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 기자
- 승인 2025.07.0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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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법 40년 만에 개정
법보다 앞섰던 시민의식
시민의식 법제화 시켜야
윤석열의 내란 시도를 계기로 추진된 계엄법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 국회와 헌정을 무력화했던 전두환 쿠데타 이후, 제도적 공백을 메우지 못한 40년의 침묵에 뒤늦게 마침표가 찍힌 셈이다.
3일 국회는 법사위와 본회의에서 계엄 시 군·경·정보기관의 국회 출입을 금지하고, 계엄 선포 시 국회 통보용 회의록 작성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의 ‘계엄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계엄 권력으로부터 입법부의 독립성과 활동을 보장하겠다는 취지인데, 국민의힘도 이 법안에 찬성하며 재석의원 259인 중 찬성 255인으로 가결됐다.
국회 통보 시 회의록 제출 의무를 명시화했다. 이는 최근 한덕수 전 총리가 계엄 직후 사후 문건을 만들려 했다는 점을 고려한 거다. 요건과 자격이 갖춰진 국무회의였는지 판단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계엄 시 국회의원 체포 중일지라도 본회의에 출석할 수 있도록 행정기관에 의무를 부과했다. 이는 과거 계엄 선포 직후 현행범이라는 이유로 국회의원을 체포해 입법부를 무력화했던 과거에서 얻은 교훈이다.
계엄 선포 이후, 국회를 보호하는 내용도 담겼다. 국회의장의 허가 없이는 군과 경찰이 국회에 출입할 수 없다. 군·경의 무분별한 국회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취지로, 계엄 선포 후 국회의원 및 국회 소속 공무원의 국회 출입과 회의 방해를 금지하고, 국회의장 허가 없이 군과 경찰이 국회 경내에 출입하지 못 하게 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한, 계엄해제 후 국방부·계엄사령관은 국회에 모든 지휘·감독 관련 사항을 보고하도록 했다. 계엄이 더 이상 권력의 도구가 아닌, 헌법에 따라 통제받는 긴급수단으로 기능하도록 감시하는 입법적 방패가 생긴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와 국회 해산 기도로 군을 정치에 개입시켰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며 정권을 찬탈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이후, 윤석열이 총선 결과를 부정하며 내란을 모의한 정황이 드러났다. 과거와 똑같았다. 언론을 통제하려 했고, 국회의원을 체포해 계엄해제를 막으려 했다.
윤석열의 내란 시도가 가능했던 이유는 1987년 헌법 개정에서도 계엄 선포 절차는 규정됐지만, 국회 보호와 군경의 정치개입 통제 장치는 사실상 미비한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실패한 원인은 다행히 법보다 시민의식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계엄법 개정안은 입법의 성과인 동시에 시민주권의 성취다. 제도가 늦게 따라왔을 뿐, 그 동력은 언제나 깨어 있는 시민이었다. 법은 시민의 투쟁을 뒤쫓아 기록하는 역사일 뿐, 앞서가는 것이 아니다.
이제 국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다. 법이 또다시 늦지 않도록, 시민의 의식을 제도의 구조로 전환하는 일이다. 깨어 있는 시민으로 인해 실패한 내란이다. 더 늦어지지 않도록 시민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김준 기자 jkim103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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