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분석이 무의미하다. 윤석열에 대해 내가 정색을 하고 칼럼을 쓰는 게 더 이상 의미가 있나 싶을 지경이다. 13일 탄핵심판 8차 변론기일에서 윤석열이 “(홍장원 전 국정원 차장 목소리를) 딱 들어보니 술을 마신 것 같았다. 나도 반주를 즐겨서 딱 알아차렸다”고 말한 대목에서 나는 진심으로 피식 하고 웃었다.
윤석열 따위의 말에 내가 웃다니.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웃음을 취소하고 싶었으나 생각할수록 너무 웃겨서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래, 윤석열 네가 이겼다. 넌 정말 내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가 그럴 때 쓰이는 밈인가?
독자분들도 기억하시겠지만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이명박의 전유물이었다. “내가 예전에 데모 해봐서 아는데”, “내가 예전에 노점상 해봐서 아는데”, “내가 서울시장을 해봐서 아는데”, “내가 배를 만들어봐서 아는데”, “나도 비정규직이었던 때가 있어서 아는데”, “내가 비즈니스를 해 봐서 아는데”, “나도 환경미화원을 해봐서 아는데” 등등은 이명박이 해야 웃긴 밈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전형적인 허세다. 허세란 자기가 갖고 있지도 않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과장을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윤석열의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내가 지금까지 봐온 허세 중 제일 멍청했다. 자기 말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허세를 부렸는데 그 내용이 “내가 반주를 많이 처마셔봐서 아는데”란 말이냐?
음주는 윤석열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다. 오죽했으면 구글에 ‘윤석열 음주’를 치면 ‘윤석열 술 먹고 계엄’이 연관 검색어로 나오겠나? 지난달 일본 아사히신문은 “윤석열은 습관적으로 술을 마셨고 취하면 여야 정치인을 막론하고 비난했다. 동 트기 전까지 술을 마시는 바람에 삼청동 안가 경비 담당자들이 밤샘 근무에 푸념을 늘어놓았다”고 보도까지 했다.
그래서 윤석열은 지금 필사적으로 자기의 행위가 술과 무관한 일임을 강조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지 입으로 “내가 밥 먹을 때마다 술을 처마셔봐서 아는데”라고 헌재에서 고백을 하다니! 도대체 저 머리(대가리라고 쓰려다가 간신히 참았다)는 어떤 구조로 작동하는 거냐?
내가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사악함과 멍청함은 같은 말이 아니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악함과 멍청함을 동일시하면 사악한 놈의 행동을 잘 못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명박은 사악한 놈이지 멍청한 놈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윤석열에 대해서도 사악한 것은 분명하지만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라 가정하고 그를 비판했다. 멍청한 놈이었으면 대통령까지 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최소한의 신뢰(?)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번에는 내가 틀렸다. 이 정도 두뇌 작동 구조라면 이건 진짜 멍청한 거다. 윤석열을 갖다대보니 이명박이 천사로 보일 지경이다.
자괴감이 드는 상대
경제학에는 ‘주지의 사실’이라는 개념이 있다. 영어로는 ‘Common Knowledge’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할 때에는 그 선택을 할 만한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A와 B 두 나라가 전쟁 중이다. 그런데 피곤에 지친 두 나라 모두 오늘 하루만큼은 전쟁을 멈추고 쉬고 싶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절대 쉬지 못한다. 상대가 쉬고 싶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나 혼자 쉬다가 상대가 쳐들어오면 낭패를 겪지 않겠나? 그래서 A나라가 B나라에게 “우리는 오늘 쉬고 싶어요”라고 쓴 편지를 비둘기로 보냈다. 이러면 문제가 해결될까?
안 된다. A는 쉬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B 역시 쉬고 싶은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B는 “잘 됐네요. 우리도 쉬고 싶었어요. 오늘은 우리 둘 다 그냥 쉬어요”라고 비둘기 메시지를 보냈다. 이러면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이 돼 둘 다 쉴 수 있을까?
아직 안 된다. B는 답장을 보냈지만 비둘기가 그 답장을 제대로 A에게 전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A는 다시 “쉬고 싶다는 메일 잘 받았어요. 그러니 우리 이제 진짜로 쉽시다”라고 비둘기 메시지를 B에게 보냈다.
이러면 문제가 해결이 됐을까? 아직도 안 됐다. 왜냐하면 A가 보낸 비둘기 메시지가 B에게 전달이 됐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두 나라는 절대 쉬지 못한다. 그래서 합리적 선택을 위해서는 둘 다 확고하게 믿을 수 있는 ‘주지의 사실’이 필요하다.
이게 뭐냐?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알고 있고, 네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고,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고, 네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알고 있고,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알고 있고···. 이런 식으로 양쪽이 충분히 알고 있다는 주지의 사실이 있어야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명박이나 윤석열 같이 나쁜 놈들과 싸울 때에도 최소한 이 정도 주지의 사실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명박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씨불이면 ‘저건 나쁜 의도가 있어서 또 사기를 치려는 거다’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이명박 역시 우리가 이명박이 사기를 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우리가 이명박이 사기를 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명박이 알고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나쁜 짓을 하려는 놈들도, 그 나쁜 짓을 막으려는 우리도, 상대가 최소한 이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는 합리적 추측 하에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윤석열은 이게 안 된다. ‘윤석열 술 마시고 계엄’이 구글 연관 검색어에 나올 지경인데 지 입으로 “내가 반주를 많이 처마셔서 아는데”라고 고백하는 놈한테 무슨 상식적 인지 능력을 기대한단 말인가.
윤석열은 나쁜 짓을 했고 앞으로도 나쁜 짓을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윤석열이 최소한 인간 수준의 두뇌를 갖췄다면 윤석열이 나쁜 짓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윤석열이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이미 파토다. 윤석열은 그걸 알 두뇌가 없다. 이러면 피차 행동을 유추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지금까지 나쁜 놈들과 싸우면서 나는 ‘어떻게 저들과 잘 맞설까?’를 고민해왔다. 저들은 나쁜 놈이지 멍청한 놈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그런데 윤석열을 만나고 나니 내 이런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기분이다. 내 평생 이렇게 머리가 나쁜 놈과 이렇게 진지하게 싸워야 한 적은 정녕 처음이다. 지금처럼 머리 짜내서 윤석열을 비판하는 칼럼을 쓰는 게 무슨 소용인가? 읽지도 않겠지만 윤석열이 읽는다 한들 해석도 못 할 텐데! 자괴감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정녕 실감이 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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