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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31일 일요일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홍암 나철 100주기 ①> 도제사언문을 찾아서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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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01  08: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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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 100주기 연재를 시작하며
홍암 나철과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외에 우리 사회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민족종교지만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큰 인물과 중요한 종교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 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 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노골적 패권 재구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변의 시기에 홍암 나철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할 이유는 충분한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이 순례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필자 주

  
▲ 홍암 나철 100주기 첫 순례길 벌교 생가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딸에게 남긴 친필 유서.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열네해동안 네 얼굴을 못 보고 오늘 천고영별은 네 마암에 매친 한이 잇슬듯 하고 내눈에 항상 걸일듯 하나 이 길은 곳 영생하는 한울길이니 부대애회를 두지 말고 아비를 생각커든 대종교 큰 도를 정성으로 밋고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임종에 두어자 유탁 잇지 말라. 친부 자필”
스스로 ‘한오리 목숨을 끊음’에 앞서 딸에게 보내는 유서에는 아비로서의 ‘애회(哀懷)’가 묻어나지만 ‘한울길로 오라’는 큰 당부도 담겼다.
홍암 나철(弘巖 羅喆, 1863~1916),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6년 음력 8월 보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제천의식을 가진 뒤 시자들을 물리치고 ‘절식수도(絶食修道)’에 들어가 유서 여러 장을 남기고 스스로 숨을 멈췄다.
다섯 아들에게 준 유서에 “너의 무리 가운데 혹시 내 뜻을 이어서 몸을 종문에 바치는 자가 있으면 참으로 내 아들이다 누가 할 수 있을까!”라는 마지막 바람은 실제로 1942년 임오교변으로 중국 목단강 액하감옥에서 순교한 임오십현(壬午十賢)에 맏아들 정련, 둘째아들 정문이 포함됨으로써 실현됐다.
최후의 항거수단 자결, ‘스스로 숨을 멈추다’
  
▲ 1916년 음력 8월 초 닷새, 경성역을 출발해 사리원역에 도착한 홍암 나철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미 순명을 결심한 상태였으리라. [사진출처 - 대종교]
  
▲ 사리원역 앞 대기사진관에서 시자들과도 사신을 남겼다. 앞줄 왼쪽이 김두봉.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홍암 나철의 죽음을 되돌아보는 것은 단지 그의 비감한 가족사를 떠올리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대종교를 위하여, 한배님을 위하여, 천하를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해 순명(殉命)했기 때문이다.
“순명하신 자취를 살피면 (북쪽을 향하여) 곧바로 누워서 두 손을 드리웠으니 시체(尸體)를 거두지 아니하였으되 머리로부터 발까지 곧기가 먹줄을 놓은 것 같은지라. 어리석은 생각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얼이 되시지 않고는 이렇게 될 수가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일본헌병대 의사가 와서 살피고 저희끼리 말하기를 『그 목숨 끊음을 연구하건대 아무런 물건도 쓰지 않은 것을 증변(証辨)할 수가 있으니 참으로 선생님, 참으로 선생님이시다』라고 공경하며 탄식하더라 합니다.” (홍암신형조천기, 96쪽)
대종교(大倧敎)에 대한 일제의 극악한 탄압에 맞선 최후의 수단으로 자결(自決)을 선택한 것도 한 인간으로서 결행하기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폐기 절식(閉氣 切息)’이라는 자결 방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일이다.
폐기 절식은 쉽게 말해 숨을 쉬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말한다. 대종교의 삼법수련 중 호흡법에 해당하는 조식법(調息法)이 높은 경지에 이르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종교의 항일무장투쟁 책임자였던 백포 서일 역시 폐기 절식으로 자결했다는 것이 대종교의 입장이다.
우리 전통 수련법에 조예가 깊은 한 인사는 “숨을 참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도록 하는 근원적인 기관을 닫는 것”이라며 “우리 역사상 그 같은 경우는 적지 않다”고 말했다.
방문을 잠근 뒤에는 먹(墨)가는 소리밖에
  
▲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삼성각. 2003년 개천절, 남북해외 대표단은 평양 단군릉에서 천제를 지낸 뒤 삼성사를 찾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863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당시는 순천시 낙안면) 금곡부락에서 태어난 나철은 과거에 급제해 공직생활을 하다 스스로 물러나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4차례 일본을 방문해 외교활동을 벌이고, 을사5적 처단투쟁을 벌이다 실패한 뒤 1909년 단군교(2010년 ‘대종교’로 개칭)를 중광(다시 일으킴)한 뒤 8년만인 191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단통치의 도를 더해가던 일제는 191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을 공포해 대종교를 철저히 불법화하고 탄압했다. 일본 신도(神道)를 퍼트려 식민통치를 완성하려는 일제에게 우리민족 고유의 신교(神敎)와 단군을 내세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있는 대종교는 그야말로 양립불가능한 눈엣가시였던 것.
대종교의 도사교(교주)인 홍암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4일 김두봉, 엄주천 등 시자들을 대동하고 수백 교우들의 환송을 받으며 경성역을 출발해 사리원역에 도착했고, 사리원역전 대기(大崎)사진관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자결을 결심한 행동이었으리라.
구월산 삼성사에 도착한 홍암 일행은 쇠락한 삼성사를 수리했다. 단군이 승하한 곳으로 알려진 상섬사(三聖祠)는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사당이지만 돌보는 이가 없어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홍암은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에 천제를 지낸 뒤 시자들을 물리치고 수도에 들어갔다.
“말씀을 마친 종사는 사당옆 언덕에 올라서 북쪽과 남쪽을 향해 망배한 후 곧 수도실로 들어가시어“자(自)금일 상오3시위시 3일간 절식수도 절물개차문(切勿開此門)”의 21자를 써서 문중방에 붙이고 안으로 방문을 잠근 뒤에는 먹(墨)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익(翌) 16일 상오 5시경 겹친 피로에서 깨어난 시자들은 늦잠 잔 것을 걱정들 하면서 수도실에 나아가니 고요하고 아무 동정이 없거늘 의아하게 생각 하고 “선생님”을 네번이나 불렀으나 응답이 없는지라 불안한 예감에 급히 문 을 떼고 들어가 보니 종사께서 미소를 띠운 얼굴로 손, 발을 펴시고 반듯 하게 누우시어 조천하신지 이미 오랬고 책상에는 여러개의 봉한 글월과 봉하지 않은 유서 두장이 있었다...” (홍암신형조천기, 44~45쪽)
“날이 저물고 길이 궁(窮)한데 인간이 어데메뇨?”
  
▲ 홍암 나철이 순명 조천한 삼성사 삼성각 내부. 지금은 단군을 가운데 모셨고, 좌우에 환인, 환웅을 모셨다. 당시 홍암은 환인을 가운데 모셨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만큼 극적인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이도 드물겠지만, 그만큼 많은 유서를 남긴 이도 거의 없을 것이다.
대종교의 법통을 이을 무원 김종헌 종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비롯해 따로 봉하여 신규식에게 전달케 한 <순명삼조> <전수도통문> <밀유> <공고교도문> <유계장사칠조>가 있고, <이세가> <중광가> <일본총리 대외에게 준 글> <조선총독 시내에게 준 글>이 있다.
또한 개별적으로 <집안에 준 글> <소운 황병욱에게 준 글> <보본 엄주천에게 준 글> <유증: 무원종사에게 보낸 유서> 등이 있다.
홍암 나철은 <순명삼조(殉命三條>에서 “한 오리 목숨을 끊음은 대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한 오리 목숨을 끊음은 한배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한 오리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신도들에게 준 <공고교도문(恭告敎徒文)>에서는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비․바람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窮)한데 인간이 어데메뇨?”라고 한탄하고 “내가 간 뒤에 대종교의 일은 오직 여러분 형제자매의 힘씀으로써 이 세상에 행복될 것을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
<밀유(密諭)>에서는 “삼법(三法)을 힘써 행하여 욕심 물결의 가라앉음을 도모하며, 한 뜻을 확실히 세워 스스로 「깨닫는문」이 열림을 얻게 하라”고 지감, 조식, 감촉의 삼법수련을 통한 깨달음을 권유했다.
<유계장사칠조(遺誡葬事七條)>에는 “지금 조선에 이 몸을 묻을 곳이 없으니 반드시 화장(火葬)으로써 깨끗하게 할 것”과 비단과 상여, 부고, 상장 등을 금하는 청빈한 장례절차를 미리 못박아두었다.
홍암의 유서에는 일본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에게 보내는 글도 포함됐다. 일본 총리에게는 “슬프다. 대종은 온갖 교의 조종이어늘 도리어 무리한 업신여김을 받아서 우리 한님께 욕됨은 철의 허물이요... 철이 마땅히 한님-한배의 곁에 모시어 인간의 선악부를 살피고 천하 만대의 공론을 기다리리니 빌건대 각하는 짐작하라”고 경고했고, 조선총독에게는 “각하가 우리 대종인을 학대하려 하는가. 철의 머리는 가히 끊을지언정 三十여만 무리의 믿는 마음을 가히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30만 신도를 내세워 압박했다.
대종교는 일제의 집중적 탄압으로 2014년 음력 5월 총본사를 백두산 북쪽 기슭인 만주 화룡현 청파호로 옮기고 만주지역에 동도본사(책임자 서일), 북도본사(이상설), 서도본사(신규식.이동녕)를 설치하고, 한반도에 남도본사(강우)를 둬 세를 확대했고, 이는 이후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가 됐다.
본격화되는 대종교 무장투쟁의 전통
  
▲ 중국 화룡시 청파호 인근에 백두산을 향해 안장된 대종교 3종사 묘역. 홍암 나철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다. 가운데가 홍암 나철, 왼편이 북로군정서 총재 백포 서일, 오른편이 대종교 2대 도사교 무원 김교헌 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대종교 서도본사 책임자 예관 신규식은 추도만장을 통해 “조선조 5백년 간 둘도 없는 선비요. 대종교 4천년 이후 제일의 종사다”라고 기렸고, 육당 최남선은 나철의 순교를 육신제(肉身祭)로 표현하고 이로 인해 지리멸렬하던 민족전선이 비로서 통일된 정신적 지주 또 구심점을 갖게되었다고 평가했다.
나철의 구월산 순교야말로 우리 민족혁명사상 최대결정이었고(이규성), 근대 한국의 지식인 저항운동사의 시조인 나철의 순교로 인해 우리의 독립운동이 들판의 불처럼 번져나갔다(이현익)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도 결코 과장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나철의 자결을 통해 본격화되는 대종교 무장투쟁의 전통이, 그 집단의 오랜 전통이었다”며 “일제하 대종교의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대내외에 천명한 일대사건으로써, 항일운동 본산으로서의 역할과 더불어 총제적 저항의 사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로 홍암 나철의 자결 이후 대종교 무장투쟁 책임자 백포 서일(白圃 徐一, 1881.2.26~1921.8.28)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1920년 김좌진 장군의 지휘아래 청산리대첩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종교적으로도 홍암의 자결은 각별한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대종교는 홍암 나철이 조천한 음력 8월 대보름을 ‘가경절’(嘉慶節), 즉 ‘아름답고 경사스러운 날’로 부르고 3대 경절(개천절.어천절.가경절)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백포 서일은 당시 애도사를 통해 홍암의 순명을 신선들의 우화등선에 비유 우화(羽化)했다면서 ‘성통(性通)하여 하늘에 오른’ 조천(朝天)이라고 기렸다. 조천은 깨달은 이의 하늘과의 만남을 뜻한다. 슬픈 날이지만 기쁜 날로 기념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100년을 기다려온 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을 찾아서
  
▲ 순례의 출발지 벌교 생가. 한여름 생가는 한적하기만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이 순명삼조를 비롯한 유서를 남기고 조천한지 100년이 지났지만, 남에서도 북에서도 그의 역사적 위상에 걸맞는 추모 분위기는 찾을 수 없다.
미군정과 이승만,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남쪽에서 대종교는 발을 제대로 붙이지 못했고, 일제 후반기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 무장투쟁 세력이 주류를 이룬 북쪽에서 일제 전반기 민족주의 계열 무장투쟁 세력은 이미 역사적으로 ‘극복된’ 비주류에 불과했다.
심지어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독립유공자 등급에서도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 등 대종교 핵심지도자들은 6등급 중 3등급 서훈에 해당하는 ‘독립장’을 받았을 뿐이다.
대종교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중화 사관’(中華 史觀)을 넘어서 ‘대륙 사관’을 펼칠 수 있었던 단재 신채호는 100년 전 홍암 나철의 자결 소식을 베이징에서 전해듣고 ‘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을 지어 애통한 심경을 남겼지만 아직 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위당 정인보가 「잔억(殘憶)의 수편(數片)」이라는 글에서 단재 신채호의 도제사언문을 격찬한 대목이 남아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셈이다.
“그 뒤 상해서 고(故) 나철(羅喆) 선생을 도제(悼祭)한 사언문 일편을 보니까, 그야말로 웅기(雄奇)·연아(淵雅)의 치(致)를 다하여 우리네의 조예로는 도저히 그 온오(蘊奧)를 엿보기 어려울 만한 대가임을 놀랬다.”
도제사언문은 북한 인민대학습당에 보관된 단재 신채호 유고자료에 포함돼 있음이 김병민 전 연변대학 총장이 펴낸 『신채호 문학유고선집』(1994)에서 확인된 바 있다.
역사적 재조명을 기다리고 있는 홍암 나철의 100주기를 맞아 단재 신채호의 도제사언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기를 고대하며, 남북관계가 개선돼 올해 개천절에는 평양 단군릉 천제는 물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홍암 나철 100주기 남북해외 합동추도식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계속>

“미국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하라!”


[현장보고]NCCK 평화협정 대표단 워싱톤 일지(7/26~28)
[NCCUSA]
지난 18일부터 로스앤젤레스로부터 미 대륙을 횡단하여 7월26일 오후 5시가 다되어 워싱턴DC 남쪽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 Quality Inn에 도착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평화협정 캠페인 대표단 24명은 미국교회협의회(NCCUSA)가 주최하는 저녁 만찬에 참여함으로 3일간의 일정을 시작했다. 미국교회협의회가 사무실을 갖고 있는 이곳 미감리교 건물에는 7, 8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아래서 민주화운동을 돕기 위한 코리아 사무실도 상주했었다. 이 감리교 건물은 위치부터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는데, 바로 정문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길 하나 건너 국회의사당이 있고, 정면으로는 길 하나 건너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위치하고 있었다, 만찬에서 미국교회협의회 총무인 Jim Winkler 목사가 환영사를 하였고 미국감리교단 교회와 사회위원회 이사회의 General Secretary인 Susan목사께서 기도를 하였다. Winkler목사는 이 시간부터 끝날 때까지 3일 동안 모든 일정을 우리와 함께 하였다.

[The Senator's Office]
오늘은 휴전협정 체결 63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27일이다, 오늘 우리 대표단은 미국 정계의 여러 관계자들과 회담을 갖는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 날을 기해 모든 회담 일정을 잡았지만, 7월 마지막 주는 휴가가 시작하는 때이고 특히 올해는 미국의 공화당 전당대회와 민주당 전당대회가 연이어 있어 정치인들은 모두 자리에 없는 기간이었다. 안타까웠지만, 할 수 없이 주어진 여건 아래서 최선을 다해야 했다.
오늘의 첫 회담은 미국상원 국제관계위원회의 동아시아소위원회 위원장직을 갖고 있으며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는 공화당 상원위원 Gardner 사무실에서 한반도담당 보좌관인 Trent Bishop과 한 시간에 걸쳐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는 우리들의 얘기를 듣고 자신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점을 많이 깨달았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와 같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오는 사람보다는 북을 제재하기를 원하는 보수그룹들이 더 많이 온다는 점이다. 정치인들은 질보다는 양에 의존하는 약점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한국에서 모은 수만 명이 참여한 평화협정 서명 복사본과 이번 캠페인 과정에서 모은 수천 명의 서명용지를 전달하였다.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바로 이어 우리는 건너편 하원의원 건물로 가서 동아시아 법률 담당 보좌관과 함께 한 시간동안 회의를 진행했다. 그는 지금 북한 인권관련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우리는 북한의 인권문제를 거론함이 왜 적절하지 못한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서 평화협정의 필요성에 대해 여러 얘기를 했다.
첫째, 인권문제는 미국과 달리 북한에게 있어서는 생존문제 다음의 문제이다. 1951년부터 시작되어 70년 이상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경제봉쇄정책과 1년에 절반 이상 북한 침공을 위한 남한과 미국의 군사훈련이라는 압박상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북한 내에서의 인권문제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이다. 목숨이 먼저이고 그 후에 인권이 존재하지 목숨이 없는데 어떻게 인권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북한의 인권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먼저 경제봉쇄와 군사훈련을 중지해야 한다. 둘째, 북한(조선)보다 더 열악한 사우디아라비아(여성은 운전도 할 수 없다)의 인권문제는 거론하지 않으면서 북한만 문제를 삼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또 미국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나라마다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 쿠바와 이란과는 대화를 통한 외교관계를 진행하면서 유독 대화를 원하는 북한과는 인권문제와 핵을 빌미로 악의 축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분쟁을 통해 남한과 일본을 대(代)중국 견제용으로 삼기 위함이다. 남한과 일본은 미국의 군사무기 주요 수입 국가들이다. 남한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인권이 목적이 아닌 적대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변명이다.(이 얘기는 안했지만, 지금 미국은 흑백 인종차별로 인해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남의 나라 인권을 운운하는 것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흉보는 일과 같다.)
넷째, 북한의 내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탈북자들의 얘기에 의존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만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다섯째, 남북에는 천만이 넘는 이산가족이 있고 그리고 남한은 세계 제1의 자살률 국가로서 이 또한 분단으로 인한 인권침해인데 이런 점은 간과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대북압박정책은 70년 동안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북한을 더 강경하게 만들었다. 이상과 같은 여러 이유를 들어 우리는 미국이 북한 인권상황을 문제 삼는 적대정책을 버리고 대화와 상호공존을 향한 평화정책에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했다. 압박이 아닌 대화만이 북한의 인권을 증진하는 길임을 설명하였다. 이어 어떤 과정을 거쳐 법안이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이어 평화협정 서명용지를 전달하였다.

[Dr. John Merrill]
점심을 피자로 때운 다음 우리는 바로 택시를 타고 존 홉킨스대학 건물로 가서 John Merrill 박사와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제주 4.3민중항쟁을 주제로 석사학위, 그리고 한국전쟁의 기원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역사에 매우 밝은 사람이었으며 젊은 시절에는 한국어에도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려 30년 동안 미국무성에서 한반도문제를 다루어온 한국통이었다. 그는 미국이나 남한 정부가 얼마나 왜곡된 역사를 만들어내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특히 국정교과서에 대해 심히 우려하는 입장을 얘기했다. 그중 하나 그는 탈북자들이 미국에 와서 의회나 교회 등 여러 집회 장소에서 북한의 인권침해에 관련하여 여러 가지 증언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 증언으로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지금 그들이 행한 대부분의 증언들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어 그는 우리에게 군산에서 온 사람이 있느냐고 물은 다음 70년대 군산 미군기지에 핵탄두 300개가 있었다는 사실도 말하면서, 우리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얘기를 하나 하였다. 그건 몇 년 전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안내로 로스앤젤레스 근처에서 모텔을 운영하고 있는 해군제독을 지냈던 분을 직접 만나 한국전쟁 전 남한의 해안경비대가 마치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듯이 북한의 몽금포 해군기지를 기습 습격하여 이를 초토화시켰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역사에는 감추어진 진실이 많다고 말하였다. 어쩌면 이것이 주고받는 전쟁사에 있어서 한국전쟁의 하나의 기원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천안함 사건 또한 그보다 6개월 전에 있었던 남한 해군의 포격에 의해 북한군 경비정이 크게 부서지고 북한군 12명이 죽은 사건을 거론하면서 이것이 북한의 군사적 대응일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래 나는 그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이 얘기를 다시금 언급하면서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비유는 적절치 않다고 지적하면서 천안함 침몰은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북한의 소행이 될 수 없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그는 하나의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이지, 북한의 소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변했다. 그는 결론으로 이제 대북적대정책은 실패했고, 대화만이 지금의 막힌 난관을 타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국무성에서 30년을 일한 사람으로서는 너무 솔직하고 매우 특이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The State Department]
이어 바로 택시를 타고 오후 3시에는 국무성으로 가서 북한인권대사인 Amb. Robert King 그리고 갑작스러운 일로 불참하게 된 Shaun Casey, US Special Representative for Religion and Global Affairs를 대신하여 그의 보좌관과 함께 한 시간의 회담을 가졌다. 킹 대사와 NCCK와의 만남은 이번으로 세 번째이다. 3년 전 내가 NCCK 화해통일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을 때 김영주 총무, 노정선 교수, 그리고 당시 감리교 사회부 총무였던 Jim Winkler 목사와 함께 국무성에서 처음 만났었고 2년 전 정전협정 61주년을 맞아 NCCK 통일위원회 대표단과 NCCUSA 그리고 UMC가 주도했던 백악관 평화행진에 이어 두 번째 만남이 있었다. 이때 나는 백악관 한반도 안보담당관인 사일러를 만나고 있었기에 그를 만나지는 아니했다. 3년 전 첫 번째 만남에서 나는 한국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50년 1월 애치슨 국무장관의 선언 곧 한반도가 미국의 방어에서 제외되었다는 발언을 지적하자 그는 두 번이나 “It was a mistake”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킹 대사의 직임 자체가 북한의 인권상황을 문제시하고 이를 확대하는 일이었으니 처음부터 우리와는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인사말에 이어 바로 북한의 인권상황을 부정적으로 언급하였다. 특히 우리가 목사들이다 보니 종교의 자유가 없음을 주장함으로 우리를 곤경에 몰아넣고자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발언 직후 곧바로 이런 물음을 그에게 던졌다. '20년 전 브리태니커사전에서 세계종교를 설명하면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세계종교의 하나로 다루었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론 그는 전연 생각하지 못했던 이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노정선 교수께서 북한이 미국이나 남한과 같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에도 교회, 성당, 절이 있고, 우리 남한 기독교 대표단이 평양에 가면 언제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에서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과 김 주석 자신이 어렸을 때는 교회를 다녔고, 그리고 칠골교회는 주석의 어머님의 이름(강반석)이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를 기념하는 이름임을 상기시켰다.
이어 서보혁 교수가 인권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이 있음을 언급하면서 미국의 북에 대한 인권문제 거론이 부당함을 학문적으로 역설하였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비판적 발언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킹 대사가 끝까지 북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면서 시간이 다 되었다고 하며 일어나려고 하자 전용호 목사께서 “잠깐만 한마디만 더 하고 싶다”며 그를 자리에 앉힌 뒤 이전 북한을 방문한 바 있는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의 발언 곧 “인권문제를 거론함으로 북한과의 대화를 막는 것보다 대화를 통해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 외교에 있어 더 중요하다”를 언급하자 그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이어 김영주 총무께서 백악관에 보내는 평화협정 서명카드와 부채를 선물로 전달하면서 다시 한 번 말했다. “이제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상호 존중의 정신에 따라 북한에 대한 적대적인 외교정책에서 대화를 통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고 이를 위한 첫 단계가 바로 북한(조선)과 미국의 평화협정이다.” 이전 두 번의 모임보다 오늘 킹 대사는 우리들의 계속되는 날카로운 질문과 반격으로 매우 곤혹스러운 시간을 가졌고, 그는 속히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표정이 역력했다.

[Peace Committee in United Methodist Church]
나는 국무성 입구를 걸어 나오면서 거기에 걸려 있는 세계 여러 나라들의 국기들과 함께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가 당당히 걸리는 그날을 기도하면서 나왔다.(우리는 북한을 국가가 아닌 하나의 적성단체로 규정하고 있지만, 사실 남한이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180여 개국이고 북한이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160여 개국으로 세계 외교적 측면에서 보면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침 9시부터 진행된 4개의 연속된 중요한 회담을 우리는 잘 마쳤다. 이후 우리는 미국감리교단의 평화위원회 고문인 정희수 감독과 위원장 장위현 목사께서 베푸는 저녁 식사를 가지면서 당일의 회담에 대한 회고를 다 같이 나누었다. 보스턴에서 미국감리교회를 목회하는 장 목사는 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아래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위원장으로서 남북화해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셨던 장기천 감독회장의 아들이기도 하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인 것 같다. 지금 미국감리교 내 평화위원회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전담할 사역자를 두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미국 전체 한인 목회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Consultation with Ecumenical Leaders]
셋째 날 28일 오전 9시 감리교빌딩에 다시 모인 우리는 미국교회협의회와 함께 일하는 평화일꾼들이 북한을 위해 일하는 저들의 사역 얘기를 들었다. 두 총무의 인사말이 있은 다음 우리 측에서는 노정선 교수께서 대표발언을 하였고, 이어 이 건물에 함께 사무실을 갖고 있는 미국장로교(PCUSA) 사회국에서 총무로 일하다 미국장로교 총회 교단본부 총무(the Stated Clerk)로 지난달에 선출된 넬슨 목사(그는 첫 번째 흑인이었고, 공교롭게도 당일 오후 그를 환송하는 파티가 있었다), 감리교를 대표하여 Levi Bautisa(co-chair of East Asia Forum)와 정희수 감독, American Friends Service(퀘이커)의 Dan Jasper, Episcopal Church의 Lacy Broemel, Pax Christi International(가톨릭)의 Judy Coode, Mennonite Central Committee의 Charissa Zehr 그리고 Maryknoll Office for Global Concerns(가톨릭)의 Gerry Lee 등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자신이 속한 기관들이 어떤 일들을 하여왔는지를 발표하였다.
흥미로웠던 발표는 American Friends의 Dan이 직접 저작한 <Engaging North Korea>란 제목의 책자였다. 이전 쿠바나 베트남, 라오스 등등의 적대 국가들과의 정상외교 전 미국의회의 지도력과 재정 도움으로 민간인들의 만남과 문화 교류가 먼저 있었던 사례들을 쭉 나열하고 이를 책자로 만들었다. 그리곤 북한에 대해서도 이에 상응하는 조치가 선행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는데, 현재는 많은 의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매우 고무적인 이야기였으며 그런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했다. 물론 미국보다 남한이 먼저 북한과의 민간교류에 앞장 서야 할 것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Presbyterian Church(USA)]
쉬는 시간 나는 넬슨 목사에게 가서 나를 소개했다. 왜냐하면 내가 한때 몸담았던 미국장로교단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총회의 총무로 부임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이곳 워싱턴에서 사회국 총무로 6년간을 일하였을 뿐더러 흑인이라는 점에 상당히 호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에게 나는 이곳 수도노회 회원 출신으로 16년간 이곳에서 한인교회를 섬겼고, 노회장을 역임했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이 수도노회에 참석을 해도 한국인들이 별로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간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난 6월 중순 포틀란드에서 진행된 총회에서 결의한 한반도 평화협정안에 따라 평화협정 서명운동을 막 시작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창피스럽지만, 나는 다음의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그가 앞으로 겪을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넬슨목사님, 당신이 그간 여기서 사회국 총무로 있으면서 세계 정의와 평화운동 특히 한반도 문제에 대해 활동한 일에 대해 깊이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당신이 앞으로 총무로 부임하면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지금 한반도 평화협정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건 부끄럽게도 교단 내의 한국교회이다.” 그러자 그는 깜짝 놀란다.

[Korean Church Leaders in Presbyterian Church(USA)]
사실 나는 작년 6월과 7월 미국의 United Church Christ(오바마가 소속된 매우 진보적인 교단)와 Disciple 교단 총회에 기장 대표로 초청을 받아 이 두 교단이 한반도평화 헌의안을 통과시키는 일에 참여하여 세미나도 인도하고 총회에서 발언도 하였다. 물론 이 한반도평화통일방안은 두 교단에서 절대 다수로 통과가 되었고, 이번 대륙횡단 시에도 적극 환영을 해주었다. 그때 나는 올해 미국장로교 총회에서도 이러한 한반도평화통일 안건이 상정되어 통과되는 것을 희망하여 내가 소속했던 수도노회에 접촉을 했고, 몇 달간의 자체 논의를 거친 후에 수도노회에서 이를 담당하겠다고 하면서 한인교회들의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한인총무 목사님을 통해 한인교회연합회(약 350개 교회) 총무 임원단에 이를 안건으로 내놓았는데,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때 나는 실망을 넘어 분노가 일어났다. 아니 미국교회가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일하겠다는데, 당사자인 한국교회가 이를 거부한다니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30년 전에도 이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90년대 남북관계가 한참 어려울 때에도 북의 종교정치지도자들을 초청한 것은 미국장로교회였다. 이를 주도하셨던 이승만 목사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신 일이 너무나 아쉬웠다. 남한 정부가 그렇듯이 미국 내의 한인장로교회 또한 오히려 뒷걸음을 친 것이었다. 이에 비해 미국감리교단의 한인목사님들 가운데 한반도 평화문제를 위해 일하는 목사들이 많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사실 조선일보는 이번 우리가 미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평화협정 서명운동을 친북이라고 비난했다. 평화협정을 반대하면 전쟁을 하자는 입장인데, 그들은 전쟁을 하나의 소꿉장난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지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살아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굳이 북한이 핵무기를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쪽에 있는 24개의 핵 원전 가운데 서너 개만 폭탄을 맞아 터진다면 한반도 전체는 100년 동안 사람이 살수 없는 황무지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난 평화협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전쟁이 일어나면 외국으로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평화협정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목숨이 두개이든가. 하여간 백보 양보하여 친정부 종미의 조선일보는 그렇게 우리를 비난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나 어떻게 목사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만드는 일꾼이 되라고 하셨고, 그럴 때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평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친북/친남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이 어떻게 평화를 반대하는 발언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분들은 무엇을 갖고 설교하는지 알 수가 없고, 누구를 향해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겉으로는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말하고 실제는 자기를 믿고 세상을 따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Press Conference]
휴식이 끝나고 나서 며칠 전에 공고한대로 SNS를 통한 기자회견이 약 40분 동안 진행되었다. 대상은 미국 전체의 2천개 언론기관의 기자들이었다. 물론 당일 참여한 기자들은 약 90명이었고, 다수는 종교계 기자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자회견을 핸드폰을 통해 SNS로 하는 것을 보면서 시대와 나라의 격차를 느꼈다. 사실 남한에서 기자회견은 한 자리에 모여서 한다. 기자 대부분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니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미국은 땅덩어리가 너무 넓다. 그리고 지금 모든 언론은 민주당 전당대회에 가있다. 그러니 이것이 가장 좋은 방식이었다. 화면을 통해 먼저 미국교회협의회 총무 Jim Winkler 목사의 인사말 이어 노정선 교수께서 위원장으로서 이번 평화협정문의 취지 발언을 하였고, 이어 Nelson 목사, Levi Bautista, 이문숙 목사, 서보혁 교수가 각각 발언을 하였다.
분단 71년 정전협정 63주년을 맞이하며 남북이 겪는 수많은 아픔과 고통을 얘기하고 이를 해결하는 길은 평화협정임을 모두가 동의하고 이를 위한 길에 모두가 나서줄 것을 요청하였다.
발표가 끝나자 트위터를 통해 질문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미국교회 교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는데, 이에 대한 답변으로
- 교단의 관련 책임자나 미국교회협의회의 도움을 통한 교육이 필요하다
-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미 상원/하원 지역 의원들에게 전화하기
- 평화협정 백악관 청원 서명하기(카드 혹은 SNS)
두 번째 질문은 이전에도 많은 남북 평화운동들이 있어왔는데, 이번 평화운동의 특징은 무엇인가?
- 남쪽 교회협의회가 공식적으로 선언한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구체적인 평화협정안을 제시하는 것이며, 북의 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은 인식하고 있다. 이는 이미 세계교회협의회가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백악관 청원을 위한 10만인 직접 서명을 받고 있는 일이다. 이는 전쟁을 막는 구체적인 행동으로서 사드(THAAD)가 도입이 되면 평화협정이나 핵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큰 어려움이 예상됨을 역설하며 이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White House]
화상 기자회견을 마친 후 우리는 샌드위치를 먹고 일부는 백악관 안으로 들어가서 Allison M. Hooker, Director for Korea, National Security Counsil과 Melissa Rogers, Executive Director of the White House Office of Faith-based and Neighborhood Partnerships와 회담을 갖고 나머지 일행은 백악관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였다. 나는 3년 전 당시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으로, 이후 6자회담 차석대사로 있다가 지금은 미8군으로 자리를 옮긴 사일러(그는 한국말에 매우 능통한 미정보국에서 30년을 일한 대북정보관이다)와 2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기에 오늘은 백악관 시위를 책임지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약 20분에 걸쳐 기도로 시작하여 “We Are Peacemakers!”, “End the Korea War!”, “Korea Peace Treaty Now”, “No THAAD in Korea” 등등의 피켓과 구호를 외치고 ‘We shall overcome’ 노래를 반복한 다음, 약간의 행진을 하고 다시 백악관을 향해 서서 내가 “Mr. Obama, In the Name of God, I Demand Your Repentance!”라고 외친 다음 20초간 모두가 함성을 질렀다. 이런 과정에서 백악관 관광을 왔던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사진도 찍고 또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평화협정 안내용지도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조금 그늘에 앉아 쉬고 있자 백악관 안에 들어갔던 팀이 나왔다. 우리는 다시 모여 구호를 외치고 모두가 빙 둘러서서 손에 손을 잡고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다같이 부른 다음 Jim Winkler 총무목사의 기도로 모든 공식적인 순서를 마쳤다.
Winkler 목사는 백악관 앞에서 이렇게 구호를 외치는 피켓 시위는 처음이라고 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였다고 말한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한국 교회를 위해 3일을 꼬박 함께한 그의 헌신과 정성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백악관 회담에 참여했던 분들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회담은 잘 진행이 되었지만, 미국은 자신들의 수천 개의 핵은 정당시 여기면서도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하는 적대시 정책을 바꿀 의도가 별로 없어보였다.
[Holocaust Museum]
일부는 펜실베이니아의 퀘이커본부가 있는 펜들힐로 가고 나머지는 유대인 학살 기념관으로 갔다, 나는 여기 방문이 세 번째이고 이스라엘과 독일, 폴란드의 여러 홀로코스트 수용소들을 다녀본 관계로 많이 아는 얘기이자 익숙한 장면들이지만,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을 들어갈 때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악랄한 동물인지 그리고 이념에 한번 사로잡히면 인간은 쉽게 악마로 변하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우리도 물론 제주 4.3항쟁을 비롯해 이념갈등으로 인한 수많은 동족 학살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단지 군인들만이 동참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여기에 동조했다. 사실 히틀러는 유대인만 학살한 것이 아니다. 지체장애인들과 정신장애인들, 집시인들, 동성애자들 모두를 학살했다. 어떻게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는 사람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성 자체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시 이 일에 앞장선 게시타포들은 모두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었다. 도대체 배움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학위가 무슨 소용이 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1년에 여기에 드나드는 관람객이 180만이라고 한다. 지금 이 근처에는 스미스소니언이라는 유명한 박물관들이 줄지어 있고 조금 있으면 개장할 Afro-american 박물관이 있는데 이 모든 박물관들의 관람이 무료이다. 우리도 이런 인간의 의식을 새롭게 깨우칠 박물관들을 만들고 이를 무료화해야 한다. 우리는 무료는 없다. 그리고 있다는 것도 평화박물관이 아닌 전쟁박물관이다. 거기에는 거짓의 천안함을 설치해 놓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알고 있다. 히틀러의 동조자들은 자신들이 승리할 것으로, 그리고 모든 거짓은 감춰질 줄 믿었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진실을 드러내고 만다.

[성찰과 감사]
3일간의 워싱턴 일정을 마치면서 우리 모두는 왜 우리의 통일문제를 남과 북 우리끼리 해결하지 못하고 이곳 미국까지 와서 이들에게 호소를 해야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약소민족으로서 깊은 서러움을 느꼈다. 물론 미국이 남북분단에 직접 책임이 있고, 북을 계속 적대하는 정책을 펴고 있기에 미국을 설득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왜 우리 남한은 전시작전권도 없는 허수아비 나라가 되었는가에 대해 깊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실제적인 도움도 되지 못할뿐더러 동아시아의 평화를 더 어렵게 만들어가는 사드(THAAD)를 도입하는 미국의 하수인 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렇게 될 경우 남북간의 평화협정은 더욱 어려워지고 이제는 중국과 미국 간에 분쟁이 일어날 경우 한반도는 중국의 첫 번째 공격 목표가 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재 우리는 OECD 국가 중 가장 긴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전체 노동자의 반수가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생계조차도 제대로 꾸려가지 못하는 낮은 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결국 재주는 곰이 넘고 돈 주머니는 주인이 챙긴다고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지만, 남한은 최고의 군사비 지출을 하고 있고 이 가운데 상당부분이 미국산 무기 구입과 미군 주둔비용으로 소요되고 있으며 주식과 채권을 통한 기업 이익의 상당 부분 또한 미국의 소수 자본가들에게 넘어가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결국 통일이 되지 못하면 미국 예속은 단지 정치와 군사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 부분에까지도 임하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 남한은 진정한 독립국가가 될 수 있으며 언제나 우리 남북한이 통일된 국가로 세계 평화를 주도하는 그런 나라가 될 수 있을까? 내 생전에 그런 날이 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끝으로 나는 급한 사정으로 대륙횡단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여기에 참가한 이들은 하루도 쉼 없이 매일 밤 10시가 다되어 호텔에 도착하여 잠만 자고 다시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빡빡한 일정을 감당해야만 했다. 이들 가운데는 캐나다연합교단의 선교동역자인 캐더린 목사는 나이도 많거니와 몸도 그리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일정을 소화했으며 미국장로교 선교동역자인 커트 목사는 운전은 물론 다른 잡일까지도 기쁘게 감당해 주었다. 깊은 감사를 드린다.
조헌정 목사  news@minplus.or.kr

‘단식농성’ 이석태 “세월호 특조위, 반민특위처럼 좌절되지 않는다”

[인터뷰] ‘단식농성’ 이석태 “세월호 특조위, 반민특위처럼 좌절되지 않는다”

“지금이 특조위 살릴 골든타임, 국민과 국회가 힘을 달라”

남소연 기자 nsy@vop.co.kr
발행 2016-07-31 19:33:32
수정 2016-07-31 19:3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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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3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조사 활동 보장을 위한 단식 농성을 5일째 진행하고 있다.
이석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3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조사 활동 보장을 위한 단식 농성을 5일째 진행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박근혜 정부의 노골적인 탄압 속에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침몰하고 있다. 이에 맞서 장관급 인사인 이석태 특조위 위원장은 특조위 조사활동 보장을 요구하며 지난 27일부터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연일 30도가 웃도는 더위와 장대비 속에서도 이 위원장은 “특조위가 처한 현실이 더 엄중하다”며 꿋꿋이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이 위원장은 “지금이 특조위를 구할 골든타임”이라며 국민들과 국회의 힘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민중의소리’는 31일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농성 5일차에 접어든 이 위원장을 만났다.
“지금이 침몰하고 있는 특조위 살릴 골든타임”
이석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장이 3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석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장이 3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이 위원장은 단식농성에 나선 배경에 대해 “유가족과 국민의 염원에 의해 만들어진 특조위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조사활동을 못 하게 된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했다”며 “국민들의 관심에 힘입어 특조위가 처한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박근혜 정부는 특조위의 출범과 진상규명 활동을 갖가지 수단으로 방해해 왔다.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뒤 반년이 넘도록 특조위는 제대로 출범도 못 했다. 특조위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특조위를 파견 공무원으로 장악하려는 정부의 시행령 탓에 이 위원장은 지난해에도 광화문 광장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애초 계획에서 반토막이 난 예산은 지난해 8월에 들어서야 지급됐다.
특조위에 조사관이 채용되고 예산을 배정받은 2015년 8월을 활동 기산점으로 본다면 현재 특조위의 조사활동은 채 1년도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정부는 특조위에 예산도 인력도 배정되지 않은 2015년 1월1일(특별법 시행일)을 특조위 활동의 개시일이라 주장하며 1년 6개월의 조사기간이 끝났다고 강변하고 있다. 지난 1일부터 특조위 조사활동 예산 지급은 전면 중단됐으며 특조위 조사관들의 신분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위원장은 현재 특조위가 처한 상황에 대해 “점점 침몰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는 “정부는 지난 6월30일자로 특조위 조사활동을 강제로 종료했다. 7월1일부터 예산 배정이 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특조위는 사무실 내 복합기 카트리지를 교체할 예산도 없어 자료 복사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조사관들 사이에서는 갹출해서 사무품을 구매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러한 특조위의 위기는 과거 이승만 정권의 탄압에 의해 '친일파 청산'이라는 목표가 좌절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비교되기도 한다. 이 위원장은 “많은 국민들이 특조위를 지지하고 지원해주고 있기 때문에 제2의 반민특위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저희가 하는 것이 올바르고,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지금 단계에서 반민특위처럼 좌절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위원장은 지금이 특조위의 골든타임이라며 세월호의 진상규명이 밝혀지기 위해 국회와 국민들의 관심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는 “특조위를 구성하고 있는 조사관들이 벌써 5명이나 떠났다. 앞으로도 그만큼 떠날 것”이라며 “지금이야말로 특조위를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이라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국민들이 바라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달라”며 “특조위는 가라앉고 있다. 국회에서도 특조위 활동을 보장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해 달라”고 호소했다.
다음은 이 위원장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조사 활동 보장을 위해 단식 농성을 진행 중인 이석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조사 활동 보장을 위해 단식 농성을 진행 중인 이석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김철수 기자
질문 어떤 절박함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하게 됐나.
답변  박근혜 정부에서는 특별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지난 6월30일자로 특조위의 조사활동을 강제 종료시켰다. 7월1일부터는 예산 배정도 전혀 안 된 상황이다. 정부에서는 종합보고서와 백서를 작성하라고 하지만 한창 조사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같은 주문에 응할 수 없다.
정부의 방침대로라면 오는 9월30일 종합보고서 작성 기간이 끝난 후 특조위 해산조치에 들어가게 된다. 국회에서도 특별법 개정안 발의 등 여러 노력을 하고 있으나 불투명한 게 사실이다. 여야 합의를 통한 조사활동 보장 역시 불분명한 상황이다.
특조위가 현재 조사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했다. 국민들의 관심에 힘입어 특조위가 처한 난관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단식농성을 시작하게 됐다.
질문  현재 특조위가 처해있는 상황은 어떠한가.
답변  조사활동을 위한 예산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상황이다. 가령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가야 한다면 특조위 조사관들이 사비로 충당해야 한다. 제대로 된 조사활동을 진행할 수 없다. 조사관들의 자발적인 의지에도 한계가 있다. 현재까지 5명의 조사관들이 특조위를 떠났다. 앞으로도 그만큼 떠날 수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특조위는 현재 가라앉고 있는 상황이다. 세월호는 인양이 되고 있는데 특조위는 점점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 특조위를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질문  특조위의 현재 상황이 정권의 철저한 무관심과 방해 속에서 친일파 청산이라는 목표가 좌절됐던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와 유사한 상황인 것 같다. 이 때문에 특조위가 제2 반민특위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답변 특조위 역시 상당한 좌절을 겪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이 특조위를 지지하고 지원해주고 있기 때문에 제2의 반민특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저희가 하는 것이 올바르고,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지금 단계에서 반민특위처럼 좌절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순간에도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은 규명될 거라고 본다.
질문  특조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국회의 도움도 많이 필요해 보인다.
답변  현재 특별법 개정안이 4건 발의됐다. 그러나 발의만 된 상황이고 언제 상정이 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 여야 합의 역시 언제, 어떻게 마무리될지 예상할 수 없다. 특조위는 무한정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특조위는 가라앉고 있다. 국회에서도 특조위 활동을 보장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해 달라고 주문하고 싶다.
질문  무엇보다 국민들의 힘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
답변  많은 시민들이 밤 11시까지 계속 농성장에 찾아온다. 많은 분들이 찾아와 목이 다 아플 정도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바란다, 힘내시라, 응원하겠다는 격려의 말들을 해준다. 지금처럼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이를 통한 안전한 사회의 건설을 위해 특조위가 대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4.16 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와 4·16연대 관계자들이 2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석태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의 특조위 활동 보장을 위한 단식농성 결정을 지지하는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4.16 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와 4·16연대 관계자들이 2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석태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의 특조위 활동 보장을 위한 단식농성 결정을 지지하는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이석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조사활동 보장을 위한 세월호 특조위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이재명 성남시장이 지지방문을 하고 있다.
이석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조사활동 보장을 위한 세월호 특조위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이재명 성남시장이 지지방문을 하고 있다.ⓒ정병혁 기자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조사활동 보장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이석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29일 서울 광화문 광장 농성장을 방문한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를 맞아 인사말을 하고 있다.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조사활동 보장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이석태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29일 서울 광화문 광장 농성장을 방문한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를 맞아 인사말을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나는 이렇게 '10억 뇌물수수 검사'로 찍혔다"


16.07.31 18:13l최종 업데이트 16.07.31 18:13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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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그룹으로 부터 6억여원을 받은 의혹을 받고 있는 김광준 부장검사가 2012년 11월 특임검사팀의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검에 피의자신분으로 출두하고 있다.
ⓒ 조재현

지난 2012년 11월 10일 대검찰청은 '김수창 특임검사팀'을 꾸렸다. 다단계 사기범 조희팔씨의 최측근과 유진그룹 등으로부터 수억 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김광준 당시 서울고검 부장검사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랜저 검사'(2010년 11월)와 '벤츠 여검사'(2011년 12월)에 이은 검찰의 세 번째 특임검사팀이었다.

당시 김수창 특임검사팀의 구성을 두고 '대검 중앙수사부를 능가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원석(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 밀양지청장과 정순신(서울중앙지검 형사7부장) 남원지청장 등 두 명의 지청장을 포함해 총 13명의 검사로 팀을 꾸렸던 탓이다. 최근 진경준 검사장의 '126억 원 주식 대박' 의혹을 수사했던 '이금로 특임검사팀'에는 5명의 검사만 참여한 것에 비하면 김수창 특임검사팀은 '매머드급'이었던 셈이다. 

김수창 특임검사팀은 특임검사팀을 구성한 지 9일 만에 김광준 부장검사를 구속했다(11월 19일). 1심과 2심, 3심은 일관되게 김 부장검사의 뇌물수수 혐의를 인정해 그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그는 현재 의정부구치소에 수감돼 3년 8개월의 수형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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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준 전 부장검사가 최근 <오마이뉴스>에 보낸 편지.
ⓒ 오마이뉴스

"이원석 특수1부장, 특임검사팀 때 불법적인 압수수색"


하지만 김 전 부장검사는 다단계 사기범 조희팔씨의 최측근 강태용씨의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서 등을 근거로 조만간 재심을 청구할 예정이다. 강씨로부터 받은 2억 원은 '알선수재 뇌물'이 아니라 '여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린 돈'이었다는 것이다(관련기사 : "김광준 검사에게 준 2억, 여자문제 풀라고 꿔준 돈"). 

김 전 부장검사는 최근 <오마이뉴스>에 보낸 편지(7월 25일 작성)에서 "부적절한 여자관계에 책임지고 공직에서 물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금전으로 무마하려다가 공무원으로서는 과다한 금전 차용을 하게 되는 등 부적절한 처신을 한 점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다"라며 "그래서 징역 7년형이라는 살인자에 버금가는 중형을 선고받고도 운명이려니 체념하면서 거의 4년 가까이 구금생활을 묵묵히 감수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전 부장검사는 "저의 부적절한 처신에 비해서는 (징역 7년은) 너무 가혹한 처벌이었고 그로 인해 저는 모든 것을 잃었다"라며 "검사가 집으로 쳐들어와 말기암 판정을 받고 투명중인 저의 처를 조사해 그 충격으로 암이 악화되어 몇 달 간 치료받다가 병원에서 객사했다"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특히 김 전 부장검사는 "2012년 11월 특임검사 수사 당시 강태용에게 돈을 차용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검사의 추궁에 김수남 (현) 총장에게 그 사정을 다 말하고 사의를 표하였다고 하니 검사가 확인한 후 총장이 그러한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라고 말했다. 지난 2008년 당시 내연녀의 협박문제로 시달리던 김 전 부장검사는 김수남(현 검찰총장) 당시 서울중앙지검 3차장에게 사의를 표명했고, 이러한 상황은 명동성(현 법무법인 세종 대표 변호사)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에게도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부장검사는 "그때 (김수남) 총장이 제가 사의를 표한 사실만 밝혀주었더라도 강태용 부분은 기소되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부하 검사가 부적절한 행위로 사의를 표하면 사표를 받거나 상부에 보고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점을 밝히지 않으려고 그렇게 얘기한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불만을 내비쳤다. 

20여 년간 '특수부 검사'로 근무했던 김 전 부장검사는 편지에서 한때 친정이었던 검찰의 "불법, 부당한 수사와 기소"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김수창 특임검사팀에서 활동했던 이원석 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을 상대로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이 부장검사가 특임검사팀에서 활동할 당시 불법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원석 부장검사는 김수창 특임검사팀이 꾸려진 다음날(2012년 11월 11일) 오전 10시부터 김 전 부장검사가 사용하고 있던 서울고등검찰청 703호실을 압수수색했다. 그런데 검찰이 압수수색의 일시와 장소를 미리 통지하지도 않았고, 압수조서도 작성하지 않고, 압수목록을 교부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김 전 부장검사의 주장이다. 

형사소송법 제122조(영장집행과 참여권자에의 통지)와 제129조(압수목록 교부) 등을 어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형사소송법 제308조의 2(위법수집증거의 배제)에 따라 당시 서울고등검찰청 703호실 압수수색을 통해 수집한 증거는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김 전 부장검사는 "그 압수수색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법적인 압수수색이었다"라며 "(그래서) 그때 수집한 증거를 법정에 제출할 수 없는 증거인데도 유죄의 증거로 채택됐다"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당시 검찰이 압수한 '명함 사본'과 '2009년 업무일지', '휴대폰 저장 문자' 등은 재판에서 유죄 인정의 중요한 증거로 채택됐다.   

서울지검 분장사무에는 '전국적인 기업.금융비리' 문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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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중앙지검 분장사무(예규, 위)와 김광준 전 부장검사 공소장 중 일부(아래). 공소장에 기재된 "전국적인 공직비리, 기업.금융비리"라는 문구가 분장사무에는 없다.
ⓒ 오마이뉴스

특히 김 전 부장검사는 검찰의 증거조작 의혹까지 제기했다. 자신의 뇌물수수가 '직무'(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장)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검찰이 서울중앙지검 분장사무(예규)를 조작했다는 주장이다. 

김수창 특임검사팀은 공소장(2012년 12월 7일)에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별수사 제3부 소속 검사는 전국적인 공직비리, 기업·금융비리, 법조·언론 주변 부조리 관련 사범(감사원 고발·수사의뢰 사건 포함)의 수사 및 처리에 관한 사항과 그 정보·자료 수집을 담당"한다고 적시했다. 특임검사팀은 각주를 통해 이러한 내용의 출처가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분장사무(서울중앙지방검찰청 예규 제99호, 2007. 6. 1 시행) 제14조'라고 밝혔다.

그런데 서울중앙지검 분장사무(예규 제99호)는 특수3부 검사의 직무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지방자치단체, 정부투자기관 소속 공직자 비리, 법조·언론 주변 부조리 관련 사범 등의 인지수사 및 처리'로 규정해놓았다. 검찰 공소장에 적시된 "전국적인 공직비리, 기업·금융비리"는 직무범위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김 전 부장검사는 "따라서 서울 외 다른 지방에서 발생했던 불법 다단계 유사수신 범행이나 유진그룹 관련 형사사건 수사를 원칙적으로 특수3부의 직무범위로 볼 수 없어 직무 관련성을 인정하기 어려웠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니까강태용씨와 유진그룹 등으로부터 빌린 수억 원을 '알선수재 뇌물'로 엮기 위해 검찰이 검찰 예규에도 없는 "전국적인 공직비리, 기업·금융비리" 문구를 끼워넣었다는 주장이다. 

결국 김 전 부장검사는 김수창 특임검사 등을 허위공문서 작성 등의 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검찰은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에서는 서울중앙지검 관할 내 사건만 한정하여 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안의 성격에 따라 그 관할구역 외에도 전국적인 사건을 수사하기도 하고, 공직자 비리, 법조·언론 비리사건 외에 기업·금융 비리사건도 수사한다"라며 불기소('고소 각하') 결정을 내렸다(2014년 1월). 

앞서 2심 재판부도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 제3부 부장검사로서의 피고인 김광준의 직무범위를 의도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검사가 공소장에 직무범위를 임의로 조작하여 기재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오히려 "현직 부장검사의 지위에서 직무 대상자들과 무분별한 금전적 관계를 가져온" 것이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김 전 부장검사는 편지에서 "(검찰이 예규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실수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조작했다"라며 "검찰이 예규를 조작한 부분의 진실을 밝혀 달라"라고 촉구했다.  

"제일저축은행 비리대출 수사 이후 청와대에서 뒷조사"

원래 김 전 부장검사의 뇌물수수 사건은 경찰에서 먼저 인지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찰은 내부감찰에 이어 특임검사를 임명하는 등 '부장검사'가 연루된 사건의 수사 주도권을 잡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김 전 부장검사가 편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서울대 법대 동기인 최재경 당시 대검 중수부장이 김 전 부장검사에게 연락해 "지금 경찰에서 조사하는 내용이 무엇이고, 그것에 해명하는 진술서를 작성해 보내주면 검찰총장에게 보고해 결과를 알려주겠다"라고 요청했다. 이에 진술서를 작성해 최재경 부장에게 보냈고, 며칠 뒤 최 부장으로부터 "감찰조사를 받고 적절한 징계를 감수하라"라는 한상대 당시 검찰총장의 지시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김 전 부장검사는 "다음 날 대검 감찰본부에 출석해서 감찰조사를 받았는데 이것을 알게 된 경찰이 온갖 유언비어성 내용을 각 언론사에 배포해 저를 천하에 몹쓸 놈으로 만들면서 경찰에서 먼저 수사 단서를 포착했으니 경찰에서 저를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라고 전했다.

김 전 부장검사는 "(이에) 한상대 검찰총장은 검사가 경찰에서 조사받는 선례를 남기기 않고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특임검사를 임명하고 검사 13명을 차출해 저를 대상으로 먼지털이식 전방위 수사를 해서 중형을 받게 하라고 지시했다"라며 "(이러한 지시가) 검찰이 온갖 불법·부당한 행위를 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라고 주장했다. 

김 전 부장검사는 자신이 '10억 원대 뇌물 검사'로 찍히게 된 계기가 '제일저축은행 비리대출 사건' 수사였다고 주장했다. 의정부지검 고양지청 차장검사(2010년-2011년)로 근무할 때 제일저축은행의 거액 불법 대출을 확인하고 유동천 회장과 유병국 전무 등을 구속하자 유동천 회장이 이상득 전 의원 등에게 로비해 자신이 청와대 민정수석실로부터 뒷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김 전 부장검사는 "유동천 회장의 범죄사실 중에 이상득 의원 보좌관 등 측근에게 금품을 교부한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간접적인 정황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 전 부장검사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날 제일저축은행에서 일부 예금 인출 현상이 벌어지자 당시 김준규 검찰총장이 대검 대변인을 통해 '제일저축은행 전무 개인비리 차원의 수사였고, 제일저축은행 대출수사는 없을 것'이라는 취지의 보도자료를 배포했고, 제일저축은행 수사를 중단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라고 전했다. 

김 전 부장검사는 "제가 그냥 총장의 개인 부탁인지 직무명령인지 확인해 달라고 하니 (총장의) 직무명령이라고 확인해줘서 그 명령(수사 중단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라며 "그 후로 청와대 민정팀에서 제 뒷조사를 계속 했고, 다음 인사 때 불이익을 받고 공정거래위 파견을 명령받아 사실상 수사권을 박탈당했다"라고 말했다. 

김 전 부장검사는 "그 이후에도 청와대 민정팀에 근무하는 경찰관들이 꾸준히 제 뒷조사를 했고, 그런 와중에 강태용에게 2억 원을 차용한 것이 제 계좌에서 확인되니 경찰청장에게 보고하고 범죄정보과, 지능수사대에서 저를 내사해 이 지경에 처하지 않았나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  

"MB정부 출범 직후 법무비서관 추천... 여자문제로 거절"

한편 김 전 부장검사는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추천되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김 전 부장검사는 "2008년 2월 MB정권 출범시 저에게 '법무비서관에 추천되었으니 계좌 추적 등 정보제공 동의서를 제출하라'는 인수위 직원의 연락을 받았다"라며 "뒤이어 검증을 담당하게 된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사양한다'는 뜻을 전했다"라고 술회했다.

김 전 부장검사는 "검사라면 거의 전부가 맡고 싶은 직책이지만 저는 당시 부적절한 여자관계가 있어 양심상 도저히 그러한 직책을 맡을 수 없었고, 조만간 공직을 사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맡을 수 없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김 전 부장검사는 "그 후 박영준씨가 전화해 '재산검증은 필요없으니 바로 와서 합류해 일하면 된다'고 했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라며 "이것이 제가 표적사정의 대상이 된 이유라고 전해들었으나 확인은 불가능했다"라고 말했다. 

김 전 부장검사는 의정부지검 형사5부장과 부산지검 특수부장,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장, 서울동부지검 형사1부장, 대구지검 서부지청 차장검사, 의정부지검 고양지청 차장검사 등을 지냈다.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 사건과 정윤재 청와대 의전비서관 뇌물수수 사건, 전군표 국세청장 뇌물수수 사건, 제일저축은행 대출비리 사건 등을 수사했고, 옷로비 특검과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에도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