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선생님이 지난 2월 16일 97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다. 길원옥 선생님은 단지 피해자가 아니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위안부'의 진실을 알리고 여성 인권을 옹호하고 반전 평화의 가치를 강조한 활동가였다. 힘겹게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을 돕고 연대하는 데도 큰 관심이 있었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길원옥 선생님은 2011년에는 일본 동북부 대지진과 쓰나미 피해를 당한 시민들을 돕는 후원 활동을 제안했었고, 2012년에는 세계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나비기금 활동을 시작해 콩고와 우간다 내전 등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을 지원했고,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고 학업을 지원하는 것에도 열심이었다.
그런데 지금, 길원옥 선생님을 추모하고 기억하자고 말하는 수많은 언론이 대부분 침묵하고 외면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길원옥 선생님이 2020년 족벌언론과 정치검찰이 주도한 '윤미향 마녀사냥'의 핵심적 피해자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당시에 마녀사냥꾼들은 '윤미향이 치매에 걸린 길원옥 등을 끌고 다니며 활동을 하고 기부를 하도록 강요했다'라고 했다.
실제로 당시 '윤석열 검찰'은 2020년 9월에 '길원옥의 심신장애를 이용한 기부 강요' 등을 이유로 윤미향 당시 민주당 의원을 준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윤미향 마녀사냥의 핵심을 이루며 족벌언론과 정치검찰이 짜놓은 이러한 프레임은 윤미향 전 의원과 위안부 피해자들에 이중의 의미로 잔인하고 악랄한 모독이었다.
첫째, 위안부 피해자들과 연대해 온 수십 년의 활동을 ‘할머니들을 이용하여 사욕을 챙겨 온’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윤미향과 정의연 활동가들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었다. 둘째, 일본의 전시 성범죄에 맞선 역사적인 저항을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이 윤미향에 속아온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었다.
이것은 수십 년간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투쟁해 온 사람들의 인간적 관계를 갈라놓고 파괴해버린 용납할 수 없는 비인간적 시도였다. 그러나 족벌언론들과 정치검찰이 앞장서고 나머지 대다수 언론이 그 뒤를 따라가고, 친윤석열·친검찰 지식인과 정치세력들이 나팔수가 되면서 거대한 마녀사냥의 쓰나미가 모두를 휩쓸었다.
그 속에서 윤미향 의원은 '희대의 위선적 사기꾼'으로 낙인찍혀서 십자가에 매달리고 끝없는 돌팔매질을 당했다. 윤미향을 도와서 고령과 노환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봐온 정의연 마포쉼터 손영미 소장은 ‘할머니들을 속여서 돈을 빼돌렸다’라는 음해와 모독을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난데없이 '윤미향과 손영미에게 속아서 돌아다닌 치매 걸린 불쌍한 할머니'가 돼버린 길원옥 선생님은 인생의 막바지에 오랫동안 정든 정의연 마포쉼터를 떠나서 양아들의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 후 세 사람(길원옥, 윤미향, 손영미)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막상 재판이 시작되면서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0년 전부터 정의연(정대협)에서 길원옥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원활동가는 '모든 게 본인 의사에 따른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길원옥 할머니는 여느 할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셨다. 날씨가 춥거나 비가 오는 날 주변에서 수요시위 참석을 만류해도 내 목소리를 들려줘야 한다면서 참석을 강행하셨다." ('김복동의 희망' 운영위원 A씨)
길원옥 선생님을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직접 간병한 요양보호사 A씨도 "할머니가 (치매로 인해) 헛소리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라고 증언했다. 치매 전문의사인 신경과 전문의도 '길원옥 할머니는 중증치매환자로 인지 및 의사결정 능력이 없었다'라는 검찰의 주장을 반박하며 '정상 생활이 가능했다'라고 확인해 줬다.
특히 검찰에게 유리한 보고서를 써주고 나서 검찰 측의 증인으로 불려 나온 전문의들조차 법정에서 길원옥 선생님의 활동 영상을 보고 나서는 당황하며 ‘의사 판단이 명료해 보인다’라고 진술했다. 그럼에도 검사들은 길원옥 선생님의 양아들 부부를 증인으로 불러서 어떻게든 '길원옥의 치매와 윤미향의 사기'를 입증하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도 길원옥 선생님이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평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에 열심이셨고 행복해 하셨다"라고 인정했다. 또 두 사람은 매주 길원옥 할머니를 찾아와서 만나고, 수시로 통화하면서 길원옥 선생님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 어떤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물론 양아들과 그 부인은 검사들의 목적과 주문대로 앞뒤가 안 맞는 진술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는 2014년부터 치매였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의연과 윤미향에게 이용당해 온 것이다. 북한 동포와 재일조선학교 등에 기부금을 낸 것도 정의연에 물들어서 그런 것이다.' 검사들은 자신들이 마구잡이로 압수해 간 수많은 자료와 윤미향-손영미 간의 사적인 문자 대화 등을 짜깁기해 이를 뒷받침하려고 했다.
그런데 검사들의 이러한 프레임과 두 사람의 진술은 지독한 논리적 모순이었다. 왜냐하면 그 증언이 맞다면 길원옥 선생님이 검찰의 부추김 속에 양아들 부부와 함께 '윤미향에게 속았다'라며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도 ‘치매에 걸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한 행동’이 되기 때문이었다. 검찰은 ‘선택적 치매 효과’라는 논리로 모순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즉, 길원옥 할머니가 더 젊었을 때 반전 평화와 여성 인권을 위해 한 활동은 전부 ‘치매에 걸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한 일’이고, 더 나이가 들어 노환이 심해진 상황에서 검사들의 프레임에 맞게 행동한 것은 전부 ‘가끔 제정신이 돌아오면 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논리는 당연히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2023년 2월에 나온 1심 판결에서 법원은 다른 대부분의 혐의와 함께 이 부분을 무죄로 선고했다. 같은 해 9월에 나온 항소심 판결과 지난해 나온 대법원 판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길원옥 선생님의 양아들이 형사 재판과 별개로 윤미향 의원에게 제기한 '부당이득금 반환소송과 위자료 청구' 민사소송의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초에 나온 판결에서 재판부는 '인권 옹호 활동과 기부행위 등은 길원옥 할머니의 의사에 의한 주체적인 행위'라고 판결했다. 이런 결과들에 대해서 당시 윤미향 의원은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안심했다. 자신이 겪은 부당한 수사와 재판이나 마녀사냥의 지옥 같은 고통보다 길원옥 선생님에게 갈 피해를 더욱 걱정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정부는 결코 사과하지 않고, 한국 정부는 제대로 노력하지 않는 속에서 고령에 접어들고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길원옥 선생님의 정신도 갈수록 쇠약해진 것은 사실이고 자연스러웠다. 윤미향과 정의연도 이것을 숨긴 적이 없었다. 이미 2019년에 나온 영화 <김복동>의 마지막 장면은 길원옥 선생님이 김복동 선생님을 기억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거기서 길원옥 선생님은 김복동 선생님과의 추억이 희미해져 가는 것을 괴로워했다. "요즘에 갈수록 기억이 안 나요. 잊어버리는 약을 먹었나, 까맣게 몰라." 길원옥 선생님 양아들 부부는 지난 재판 과정에서 '어머니가 그토록 의지했던 손영미 소장님이 목숨을 끊은 것도 모르는 것 같다. 그게 차라리 나은 일일지 모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랑하던 이들에 대한 기억을 잃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그러나 더욱 비극적인 일은 마녀사냥꾼들이 짜놓은 프레임 속에서 길원옥 선생님이 검찰과 언론이 떠드는 ‘당신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동지라고 믿었던 윤미향과 손영미에게 이용당했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인생의 마지막 나날을 보내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김복동, 길원옥, 윤미향, 손영미는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세계를 움직인 역사적 운동을 함께 만들었던 사람들이었다. 이 네 사람이 이제는 운영이 중단된 정의연 마포쉼터 '평화의 우리집'에서 함께 찍은 사진은 빛바랜 추억으로 남았다. 이 사진 속에서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 중에 3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제 남은 것은 1명뿐이다.
2명은 끝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고 죽어서도 친일 극우파들에 의한 '자발적 매춘부'라는 식의 비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명(손영미)은 '길원옥의 돈을 빼돌렸다'라는 공격을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고, 살아남은 1명(윤미향)은 지금도 '위안부 팔아서 앵벌이질한 마녀'라는 낙인과 멍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평생 서로 믿고 사랑하던 동지들을 갈라놓는 것이 2020년 윤미향 마녀사냥의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측면이었다. 그토록 윤미향을 믿고 좋아하던 길원옥 선생님은 같은 하늘 아래 있으면서도 결국 끝내 윤미향을 다시 만나서 저들이 갈라놓은 오해와 불신의 매듭을 풀지도 못하고 떠났다. 이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결코 아물지 못할 상처와 한으로 남을 것이다.
길원옥 선생님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언론의 수많은 기사와 사진들 속에서도 윤미향의 존재는 철저히 삭제되고 있다. 도저히 분리하기 어려운 게 두 사람의 관계와 함께 한 활동과 순간이었는데도 말이다. 오로지 조선일보만이 길원옥 선생님의 별세를 알리면서 또다시 '윤미향의 사기 혐의'를 언급하며 낙인을 찍을 뿐이었다.
이 마녀사냥을 일으켰던 자들, 주도했던 자들은 결코 용서받기 어렵다. 그 마녀사냥에 동참하던 이들, 침묵하고 방관하던 이들도 돌아봐야 한다. 이것은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이들이 거대한 벽을 무너뜨리고 다시 새로운 벽에 부딪혔던 감동적이면서도 슬픈 이야기다. 길원옥 선생님의 고달프면서 고귀했던 삶을 기억하고 추모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