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우리말에는 있지만 영어에는 없는
- 권희경 국립창원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 입력 2025.01.21 08:13
- 수정 2025.01.21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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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계엄
다른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되는 '기막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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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 정(情), 한(恨) 등의 단어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의미를 알지만 영어에는 상응하는 단어가 없기에 우리말 발음을 그대로 차용해서 쓰인다는 걸 많이들 알고 계실 겁니다. 이런 명사 외에도 우리말에는 있지만 영어로 옮기기 곤란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막히다'가 그렇습니다. 우리말에서는 어떤 일이 놀랍거나 언짢아서 어이없거나, 반대로 어떻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음을 나타낼 때 쓰입니다. 같은 단어인데도 어떤 맥락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반대를 뜻하게 된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영어에서는 기막힘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를 나타내는 표현은 있어도 '기막히다'에 딱 맞는 단어는 없습니다.
유래가 있는 표현은 영어로 옮기기가 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어이없다', '어처구니없다'도 그렇습니다. '어이있다', '어처구니있다'는 표현은 없지요. 사전을 찾아보면 '어이'는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이라고 합니다. '어처구니'는 정확한 어원을 알기 어렵지만 보통 두 가지 유래가 소개됩니다.
하나는 잡귀를 쫓기 위한 목적으로 궁궐 기와지붕의 추녀에 흙으로 빚어 세운 동물이나 사람 모양을 가리키는 '어척군(魚脊群)'에서 'ㄱ'이 탈락하면서 '어처군'이 되었다고 합니다. 민간에서 집을 지을 때는 어척군을 올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궁궐을 지을 때 이것을 가끔 잊어버리는 일이 있었는데, 궁궐 건축에 이를 빠뜨리는 것은 엄청나게 큰 실수였다고 합니다.
어처구니의 다른 뜻은 맷돌의 손잡이라고 합니다. 손잡이가 없으면 맷돌을 돌리지 못하니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유래가 있다 보니 딱 맞는 영어 단어를 찾기도 어렵습니다.
'조바심'은 조 타작에서 온 말입니다. 바심은 타작의 옛말입니다. 조를 수확할 때는 이삭을 잘라다가 한꺼번에 두드려서 터는데, 조는 두껍고 질긴 껍질에 겹겹이 싸여 있어 타작을 하려면 조 이삭을 모아두고 아예 부술 정도로 두드려야 탈곡이 되므로 옛 농부들은 '조' 타작을 가장 힘들어했습니다. 그러니 '조바심'은 농부들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셈입니다. 영어에는 조바심에 해당하는 말이 없습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다'에서 봉창은 예전 토담집에서 흙벽을 조그맣게 뚫어 창틀을 대지 않고 그냥 창호지를 발라 통풍과 채광을 도모한 것인데, 방안에서 자고 있다가 밖에서 누가 부르니 잠결에 봉창을 문으로 착각하여 열려다가 내는 소리를 일컬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고 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답답하다', '시치미를 떼다', '오죽하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등 영어로 옮기기 쉽지 않은 고유한 표현이 우리말에는 많이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3일의 비상계엄은 저에게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같이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헌법에 규정된 계엄의 조건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인데, 저는 당시 상황이 그러했다고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날 이후 관련자들의 시치미 떼는 모습과 어처구니없는 궤변을 계속 보아야 하는 상황이 기막힙니다.
자다가 불쑥 깨어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조바심으로 전화기를 열어 보지 않아도 되는 일상으로 얼른 돌아가고 싶습니다. '오죽하면'이 아니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가 저에게는 더 설득력 있습니다. 제가 대한민국에 사는 한국인이기에 더 간절합니다. 영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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