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배신 ⑥]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문 같았던 2월 25일 탄핵심판 최후진술
25.02.26 07:28l최종 업데이트 25.02.26 08:37l 박소희(sost)
서서히 끓는 솥 안의 개구리는 자신의 현실을 깨닫지 못한다. 25일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 당시 상황을 이에 비유하며 "벼랑 끝으로 가고 있는 이 나라의 현실이 보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끓는 솥 안의 개구리'는 자신과 더 가까워 보인다.
이날 헌법재판소는 '내란의 밤'의 책임을 묻는 첫 번째 절차, 대통령 탄핵심판의 변론을 종결했다. 오후 2시부터 변론이 시작됐지만, 윤 대통령은 줄곧 자리를 비웠다. 그는 증거조사와 양쪽 법률대리인단의 최종변론, 국회 쪽 정청래 법제사법위원장의 최후진술까지 모두 마친 뒤 자신의 순서만 남은 오후 9시 3분에야 대심판정에 나타났다.
그가 태도를 바꿔 성찰의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가 관심사 중 하나였다. "작년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84일이 지났다. 제 삶에서 가장 힘든 날이었지만 감사와 성찰의 시간이기도 했다"는 말로 최후진술을 시작하긴 했다. 거기까지였다.
그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끝까지 "12.3 비상계엄 선포는 이 나라가 지금 망국적 위기 상황에 처해있음을 선언하는 것이고, 주권자인 국민들께 상황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 함께 나서달라는 절박한 호소"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언급하며 "미국 국민들을 지키기 위한 대통령의 결단"이라고 칭송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국가비상사태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북한을 비롯한 외부의 주권 침탈 세력들과 우리 사회 내부의 반국가세력이 연계하여, 국가안보와 계속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런데도 거대 야당은 민노총을 옹호하기 바쁘고, 국정원 대공수사권 박탈에 이어 국가보안법 폐지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경찰의 대공수사에 쓰이는 특활비마저 전액 삭감해서 0원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간첩을 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윤 대통령은 또 "거대 야당은 야당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을 탓하기 전에, 공당으로서 국가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와 신뢰를 보여주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3일 밤,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 "패악질을 일삼은 만국의 원흉 반국가세력"이라던 비상계엄 선포문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84일이 지나고, 국민적 분노에 밀려 헌법재판소에 탄핵 피소추인으로 선 지 73일이 지난 2월 25일에도 그는 "거대 야당은 선동 탄핵, 방탄 탄핵, 이적 탄핵으로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있다"며 "직선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한 줄탄핵, 입법·예산 폭거는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너무 마음 아프고 미안"... 그 대상은 서부지법 폭동자들
달라진 모습이 있기는 했다.
윤 대통령은 "저는 잠시 멈춰 서 있지만 많은 국민들, 특히 우리 청년들이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주권을 되찾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서고 있다"며 "이것만으로도 비상계엄의 목적을 상당부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자화자찬했다. 따라서 직무에 복귀하더라도 "계엄을 또 선포할 이유가 있는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옳고 그름에 앞서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다"고도 했다. 성찰하고 국민에게 사과하는 태도를 보인 걸까? 전혀 아니었다. 발언의 맥락상 '너무 마음 아프고 미안한' 대상은 서울서부지법 폭동사태로 구속된 이들이었다. 대통령의 입에서 또 다시 나온 거친 말들은 '수신자'가 달라지는 대목에선 이렇게 너그러워졌다.
탄핵 찬성과 반대로 쪼개진 국민을 하나로 묶는 일은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윤 대통령은 "제가 직무에 복귀하게 된다면, 먼저 87체제를 우리 몸에 맞추고 미래 세대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한 개헌과 정치개혁 추진에 집중하고자 한다. 잔여임기에 연연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국민통합은 헌법과 헌법 가치를 통해 이루어지는 만큼, 개헌과 정치개혁이 올바르게 추진된다면 그 과정에서 갈라지고 분열된 국민들이 통합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속이 텅 빈 약속이었다.
결혼식 주례자 정상명의 '인간 윤석열' 호소론
어쩌면 '대통령 윤석열'의 마지막 공개발언일지도 모를 순간에도 그는 자신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서 날을 세웠다. 정상명 전 검찰총장은 그런 윤 대통령을 위해 읍소에 가까운 변론을 펼쳤다.
윤 대통령의 초임 검사시절부터 함께 근무했고 결혼식 주례까지 맡는 등 각별한 사이인 만큼 "'인간 윤석열'에 대한 생각이 존경하는 재판관님들의 결심에 조그마한 보탬이 되길 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고 했다. "떠밀리다시피 해서 들어선 정치판에서 상당히 고민하고 힘들었다는 걸 가까이서 듣기도 했고, 그 사정을 보기도 했다"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할 때도 있었다.
결코 윤석열은 불소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이야기하길 좋아해서 앉으면 5시간, 8시간 얘기합니다. 저하고 그런 적도 많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불소통입니까. 절대 불통할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 소신이 확실합니다. 자유민주주의와 국민 주권에 대해 확신합니다. 너무 그런 것에 대해서 집착해서 어떤 때는 꾸짖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집착하나. 정치인이라면 유연해야 한다.' 그런 상황이 여기까지 왔다 생각합니다. 저 역시 지켜본 선배로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단호한 국회 측 "광인에게 다시 운전대 맡길 수 없다"
반면 국회 법률대리인,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은 윤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운운했다는 데에 주목하면서 "이는 피청구인이 과거 절대왕정 또는 왕조 시대의 비상대권 개념에 함몰되어 현대 국민 주권국가의 대통령직에 전혀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또 "피청구인은 다시 한 번 정치적 반대자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몰아 일거에 척결할 기회를 갖고자 골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광인에게 다시 운전대를 맡길 수는 없다. 또한 증오와 분노로 이성을 잃은 자에게 다시 흉기를 쥐여줄 수는 없다"고 일갈했다.
정청래 위원장 역시 재판관들에게 "속지 마시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들은 피청구인이 적반하장, 남 탓만 하는 아무말대잔치를 이제 믿지 않을 것이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한들 누가 믿겠나"라며 "신뢰를 잃은 대통령은 국민 앞에 다시 설 수 없다"고 했다. 또 "피청구인의 반헌법적 내란행위는 주권자인 국민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었다"며 "피청구인을 파면하는 것은 대통령이라는 최고권력자에게 헌법을 준수할 의무를 다시금 상기시키고, 헌법의 적으로부터 헌법을 수호하는 일"이라고 촉구했다.
김이수 전 재판관도 "검증은 끝났다"고 얘기했다. 그는 윤 대통령을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 하지만 충성만을 받고자 했던 인물. 상식을 뛰어넘는 언동으로 일방통행만을 일삼았던 인물. 손에 왕(王)자를 새기고 나타난 인물. 대규모 군사퍼레이드를 즐기며, 역대 독재자 대통령들을 찬양한 인물, 헌법을 준수하거나 수호하기는커녕 파괴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며 "피청구인의 행위는 민주주의와 헌법, 그리고 국민들의 평화로운 일상에 대한 신뢰, 모두를 흔들어 놓았다. 이제 공동체의 상식과 보편적인 원칙, 그리고 정치와 헌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 민주헌정사에 있어서 최대의 고비인 지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재판은 민주주의와 헌법을 지키는 재판이며, 대한민국의 존립을 지키는 재판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믿으며 그 가치를 수호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입니다. 부디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하여 주십시오.
다시 찾아온 헌법의 시간... 누가 '끓는 솥 안 개구리'인가
이제 본격적으로 헌법의 시간에 들어간다. 헌재는 변론 존결 후 선고기일을 곧장 정하지 않았다. 최종 결론은 문형배, 이미선, 김형두, 정정미, 정형식, 김복형, 정계선, 조한창 재판관 8인의 평의를 거쳐 도출된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은 변론 종결에서 선고까지 11일,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의 경우 14일 걸렸던 점을 참고하면 3월 중순쯤 나올 가능성이 크다. 물론 평의 속도에 따라 더 빨라질 수도, 더 느려질 수도 있다.
헌재는 최초의 대통령 탄핵사건이었던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중대한 법 위배 행위'와 '국민의 신임 배반 행위'라는 두 개의 축을 세웠다. 이 판단은 두 번째 대통령 탄핵사건,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피청구인의 이 사건 헌법과 법률 위배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로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는 문장으로 이어져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수호의 이익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로 나아갔다.
세번째 대통령 탄핵사건,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헌재는 어떤 기준점을 정립할까.
섣불리 예단할 수 없지만, 딱 하나는 분명하다. 2024년 12월 3일 밤 역사에 기록될, 거대한 일이 일어났다. 국민들은 국회로 달려갔고,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아섰다. 군인들은 부당한 명령을 소극적으로나마 거부했다.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었고, 보좌진과 당직자들은 온몸을 던져 군인들을 막았다. 그날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윤석열의 말은 거짓이다. 모두가 목격했고, 모두가 기억한다. 누가 민주공화국을 공격했는지. 진짜 "끓는 솥 안의 개구리"는 누구인지.
[대통령의 배신]
① '중국·민주당·부정선거'...음모론으로 뒤덮인 '윤석열 변론' https://omn.kr/2bxle
② 윤석열의 적은 윤석열이다 https://omn.kr/2c039
③ 윤 대통령이 절대 찢지 못하는 '큰 그림' https://omn.kr/2c5j1
④ 윤석열·김용현·이상민만 우기는 그날의 회의 https://omn.kr/2c97f
⑤ 윤석열, 홍장원 밟으려 김용현·여인형까지 밟다 https://omn.kr/2cb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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