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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8일 수요일

‘전작권 조기 전환’ 추진의 교훈과 과제(2)

 


  • 기자명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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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0.28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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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분석기사]

전시작전권 조직 전환 추진의 교훈과 과제

ㆍ 노무현 대통령은 왜 전시작전지휘권 환수에 목을 맸는가? 
ㆍ 속 빈 강정으로 변질한 전작권 전환
ㆍ ‘임기 내 전작권 전환’을 미루려는 미국의 흉계
ㆍ 유엔사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 없이 자주국방은 없다. 

▲ 지난 11월 15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제51차 한·미 안보협의회(SCM) 고위회담이 열리고 있다. [사진 : 뉴시스]
▲ 지난 11월 15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제51차 한·미 안보협의회(SCM) 고위회담이 열리고 있다. [사진 : 뉴시스]

‘임기 내 전작권 전환’을 미루려는 미국의 흉계

이처럼 현재 추진되고 있는 전작권 전환은 ‘한국군으로 전시작전지휘권 환수’와는 거리가 멀고,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쥐꼬리만 한 권한만을 넘긴 기만적인 전작권 전환’마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미적거리고 있다. 특히 이번 10월 14일에 열린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전작권 전환을 둘러싸고 한미간의 마찰이 심각했다고 알려졌다. 서욱 장관은 이번 회의 모두 발언에서 “전작권 전환 조건을 조기에 구비해야 한다”며 속도를 강조한 반면, 에스퍼 장관은 “모든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양측의 인식 차를 그대로 드러냈다. 전작권 전환 문제에 대해 미국방장관이 공개석상에서 서둘러 전환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기에는 미국의 교묘한 흉계가 있다. 

첫째는 대다수 사람이 생각하듯이 전작권 전환을 매개로 최대한 이득을 챙기려는 속셈이다.

방위비 분담금 증액 강요, 미국제 무기 강매를 통해 최대로 경제적 이득을 챙기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현 정권의 잘못도 있다. 현 집권 세력은 ‘임기내 전작권 전환’에 목을 매고, 미국이 요구하는 전작권 전환 조건( △안정적 전작권 전환에 부합하는 안보환경조성, △전작권 전환 이후 한국군의 핵심 능력 구비, △국지 도발과 전면전 시 초기 단계에서 북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한국군의 필수 대응능력 구비 )을 갖추기 위해 국방예산을 도가 넘치게 증액해 미국제 무기 구매에 쏟아붓고 있다. 이러한 무기 장사에 재미를 붙인 미국은 되도록 전작권 전환 시기를 늦춰 더 많은 무기를 팔아먹으려 하고 있다. 또 현 정권이 목매고 있는 전작권 조기 전환을 약점으로 삼아 방위비분담금 협상에서 자기들의 입장을 관철시키려고 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날강도 같은 행태를 절대로 묵과해서는 안된다.

둘째는 한반도 정치 군사 환경의 변화이다. 

북은 2017년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하고, 미국에 대북적대정책 철회를 압박하고 있다. 특히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은 ‘제재해제를 조건으로 하는 북미협상은 없다’고 선언하고, 자강력 제일주의 노선을 앞세워 장기대결의 길을 선택했다. 북이 협상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가자, 미국은 불안과 초조감에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제재마저 무용지물로 되고 만 현실에서 북의 핵 무장력 강화를 억제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설상가상으로 한국의 정부마저 미국의 정책에 순종하지 않고 남북협상노선을 독자적으로 추진해 나간다면,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회복할 길 없는 궁지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이러한 사태 발발에 대한 두려움에서 한국정부에 대한 통제와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한국정부에 대한 통제와 압박을 강화할 적절한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 전작권 전환 문제이다. 미국은 전작권 조기전환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한국 정부가 미국 주도의 대북정책의 틀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고삐를 단단히 조이고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하고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공허한 전작권 조기 전환에 목맬 게 아니라, 당당하게 자주적인 남북협력노선을 선택해 나갈 때, 한국 정부의 요구를 더 잘 관철할 수 있다.

셋째는 중미 관계의 악화이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에 두려움을 느끼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냉전체제와 같은 대중국 포위환을 만들려 하고 있다. 미국은 코로나 사태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도 중국을 상대로 한 향후 전략 및 정책 방향을 담은 보고서(“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 2020.5.20, 백악관)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미국은 중국에 대한 협력보다는 공개 압박과 봉쇄전략 등의 ‘경쟁적 접근’을 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해 코로나 사태의 중국책임론을 연일 떠들면서, 경제번영 네크워크를 비롯해 지구적 공급망에서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구상을 가속하며, 동맹의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미국은 특히 미중 경제의 디커플링(  decoupling(디커플링)은 함께 움직인다는 뜻의 커플링coupling(동조화)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탈(脫)동조화’를 의미)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경제와 함께 하는 세력권을 형성하려고 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 중국경제와의 협력 체제를 끊을 것을 요구해 나서고 있다. 

미국은 한국 정부에도 대중국 봉쇄망 구축에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경제의 현실에서 미국의 대중국 압박정책 동참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대중국 봉쇄에 따르라는 미국의 요구에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이 미국에 눈엣가시로 되고 있다. 미국은 감히 한국이 자신들의 뜻을 잘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 분통을 내고 있다. 미국은 대중국 봉쇄망에 한국의 참여를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보고 있으며, 이를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다. 전작권 조기 전환 문제도 한국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전작권 전환 문제를 미끼 삼아 노무현 정부 때에도 쏠쏠한 재미를 봤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관철해 냄으로써, 주한 미군과 미군기지를 대중국 군사적 대결의 전초부대와 기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2003년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한미양국은 “한미동맹은 동북아와 아시아 태평양 전반의 평화와 안정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한미동맹의 지역동맹적 역할을 주목했다. 또한 협력적 자주국방이라는 구호 밑에 한국의 국방비를 대폭 증액해 미국의 군사 변환(21세기 최첨단군으로 전투력 제고)에 보조를 맞춰 한국군의 무기 장비 수준을 미군에 맞추도록 요구했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의 평택 미군기지 이전,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등을 통해 중국에 가까운 서해안 벨트 지역에 미군 기지들을 배치해 나가고 있다. 

중미대결이 첨예화되고 있는 지금, 미국은 한반도 이남 지역을 대중국 봉쇄망의 전초기지로 삼는 게 매우 절박한 과제로 나서고 있다. 그들은 노무현 정부 때처럼 ‘전작권 전환을 미끼 삼아 이를 관철하려고 하고 있다.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한일정보교류협정 체결을 압박하고, 그것을 강제 연장토록 한 것도 이러한 일환이다. 이번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양 장관은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증진시키기 위해 정보공유, 한미일 안보회의를 포함한 고위급 정책 협의, 연합훈련, 인적 교류활동 등 한미일 안보협력을 지속하기로” 합의했다. 또 “성주기지 사드포대의 안정적인 주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임시배치라는 사드기지 영구기지화를 뜻하며, 중국 측의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현 정부는 미국의 강압에 한미연례안보협의회가 끝나자마자 성주 사드 기지 건설공사를 밀어붙이는 악수를 두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지금 미국은 현 정권의 전작권 조기 전환 요청을 거부하고 있다.

유엔사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 없이 자주국방은 없다. 

기만적인 전작권 전환 요구마저 뭉개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과 협력적 방식으로 전작권을 환수하려는 노무현식 자주국방은 신기루라는 것이다.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대북전략)과 동아시아 전략(대중국 전략)에 순응해 미국의 요구를 계속 수용하면서 그 대가로 전작권을 환수받으려는 것은 실현불가능한 환상일 뿐이다. 그 어떤 나라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순순히 내놓으려 할 것인가? 특히 종속적인 한미관계에서 미국이 자신의 기득권을 순순히 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다. 

이러한 점은 이번 연례한미안보협의회에서 드러난 한미불협화음에 울분을 터뜨린 집권여당 중진의원의 솔직한 고백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전작권 전환은 군사적 자율성을 높이고, 책임국방을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전작권을 추진할수록 미국에 대한 안보의존이 커지는 역설적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쯤되면 누구를 위한 조건 충족인지, 무엇을 위한 전작권 전환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전작권 전환의 목표는 자주국방인데, 한미협의를 통한 전작권 전환을 추진하면 할수록 안보의존이 커지고 있는 ‘전작권 전환의 역설’을 예리하고 포착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한미합의(미국에 대한 구걸)를 통해서는 자주국방도, 군사주권도 확립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주한미군이 이 땅에 존재하고, 유엔사가 존속하는 한 전작권 전환이 일백 번 이루어진다 해도 군사주권은 주한미군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전작권 전환을 미끼로 삼아 한미동맹을 지역동맹화하려는 미국의 꼼수에 놀아날 뿐이다. 이 땅에서 군사주권을 확립하고 자주국방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현실적인 방도는 한국 민중의 단결된 힘으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유엔사를 해체하는 길밖에 없다. ‘유엔사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만이 자주국방을 위해 가장 올바른 길이며, 현실적인 경로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주한미군 철수, 유엔사 해체를 향한 전국민적 촛불을 높이 들어야 할 때이다.


2020년 10월 27일 화요일

“공시가격, 10년 내 시세 100% 목표로 올려야”

 


공시가격 로드맵 공청회...시민사회, 정부·여당 10년·90% 목표에 “속도 내야” 요구…9억 미만 주택 현실화율은 시차 조정

홍민철 기자 plusjr0512@vop.co.kr
발행 2020-10-27 17:59:17
수정 2020-10-27 19: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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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운로 한국감정원 수도권본부에서 열린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 수립을 위한 공청회. 왼쪽부터 유선종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 김성달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 국장, 김광훈 법무법인 세양 대표변호사, 조주현 건국대학교 교수, 정세은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위원, 정순미 중앙감정평가법인 이사, 김수상 국토교통부 토지정책관.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운로 한국감정원 수도권본부에서 열린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 수립을 위한 공청회. 왼쪽부터 유선종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 김성달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 국장, 김광훈 법무법인 세양 대표변호사, 조주현 건국대학교 교수, 정세은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위원, 정순미 중앙감정평가법인 이사, 김수상 국토교통부 토지정책관.ⓒ제공 : 뉴시스  

주택과 토지 세금 산정 근간이 되는 공시가격을 향후 10년 안에 시세와 일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세은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위원(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27일 열린 ‘공시가격 로드맵 공청회’ 자리에 참석해 “현실에서 발생하는 공시가격과 시세의 괴리 문제는 이미 오랫동안 이어진 문제”라며 “상황이 허락한다면 빠르게 이 괴리를 해소해야 한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정 위원은 “참여정부 시절에도 현실화율을 10년으로 뒀는데, 이것이 최저 수준이라고 본다. 시장 상황에 따라 속도를 조절할 수 있지만 10년 안에 100%를 달성하는 것이 바람직한 목표”라고 재차 강조했다.

국토연구원은 이날 공시가격 현실화율 목표를 80%, 90%, 100% 등 총 3가지로 발표했다. 아파트를 기준으로 공시가격이 시세에 80%에 근접하려면 최소 5년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고, 90%에는 10년, 100%에는 15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됐다. 토론자로 참석한 정 위원이 주장한 ‘10년, 100%’는 연구원의 세 가지 안이 지나치게 조심스럽다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정책위의장은 ‘향후 10년, 90%’를 로드맵으로 소개한 바 있다. 당정이 사실상 ’10년, 90%’를 로드맵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 위원은 “언론이나 여론이 ‘세금폭탄’론으로 공격할 것이 뻔한데도 정부가 용기를 내서 로드맵을 발표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면서도 “공시가격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봤을 때 시세 90%를 목표로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세는 100%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주택 유형과 가격에 따라 차등해 인상해야 한다는데는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연구원은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과 단독주택을 구분하고 가격도 9억원 미만, 9~15억원, 15억원 이상 등 세 구간으로 구분해 현실화율 목표치에 따른 인상률을 구분해 제시했다.

대안별 공시가격 현실화율 도달 기간
대안별 공시가격 현실화율 도달 기간ⓒ제공 : 뉴시스

연구원의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공시가격 아파트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100%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격에 따라 매년 2.5~2.7% 인상해 최대 15년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실화율이 높은 15억원 이상 아파트는 2029년에, 시세의 100%를 달성하고, 9억 미만 아파트는 15년 뒤인 2035년에 시세 100%를 달성하는 식이다. 시세반영률이 아파트에 비해 낮은 단독주택의 경우 시세의 100%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15억원 이상 주택이 13년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원은 9억원 미만 주택에 대해서는 모든 방안에서 일정 기간 1% 미만의 소폭 인상을 전제하고 가격 구간별 공시가격 균형을 회복한다는 방안을 담았다.

토론자들은 공시가격 산정 과정을 보다 투명하게 공개해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성달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 국장은 “경실련이 조사한 자료와 국토부의 발표 자료의 괴리가 너무 크다. 여러 차례 공동 검증 등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은 채 로드맵이 발표되면서 신뢰를 얻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고 지적했다.

공청회에 참석한 공시가격 실무진 정순미 감정평가사는 “공시가격 인상으로 민원이 폭증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과거 참여정부 시절 세 부담 상한을 낮춤으로써 반발을 줄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 중산층까지 보유세 상한이 10~20%까지 늘어난 상황을 감안하면 세 부담 상한을 보다 줄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공시가격이 보유세 등 부동산 세제는 물론 건강보험, 기초연금, 부동산 가격평가 등 60여 가지 행정 업무의 기준이 되는 만큼 서민들의 부담이 늘어나지 않는 방안을 다각도로 검토 중이다.

중저가 1주택 장기보유자나 고령자에 대한 종부세 감면제도 등이 검토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홍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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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6일 월요일

[여성, 정치를 하다](13)‘성실’로 경제 살렸지만, 독선의 파국도 따라왔다

 장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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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 

11년간이나 총리직을 지킨 마거릿 대처의 성실함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위험한 독선이 영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1년간이나 총리직을 지킨 마거릿 대처의 성실함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위험한 독선이 영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 암송 경연대회에서 입상
교장은 “너는 참 운이 좋구나”
발끈한 아홉살의 마거릿은
“저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상 받을 만한 자격을 갖췄기에
수상자가 됐습니다”라고 대답
 

“내가 처음으로 가진 직업은 플라스틱을 만드는 공장의 개발과에서 일한 것이다. 소규모 실험 단계를 거쳐 새로운 플라스틱을 만들어낸 다음 어떤 용도로 사용하고 어디에 팔 것인지 생각하는 일이었다. 가끔 노동당 일원인 친구들에게 ‘난 너희보다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더 많아’라고 말하며 장난을 치고는 했다.”

마거릿 대처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구두 제조공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13세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고 일했다. 잡화상 점원으로 앞만 보며 생활한 소년은 이내 식료품점의 주인이 되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근면한 삶에 보상이 따른다는 종교적 신념도 깊었다. 감리교 교회의 평신도 설교자로 명성이 높았다. 지역에서 자수성가의 대명사로 통했던 앨프레드 로버츠는 중산층에 진입하자,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랜섬 시의회 의원을 거쳐 1945년에 시장이 된 앨프레드 로버츠의 둘째 딸은 아버지의 연설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1925년 영국 중부의 링컨셔 그랜섬에서 태어난 마거릿 대처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또래 집단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책을 읽거나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에서 일을 했다. 아홉 살 때 시 암송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마거릿 대처에게 교장 선생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너는 참 운이 좋구나”라고 하자, 마거릿 대처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는 그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수상자가 되었습니다”라고 맞받아쳤다.

마거릿 대처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또래 집단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책을 읽거나 일했다. 10대 시절의 마거릿 대처

마거릿 대처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또래 집단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책을 읽거나 일했다. 10대 시절의 마거릿 대처

그녀는 옥스퍼드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사립 기숙학교에 갈 형편이 아니었지만, 상황을 탓하는 대신 수업료가 낮으면서도 우수한 학생이 많았던 공립학교 케스티븐 앤 그랜섬 여학교를 선택했다. 옥스퍼드는 입학 자체도 어려웠지만, 등록금도 무척 높았다. 마거릿 대처는 부모님이 옥스퍼드 학비를 지원할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장학생 선발 시험에 응시했다. 1943년 10월 마거릿 대처는 옥스퍼드대학교 솜머빌 칼리지에 입학한다.

대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우선, 전공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화학보다는 정치학과 경제학에 관심이 갔다. 게다가 옥스퍼드의 친구들은 대부분 사립 기숙학교 출신이었고, 그들끼리는 대대손손 혈연과 지연으로 서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소외감을 느꼈다. 마거릿은 혼자 산책을 하거나, 교회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1946년 10월 마거릿은 옥스퍼드대학교 보수협회에 가입했다. 유서 깊은 정치토론 클럽인 옥스퍼드 유니언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여성 회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옥스퍼드대학교 보수협회에서 마거릿의 활약은 눈부셨다. 가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협회장이 된 마거릿은 보수당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회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옥스퍼드에서 만난 대부분의 친구들은 보수와 진보의 정치 성향을 떠나 마거릿의 뜻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마거릿은 주류 사회 안에서 평온한 삶을 살며 세련된 교양과 호사 취미를 은근히 자랑하는 친구들과 자신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인식하게 된다. “마거릿 대처에게는 언제나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이 연 파티에 참석한 불청객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그녀는 자신을 하찮은 집안의 출신으로만 보는 동문들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면서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도련님 같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월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해야 했다. 1947년 옥스퍼드를 졸업한 마거릿은 안경테와 필름 등을 생산하는 플라스틱 제조 회사에 취직해 1년 반 동안 근무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정치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1950년 런던 남동부에 위치한 닷퍼드의 보수당 지역구위원장 자리에 옥스퍼드 시절 지인이 마거릿을 추천했다. 그녀는 1950년 총선에 출마한다. 24세의 마거릿은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직접 찾아갔다. 우선 유권자들을 만나야 했다. 남성들만 출입 가능한 클럽이 즐비했던 시절, 여성은 종업원 이외에 입장이 되지 않자, 마거릿은 클럽에서 맥주 따르는 일을 하면서 남성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할 정도로 선거에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석패였다. 1951년 총선에도 도전했지만, 다시 낙선했다.

두 번의 실패를 겪은 마거릿은 선거운동 기간 중에 만난 데니스 대처와 1951년 12월에 결혼했다. 그는 아내의 능력과 야망을 높이 평가했다. 1953년 8월 쌍둥이를 출산한 마거릿은 선거를 치르면서 계획했던 일을 실천에 옮긴다. 정치인에게 법률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마거릿은 세금관계법으로 변호사 시험을 준비해 합격했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이 곧 정치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하루빨리 직업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

[여성, 정치를 하다](13)‘성실’로 경제 살렸지만, 독선의 파국도 따라왔다
보수당 대표 시절인 1975년 미국 백악관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1982년 북아일랜드를 방문한 마거릿 대처 부부 .

보수당 대표 시절인 1975년 미국 백악관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1982년 북아일랜드를 방문한 마거릿 대처 부부 .

세번째 도전 끝에 의원 당선
엘리트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
여성 의원 휴게실도 없던 의회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실력뿐
간명하면서 공격적 언어 구사
첫 여성 총리가 된 ‘철의 여인’
 

1959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마거릿 대처는 의회에서 법안을 발의할 때마다 주목받았다. 의회에 여성 의원을 위한 휴게실조차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엘리트 남성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의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실력뿐이었다. 그녀는 특히 연설에 공을 들였다. 간명하면서도 공격적인 정치 언어를 구사했다. 한편 지역구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년 후인 1961년 10월, 마거릿 대처는 연금국민보험부의 정무차관으로 임명된다. 36세의 최연소 차관 마거릿 대처는 보고만 받지 않았다. 복지 제도의 실효성을 다각도로 검토하며 현안을 직접 챙겼다. 대처는 1970년 교육부 장관에 취임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거릿 대처는 우리 모두의 머리를 합친 것보다 더 좋은 머리를 가졌어.”

하지만 보수당 에드워드 히스 총리의 경제 정책이 영국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자 1972년 노동당으로 정권이 교체된다. 마거릿 대처는 나라 살림이 국정 운영의 최우선 과제라는 교훈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1974년 보수당의 정책연구센터 부소장으로 취임한 마거릿 대처는 경제 이론들을 다각도로 분석하며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을 점검한다. 보수당이 영국 사회를 다시 이끌어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지만,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1974년 10월 보수당의 차기 대표 후보였던 키스 조지프가 “양육에 문제가 많은 하층 노동계급 미혼모의 출산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우려한다”고 발언한 것이다. 키스 조지프는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채, 기자들을 피해 다니기에 바빴다. 그가 후보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지만, 누구도 쑥대밭이 된 보수당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다. 마거릿 대처는 “내가 출마하겠습니다”라고 나섰다.

1969년 한 기자로부터 총리직을 꿈꾸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총리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제 모든 것을 헌신해야 하니까요”라고 답했지만, 마거릿 대처는 의회에 입성하면서부터 더 정확하게는 옥스퍼드 시절부터 영국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 않기로 한다.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남성 정치인들을 보면서 마거릿 대처는 “모든 것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지인들은 그녀에게 도박에 손을 대지 말라고 충고했다. 보수당 중진 의원들과 언론 매체들은 “모든 여성 정치인은 이류에 불과하다” “마거릿 대처는 여성일 뿐만 아니라 경력도 일천하다”며 그녀를 깔보았다. 재무부, 내무부, 외무부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당 대표도 총리도 될 수 없다는 논리로 마거릿 대처를 압박하기도 했다.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마거릿 대처는 아직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겁먹지 않았다.” 1975년 2월4일과 2월11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보수당 대표 투표의 승자는 마거릿 대처였다.

보수당 대표에 취임하자마자, 마거릿 대처는 조직 쇄신에 착수한다. 집권 정당이 되는 길은 오직 하나, 정책 개발에 있다고 판단했다. 경제 회생을 위한 감세 정책에 주력했다. 1979년 5월, 보수당은 압승했다. “총리직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발언했던 마거릿 대처는 10년 동안 절차탁마의 시간을 보내고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에 취임한다. 역대 최장 기간인 11년 동안 영국 총리로 재임하며, 마거릿 대처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신봉했다. 어떤 타협도 후퇴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책이 성공을 거둘수록 그녀는 대학 시절 가졌던 우월감에 다시 빠져들었다. 보수당 의원과 내각을 수반하는 장관들이 부유한 집안에서 “물러 터지게” 살아와 아무것도 모른다며 그들을 자주 야단쳤다. 본인은 피나는 노력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보수당 의원들과 각료들은 너무 쉽게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노동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 출신인 자신이 노동당의 귀족들보다 노동을 훨씬 잘 안다고 확신했다.

마거릿 대처와 남성 엘리트 정치인들은 혐오와 차별적 언어를 주고받았다. 총리가 물가를 언급하면 실물경제에 정통하다고 평가하는 대신 ‘야채 가게’ 출신은 어쩔 수 없다고 비아냥거렸다. 마거릿 대처의 독선도 나날이 거칠어졌다. 총리가 아니라 여왕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정치적 여정을 함께해온 최측근들에게조차 모멸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1990년 11월, 부총리 제프리 하우는 “더 이상 국민의 이익과 총리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갈등할 수 없다”는 말로 대처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결국 제프리 하우의 공개 비판은 3주 후 대처 정부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990년 11월20일 실시된 투표에서 대처는 뒤늦게나마 세론(世論)을 알게 되었다.

이틀 후인 1990년 11월22일 오전, 마거릿 대처는 사임을 발표하며 보수당의 승리를 기원했다. 자진 사퇴 결정이야말로 마거릿 대처의 정치생명을 연장시켰다. 1997년에는 후배들의 간청으로 보수당 총선을 지원했고,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마거릿 대처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정계에 입문한 이후로 하루에 잠을 4시간 이내로만 자면서 정치 현안과 행정 업무를 완벽하게 파악하고자 했던 마거릿 대처의 성실함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위험한 독선이 영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는 자력갱생의 미덕과 독선의 파국을 함께 선사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13)‘성실’로 경제 살렸지만, 독선의 파국도 따라왔다

성균관대학교에서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0270600025&code=910100#csidx01c94c3e85fbb458b3d12f585d691e1 


'살고 싶으면' 석탄발전에서 탈출하라

 [함께 사는 길] "'탈석탄법'을 제정하라"


"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추세였던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2018년을 정점으로 2019년부터 감소추세로 돌아섰습니다. 초미세먼지도 줄어서 연평균 농도가 개선되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늘어났습니다."


제1회 '푸른 하늘을 위한 국제 맑은 공기의 날'이었던 9월 7일,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정부의 기후변화와 미세먼지 대응 노력을 강조했다. '푸른 하늘을 위한 국제 맑은 공기의 날'은 '대기 환경과 기후 변화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관심을 높이고 대기오염 저감 활동에 대한 범국가적 참여를 유도'한다는 취지로 지정한 날로 지난해 9월 열린 '기후행동 정상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유엔이 이를 공식 채택한 뒤 올해 첫 기념일을 맞았다.


올해 코로나 감염병 확산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뿌연 공기가 가시고 푸른 하늘이 열렸다. 하지만 기후위기로 인한 '빨간 지구'는 더욱 심각해졌다. 코로나 감염병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도 대기 이산화탄소 농도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올해 8월 기준, 지구 평균 이산화탄소 농도는 414ppm(100만분의 1)을 기록했다. 산업화 이전인 1850년에 비해 47% 증가한 수치다. 

석탄발전 퇴출한다면서 수명 30년은 보장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세계 감염병 대유행부터 최장기간 이어진 장마와 태풍까지, 기후위기는 당장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비상사태로 치닫고 있다. 한국의 온난화 속도는 세계 평균보다 2배 이상 빨라 폭염 사망을 비롯한 기후 재난 위험이 급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푸른 하늘의 날' 기념일에 초강력 태풍 '하이선'이 덮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단기적 대기오염 대책에 안주하며 기후위기에 정부가 무대응한다면, 시민 생명과 안전은 더욱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1.5℃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탈탄소 전환에 대한 정부의 정책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현행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1.5℃는커녕 3℃ 이상 온난화로 이어지는 '매우 불충분'한 목표라는 국제사회의 혹평을 받는 처지다.


 

가장 큰 역설은 '푸른 하늘의 날'을 제안한 한국이 대기오염과 기후변화 주범인 석탄발전에 중독된 대표적 국가라는 사실이다. 한국은 현재 석탄발전소 60기가 가동되고 있고 현재 7기가 추가 건설 중이다. 석탄발전은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30%를 배출하는 최대의 배출원이며, 연구에 따르면 석탄발전에서 배출되는 미세먼지로 해마다 1천 명이 조기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도 석탄발전의 문제점에 대해 모르지 않는다. 더구나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겠다"라고도 말한다. 동일한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는 신규 석탄발전소 허가를 전면 금지하였으며, 이미 폐쇄한 노후 석탄발전소 4기를 포함하여 임기 내 10기를 폐쇄하고, 장기적으로 2034년까지 20기를 추가로 폐쇄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태양광과 풍력 설비는 2025년까지 지난해 대비 세 배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럼, 한국은 석탄발전으로부터 제대로 '탈출'하고 있는 것일까.


 

대통령의 연설을 보면, 한국이 석탄발전을 과감히 줄이는 정책을 펴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그건 착시다. 대통령은 석탄발전소를 2034년까지 20기를 추가 폐쇄하겠다고 했지만 석탄발전소의 가동 수명을 30년으로 정하고, 수명이 만료되는 발전기를 순차적으로 폐지하겠다는 방침에 근거한 말이다. 석탄발전소의 폐쇄에 대한 공식적 규칙이 없었던 과거보다는 나은 것일까. 아마 10년 전이었으면, 그렇게 평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후위기로 온실가스 배출을 극도로 억제하고 줄여나가야 할 시점인 현재로선 전혀 그렇지 않다.


 

1.5°C 지구 온난화 방지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 세계적으로 204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늦어도 2030년까지 석탄발전을 완전히 퇴출해야 한다는 게 과학적 명제다. 정부 계획대로 수명을 30년으로 설정해 석탄발전소를 가동하게 한다면, 온실가스 배출량은 1.5°C 목표 대비 3배를 초과할 전망이다. 특히 향후 온실가스 급증의 원인이 될 7기의 건설 중 석탄발전소에 대해서 정부는 수수방관할 뿐이다. 실제 정부 예측을 보더라도, 석탄발전은 15년 이후에도 최대의 발전량 비중을 유지할 전망이다. 기후위기 비상사태를 목도하는 현재, 석탄발전의 '수명 30년 보장'이 아닌 조기 퇴출을 촉진해야 하는 이유다.


 

▲ 환경운동연합은 지난 9월 9일 국회 앞에서 '석탄발전 퇴출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했다. ⓒ서울환경운동연합

석탄발전 퇴출 위한 탈석탄법 제정해야


 

환경운동연합은 8월 26일 '탈석탄법 제정 캠페인'을 선포하며 "국회는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 금지와 '2030 석탄발전 퇴출 로드맵' 수립을 포괄한 탈석탄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이날 회원 1233명이 선언자로 참여한 '석탄발전 퇴출을 촉구하는 환경운동연합 1천인 선언'을 발표해 △2030 석탄발전 퇴출 로드맵 수립 △환경 과세 강화 및 환경급전 제도화 △석탄발전 사업에 대한 공적금융 지원의 중단 △건설 중 석탄발전의 중단 및 지원 근거 마련을 요구했다. '탈석탄법'이 담아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석탄발전 퇴출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올해 말까지 1.5℃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장기 저탄소 발전전략'을 유엔에 제출해야 하는 가운데 전국 모든 광역기초지자체가 기후 비상 선언을 선포했다. 아울러 2050년 온실가스 순배출 제로 목표와 2030년 목표를 강화하자는 국회 '기후위기 비상선언' 결의안이 상임위를 통과하면서 진전된 온실가스 감축 목표 설정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졌다. 석탄발전을 운영 중인 유럽 15개국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석탄발전의 단계적 폐지 방안을 공식화했고 대부분 2030년 이전까지 석탄발전의 퇴출을 완료할 계획이다.


한국도 2030년까지 석탄발전을 퇴출하기 위한 로드맵이 마련돼야 한다. 폐쇄되는 석탄발전소의 자리만큼 에너지 효율 개선과 풍력, 태양광 등의 재생에너지 확대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석탄발전은 조속히 퇴출하되, 지역 사회와 노동자의 일자리는 보호하고 안정화해야 한다. 석탄발전에 의존하던 지역이 에너지 전환에 기반을 둔 일자리와 경제로 회복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 대책이 선행돼야 한다.


 

석탄발전의 퇴출을 제도적으로 정한 해외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네덜란드 의회는 2019년 12월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의 일환으로 석탄발전 금지법(Law on the prohibition of coal in electricity production)을 제정해 2025년부터 석탄을 이용한 발전시설을 전면 금지하는 것을 입법화했다. 핀란드는 2029년 5월 1일 이후로 석탄을 연료로 한 전기 및 열 생산을 전면 금지하는 법을 2019년부터 발효했다. 정책적 의지만 있다면 방안은 만들면 된다.


둘째, 석탄발전의 비용에 환경오염을 제대로 부과해야 한다. 이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석탄발전이 과도하게 가동되는 '시장 왜곡'을 바로잡고 효과적 감축을 유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현행 전력시장은 발전원에 대해 아무런 기후변화 비용이 반영되지 않는 구조다. 그나마 배출권 거래제가 시행 중이지만, 배출권 가격도 급전 순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다. 오로지 연료비만 따지는 '경제급전'만 작동 중이다. 온실가스 배출 비용을 전력시장 급전 순위 결정에 반영하는 '환경급전'을 조속히 시행할 필요가 있다. 배출권 유상할당 비율과 화력발전의 배출원단위 기준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아울러 석탄발전이 미세먼지의 다배출 오염원인 만큼, 대기오염 세제도 높여야 한다. 발전용 유연탄에 대한 개별소비세 세율을 대기오염 환경비용에 충분히 반영하도록 2배 수준으로 인상하는 개별소비세법 개정이 요구된다.


 

셋째, 석탄 사업에 대한 공적금융 지원을 중단하고 금지해야 한다. 2015년 노르웨이 연기금은 기후변화 대응 및 윤리적 투자를 위해 석탄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 중단과 철회를 선언했다. 전 세계적인 파슬 프리 캠페인(Fossil Free Campaign)에 1000개 이상의 투자기관이 동참했다. 반면, 한국산업은행 등 공적 금융기관은 최근 10년간 국내외 석탄발전 사업에 총 23조 원 규모의 금융을 제공하며 석탄 사업에 대한 주요한 자금 제공처 역할을 담당했으며, 석탄발전에 대한 금융 지원의 축소와 중단을 선언한 바 없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국민연금 등 공적금융 기관의 사업 업무에 사회, 환경, 지배구조 등 사회책임을 고려하고 석탄발전 투자를 금지하는 기준을 포함시켜야 한다. 아울러 기후변화 영향이 큰 프로젝트에 대한 금융 지원을 결정하는 경우, 기후변화 비용을 포함한 경제성 평가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건설 중인 석탄발전 사업을 중단하고 전환을 지원해야 한다. 현재 강원도 삼척과 강릉, 경남 고성, 그리고 충남 서천 등 지역에 건설 중인 7기의 대규모 석탄발전 사업이 중단 없이 그대로 추진돼 향후 30년 동안 가동된다면 연간 5160만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할 것으로 예측된다. 석탄발전소 건설과 장거리 송전선 입지로 인한 생태계 파괴와 주민 갈등도 더욱 심화되는 상황이다.


 

이대로 추가 석탄발전소를 건설하기보다는 매몰비용에 대한 보전을 통해서라도 중단시키는 방안이 공익적으로 편익이 높다. 방법이 없지 않다. 현행 전기사업법과 전력산업기반기금을 통해 석탄발전소를 포기하는 경우 보상책을 제공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현재 건설이 진행 중인 석탄발전소를 멈춰 세우기 위해서는 강력한 의지를 모아야 한다. 국회는 건설 중 석탄발전 사업의 중단 및 전환을 위한 국회 결의안을 채택하고 지원 대책을 마련하는 데 머리를 맞대야 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02612122427271#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스물여섯, 그는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동생의 '책임자'다

 [조기현의 영 케어러 ③] 알코올 의존증 동생을 돌보는 청년형수씨의 이야기

20.10.27 07:07l최종 업데이트 20.10.27 07:07l
'가족 돌봄'을 말할 때 떠오르는 얼굴들은 '중장년'입니다. 하지만, 분명 한국 사회에도 아픈 부모나 가족을 돌보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영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들을 지칭하는 '영 케어러'(Young Carer)라는 개념이 있을 정도지만, 한국에서는 그저 '효녀', '효자'로 불릴 뿐 사회적 주체로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직접 돌본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작가가 자신과 같은 한국의 영 케어러들을 찾아나섭니다. 돌봄이 형벌이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더 많은 청년들의 경험담을 기다립니다. 
(제보 - youngcarer90@gmail.com, jeor23@ohmynews.com)[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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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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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얼굴에 주먹이 날아들어 정신이 아득했다. 김형수(가명)씨가 다시 술을 먹겠다고 방을 나서려는 동생을 몸으로 막아선 직후였다. 방 안에 갇힌 동생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친다, 친다" 소리치며 형수씨를 겁줬다. 형수씨의 등 뒤에 서있던 외할머니는 "너한테 술 판 곳 찾아서 경찰에 신고할 거야!"라며 소리쳤다. 그 말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주먹이 뻗어 나왔다.

주먹을 날린 후에도 동생은 더 날뛰었다. 형수씨는 아득한 정신을 서둘러 부여잡았다. 그는 항상 정신이 아득해지는 일 앞에서도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하는 '책임자'였다. 동생을 눕혀 온 몸으로 짓눌렀다. 평소에는 자신보다 더 힘이 셌지만, 지금은 만취 상태였다. 그렇게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동생이 벌떡 일어났다. 비틀거리면서 부엌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형수씨가 돌아봤을 때 동생의 손에는 끝이 번뜩이는 부엌칼이 쥐어져 있었다. 눈앞에 거슬리는 무엇이든 찌르려는 듯 형수씨를 노려봤다.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었다. 동생은 이미 여러 번 칼을 빼들었다. 하지만 형수씨를 목표물로 여겼던 적은 처음이었다. 동생 19살, 그가 21살이 된 때였다. 그날 동생은 부엌칼로 형제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그때 마음이 아예 떠났어요. 얘랑은 아무 형제 관계도 아니고, 남남이구나 싶었죠."

알코올 의존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언젠가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가족 돌봄의 어려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프로그램의 진행자에게 아버지를 돌보면서 힘들었던 순간들을 말했다. 가족 돌봄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에는 벅차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대부분 방송에서는 힘든 순간을 하나의 질병으로 환원하기를 원한다. 바로 '치매'다. 국가적 관심사이면서, 실제로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를 돌본 10년이란 기간의 전반부는 치매가 아니라 알코올 의존으로 고생했다. 알코올 의존으로 인한 아버지의 당뇨, 환각, 신부전 등이 나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코올 의존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순전히 개인의 '의지' 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알코올 의존은 마음만 굳건하게 먹으면 해결될 일처럼 느껴진다. 만약 그런 마음조차 없다면 알코올로 인해 몸 안에서 벌어지는 재난은 스스로 감당할 몫이라고 여기게 된다. 

실제로는 스스로 감당하지 않는다. 많은 가족들이 가족 구성원의 알코올 의존 때문에 고생한다. 내가 만나본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도 대부분 알코올 의존으로 돌봄의 전조를 감지했다. 질병은 이미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족들은 알코올 의존을 겪는 부모나 형제가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집에 있는 술을 버리거나 외출을 제한하기도 하고, 술을 끊을 수 있는 동기를 만들기 위해 마음의 정성도 쏟아본다. 그럼에도 당사자를 제어하지 못하고, 그가 술을 꾸준히 마시면서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가 질병이 터져 나오면,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돌봄을 하게 된다.

지난 10월 15일, 인천 한 카페에서 95년생 김형수씨를 만났다. 형수씨는 알코올 의존이 한 가족에게 어떤 경험을 전해주는지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 청소년 기관을 통해 그를 소개받았다. 그는 주변에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숨기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는 한동안 동생의 알코올 의존을 해결하기 위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지 도움을 요청했다. 다만 세상에는 알코올 의존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창구가 많지 않았다. 알코올 의존은 세상의 관심 밖이었다. 다행히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던 사회복지사가 그와 나를 연결해줬다.

동생의 첫 번째 책임자

때때로 새벽이면 동생이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어서 무시하고 잠들고 싶었지만, 그런 전화를 한 번 받으면 긴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졸음이 달아난다. 그럴 때면 형수씨는 풀어진 정신을 주섬주섬 챙기며 경찰이 알려준 위치로 향했다.

어느 날은 집 앞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빨간 소주 4병을 쌓아두고 쓰러져 있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대중교통으로 1시간이나 되는 다른 동네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동생은 늘 혼자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면 순순히 형의 말을 듣지 않았다. 부축하려는 형수씨의 손은 뿌리치기 일쑤였다.

"그럼 보호자 분 왔으니까 저희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생과 실랑이를 벌이면 옆에서 지켜보던 경찰이 늘 하는 말이다. 형수씨도 경찰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동생 곁에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었다. 새벽녘에 해가 뜰 때면 동생에 대한 형수씨의 기대는 저물었고,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는 언제부터 동생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왜 그에게 의지가 사라졌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 동생은 똑똑했고 체격도 좋았다. 어른들은 형수씨보다 동생을 더 예뻐했다. 그는 내성적이었고 늘 방어적이어서 친구를 사귀기보다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게임을 했다. 반면 동생은 늘 사교적이어서 친구들이 넘쳐났다. 

그런 동생이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소위 '비행 청소년' 집단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술과 담배는 늘 지니고 다니는 명찰 같은 것이었다. 후배들 돈을 갈취하거나 패싸움을 하는 건 일상이었다. 모두 집 밖에서 벌이는 일들이었다. 경찰서나 학교에서 연락이 오는 날이 아니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조차 몰랐다. 
 
 그는 언제부터 동생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왜 그에게 의지가 사라졌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동생은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그는 언제부터 동생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왜 그에게 의지가 사라졌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동생은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영화 파수꾼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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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제는 초등학교 때부터 쭉 외갓집에 살았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아버지는 중학교 때 한 번 보고 만난 적이 없다. 결혼 생활의 생활비로 썼던 비용이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빚으로 남았다. 이혼하고 지금까지, 어머니는 경기도 등지에 있는 공장을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한다. 형수씨가 같은 집에 살고 밥을 먹고 생활한 사람은 할머니, 외삼촌 둘, 그리고 동생이었다.

할머니는 동생에게 늘 마음을 썼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폭력적인 동생을 할머니가 제어할 수는 없었고, 만취해서 여기저기 드러누워 있는 걸 쫓아다닐 수도 없었다. 큰 외삼촌과 막내 외삼촌 모두 40대 중반을 넘겼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큰 외삼촌도 알코올 의존이 심해서 스스로를 챙길 수도 없는 상태였고, 막내 외삼촌이 투잡을 뛰며 집안의 모든 생계와 부양을 담당했다. 외삼촌들은 매번 사고만 치고 다니는 동생을 곱게 보지 않았다. 

형수씨가 동생이 벌인 일들에 첫 번째 책임자가 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선택하고 자시고 할 게 아니었다. 19살 때부터 밑 빠진 독에 물을 붓 듯이 동생이 벌이는 사고를 수습하러 다녔다. 그러다 그가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고가 커지면 가족들에게 그 사항을 보고했다. 그럴 때면 무슨 명절처럼 어머니, 할머니, 외삼촌들, 자신이 한 자리에 모였다.

"안 마셔볼게" 단 한 번의 다짐 

20살이 된 형수씨는 대학에 들어가 학생회 활동에 열중했다. 사회복지 관련 학과였다. 어떤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 협업하는 과정이 좋았다. 하지만 저녁 6시가 넘으면 여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형수야, 미안한데 집에 일찍 들어가서 동생 좀 봐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동생을 돌보지 못하니, 형수씨라도 잘 돌봐주기를 바랐다. 반면 형수씨는 동생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학생회 활동에 더 집중하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저녁이 돼서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거나 맛있는 걸 먹으러 갈 때, 그는 어머니 전화를 받고 몸을 일으켜야 했다.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고, 자신도 동생의 부모였다면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가 저녁마다 자리를 뜰 때면 아쉬워하던 친구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으레 '집에 가는 애'라고 여겼다. 그렇게 이 집에 가면 동생이 술 먹으러 나가지 못하게 지키는 게 전부였다. 동생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뭐가 그렇게 힘드니? 왜 계속 술을 마시니?"

그런 질문에 동생은 곧바로 입을 닫았다. 너무 많은 게 힘들어서 말을 않는 것인지,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려는 질문이라고 느낀 것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형수씨는 동생의 마음의 문에 노크하듯이 '술 먹지 말고 좀 더 잘 살아보자'는 잔소리밖에 할 수가 없었다. 삶을 포기한 동생과 동생의 삶을 놓지 못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형수씨는 혼자 조난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안 마셔볼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생이 그의 잔소리에 응답했다. 시커멓게 빛 하나 없는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어디 등대라도 발견한 것 같았다. 동생의 의지를 함께 메워줄 사람들을 찾았다. 서둘러 알고 지내던 청소년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고, 집 근처에 있는 사회복지관의 청소년 상담사를 소개받았다. 

하지만 동생의 말 한마디에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걸까. 동생은 상담사의 전화에 잠수를 탔고, 다시 만취해서 집에 돌아오길 반복했다. 집에서 만취해 있던 큰 외삼촌과 밖에서 만취해 들어온 동생은 마주치면 크게 싸웠다. 외삼촌은 욕을 하면서 동생을 때렸고, 동생은 부엌에서 칼을 뽑아들며 외삼촌에게 욕을 퍼부었다. 기력도 없는 할머니와 형수씨가 외삼촌과 동생을 뜯어 말렸다. 알코올 의존이라는 구멍이 점점 커져서 집안 전체가 꺼질 판이었다.

기대를 거는 순간 상처를 입는다
 
  동생은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  동생에게 기대를 거는 만큼, 더 감당하기 힘든 파국이 뒤따랐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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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잘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아예 접을 수는 없었다. 그건 애틋한 마음으로 거는 기대가 아니다. 모든 사태가 동생이 의지만 있으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 인식에 가까웠다. 기대는 일종의 투자와 비슷하다. 내가 이만큼 기대를 걸면 얼마만큼 보상이 따를 것이라는 마음의 공식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노력하고 계기를 만들어주면 알코올 의존을 겪는 사람이 도의적으로라도 성의를 보일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형수씨의 기대는 번번히 상처로 끝났다. 그는 19살 때부터 8년간 동생의 알코올 의존을 돌보며 온몸으로 이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날 동생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을 때, 차라리 일이라도 하면 정신을 차리겠거니 했다. 하지만 편의점 카운터에 앉아서도 만취해서 정신을 잃었다. 동생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친구들은 동생이 잠든 사이 물건들을 싹 다 훔쳐갔다.

분노한 점주는 동생과 친구들을 한데 묶어 특수절도죄로 고소했다. 형수씨는 동생이 감옥에 들어가서 정신 차릴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어머니는 기어코 동생의 합의금을 마련해줬다. 1000만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큰 외삼촌과 갈등이 극에 달하자 동생은 집에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그때 형수씨는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디 고시원 방이라도 얻어 혼자 살아보면서 정신을 차릴 기회였다. 어머니에게 얘기해서 간신히 동생이 살 고시원을 구했다.

거기서 동생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른다. 병원 응급실에서 동생이 급성 췌장염으로 입원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술만 먹었겠구나 싶었다.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으면 계속 장기가 아프다고 했던 동생의 말도 떠올랐다.  

"의사가 막 다그쳤어요. 췌장염은 가족들이 잘 안 돌봐주면 죽는 거라고. 가족들은 이미 알코올 의존으로 다 지쳐 있는데."

동생에게 기대를 거는 만큼, 동생이 정신 차릴 계기를 마련한 만큼, 더 감당하기 힘든 파국이 뒤따랐다.

술 뒤에 삶과 가족

"좌절감도 있지만, 동생에 대한 분노도 너무 커요. 얘도 못 바꾸고 내 마음도 어떻게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과연 내가 사회복지 분야의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요. 내가 일하다가 동생이랑 비슷한 비행 청소년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지금 대학교 4학년이다. 원래는 사회복지 전공과 청소년 기관 활동 경험을 살려서 청소년 사회복지 쪽으로 걸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는 내내 동생을 돌보면서 겪은 경험들이 그의 발목을 낚아챈다.

여전히 동생이란 사람을 감당할 수 없고, 마주하는 것도 힘이 부친다. 또다시 전화벨이 울리며 경찰서나 병원에 가는 악몽이 시작될 것만 같다. 어쩌면 첫 번째 책임자의 임기는 동생이 죽을 때까지일지도 모른다.

동생은 급성 췌장염을 겪은 이후에도 계속 술을 몸속에 들이부었다. 몸은 만성 췌장염과 당뇨로 악화됐고, 지금은 병원에 입원했다. 몸이 악화되는 걸 계기삼아 그동안 미뤄두었던 정신병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의사는 이미 동생의 뇌가 "술에 절여졌다"고 말했다. 통제력을 아예 잃은 상태라는 것이다. 동생은 올해 초 퇴원을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가 터져서 아직 퇴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퇴원하는 날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 형수씨는 초초하다.

10대가 알코올 의존을 겪는다는 사실은 많이 이들에게 낯설 수 있다. 실제로 10대의 알코올 의존 비율은 다른 연령층에 비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19년 건강보험 심사평가원 '알코올중독 현황' 자료에 따르면, 10대 알코올 의존증 환자는 2014년 1588명에서 2018년 2106명으로 약 33%나 늘었다.
 
 10대 알코올 중독 현황.
▲  10대 알코올 중독 현황.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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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알코올 의존증 환자 증가의 원인으로는 청소년이 겪는 과도한 스트레스, 술에 관대한 음주문화, 술을 산 청소년은 처벌 받지 않고 사업주만 처벌받는 구조 등이 언급된다. 술에 대한 교육, 예방, 처벌 등을 강화돼야 청소년 알코올 의존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조금은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술은 여러 가지 표현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알코올 의존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술을 둘러싼 문화를 점검하는 것과 더불어 술 뒤에 감춰진 삶을 들여다봐야한다. 모든 중독과 의존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삶의 맥락에서 따라가 보지 않으면 중독과 의존은 술이 아니라 또 다른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중독과 의존이 벌이는 사고들을 수습하는 가족이 있다. 형수씨는 말했다.

"병원에 가두는 것 말고 알코올 중독자를 케어할 수 있게 돕는 제도가 구체적으로 없어요."

형수씨와 나는 긴 침묵을 나눴다. '알코올 의존'이라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술 뒤에 감춘 삶을 되짚어줄 사회가 우리에겐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