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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7일 금요일

작은 승리의 경험이 필요한 이유

 


[culture critic]
연말엔 반성보다 성취를 떠올리세요[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연말의 거리에선 크고 작은 종소리가 울린다. 한 해를 정리하는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경종이 울린다. 포부와 다짐과 함께 새해를 맞이했지만, 돌아보면 이룬 건 없고 올해도 제자리인 것만 같다. 수포가 된 신년 계획을 푸념하는 건 우스개처럼 나누는 대화지만, 그 안에 비낀 자책감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삼성을 창업한 고 이병철 회장이 남겼다고 하는 말을 접했다. 지나간 한 해를 울적하게 돌아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었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칩시다. 낚시를 하면서 반드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입니다. (…)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리느냐에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예전으로선 적지 않은 나이에 창업을 했다. 자신의 삶에서 깨우친 바를 전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무의미해 보이는 나날에도 의미는 깃든다. 세상은 허비된 인생을 경멸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런 시간을 살아본 사람만 알 수 있는 무언가가 거기에도 있다. 남는 건 그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 것이냐다. 과거는 성찰을, 지금은 실천을. 단순하고 분명한 진리다.

이미지 출처=Pixabay.com
이미지 출처=Pixabay.com

문제는 그 ‘지금’이다. 과거를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달렸다. 그걸 알기에 정초마다 마음을 붙잡고 소매를 걷어붙인다. 하지만 찬바람이 닥쳐올 때쯤이면 이루어진 것 없는 현재가 돌아온다. 사람들 마음에 어른거리는 헛헛한 기분은 다짐과 반성이 반복되며 제자리만 도는 듯한 불안감일 것이다. 사람은 과거로부터 배워야 하는 존재지만, 배운다고 해서 삶의 전환을 일으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제와 오늘이 같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은 승리보다는 패배로 끝나고 만다.

황현산 문학평론가는 생전에 승리의 서사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우리의 삶은 승리가 한 번이면 패배가 아홉 번이지만,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은 그런 막막함을 비춰줄 전망이 결여돼 있다고 평했다. 고인은 좋은 이야기는 ‘승리의 서사’라고 말한다. 그것은 상투적 낙관주의가 아니다. 패배의 결말에서 승리한 순간의 조각들을 찾고 그것이 헛되지 않았음을 긍정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패배를 승리로 전유하는 용기라고 할까.

큰 성취는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그건 역량과 환경을 타고난 소수의 전유물인 것이 진실이다. 지금처럼 사회경제적으로 우하향 곡선을 타는 사회라면 미끄러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쉽지 않다.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건 사소한 성취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일들, 많은 노력까진 필요치 않은 일들, 내게 기쁨을 주는 일들, 남들 눈엔 하찮아도 나에겐 가치 있는 일을 계획하고, 늘 뜻대로 되진 않더라도 열 번 중 서너 번이라도 이뤄내 보는 작은 승리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런 정도의 성취는 이미 누구나 얻어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흔히들 버킷리스트라고 부르거나 노력했지만 목표에는 이르지 못한 미완의 성취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탄핵이 가결되자 환호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탄핵이 가결되자 환호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연말이 성찰의 시간이라면, 이루지 못한 것들의 빈자리보다는 이뤄냈지만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것들의 목록을 열거해 보며 음미하는 건 어떨까. 승리의 조각들이 작년보다 올해 더 누적되었음을 확인한다면, 바뀐 것 없어 보이는 막막한 삶에서 변화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깨달음은 스스로를 조금 더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여기게 하고, 다수의 일상에 안정된 감각을 제공할 수 있다.

올 연말에는 탄핵을 위해 광장에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탄핵이 가결된 2017년과 같은 광경이다. 사회는 7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여러 가지 현실은 그때보다 좋아 보이지 않는다. 개인이 제자리를 맴돌며 사는 것과 그들을 뒤에서 받쳐줘야 할 사회가 그리 된다는 건 같은 의미일까. 세상이 한 치라도 진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승리의 경험이 사회적 차원에서도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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