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호 생명학연구회 부회장
기후 재난이 초래할 식량 위기 문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도 전에 세계 곳곳이 역대급 폭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섭씨 40도가 넘는 고온으로 인명 피해 확산을 걱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 등에서도 전례 없는 이상 고온 현상이 지금 큰 문제다. 인류 전체가 기후 위기 시대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중이다. 문제는 이런 극단적 기후 변화가 지금보다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기후 변화의 충격은 인간 사회는 물론 자연 생태계에도 불균형하게 차별적으로 미친다. 각종 인공 환경을 만들어 살아가는 인간과 자연환경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동식물 등 비인간 존재가 받는 충격의 정도 또한 사뭇 다르다. 온도, 강우, 햇빛 등 기상 상태의 직접 영향을 받는 농업은 여타 산업 분야보다 기후 위기의 충격에 특히 취약하다. 작물의 파종과 개화, 성장, 수확 등의 농업활동은 오랜 기간 기온, 일조량, 강수량 등의 안정적인 흐름에 의존해 왔는데, 극단적 기상 변동을 동반하는 기후 위기가 농업생산 기반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기후 재난의 파국적 상황이 식량 위기를 통해 인류의 생존과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할 것이라는 경고가 계속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결국 기후 위기로 인한 식량 생산 시스템의 파괴는 지구 생태계의 인구 부양 시스템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농업이 지속 불가능한 상태에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기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미 현실의 문제가 되어 버린 식량 위기 사태
점점 극단화되는 기후 변화가 농업생산 기반을 위협하는 가운데 식량 위기는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작년 말 기준으로 세계 3억 4300만 명이 급성 식량 부족 상태에 처해 있으며, 올해에는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더 악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식량 위기에 대응하는 글로벌 네트워크’(GNAFA)가 발간한 2025년 ‘글로벌 식량 위기 보고서’(global report on food crisis)에 따르면, 식량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이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 한정된 긴급 상황이 아니라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생존을 직접 위협하는 주요 현안이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분쟁 및 지정학적 갈등에 따른 영향도 있지만, 기후 위기가 세계 식량생산과 수확을 망치고 식량 공급망을 붕괴시켜 식량안보를 위협하는 주요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3월 핀란드 알토 대학교(Aalto University) 연구진은 세계 30개 주요 식량작물에 대한 기온과 강수량 변화, 건조도 증가의 영향을 분석한 결과, 기온 상승으로 세계 식량생산의 최대 1/3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과학 저널 ‘네이처 푸드’(Nature Food)에 발표하기도 했다.
기후 위기는 식량 위기를 다차원적으로 심화시킨다. 기상 변동에 따른 식량 생산량 감소는 물론이고, 영양학적 측면에서 식량의 질적 가치도 떨어뜨린다. 기후 변화에 따른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가 작물 내 철분, 아연, 단백질 함량을 감소시켜, 인간은 물론 가축의 해당 요소 결핍 현상을 일으킨다는 연구도 나오고 있다. 또한 식량 생산량 감소는 가격 폭등으로 이어져 사회 경제적 취약층을 중심으로 식량에 대한 접근성을 가로막고, 기후 변화로 인한 해충과 곰팡이 감염 확산은 식품 저장성을 떨어뜨려 폐기물을 증가시키는 점도 식량 위기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농업과 먹거리 영역에 작동하는 ‘지연의 정치’ 구조부터 바꿔야
기후 위기는 많은 과학 전문가들의 주장처럼 ‘예견된 재난’에 가깝다. 그만큼 사전예방적인 대응에 우리가 가진 지혜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식량 위기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기후 위기 시대는 농업과 먹거리에 대한 인식과 접근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면 농업과 먹거리의 중요성에 대해 대체로 쉽게 공감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중요성과 긴급성 사이의 괴리가 매우 큰 것이 문제다. 농업과 먹거리 문제가 중요하다지만 긴급하게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는 잘 다뤄지지 않는다. 우리 현실에서 농업과 먹거리는 ‘지연의 정치’(politics of delay)가 작동하는 대표적인 영역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구조적 요인들이 작용한다. 식량안보가 글로벌 이슈가 되었는데, 우리의 식량 자급률은 1970년 이후 계속 줄어들어 44% 수준이고, 곡물자급률은 20%, 그것도 쌀을 제외하면 3.4% 수준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식량 자급률 문제는 여전히 소홀히 다뤄진다. 정부의 지속적인 시장 개방과 농산물 수입 확대로 우리나라는 연간 1600만 톤을 수입하는 세계 5위의 곡물 수입국이 되었다. 이처럼 수입 농산물에 대한 의존도가 크면 낮은 식량 자급률에 대한 국민적 체감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식품산업이 제조업 GDP(국내총생산)의 11%를 차지하지만 국내산 원료 사용 비율은 전체의 1/3 수준이다 보니 식품 소비 행위와 실제 먹거리를 생산하는 국내 농업과의 연관성이 약한 것도 문제다.
국내 농업이 무너져도 식량의 부족분을 수입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체계가 여전히 강고하다. 이런 상황에서 주식인 쌀 자급률이 100% 아래로 떨어졌는데 정부는 쌀 의무 수입 조치를 유지한 채 쌀 재배면적을 줄이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농산물 가격이 폭등할 때 잠깐 여론의 관심을 받지만 수입 농산물로 소비자 가격이 안정화되면 금세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우리 농업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후 위기로 식량 생산 기반이 위협받는다고 해도 농업에 대한 비상한 대책이 나오기가 어렵다.
농업 분야의 정치, 사회적 대변 기능이 구조적으로 취약한 점도 지연의 정치를 작동시키는 요인이다.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구 획정을 인구 수를 기준으로 하다 보니, 인구 과소지역인 농촌 지역구는 축소되고 농업에 대한 정치적 책임 주체는 계속 줄어든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트렉터를 몰고 도로에 나서고 아스팔트 위에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할 수밖에 없다.
우리 농업과 농산물의 가치에 공감하는 정도가 60세 이상의 농촌 거주 경험자나 가족 중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서 높게 나타났는데, 빠른 고령화와 탈농 현상으로 ‘세대 단절’이 현실화되는 것도 문제다. 지연의 정치로 허비할 시간이 우리에게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의 농업 문제는 중요성만큼 문제 해결의 긴급성을 요구하고 있다. 5년이라는 정권 임기를 고려할 때 시작 단계부터 농업에 대한 정책적 우선순위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난 정부에서 100대 국정과제로 포함되었던 농업 의제들 가운데 제대로 실행되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다가 흐지부지된 것들이 많은데,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일본의 ‘쌀 파동’이 주는 교훈을 잘 들여다봐야
일본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쌀 부족과 쌀값 폭등으로 큰 홍역을 치르고 있다. 이번 사태는 일본 정부가 쌀 수급과 가격 안정 역할을 시장경제 논리에 맡겨 놓은 채 쌀 개방과 감산 정책을 추진해 온 결과에 따른 것으로, 구조적 문제와 정책 실패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일본은 농업 인구의 지속적인 감소와 심각한 고령화 속에 농민들은 적자 경영에 시달리고 후계농은 단절되고 식량자급률도 계속 감소해 왔다. 이런 가운데 쌀 생산이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된 데는 1995년부터 지속된 쌀 의무 수입 조치로 매년 77만 톤의 WTO(세계무역기구) 쌀을 수입하고 있는 영향이 크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본의 쌀 파동이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일본과 한국 농업이 처한 구조적 문제는 물론이고 정부 정책 방향과 대응 방식도 많이 닮아 있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저가 정책으로 인한 쌀값 폭락을 쌀 생산 과잉 현상과 연결시키고, 이것을 빌미로 쌀 생산 기반을 축소하는 정책을 추진해 오고 있다. 특히 윤석열 정부는 쌀값과 농가소득 안정을 내세워 ‘벼 재배면적 조정제’를 통해 전국적으로 벼 재배면적 8만ha를 감축하고자 지자체별로 할당량을 정하고, 실적이 낮은 지자체는 각종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는 방안을 추진하려 했다. 식량 생산 기반인 농지에 대한 규제 완화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다 일본처럼 우리도 WTO 쌀을 의무 수입하고 있다. 매년 40만 8700톤의 쌀 수입은 우리의 주식인 쌀의 생산 기반을 무너뜨려 식량 자급기반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데, 이것을 고정 상수로 취급하면서 전향적 접근을 내놓지 않고 있다. 지금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신자유주의 자유무역 체제에서 벗어나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우리도 국익 차원에서 쌀 의무 수입 문제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재명 정부의 농업 정책은 과연 얼마나 달라질까?
식량 자급과 식량주권 확보는 농민들의 소득 보전 차원을 넘어서 국민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 문제이자 대한민국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핵심 과제다. 그만큼 농업과 먹거리를 국가 전체 차원에서 주요하게 다룰 수 있도록 대통령의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지역 선거 유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만약에 농업기반이 허물어졌는데, 기후 위기로 전 세계적으로 흉작이 발생했다. 그래서 각국이 곡물수출을 통제한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겠어요. 곡물가격이 급등하고 나라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은 농업을 보호 하는 것이고, 바보라서 지원하는 게 아니죠. 제 말이 맞습니까?”
6월 4일 21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농정 대전환으로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농민의 삶을 지키며 대한민국의 미래 성장동력을 키워내겠다”고 말했다. 또한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그 뿌리에는 농업인의 땀과 눈물·헌신이 있었다”면서 “이제는 국가가 책임 있는 농정으로 응답하겠다”고 했다.
국가 지도자로서 농업에 대한 전향적 인식을 엿볼 수 있어 매우 반갑고 농업계의 기대감 또한 크다. 하지만 정권 초기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우려가 되는 지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대통령 취임 후 1호 행정명령으로 ‘비상경제점검 TF’를 운영하면서 농림축산식품부가 배제된 점이나, 내각을 구성하면서 지난 정부에서 임명된 농림부 장관을 그대로 유임시킨 것을 두고 말들이 많다. 탈이념 실용 정치의 광폭 행보 대상이 왜 하필 농업 분야인지, 농업을 국가 경제 운영의 부분적 수단으로 다뤄 온 관성이 혹시 반복되지는 않을지 농업계의 우려가 적지 않다.
지난 정부에서 추진해 온 쌀 생산 감축과 농지 규제 완화 기조에 대한 정책적 변화의 조짐도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다 에너지 전환과 농민소득 개선 차원에서 추진되는 영농형태양광 건설과 정부의 AI 투자 흐름 속에서 자본 및 기술 집약도가 높은 스마트팜이 확대될 전망인데, 이것이 농업 현장의 생산활동에 미칠 영향에 대해 꼼꼼한 사전 검토가 있어야 한다. 또한 후보 시절 내놓은 10대 공약을 보면, 식량안보 차원에서 주요 농산물의 안정적 공급기반 구축 공약을 외교∙통상 분야에 배치하고 있다. 이것은 식량자급율 향상 방안으로 해외 식량기지 건설과 식량 수급 체계 확대 가능성을 키우고 있는데, 과연 이러한 전략이 기후위기 시대에 실효성이 있을지도 점검되어야 할 것이다.
농업과 먹거리를 기본사회의 기본으로 삼아야 할 때
정권 초기부터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압박이 매우 거세고 거칠다. 특히 농업 및 먹거리 분야와 관련해 미국은 광우병 촛불시위로 논란이 되었던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수입 금지 조치 해제를 요구하고 있으며, 유전자 조작(GMO) 농산물 수입 규제 완화와 함께, 블루베리, 체리, 사과, 배, 딸기 같은 농산물의 수입 확대 등 요구가 매우 구체적이고 광범위하다. 국민 건강과 생태계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자 최소한의 보호막 역할을 해온 비관세장벽이 이번 일로 무너지지 않을까 농업계와 시민사회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자유무역 협정에서 농업 부문 보호정책을 포기하고 농산물 수입 자유화 조치를 확대해 왔다. 그만큼 미국의 이번 요구에 대한 정부의 대응 방향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한미 통상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농산물 수입 확대는 농민들의 생산활동은 물론 도시 소비자들의 건강에도 밀접한 영향을 주는 만큼, 상황에 따라 이명박 정부 시절 광우병 촛불집회처럼 커다란 사회적 갈등이 촉발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만약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이재명 정부 초반기의 국정 운영 동력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것이 자칫 극단주의자와 퇴행적 정치 세력에게 반격의 빌미가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
대한민국이 처한 국제적 위상과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미국과의 통상협상에서 국익을 앞세워 속 시원하고 명쾌한 결론을 내리기가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다. 그만큼 함께 인내할 수 있는 뚜렷한 명분과 신뢰를 바탕으로 역량을 결집할 수 있는 구심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정부부터 농업과 먹거리 문제에 대한 인식과 접근에서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보여줘야 한다. 농업과 먹거리 문제를 농민은 물론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건강 및 생존 보장 차원에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이 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명확한 국정 철학과 비전이 제시되고, 이것이 농업계를 포함한 국민적 인식의 공감대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야 급속한 기후 위기와 불확실한 통상환경 변화 속에서도 대한민국이 지속 가능한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마침 이재명 정부가 ‘먹사니즘’과 ‘기본사회’ 실현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이것을 농업 및 먹거리 영역과 연결시키는 노력도 중요하다. 기본사회는 외형적 성장과 단기적 이윤 추구 논리 속에서 소홀히 했던 기본권과 좋은 삶의 기반을 확장하는 것이자 지속 가능성의 토대를 단단하게 마련하는 것으로, 기본사회의 핵심 영역으로 농업과 먹거리를 전환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선거 과정에서 수많은 공약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결국 국가 정책과 결합해 실행력을 가지려면 우선순위 형태로 체계화되어 조직과 예산이 배치되어야 한다. 마침 미래의 먹거리 확보와 국가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AI 분야에 엄청난 예산 투입을 준비 중인데, 농업과 먹거리도 이에 못지않게 기후 위기 시대의 지속 가능한 전략 과제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국정기획위원회와 기본사회위원회가 논의 과정에 있는 만큼, 이재명 대통령이 ‘국가책임’ 영역으로 강조한 농업과 먹거리 정책이 비중 있게 구체화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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