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7월 수출규제 뒤 갈등 증폭
WTO 분쟁해결 절차까지도 방해
강제동원 판결 타협안 도출 난항

양국 갈등 해법 도출 찾기 어려운
‘구조적 갈등’으로 이미 변화 조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재뿌릴라”
대일관계 방치 위험 지적 이어져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지난 29일(현지시각)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기구(DSB)는 일본이 지난해 7월 취한 수출규제 조처에 대해 분쟁해결절차를 재개하기 위한 첫 회의를 열었다. 한국의 재개 요청에 따라 열린 이 회의는 피소국 일본이 1심 재판부에 해당하는 패널 설치를 완강히 거부해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산회했다. 회원국 만장일치 동의가 이뤄지지 않는 한 패널 설치를 막을 수 없는데도 절차 진행을 방해하기 위해 일단 ‘몽니’를 부린 것이다. 그 밖에 한·일은 세계유산 ‘군함도’(하시마) 전시물의 ‘역사 왜곡’ 논란 등 여러 민감한 현안에서 다시 날 선 공방을 벌이고 있다. 지난 3월 초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며 잠시 이어졌던 휴전을 끝내고 다시 전방위적 백병전에 나서는 모양새다.

일본이 한국의 반도체 생산에 꼭 필요한 불화수소 등에 대한 수출규제 조처를 내놓으며, 한-일 관계를 격랑 속으로 몰아넣은 지 1일로 꼭 1년이 된다. 시간이 지났지만 양국 관계는 여전히 ‘사상 최악’의 긴 터널 속에 머물러 있다. 이 조처를 일본의 ‘경제침략’이라 받아들인 한국에선 전국민적인 불매운동이 벌어졌고,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결정하며 전선이 ‘경제’에서 ‘안보’까지 확대됐다. 이후 협정 연장을 선택한 한국의 후퇴로 파국을 피했지만, 관계 개선의 실마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최악의 지경에 이른 한-일 관계를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선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인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판결’에 대해 원만한 ‘타협안’을 도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서로가 상대에게 결정적 양보를 요구하며, “이대로 가다간 공멸”이라는 위협만 거듭하고 있어 타결 전망은 매우 어두운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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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협상이 교착상태에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올해 초 양국 정상 간 공방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1월14일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일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가자며 대화를 통한 해결 의지를 강조했다. 이에 대해 아베 신조 총리는 엿새 뒤 “국가와 국가 사이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극히 냉담한 반응을 내놨다. 한-일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음을 선언한 1965년 청구권협정을 지키라는 얘기였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 정부가 지난해 6월 첫 제안 이후 여러 강화된 제안을 내놨다. 그러나 일본이 완강히 거부하는 상황이라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청와대도 ‘원고들에게 지급되는 금원은 피고 기업들에서 나와야 한다’는 최소 기준만을 세워 두고 유연한 자세로 외교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일본의 강경한 태도가 바뀌지 않아 당혹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오쿠조노 히데키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는 “일본은 현대 일-한 관계의 기초가 되어 있는 ‘65년 체제’를 지켜야 한다고 절실하게 생각한다. 일본 기업의 자산을 현금화한 돈이 원고들에게 넘어가는 순간 청구권협정은 완전히 무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 판결’의 틀 안에서 해법을 도출하려는 한국과 ‘65년 체제’를 사수하려는 일본 사이에 타협점을 찾기 힘든 처절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일본과의 두번째 충돌을 원치 않지만, 피할 수도 없다는 입장이다. 정부·여당은 올 하반기 원고들이 현금화에 나설 경우 일본이 내놓을 수 있는 추가 보복조처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비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문 대통령은 29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1년 전 기습적인 일본의 조치에 흔들리지 않고 정면돌파하며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는 지난해 3월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조처로 “관세, 송금 정지, 비자 발급 정지” 등을 언급한 바 있다.
한-일 대립은 ‘역사 갈등’에서 신냉전이 시작된 동아시아의 미래상에 대한 양국의 화해하기 힘든 입장차를 반영하는 ‘구조적·사활적 갈등’으로 이행하고 있다. 일본은 정부가 2018년 이후 민족의 명운을 걸고 추진한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 핵협상의 결정적인 고비마다 훼방꾼 구실을 해왔고, 최근엔 한국의 ‘대북·대중관’을 문제 삼으며 ‘확대된 G7’에 한국을 참가시킨다는 미국의 안에 반대까지 했다. 대법 판결을 둘러싼 지난 2년의 갈등은 한때 같은 방향인 줄 알았던 한·일의 ‘전략적 이해’가 사실은 크게 달랐다는 점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베 정권에서 두 차례 방위상을 지냈던 오노데라 이쓰노리는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애쓰기보다 “정중히 무시하자”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과의 관계를 방치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이 한-미 동맹보다 상위에 있는 미-일 동맹의 힘을 업고 한국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시행하는 데 번번이 재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진구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정부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관련해 단 한번도 일본과 제대로 협의한 적이 없다고 본다. 어려운 시간일수록 지도자의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