세대도 내가 보기엔 통일의 변수가 될 것 같아요. 그들은 분단과 어떤 직접적 상관이 없잖아요? 그런데 통일 상황이 조성되면, 그들은 그 모든 변화가 자신들의 부담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향한 반발심이 강하게 일어날 수도 있지. 좋은 통일을 이루려면 그들을 잘 달래야 해요.  

통일 이후 대도시와 소도시의 격차, 빈부 격차로 인한 문제에도 주의해야 해요. 남한에서 대도시와 소도시 사람 간 삶의 질이 차이나지 않아요? 그런데 통일이 되면 북쪽 사람들이 많이 내려올 거 아니에요. 그러면 원래 가진 것 없던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을 더 미워하게 될 거예요.  

잘 본 것 같다고? 이런 일을 우리가 다 경험했어요. 재통일 후 독일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을'들의 싸움, 즉 약자가 다른 약자를 혐오하는 사회 현상이 일어났어요. 아마 남북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급박한 통일은 안 된다... 남북이 배워야 할 교훈 

맞아요. 내가 말한 '을들의 싸움'이란 게 극우화 현상이에요. 우리에겐 악몽과 같은 현상이지. 이 문제를 사람마다 다르게 볼 텐데, 난 특히 작센 주의 특수성에 주목해요. 

그 동네 사람들이 원래 좀 달라요. 작센 주 주도 드레스덴 근처에 프라이탈(Freital)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어요. 그 도시가 협곡에 위치했어요. 그래서 분단 시절에 서독 TV 전파가 안 닿았어요. 결국 그 사람들이 서독 미디어를 가장 적게 접했죠. 그런데 그 동네가 요즘 극우 문제로 가장 시끄러워요. 그 동네는 정말 '무 개념의 계곡'이라고. (웃음) (이 같은 지역 비하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인터뷰이의 생각을 되도록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한편, 독일 내에서 작센 주를 바라보는 일반적 시선을 전하고자 그대로 옮긴다. 상당수 독일인들이 작센 주를 경멸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기본적으로 동독 사람들이 외국인을 두려워해요.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 그래. 동독 시절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 쿠바나 에티오피아, 베트남 등에서 다양한 인종의 이주민이 오긴 했어요. 그런데 그 수가 굉장히 적었고, 대부분은 대도시에 살았어요. 그러니 그런 시골 동네 사람들은 외국인 자체를 접해보지 못했어요. 다르니 두려워하는 거야. 그 상황에서 통일 후 한꺼번에 변화가 닥치니, 그 분노를 생소한 외국인에게 표출하는 거지. 그게 극우가 잘 나가는 이유예요. 

그런 사람들, 어차피 동독 시절이었다 해도 자기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했을 거예요. 자본주의 체제로 세상이 바뀌니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더 잃어버린 것 같거든. 그러니 더 분노하는 거라고. 이제 그 동네 문제를 어떻게 손쓰기 어려운 지경이 돼 버렸어요. 안타까워.  

이런 문제 때문이라도 남북은 급박한 통일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당장 우리가 너무 급하게 통일했다가 통일 30년이 지나도록 이런 문제를 겪고 있잖아요. 일단 두 개의 정부 체제를 유지하고 천천히 통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한테서 배울 건 배우라고. 내가 너무 주제넘은 참견을 하나? (웃음) (통역: 추영롱) 

그간 재통일 당시 이미 장년이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전했다. 다음부터는 상대적으로 젊은 통일 세대의 이야기를 전한다. 20대부터 50대까지, 연령층은 다양하지만 이들은 동독 체제에서 경제적으로 자리잡기 이전에 재통일을 경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통일 독일에서 서독 사람과 동등한 조건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경험을 한 이들이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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