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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6일 일요일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시국간담회 열고 대통령의 변화 촉구했던 추기경

 [어떤 어른] 가톨릭 지도자로서뿐 아니라 사회의 어른으로서 일생을 산 김수환 추기경

사회 김종성(qqqkim2000)

25.07.06 19:26최종 업데이트 25.07.06 19:26

2009년 2월 16일 저녁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가운데 17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을 찾은 가톨릭 신자들이 전시된 김 추기경의 생전 사진을 둘러보고 있다.유성호

2009년에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원래 꿈은 장사였다. <평화신문>에 연재된 회고록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따르면, 부모님처럼 상인이 되는 것이 어릴 적 그의 꿈이었다. 읍내 공터에 쪼그리고 앉아 국화빵을 구워 파는 어머니, 곳곳을 돌며 옹기장수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투영된 장래 희망이다.

위 신문 2003년 5월 18일 자에 실린 제1편은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라며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살이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는 꽤 구체적인 계획을 소개한다. 그러나 상인의 꿈, 결혼의 꿈은 그냥 꿈으로 그쳤다. 그의 인생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922년 6월 3일 대구에서 출생한 그는 11세 때인 1933년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경북 대구의 성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에 들어갔다. 지금의 서울 대학로에 있는 동성상업학교(동성고등학교)를 1941년에 졸업한 그는 도쿄 조치대학으로 유학을 갔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학병으로 끌려가 미군 포로가 됐다. 귀국한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2월 경이다.

20대 초반에 미군 포로가 되는 파란만장한 경험을 한 그는 1947년 9월부터 학업을 다시 이어갔다. 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인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성신대학에 들어가 사제 수업을 받은 그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 9월에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현 목성동성당인 안동성당의 주임신부가 됐다. 20대 초중반에 상점을 경영하고 25세에 신랑이 되겠다고 꿈꿨지만, 막상 직면한 현실은 29세 때 신부가 되고 안동성당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는 1956년부터 1963년까지 독일에 유학 가 뮌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그런 뒤인 1964년부터 2년간 현 가톨릭신문사인 가톨릭시보사의 사장을 지내다가 1966년에 주교가 되고 마산교구장이 됐다. 1968년에는 대주교가 되고 서울대교구장이 됐다가, 47세 때인 1969년 4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한국 가톨릭(천주교) 지도자가 된 그가 역점을 둔 것 중 하나는 '한국 사회와의 대화'다. <교회사연구> 2011년 제36집에 실린 이장우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의 논문 '김수환 추기경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1969년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가톨릭교회가 세상과 대화하거나 삶을 나누는 일은 전무하다시피 하였다"고 기술한다. 한국 사회와 가톨릭 사이를 가로막던 그 같은 담장을 헐고 가톨릭과 이 땅을 통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를 위해 주의를 기울인 것은 한국 유교와의 화해다. 가톨릭이 한국 사회와 충돌한 것은 제사 문제 때문이고, 제사 문화를 주도하며 가톨릭을 앞장서 비판한 쪽은 유교다. 그래서 유교와의 화해는 한국 사회와의 화해였다.

그가 이 일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은 78세 때인 2000년에 제13회 심산상 수상자로 선정된 사실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불굴의 독립운동가이자 꼬장꼬장한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을 기리는 이 상을 가톨릭 지도자가 받은 것은 제사 문제로 인한 두 종단의 갈등이 대략 해소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해 5월 23일, 그는 심산상을 받은 직후에 서울 강북구 수유동 김창숙 묘소로 가서 술도 올리고 예법도 표시했다. 언론들은 '가톨릭과 유교, 아름다운 만남', '가톨릭과 유교가 해묵은 역사의 질곡을 벗어버리고 화해했다'는 찬사를 보냈다. 이 일을 그도 흡족해했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 제5편'은 "그런 긍정적 평가가 과분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가톨릭과 유교 두 종교가 마음의 벽을 허물고 화합하는 모습으로 비쳐졌다니 다행이다"라고 즐거워했다.

상당한 위험 감수하며 민주화 투쟁에 나서

1968년 5월 29일 고 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장 착좌식.1968년 5월 29일 고 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장 착좌식.평화방송·평화신문 제공

김수환 추기경이 그런 성과를 거둔 것은 일차적으로 한국 가톨릭의 노력과 더불어 추기경 개인의 신념과 역량에 기인한다. 이와 함께, 1960년대부터 전개된 세계 가톨릭의 개혁 열풍과도 연관된 것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은 서양 제국주의의 세계 침략에서 첨병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직전에는 히로히토 일왕(천황)이 강행하는 신사참배도 공인하고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자행하는 파시즘 폭정에도 협조했다. 이 같은 과오에 대한 반성으로 나온 것이 교황 요한 23세의 주도로 1962년 10월 11일 개회돼 1965년까지 이어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다. 개혁을 위한 이 공의회가 성과를 거두면서, 가톨릭은 세계 대중과 친숙한 종교로 거듭날 기회를 갖게 됐다.

공의회에서 강조된 핵심 정신은 현대 세계에 대한 적응, 대화와 자성, 교회 밖에서의 구원 가능성 인정, 종교의 자유 인정, 권위주의 철폐 등이다. 청년 신부 김수환은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유럽 유학을 했다. 그 같은 개혁 열풍을 가까이서 접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 정신은 김수환 추기경의 이미지와 대략 맞아떨어진다. 이는 그가 그 정신에 입각해 한국 천주교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1964년부터 그는 공의회 정신을 한국에 전파했다. 위 이장우 논문은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재임할 때 공의회 소식을 앞장서서 보도하면서,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로 거듭날 것을 강조했다"고 기술한다.

공의회의 정신적 세례를 받은 신부 김수환이 한국 가톨릭 지도자로 급부상하는 시점은 박정희가 독재자로 부각되는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신부 김수환이 가톨릭시보사 사장이 된 것은 1964년, 마산교구장 주교가 된 것은 1966년, 서울대교구장 대주교가 된 것은 1968년, 교황청 추기경이 된 것은 1969년이다. 박정희는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하고 1967년에 재선된 뒤 1969년에 3선 개헌을 강행해 종신제 군주의 길을 열었다. 1960년대 후반은 김수환과 박정희가 각각 가톨릭 지도자 및 독재자로 떠오른 시기다.

그 시기에 추기경 김수환은 박 정권과의 협력을 통해 교단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정권이 아닌 민중의 편을 들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본업이 추기경인지 운동권 투사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는 민주화운동에 깊이 개입했다.

그의 민주화운동이 반정부 차원을 뛰어넘어 반체제로까지 발전했다는 점은, 박정희를 사실상의 종신군주로 만든 1972년 12월 27일 이후의 유신체제에 대해 정면 대항한 데서도 확인된다. 1973년 12월 13일, 그는 함석헌 목사 및 윤보선 전 대통령 등과 함께 서울 시내 한복판인 중구 명동에서 시국간담회를 열고 박정희의 변화를 촉구했다.

다음날 이 상황을 보도한 <동아일보> 1면 기사의 제목은 '민주체제 회복 조치를'이다. 체제 문제를 거론하는 시국간담회였던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참여자들은 "중대한 민족적 위기", "정상적인 민주주의체제로의 회복", "평화적 정권교체" 등을 거론하며 유신헌법 체제의 부당성을 비판했다. 추기경 김수환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며 민주화 투쟁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교회 밖 대중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헌신

2009년 2월 20일 서울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거행된 장례미사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영정과 관이 명동성당을 나오고 있다.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1987년 6월항쟁이 중산층의 지지를 얻은 결정적 계기는 6월 11일 점심때 서울 명동의 금융 노동자들이 넥타이 차림으로 시위에 참여한 사건 등이다. 명동이 그런 분위기에 휩싸인 데는 시민과 학생들이 전날 명동성당에 들어가 밤 9시 55분부터 횃불 시위를 벌인 것과 무관치 않다. 추기경을 비롯한 가톨릭 지도자들의 용인과 묵인 없이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박 정권을 비롯한 독재정권들은 민주주의를 억압하기 위해 노동자·농민의 생존 기반을 억눌렀다. 대중이 경제적 힘을 갖지 못하게 만들어 정치권력과 재벌자본가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는 이 같은 탄압에 대해서도 김수환 추기경은 도전했다.

그 일례가 1967년 사건이다.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들의 주도로 1967년 5월에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심도직물 사장과 경찰은 노동자 탄압에 착수했다. 조합원 16명이 해고되고 일방적인 휴업이 강행됐다. 마산교구장이자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였던 김수환 주교는 '강화도 사건에 대한 주교단 공동성명'을 이끌며 사측과 경찰에 맞섰다.

이장우 논문에 따르면, 이 성명에는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특히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쳐야 합니다"라는 대목이 있다. 또 '노동자들은 가족 부양에 알맞는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 '경영자들은 경영이익 상당부분을 노동자들에게 분배해야 한다', '장시간 노동과 연소자의 노동은 합당치 않다'는 등의 취지를 담은 부분도 있다. 단순히 노동자를 응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 개혁을 통한 사회 대개혁 비전까지 담은 성명서다.

추기경 김수환은 교회 안의 신자들뿐 아니라 교회 밖의 대중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헌신했다. 가톨릭 지도자로서뿐 아니라 이 사회의 어른으로서도 일생을 살았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가톨릭은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 사회를 항상 염려했음을 보여주는 시가 '평화를 위한 기도'다. 이 시에서 그는 이스라엘민족처럼 한민족도 돌아봐달라고 천주님에게 간청했다. 한국 가톨릭 신자들뿐 아니라 한국 민중도 챙겨주시라고 떼를 쓴 것이다. 그의 잠언집인 <바보가 바보들에게>에 수록된 이 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들은 당신의 선민 이스라엘은 아닙니다

그러나 역시 당신의 백성입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가운데도

길고 긴 형극의 여정 속에서도

이스라엘에 못지 않게 받은

이 민족의 학정과 그 수모 속에서도

이 분단의 비운과 전화(戰禍)의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당신만은 끝내 두려워할 줄 알던 선민이 아니옵니까?

그런데 주님!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각박합니다

위기의식이, 불안이, 체념이, 허탈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권력의 절벽

무섭게 공허한 침묵의 심연

칠흙 같은 불신의 장막

이 장막을 벗길 빛은 없습니까?

저 절벽과 심연을 이을

믿음의 다리는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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