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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6일 일요일

세월호 조사권 무력화, 집요하고 끔찍하다


[세월호 특별법 연속기고①] 세월호 특별법 논의를 투명하게 공개하라 14.10.26 20:31l최종 업데이트 14.10.26 20:31l김혜진(pspd1994)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관한 여·야 협상이 또다시 질곡에 빠졌습니다. 새누리당은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수사와 기소를 가로막은 데 이어,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권마저 흔들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독립적인 진상조사위원회의 구성은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는 연속칼럼을 통해, 세월호 가족들과 530만 국민의 염원인 특별법을 후퇴시키려는 움직임을 낱낱이 짚어보고 이를 극복해나갈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기사 관련 사진 ▲ 새누리당 이완구, 새정치민주연합 우윤근 원내대표가 지난 14일 오전 국회에서 만나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포함한 국회 운영 방안을 논의하기 앞서 악수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4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 우리가 알 바는 아니다. 하지만 국민 304명의 생명이 바닷속으로 사라져가던 그 시각, 대통령이 제대로 보고를 받지 못했고 따라서 적절한 조치를 지시하지 못했다면, 국민들은 왜 그랬는지를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검찰수사 결과가 발표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것이 의문투성이다. 국정원이 세월호의 실소유주일지 모른다는 의혹에 대해 검찰은 국정원의 해명을 받아쓰기 하면서 '국정원이 믿으라니 그냥 믿으라'고 했고, 통영함은 왜 세월호를 구하러 갈 수 없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왜 해경은 미군과 해군을 돌려보내고, 민간인 잠수사를 통제했는지도 알 수 없다. 유가족이라면, 그리고 합리적인 시민이라면 이런 의혹을 밝히기 위해 최고책임자가 받은 보고와 조치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당연하다. 단지 그 이유였다. 그런데 우리가 밝혀야 할 진실에 '청와대'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참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회는 하나씩 차단 당했다. 올해 6월 국정조사가 진행될 때 청와대는 185건의 자료요청 중 단 한 건도 제출하지 않았다. 8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청문회는 청와대 측 증인채택 문제로 공방을 벌이다가 결국 무산되었다. 검찰은 구조실패의 최종 책임을 123함정 정장에게 물었을 뿐 소위 '윗선'은 수사도 하지 않았다. '행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있으나 형사상 책임을 지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면 감사원의 감사에서라도 행정적 책임이 드러나야 했으나 감사원도 청와대 감싸기에 바빴다. 감사원은 5급 공무원 두 명을 보내 단 하루 동안 청와대 행정관 4명만 만나고 돌아와서 문제가 없다고 보고했다. 심지어 4월 16일 당일 대통령의 행적과 관련하여 청와대 답변서에 없는 내용을 임의로 추가하여 문제가 없는 것처럼 꾸민 정황도 보인다. 이 과정을 지켜본 시민들은 '독립적인 기소권과 수사권을 갖는 특별위원회'만이 진실을 밝힐 수 있겠다고 확신하게 됐다. 그런데 특별법을 만드는 과정에도 청와대가 개입하여 어지럽히고 있다. 9월 16일 세월호 특별법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중 대통령은 '삼권분립과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면서 특별위원회에 기소권과 수사권을 주면 안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결국 특별위원회에 기소권과 수사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포기하고 특검제도를 중심으로 논의한 세 번째 협상과정에서도 '협상이 정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발언해 유가족과 여야의 합의로 특검 후보를 선정하는 논의도 무산시켰다. 수사권·기소권 위헌이라더니 '조사권'마저 흔드나 기사 관련 사진 ▲ 묵념하는 세월호 유가족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에 앞서 묵념을 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진실에 다가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었다. 그런데 '독립적인 기소권과 수사권'을 여야 합의로 무력화시킨 청와대는 이제 '독립적인 조사권'에까지 손을 대려고 한다. 세월호 특별법에서 여야 모두가 합의한 바는, 특별위원회 위원을 모두 17명으로 구성하고 위원장을 그 내부에서 논의하여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청문회를 여는 권한, 실지조사, 동행명령권 등 여러 가지 조사권을 진상조사위원회에 부여했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조사권도 무력화하려고 한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자고 하는 등 위원장을 청와대의 의도대로 만들려고 하고, 청문회와 실지조사와 동행명령권 등에 대해서 손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언론에 슬슬 흘리고 있다. 정말로 집요하고 끔찍하다. 가족들의 죽음을 가슴에 묻지 못한 채 200일 동안 '왜 죽었는지 밝혀내겠다'면서 거리를 떠돈 가족들의 아픔이 아직도 지속되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로도 재난과 참사가 계속 벌어지고 시민들은 국가가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며 비참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해서든 진실을 덮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정부 여당의 이러한 태도는 도대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국회, 언론, 검찰, 감사원, 청와대에 묻는다. 나라가 자신을 살려줄 것이라고 믿으며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다'가 죽음을 당한 304명의 고통보다 대통령이 더 중요한가. 청와대가 무엇을 했는지 묻는 시민들의 상식적인 질문을 가로막기 위해서, 유가족들의 마음에 못을 박고, 진실을 덮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특별위원회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정치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 자리에 있는가. 특별위원회 조사권의 독립성마저도 훼손하는 안을 슬그머니 언론에 흘리고, 일부 언론들은 조사권에 대해서 위헌이니 무리한 요구이니 하면서 맞장구를 치고, 그러다가 다시 여야가 가족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야합하는 행위가 반복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요구한다. 양당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특별법 논의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특별법 논의가 암흑상자 속에서 진행되는 한, 특별위원회의 권한은 청와대의 권력 아래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덮으려 해도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가족들의 죽음을 가슴에 품은 이들, 그 아픔에 공명하며 적어도 이번 일은 결코 흘려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시민들은 아직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번 세월호 특별법 협상에서 독립적인 기소권과 수사권, 조사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진실을 규명할 것이다. 진실을 감추려 했던 이들도 그 분노를 잠재우지는 못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는 김혜진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입니다. * 이 기사는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홈페이지(http://sewolho416.org)에도 동시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종이폭탄' 그 이름 대북전단


[친절한 통일씨] 대북전단으로 본 남북관계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10.26 21:42:04 트위터 페이스북 삐라. 순화해서 전단이라고 부른다. 2007년 경찰이 북한 불온선전물 수거처리 규칙을 폐지해 없어졌지만 누구나 한 번쯤 북한에서 뿌린 전단을 발견해 경찰서에 신고하면 학용품을 받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심리전의 하나인 전단살포는 한국전쟁은 물론 휴전 이후에도 남북이 서로 살포하면서 자극해왔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남북관계가 해빙기를 맞자 국가차원의 전단은 보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최근 일부 탈북자 단체와 보수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로 남북관계가 어수선하다. 지난 25일 한 보수단체가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하려 하자 지역주민이 들고 일어나 반대했다. 앞서 지난 10일 연천 지역에서는 대북전단으로 총탄이 오가는 위기상황까지 갔다. 종이에 불과한 전단이 무엇이기에 전쟁 일촉즉발 상황까지 만들어 내는가. 전단이 어떤 의미이고 대북전단을 막을 방법은 없는가. 전단의 의미와 역사 그리고 활용 전단을 우리는 '삐라'라고 부른다. '삐라'는 영어 'bil'에서 유래된 말로 일본어로 '비라'라고 발음, 우리에게는 '삐라'가 더 익숙하다. 하지만 정확한 영어식 표현은 'leaflet'이고, '전단'으로 순화해 부른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삐라'를 '전단, 혹은 전단의 북한말'로 정의한다. 합동참모본부가 발행한 '합동.연합작전 군사용어사전'에는 '심리전의 한 수단으로 항공기나 기타 수단에 의해서 적지에 살포하는 삐라'라고 설명한다. 여기서는 '삐라'라는 잘못된 일본어 표기가 아닌 우리말로 순화된 '전단'으로 통칭하고자 한다. ▲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을 상대로 뿌려진 유엔군의 전단. [자료출처-'한국전쟁기 맥아더사령부의 삐라 선전정책'(이상호, 2011)] 독일 언론학자 베르너 파울슈티히는 전단을 두고 "다양한 텍스트와 구성양식을 매우 상이한 이용 방식 및 기능으로 묶어주는 매체"라고 성격을 규정, △간결함, △구체성, △감각적인 명료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화, △상호대조, △빠른 생산성, △저렴한 가격, △임시적 성격, △호소적인 구조, △저장 기능, △통제 불가능성 등의 특징을 지녔다고 분석했다. 즉, 전단은 장문의 글이 아니라 상대의 심리를 단번에 자극해 국민적 동요를 불러오게 하기 위해 매우 간단히, 그리고 자극적이고 호소력 짙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 그래서 시각적 효과를 위해 그림과 사진을 활용, 이를 두고 전쟁미술로 분류하기도 한다. 전단은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대체로 일반전단, 화폐전단, 안전보장증형 전단, 벽보 및 포스터형, 연 전단, 수기형 전단, 플랜카드와 에드벌룬, 신문.잡지.포스터.패러디형 전단 등으로 나눈다. 내용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는데, '호소형 전단'은 읽는 이에게 호소하는 형식의 그림과 문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읽는 즉시 내용을 즉각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림을 주로 활용한다. '뉴스형 전단'은 객관적 시각에서 사실만을 전달하는 내용을 담아, 마치 신문을 읽는 기분을 준다. '전술형 전단'은 주로 전쟁 당시 군인을 선동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작되는데 '안전보장증형 전단'이 이에 해당된다. ▲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 살포한 전단. [자료출처-koreanwar-educator.org(좌), 위키피디아(우)] 전단은 대체적으로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규격으로 제작되는데, 한국전쟁 당시에는 10x8cm 크기에서 A4용지(26.5x19cm)까지 6종류의 크기로 제작됐다. 최근 살포되는 대북전단도 이와 비슷한 크기이고, 인쇄기술의 발달로 물에 젖지 않는 얇은 폴리비닐로 만들기도 한다. 전단살포 방법도 다양하다. △비행기에 탑재해 투하하는 지폭탄(종이폭탄), △헬기나 수송기로 전단뭉치를 공중에서 살포하는 방법, △대포에 전단을 넣어 살포하는 지폭탄, △풍선 등 기구에 매달아 부력을 이용한 방법, △연이나 하천 및 해류를 이용하는 방법, △차량이나 직접 인편을 통한 방법, △인터넷 등 사이버상에서 살포하는 방법 등이 있다. 전단은 총력전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2차 세계대전부터 전쟁도구로 쓰였다. '전쟁 당사자가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전쟁에 임한다'는 의미의 총력전은 독일 참모차장인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처음 전쟁개념으로 도입했다. ▲ 전쟁이 끝난 뒤 남북은 각각 체제를 선전하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했다. 사진은 북한이 살포했던 대남전단.[자료사진-통일뉴스] 총력전의 개념에는 심리전도 포함되는데, 심리전은 '대상 청중의 문화심리적 성격과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이용하여 주로 정부나 정치적 운동과 같은 후원조직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된 전략과 전술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즉, 심리전이 도입된 2차 대전부터 전후방이라는 전선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적국의 민간인들에게 전쟁에 관한 선전전을 전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단이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 등에도 다양한 내용의 전단이 뿌려져 전단은 심리전의 상징이 됐다. 전단은 2차 대전에 처음 등장했을까?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던 16세기 당시 독일 지역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예수와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추는 왕들의 모습이 나란히 그려진 그림이 뿌려졌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전단이다. 한국전쟁, 전단을 통한 심리전 한반도에 전단이 등장한 것은 1945년 해방에 즈음해서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전단이 대대적으로 뿌려졌다. 미 육군 극동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1947년 미 육군의 심리전부대 해체에도 불구하고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에 심리전과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부서에서 1950년 6월 28일 비행기로 전단을 처음 살포했다. 이후 1951년 8월 심리전과는 작전참모부에 배속되면서 심리전부로 확대, 미8군 심리전부, 제1방송, 전단부대를 지원.감독했다. 이와 별도로 1950년 미군은 육군 전술정보파견대를 파견, 11월 4일 제1확성기.전단중대로 명칭이 변경됐다. 그리고 1955년 2월 21일 해체될 때까지 전술심리전 작전을 담당했다. ▲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6월 28일 유엔군이 투하한 첫 전단. 유엔군은 이날 약 1천2백만 장의 전단을 뿌렸다. [자료출처-'한국전쟁기 맥아더사령부의 삐라 선전정책'(이상호, 2011)] 전쟁발발 직후 미 극동사령부 심리전과는 6월 28일 약 1천2백만 장의 전단을 살포, 1950년 6월부터 5개월 간 뿌린 전단 살포양의 1/10에 해당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처음에는 남한 군인의 항전을 격려하고, 남한 주민에게 유엔과 우방국이 한국을 돕는다는 내용이었지만 7월 17일부터 북한군을 대상으로 전단을 살포했다. 미군은 1953년 휴전까지 B-29폭격기를 이용, 약 25억 장 이상의 전단을 살포했다. 북한군은 어떠했을까. 당시 김일성 수상은 "우리의 정의의 투쟁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널리 선전해야 하며 모든 것을 미제와 이승만 역도를 격멸 소탕하는데 바치도록 인민들을 고무 격려하여야 한다"고 지시했다. 북한군은 전단제작의 주체가 매우 다양했는데, 조선인민군, 조선인민군 전선사업부 문화훈련국,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조선인민군 총사령부 등이 맡았다. 중국은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가 일임했다. 주로 공산주의 체제선전, 정치선전, 유엔군 및 한국군 전의 상실 등의 내용을 담았다. 탈북자 단체와 보수단체의 대북전단 한국전쟁이 끝난 뒤, 남북은 각각 체제를 선전하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해왔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전단살포의 양상은 변화됐다. 군이 담당하던 전단살포는 민간이 주도하는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특히, 대북전단의 경우 일부 탈북자 단체와 보수단체가 중심이 됐다. 탈북자 단체들이 왜 전단을 살포할까. 이들이 대북전단을 살포한 것은 2003년을 기점으로 한다는 게 중론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2004년 남북 장성급 회담을 통해 전단살포 행위가 금지되자, 탈북자 단체와 보수단체는 "정부가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2003년을 기점으로 탈북자의 수가 급증, 나름대로 체계를 갖춘 조직을 만들자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할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이다. 그리고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보수단체와 연합전선을 구축, 대북전단 살포 횟수와 분량이 급증했다. ▲ 2008년 12월 통일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부 탈북자 단체와 보수단체가 대북전단을 살포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대북전단을 살포하는 탈북자 단체는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 박상학), '기독북한인연합'(대표 이민복), '탈북인단체총연합'(대표 한창권) 등이고, '납북자가족모임'(대표 최성용), '대북전단보내기국민연합'(대표 최우원) 등 보수단체들도 가세하고 있다. 이들은 대북전단을 살포하던 초기에는 고무풍선을 이용했다. 풍선제작 기술 부족으로 당시에는 어린이 장난감용으로 사용되던 고무풍선에 헬륨가스를 넣어 몇 장의 전단만을 달아 날려 보냈다. 하지만 2005년 12m의 대형 비닐에 수소가스를 넣는 화학식 대형 풍선을 개발, 수 만장의 전단을 달아 보낼 수 있게 됐다. 여기에 타임조절 방식을 도입, 설정방식에 따라 단.중.장거리로 나누고 풍속 10m/s인 경우 4시간 정도면 평양에 도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람의 방향을 제대로 읽어야 하는데, 제갈량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전단은 접경지역 일대에 뿌려지기도 해 대북전단살포의 효과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 보수단체들이 살포한 대북전단의 내용. [자료사진-통일뉴스] 대북전단 살포비용은 공공연한 비밀로 부쳐져 있다. 초기 고무풍선의 경우 1개 당 고무풍선 130원, 헬륨가스 8백 원으로 알려졌다. 현재 방식의 풍선은 수소가스 1만 8천원, 비닐 4천 원, 타이머 2천 원 등 약 13만 원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풍선 개당 5백여 만원으로 책정하기도 한다. 이런 비용은 어디서 나오는가. 초기 미국 민주주의진흥재단(NED) 등이 지원했지만 현재 지원을 끊은 상태이다. 그리고 국정원도 지원했지만,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자료에 따르면, 국무총리실과 안전행정부가 대북전단 살포 단체에 2012년부터 민간경상보조사업 명목으로 3년간 4억여 원을 지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국무총리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대북전단 지원처가 어디든 일단 대북전단을 살포하는 단체들은 현재 개인 후원자가 교회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지역주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대북전단을 살포하는 이유가 후원금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많다. 이들이 뿌리는 전단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주로 군인을 상대로 하는 전술형, 안전보장증형이 아니라 주민을 대상으로 한 뉴스형, 호소형이 대부분이다. 남한의 경제체제 선전, 북한 정권 부당성 등이 주를 이룬다. 그림보다는 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이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자극적인 모습으로 희화하는 사진 등을 담고 있지만, 가독성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 지난 25일 보수단체인 '대북전단보내기국민연합'이 살포하려 했던 대북전단. [자료사진-통일뉴스] 대북전단 살포, 막을 방법 없나 북한은 대북전단을 두고 반공화국 모략행위로 규정, 반발하고 있다. 심지어 10월 초에는 연천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대북전단은 남북관계 개선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전단살포는 남북간 오랜 골릿거리 중 하나였다. 이에 남북은 상호 간 전단살포 금지 합의를 여러 차례 해왔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천명하면서 '상호 중상, 비방 금지'에 대해 합의했다. 이후 1991년 12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합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한 비방 중상을 하지 아니한다"면서 전단 등을 포함한 도구를 이용한 상호 간의 비방 중상 금지를 명시했다. 하지만 공식적이고 실질적인 합의는 2004년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이뤄졌다. 당시 남북은 해상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활동 중지, 선전수단 제거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 전단 등을 통한 모든 선전활동을 중지했다. ▲ 2012년 10월 정부는 탈북자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저지한 사례가 있지만 현재 대북전단 살포를 막을 근거가 없다고 강조한다. [자료사진-통일뉴스] 그러나 이는 당국간 전단살포에 국한된 내용이다. 즉, 탈북자 단체 등 민간단체의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두고 정부는 대응방안에서 딜레마에 빠져있다. 정부는 남북간 전단 등 상호 비방 중상 금지 합의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전단 살포를 막을 법적 근거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자제요청만 할 뿐이다. 물론 이들의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법적으로 제재하기 위해 고심을 한 흔적은 있다. 2008년 범정부 대책회의를 열고 수소가스를 활용한다는 점에 착안, 고압가스안전관리법을 검토했지만 마땅한 근거조항을 찾지 못했다. 당시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은 "전단 살포는 남북 합의 이행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으며 남북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법적 제재 가능성을 시사했다. 2009년 통일부는 이들 단체가 북한 화폐를 풍선에 담아 보낸다는 점에서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지만, 검찰은 내사종결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항공법 위반 지적도 있었지만 풍선은 초경량 비행장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국토교통부의 해석으로 법적 제재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하지만 환경운동연합은 대북전단 살포가 자연환경을 오염시키는 행위라며 쓰레기 투척행위로 규정, 경범죄로 이들 단체를 고발해 주목된다. ▲ 북한이 지난 2012년에 살포한 대남전단. [자료사진-통일뉴스] 군은 어떠한 반응일까? 일단 군 당국은 탈북자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 행위에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만 북한 군부의 항의에 대응만 해왔을 뿐이다. 심지어 2010년 11월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을 계기로 김포, 철원, 연천, 북송 등 4곳에서 약 40만 장의 대북전단을 살포했다. 이에 북한도 대남전단 살포를 재개, 지난 3년간 경기도 파주, 강원 강릉 등 일대에서 약 3만여 장의 전단을 수거했다고 국방부가 밝혔다. ▲ 지난 25일 파주 임진각에서 보수단체 '대북전단보내기국민연합'이 대북전단을 살포하려 하자 파주 지역주민들이 강력 저지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현재 한반도는 가히 전단이라는 종이폭탄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리고 종이전쟁은 국가가 아닌 탈북자 단체 등 민간이 만들어내고 있다. 정부는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며 법적 제재 불가능 입장이다. 지난 25일 보수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막아낸 건 지역 주민들이었다. 결국, 종이전쟁을 막는 것은 평범한 국민의 몫인가. 대북전단으로 총탄이 오간 상황에 이르렀지만 국가는 여전히 팔짱 끼고 불구경만 하고 있다.

은빛 억새물결? 아직은 철이 이르다


[여행] 경주 무장봉 억새군락지 등정기 14.10.26 17:05l최종 업데이트 14.10.26 17:05l장호철(q9447) 기사 관련 사진 ▲ 무장봉의 억새군락지. 1970년에 조성한 오리온 농장이 1996년 문을 닫으면서 드넓은 초지는 자연스레 억새 군락지가 되었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바야흐로 '억새'의 계절이다. 정선의 민둥산을 비롯해 창녕의 화왕산, 이른바 영남 알프스라는 간월재 등 드넓은 억새 군락지를 자랑하는 산이 사람들로 붐비는 시절이 된 것이다. 화왕산은 20여 년 전에, 간월재는 지난해에 다녀왔지만 정선 민둥산은 겨누어 보기만 하다 넘긴 게 몇 해째다. 억새 평원은 경주 무장산에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민둥산은 너무 멀다. 포털에서 승용차 길 찾기를 해보면 무려 4시간이 좋이 걸린다고 나오니 겨누기만 하다 말 수밖에. 그런저런 이야기를 했더니 앞자리의 동료가 '경주 무장산 억새도 괜찮다'고 거들었다. 무장산? 웬 '무장(武裝)'? 30여 년 전에 경주 근처에서 몇 해 산 적이 있는데도 낯선 이름이다. 하필 이름이 무장이람,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게 만만치 않은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일연은 <삼국유사>제 3권, 탑상(塔像) 제4 '무장사(䥐藏寺) 미타전'에서 '무장'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䥐藏寺)라고 한다"고 한다. '투구 무(䥐)'자에 '감출 장(藏)'자를 쓴 무장사는 지금 터만 남아있다. 태종은 태종무열왕, 전날의 김춘추다. 그가 삼국 통일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에 묻은 것은 후대의 해석처럼 '전쟁 없는 평화시대'를 열겠다는 뜻이었을까. 기사 관련 사진 ▲ 위도 탓일까. 10월도 중순이건만 무장산에는 아직 푸른빛이 승했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석탑과 절터가 남아 있어 인근 마을 주민들은 '무장산'이라 부르지만 애당초 이 산은 포항 오어사(吾魚寺)를 품은 운제산과 경주 토함산을 잇는 '624봉'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2008년에 주변이 경주 국립공원 토함산 지구로 정식 편입된 이후에야 이 산은 비로소 '무장산'으로 국토지리정보원에 정식 등록되었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해 본 무장산의 억새 군락은 규모도 풍치도 괜찮았다. 한 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산행을 결정하자, 아내와 딸애는 간식과 점심을 챙기기로 했다. 지난해 간월산행에서 꽤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터득한 것은 '산을 오르려면 하찮은 것도 제대로 챙겨라'가 아니던가(관련기사 "<'1박2일'도 반한 한국의 알프스? 가보면 누구든 반한다> 바로가기). 토요일(18일) 아침, 7시쯤 출발하려 했는데 어정대다 보니 8시가 겨워서야 길을 떠날 수 있었다. 한 시간 반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두 시간이 좋이 걸렸다. 손곡마을 삼거리에 도착하니 해병대 군복을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들어오는 차량들을 일제히 오른편 길섶으로 붙인다. '만차입니다. 버스를 타고 들어가세요.' 주말엔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늦으면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없다는 경고를 허투루 들은 대가다. 꼼짝없이 거기다 차를 대고 시내버스를 탔더니 차는 이내 무장사지 입구 경주시 암곡동 왕산마을까지 승객들을 휑하니 실어 날라준다. 버스 종점을 지나 나타난 꽤 커다란 주차장은 이미 꽉 찼다. 거기 말고도 주차장은 한 군데 더 있는 모양인데 그곳도 찼다면 오늘 이 산 아래로 몰려든 이들을 수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주차장에서 산 아래까지 이어지는 것은 '청정 미나리'와 '돼지고기'를 함께 파는 음식점들이다. 이름난 산 아래마다 이런 음식점이 들어서는 건 마치 유행 같다. 기사 관련 사진 ▲ 근교의 산은 가족 단위들이 당일 산행으로 붐빈다. 평탄한 숲길을 다니는 가족들이 많았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공원 지킴터를 지나 삼거리에서 길이 갈린다. 왼편은 무장사지를 거쳐 무장봉에 이르는 5.3km 길이고, 오른쪽은 좀 가파른 대신 짧은 3.1km길이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물매가 꽤 급한 오르막길은 500m 남짓, 산등성이에 이르자, 비교적 너르고 평탄한 산길이 이어진다. 등산로 주변에 빽빽이 들어찬 나무와 숲이 무척 실했다. 10월 중순인데도 위도가 낮아서일까, 단풍은 아직 일렀다. 가끔씩 노란빛이 섞이기는 하지만 나뭇잎들은 여전히 싱싱한 푸른빛이었다. 10월의 뙤약볕이 따가웠다. 억새 군락 못 미처 그늘이 있는 마지막 숲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오르면서 바나나와 사과 등 간식을 축냈지만 산 위에서 먹는 밥이란 원래 별미 아닌가. 가게서 사 온 김밥 맛도 괜찮았고, 아내가 부러 챙겨온 김치 맛도 좋았다. 기사 관련 사진 ▲ 무장봉의 억새평원에는 곳곳에서 기념촬영에 바쁜 원색의 등산복을 차려 입은 사람들로 어지럽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 무장봉의 억새군락지. 아직 가을이 이른 탓일까. 하얗게 빛나는 억새의 물결을 만나지 못했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 무장산의 억새는 정선 민둥산이나 영남알프스에는 비기지 못할지라도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으로 충분히 훌륭하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점심을 먹어 가벼워진 배낭을 걸치고 산등성이를 넘으니 눈앞에 억새 군락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그러나 그걸 심상하게 받아들인 것은 간월재에서 만난 억새 평원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등산로로 낸 데크 양옆으로 하얗게 빛났던 간월재의 억새 군락에 비겨 무장봉의 억새 빛깔은 여전히 푸른 빛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은빛 억새물결? 아직은 철이 이르다 간월재에서와 같은 하얗게 빛나던 억새의 물결을 만나려면 얼마쯤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 언제나 그렇듯 좋은 풍경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조금 이르거나 조금 늦곤 하니 말이다. 억새 군락 주변 길은 곳곳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원색 등산복으로 어지럽다. 무장산의 억새 군락지는 원래 1970년, 동양그룹이 산 정상부 45만 평에 조성한 오리온 목장이었다. 이 목장은 1980년 5공의 재벌 비업무용 토지 강제매각 조치로 다른 축산회사로 넘어갔다가 1996년에 문을 닫게 된다. 그 후 주변 초지는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억새 군락지로 바뀌어간 것이다. 억새군락지가 끝나는 산마루가 이 산의 정상 무장봉(642m)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투어 '인증샷'을 찍고 있는 무장봉 표지석에는 '동대봉산 무장봉'이라 씌어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에 등록된 '무장산'은 뭐고, 멀쩡한 무장봉에 동대봉산 표지는 또 뭔가. 해발 1000m가 되지 않는 낮은 산이라 이름의 혼동이 있는 것일까. 무장봉에서 무장사지를 거쳐 내려오는 길은 경사는 완만하나 단조롭고 멀었다. 중턱쯤에 '돼지풀 확산 방지를 위한 억새 식재지역'이 있다. 돼지풀은 자생식물의 서식지를 위협하고 알레르기성 비염과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는 북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이다. 억새 식재는 돼지풀의 확산을 막고 무장봉의 경관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공원 지킴터를 2Km 남짓 앞둔, 암곡동 골짜기의 가파른 등성이에 설치된 데크 길을 따라가면 주춧돌 일부와 석등을 받쳤던 연화대좌가 남은 무장사 터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무장사는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이 그의 숙부를 추모하여 세운 왕실의 원찰이라고 한다. 무장사 터에는 현재 아미타조상사적비(보물 125호)의 이수와 귀부가 남아 있다. 이 비는 제39대 소성왕의 왕비인 계화부인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을 만들면서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1915년 주변에서 발견된 비석 파편에 새겨진 글로 이 비가 '무장사아미타조상사적비'임이 밝혀지면서 이곳이 무장사 터라는 것도 확인되었다. 기사 관련 사진 ▲ 무장사 터 어귀의 데크 길. 아직도 푸른빛을 자랑하는 실한 나무들이 아름답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 무장사지 삼층석탑. 폐사지의 낡고 퇴락한 돌탑 등의 쇠잔한 모습이 연출하는 고즈넉한 정적은 쓸쓸하면서도 흥미롭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 무장사터 아래에서 만난 옅은 단풍. 바야흐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사적비가 서 있는 평지 아래 산비탈에 삼층석탑(보물 126호)이 있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이다. 원래 무너진 채 깨어져 있었던 것을 1963년 일부를 보충하여 다시 세웠다고 한다. 기단부에 새겨둔 안상(眼象)으로 미루어 볼 때 9세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돌탑은 저물어가는 햇살 속에서 좀 외로워 보였다. 절터가 주는 느낌은 언제나 그렇듯 좀 각별하다. 외롭게 남은 주추, 깨어진 석등, 낡고 퇴락한 돌탑 등의 쇠잔한 모습이 연출하는 고즈넉한 정적 속에서 그 번성했던 시절의 풍경을 하나하나 재구성해 보는 것은 쓸쓸하면서도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불당과 불탑을 세우던 때, 사부대중의 가슴속에 뜨겁게 살아 있었던 소박한 불심과 서원(誓願)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투구 묻은 골짜기... 그러나 평화는 아직 멀기만 하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밝힌 무장사에 대한 전언은 사실관계에서 다소 어긋난다. 그는 태종무열왕(재위 645~661)이 이 골짜기에 병기와 투구를 묻었다고 쓰고 있지만 삼국을 통일한 군주는 그 아들인 문무왕(재위 661~681) 법민이기 때문이다. 100여 년 후에 원성왕(재위 785~798)의 아버지가 여기에 왕실의 원찰을 세우면서 선대 임금의 유지를 기려 '무장사'라 명명했다는 것인데, 전후의 맥락을 살피면 이 전언의 개연성은 충분해 보인다.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며 이 골짜기에 병기와 투구를 묻었다는 이가 무열왕이든 그 아들 문무왕이든 무슨 상관이랴. 전쟁과 살육의 시대를 넘어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추구하는 것은 시대를 넘어서 인류의 영원한 과제가 아닌가 말이다. 천 년도 전, 부처의 나라를 꿈꾸었던 고대국가조차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를 기약했건만 그 땅에 흘리고 묻은 피와 주검은 또 얼마였던가. 이어진 후삼국의 쟁패(爭霸)뿐이 아니다. 20세기의 중반, 이 땅에 휘몰아친 골육상잔의 전쟁은 여전히 끝을 맺지 못하면서 갈등과 대립은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천 년도 전에 김춘추가, 아니 법민이 묻었다는 투구와 병기는 이 산골짝 어디에서 이미 흙이 되고도 남았으리라. 무장사지 앞의 벤치에서 잠깐 다리쉼을 하고 나서 우리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킴터가 가까워지면서 연도의 숲은 조금씩 물들어가는 듯했다.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 너머로 단풍나무의 빛깔도 어느덧 한결 선명해지고 있었다.

2014년 10월 25일 토요일

세월호 촛불 “진상규명 거래말라, 진실은 존엄이다”


세월호 촛불 “진상규명 거래말라, 진실은 존엄이다” 청와대로 행진 중 경찰과 대치.. 유가족, 정부청사 앞 연좌농성 돌입 나혜윤 기자 | balnews21@g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10.25 22:22:53 수정 2014.10.25 22:36:5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서울 광화문 광장에 모인 500여명의 시민들이 “대통령도 조사하라”며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위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25일 오후 7시 광화문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국민촛불문화제에 참석해 “진상규명 거래말라 진실은 존엄이다”, “안전은 인권이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제대로 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단식 농성을 풀고 오랜만에 발언에 나선 ‘유민아빠’ 김영오씨는 “4.16 나의 무관심과 어른들의 무관심이 304명의 고귀한 생명을 생매장 시켰다”며 “하지만 참사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 무능한 야당, 수구 언론사들이 방관자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김씨는 “국민여러분 이제는 방관자가 되지 말자”며 “더 이상 정부 여당이 뻔뻔한 횡포를 보인다면 앞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무기한 농성을 이어 갈 것이다. 국민 여러분이 성역 없는 진상 규명을 위해 저희 유가족과 끝까지 함께 해 달라”고 호소했다. 유경근 세월호 가족대책위 대변인도 “끝까지 진상규명하고 남은 자식들을 위해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 때까지 저희 손 놓지 말고 버텨달라”며 “우리 손 놓치고 평생 그렇게 사실 건가. 언제 어떻게 어떤 상황에서 누가 손을 놓아버릴지 그게 무섭다”고 국민이 함께 해달라고 호소했다. ▲ ⓒ '세월호 대책회의' 유 대변인은 “내일 중으로 특별법 도장을 찍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유가족 참여를 추후에 논의하겠다고 이야기 하면서 누더기가 된 법안으로 진상조사위를 시작할 수는 없다”고 강경 대응 방침을 시사했다. 이날 문학평론가 양경언씨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결성된 ‘304 낭독회’의 활동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양씨는 “작가들이 우리가 직접 쓴 글을 낭독하는 방식으로 계속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함께 움직이자는 의미에서 시작하게 됐다”며 낭독회 결성 배경을 밝혔다. 양씨는 “두 번의 낭독회를 진행했으니 302번의 낭독회가 남았다. 한 달에 한번 꼴로 낭독하면 25년의 시간이 걸릴텐데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이들이 살아있다면 25년은 더 살았을 것”이라며 “결코 짧은 시간이라 생각하지 않고 누구보다 더 오래 읽고 쓰고 행동하겠다는 마음으로 진실을 위한 움직임에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양씨는 “이제 끝났다고 그만 말하자고 한다. 왜인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유를 물어보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다. 대답해야 할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진실 밝히는 것이 왜 싸움이 되는지 나는 모르겠다”는 중학생의 글을 대신 낭독해 시민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다가오는 세월호 참사 200일을 맞아 대학생들의 ‘수업 반납’ 계획도 공개됐다. 국민대학교에 재학 중인 고재건 씨는 “여야는 3차 합의를 통해 유가족을 배제하고 특검 실시하겠다고 하지만 과연 대통령이 임명하는 특검이 청와대, 국정원, 군, 해경, 해수부 모두 수사할 수 있겠나”라며 “이럴 때 일수록 싸움의 중심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긴 광화문 광장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고씨는 “대학생들은 다음주부터 수업을 반납하고 일주일간 광화문에서 실천 하려 한다”며 “정부와 국회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특별법을 제정하고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대학생들이 더욱 앞장서서 싸워나갈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서울정부청사 앞에서 경찰들이 청와대로의 행진을 막아서자 한 유가족이 경찰의 방패를 붙잡고 '비켜달라'며 절규하고 있다 ⓒ 나혜윤 한편, 이날 집회가 마무리 된 후 200여명의 시민들과 세월호 유가족들은 청와대로의 행진을 시도하다 서울정부청사 인근에서 경찰 병력에 의해 저지됐다. 경찰과의 격렬한 대치 속에 유경근 대변인의 연행이 결정되자 유가족들은 “나도 잡아가라”고 항의하며 연좌 농성에 돌입했다.

대북전단살포 저지의 정치적 의미


<분석과전망>북한도 막지 못했던 대북전단살포, 주민들이 막아내다. 한성 자유기고가 기사입력: 2014/10/25 [20:06] 최종편집: ⓒ 자주민보 ▲ 투쟁하는 농민들 ▲ 투쟁하는 농민들 반북단체들의 북한 비방 전단 살포를 해당 접경지역주민들이 '온 몸으로' 직접 나서 막아냈다. 긴박한 임진각, 그 10월 25일 10월 25일 임진각 주변은 오전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반북단체에 속한 사람들 3-40여명은 10시 조금 넘은 시각에 서울역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 임진각을 향했다. 이들은 오후 1시 임진각 망배단 등 5곳에서 대형 풍선 10개로 전단 10만 장을 살포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지난 15일에 밝힌 사안이다. 임진각에 진입한 그들을 정면에서 맞이한 사람들은 문산, 파주 등 접경지역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은 대북전단 살포를 온몸으로 막겠다며 하루 전날부터 임진각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중에서 특히 농민들은 트랙터 등 농기계들을 대거 동원해두고 있었다. “당신들만 대한민국에 사나? 우리도 대한민국에 산다. 가만히 있어라” 농기계에 달린 대형현수막에 부착한 현수막의 내용이었다. 당신들 때문에 오늘도 내일도 불안하게 산다는 문구도 있었다. ▲ 접경주민들을 지원하고 국민불안을 해소해야된다면서 나선 시민사회단체 ▲접경지역 시민단체 ▲개성공단에 입주한 기업인들이 나서서 대북전단 살포 반대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주민들을 지원하는 사회단체들도 속속 임진각으로 집결했다. 주민들에 대한 지원은 기업인들에게서도 나왔다. 개성공단기업협회 기업가들이 임진각에서 대북전단 살포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한 것이다. 경찰의 대응은 반북단체의 전단 살포에 무대응 했던 여느 때와는 달랐다. 주변에 경찰력을 배치했다. 무려 1400여명, 14개 중대병력이었다. 양측의 물리적 충돌을 예방한다는 것을 명목으로 내세웠다. 주민들과 반북단체들의 대치는 정오 무렵부터 본격화되었다. "농번기인데 대북전단 살포 때문에 일도 못하고 있다" 농민 한사람이 반북단체와 대치하면서 전단 살포를 하지말라며 한 말이다. 이에 대한 반북단체의 대응은 간단했다. "굶어 죽어"라고 응수를 한 것이다. 농민들에게 굶어죽으라고 욕설 같은 강변을 한데 이어 반북단체의 대표 한 사람은 주민들에 대해 종북세력이라는 말도 서슴치 않았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가 이날 12시 20분께 취재진 앞에서 대북 풍선과 전단을 도둑질당했다면서 "복면을 쓴 종북세력이 면도칼을 가져와서 협박"했다고 한 것이다. "아무리 (북한이) 종북 노비들을 써서 우리를 막으려고 해도 우리는 꺾이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다. ▲ 반북단체의 호전적인 언사 © 오마이뉴수에서 펌 ▲ 주민들의 대북전단살포저지 활동에 종북논리로 대응하는 반북 단체 © 오마이뉴스에서 펌 ▲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 박상학 , 북한은 대북전단 살포를 하는 탈북자에 대해 최근 '범죄를 짓고 도주한 자'라고 하고 있으며 '인간쓰레기'라고 비난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5월 3일 통일동산 주차장에서 대북 전단을 살포 하는 장면 © 한성 자유기고가 여전히 반북단체를 '방조'하는 경찰 전단과 풍선을 도둑맞았다는 반북단체의 주장에 대한 경찰들의 대응은 매우 신속했다. 파주 시민 1명을 반북단체가 준비한 대형 풍선과 전단지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긴급 체포를 한 것이다. 경찰은 그 시민에 대해 재물손괴죄 및 업무방해죄 혐의를 붙였다. 이에 대해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의 한 회원은 경악했다. 전날인 24일 광화문에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 하는 풍선날리기를 하는 과정에서 풍선을 터뜨린 것이 경찰이었기 때문이었다. ▲ 전례없이 대규모로 동원된 경찰병력 붙잡힌 시민은 저항했지만 경찰의 물리력에 의해 200여 미터를 끌려갔다. 그리고 버스에 태워졌다. 이 과정에 연행을 반대하는 시민들과 경찰 간의 몸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시민들은 경찰이 보수단체의 전단 살포는 방조하면서 시민들만 막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임진각일대가 아수라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임진각 망배단에서 예정되었던 반북단체의 대북전단살포는 일단 그렇게 무산되었다. 그렇지만 반북단체들은 장소이동을 해 전단살포 재시도를 했다. 서울에서부터 새로운 전단과 풍선을 공급받아 오후 4시 20분께 타고 온 전세버스로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 쪽으로 이동해서 살포를 재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반북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는 저지당했다. 통일전망대의 통일동산 상인회와 주민들은 살포 저지조를 구성, 트랙터와 차량으로 통일동산 주차장 입구를 봉쇄했다. 이에 따라 반북단체는 오후 5시20분께부터 자유로에서 통일동산 쪽으로 향하는 샛길 옆 공터에서 전단 살포를 시도했다.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간부 한사람이 6시경 반북단체로부터 폭행을 당해 안경이 부러지는 등의 불상사도 발생 했다. 6시 40분경 반북단체들은 기자회견을 갖고 난 뒤 서울행 버스에 탑승 했다. ▲ 찟어져 길가에 버려진 대형 풍선 ©한성 자유기고가 ▲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고 길가에 흩뿌려진 대북 전단 남북관계개선에 기여한 접경주민들 반북단체의 25일 대북전단살포는 사실상 무산되었다. 물론 강화도에서는 비밀리에 살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는 하다. 25일 반북단체들의 대북전단살포 무산은 주민들이 ‘온 몸으로 막아 나선’ 투쟁의 결과이다. 생존권 위협 그리고 생업 지장을 그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것은 현 정국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반북단체의 대북전단살포는 남북 간의 총격전까지 불러온 심각한 사안이다. 북한에 반발하기에 앞서 국민들에게 불안을 조성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북한은 반북단체의 대북전단살포를 전쟁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은 25일 북한의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기사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남한 정부에 살포를 저지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남조선 당국이 우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삐라 살포 난동을 또다시 허용한다면 북남관계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 대형 헬륨가스 © 한성 자유기고가 ▲대북전단살포현장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 © 한성 자유기고가 ▲ 반북단체의 대북전단살포에 대해 규탄 기자회견을 하는 사회단체(사진은 지난 5월 3일 현장사진) © 한성 자유기고가 “남남갈등” 정부당국이 북한과 관련되는 사안을 다루는데 있어서 자주 동원하는 논리이다. 북한이 자신을 주장을 내세우면서 우리사회의 진보와 보수를 갈라놓는 것을 의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정세는 반북단체의 대북전단살포야말로 남남갈등을 초래하는 대표적인 사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대북전단을 살포하려는 반북단체들과 이를 막으려는 접경주민들은 다 대한민국 국민들이다. 이들 간의 대립과 갈등이 남남갈등으로 되는 것은 우리정부가 반북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서 ‘표현의 자유’운운하며 적극 방조를 하고 있는 데에 따르는 현상이다. 반북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한 우리정부의 이러한 자세와 태도는 남남갈등을 조장하여 사회를 불안하게 할 뿐 만 아니라 모처럼 대화의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남북관계에 장애를 조성하는 것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다. 주민들의 대북전단살포저지 활동이 남남갈등을 폭발시켜 남남갈등을 해소할 길을 열었다는 의미로 평가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렇지만 주민들의 대북전단 살포 저지 활동은 종국적으로는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민들의 대북전단 살포 저지는 당장에는 대북전단에 대한 북한의 ‘소멸전투’의 원인을 제거한 것으로 된다. 이는 남북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요소 하나를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해소한 것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온전히 정부가 해결해야할 몫이었다. 더구나 농민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고 상인들은 장사를 못하고 사회단체들 역시도 지방에서까지 올라와 규탄을 해야하는가하면 경찰병력도 대거 동원되는 등의 사회적 비용을 애초에 지불하지 않아도 될 사안이었다.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안게 되는 불안감이다. ▲ 25일 대북전단 살포 저지투쟁에서 맨 앞장에 선 접경 지역 농민들 긴박했던 10월 25일 임진각. 우리 정부가 북한에 2차고위급회담을 30일에 진행하자고 제안한 조건에서 더욱더 심사숙고하게 바라보아야하는 이유이다.

2014년 10월 24일 금요일

그래프로 보는 올해 핵발전 동향


그래프로 보는 올해 핵발전 동향 [함께 사는 길] 한국은 세계에서 네번째로 핵발전을 많이 하는 나라 함께 사는 길 2014.10.24 11:27:41 핵 발전으로 생산한 전력량은 1990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했지만 2006년 최고치를 찍은 후 줄어들고 있다. 2013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핵 발전으로 생산한 전력은 2359TWh다. 또한 전 세계 발전량 중 핵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도 1996년 이후 점점 줄고 있는데 2013년 현재 전체 생산된 전력량 중 핵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10.8퍼센트다. ■ 4번째로 핵 발전을 많이 하는 한국 우리나라는 미국, 프랑스,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핵 발전량이 많다. 이들 다섯 국가 핵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은 전 세계 핵 발전량의 68퍼센트나 된다. ■ 문 닫는 핵발전소들 1954년 6월 27일 소련에 세계 최초의 핵발전소가 세워진 후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기 전인 1985년까지 핵발전소 건설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1974년 한 해에만 26개의 핵발전소가 세워졌고 1984년과 1985년에 각각 33개의 핵발전소가 세워졌다. 1990년 접어들면서 가동을 중단하는 핵발전소도 늘어났다. 1991~2000년 사이 세워진 핵발전소는 52개였고 가동을 중지한 핵발전소는 30개였다. 2001~2010년에는 32개가 세워지고 32개가 문을 닫았다. 2011~2014년 중반까지 16개의 발전소가 세워졌고 26개의 발전소가 가동을 중지했다. 한편 2001년 이후 세워진 48개의 핵발전소 중 39개가 아시아에 세워졌다. ■ 폐쇄된 핵발전소의 평균 나이 2014년 7월 1일 기준으로 전 세계적으로 153개의 핵발전소가 사고나 정치적인 이유로 가동을 중지했다. 폐쇄된 핵발전소의 평균 가동연도는 24년이다. ■ 2059년까지 전 세계 핵발전소 설계수명 만료 현재 가동중이거나 건설중인 핵발전소가 수명 연장 없이 설계수명 40년을 유지한다면 2060년이면 다 수명이 만료된다. 2020년에 8기의 발전소가 추가로 세워질 계획이지만 전반적으로 감소 추세를 뒤집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핵발전소 수명 연장도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핵발전소의 유지보수 및 업데이트 비용이 급상승하고 있는 반면 핵발전소와 경쟁에 있는 다른 발전소들은 시스템 비용이 감소하고 있어 미국과 독일에서는 핵발전소의 조기폐쇄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그 시기는 더 빨리 올 수도 있다. ■ 세계는 지금 재생가능에너지에 투자! 2004년 이후 재생가능에너지와 핵 발전에 투자한 금액을 비교한 그림이다. 전체적으로 핵 발전에 대한 총투자는 재생가능에너지보다 거의 10배 정도 낮다. ■ 눈부신 재생가능에너지의 성장 전 세계적으로 재생가능에너지와 핵에너지의 발전 증가율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풍력발전과 태양광은 전년도에 비해 각각 25퍼센트, 43퍼센트 성장한 반면 핵에너지는 0.4퍼센트 줄었다. 또한 2000~2013년 동안 핵 발전은 정체기를 겪으면서 발전용량은 19GW 줄었지만 같은 기간 풍력과 태양광은 각각 301GW, 135GW씩 늘었다. ■ 태양에너지가 핵 발전 추월 매년 태양광 패널과 풍력, 핵에너지에 의해 생산된 에너지와 생산 수준 변화를 보여준다. 2013년 풍력에너지는 1997년에 비해 616TWh, 태양광에너지는 124TWh, 핵에너지는 114TWh를 더 생산했다. 함께 사는 길

'전시작전통제권'을 둘러싼 4가지 이야기 :


노무현에서 박근혜까지 8년 간의 '줄다리기' 허핑턴포스트코리아 | 작성자 원성윤 이메일 게시됨: 2014년 10월 24일 17시 31분 KST 업데이트됨: 2014년 10월 24일 18시 42분 KST 1. 전시작전통제권은 무엇인가 1 23일(현지시간) 미국 국방부 청사 펜타곤에서 열린 제46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 직후 한민구 국방장관(오른쪽)과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전시작전통제권을 줄여서 전작권이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Wartime Operational Control; OPCON. 즉, 전시에 자국의 군 작전을 지휘할 권리를 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이 가지는 통수권의 차하위, 합동참모의장이 대통령으로부터 위임받아 행사하는 지휘권의 하위 개념이다. 대한민국 국군 중 한미연합작전통제권에 들어있는 부대들의 전시 작전권은 한미연합사령부가, 평시 작전권은 한국 합동참모본부가 갖는다. 평시인 데프콘 4의 경우에는 대한민국 국군이 지휘하며, 데프콘 3 부터 1까지는 한미연합사가 지휘권을 갖는다. 일본은 주일 미군(USFJ)이 주둔하고 있으나, 대한민국과 달리 자위대(JSDF)의 전시 및 평시 작전통제권을 일본 정부가 갖고 있다. 1 전시작전통제권은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을 넘긴 후 60여 년 간 지속됐다. 평시와 전시작전권 가운데 평시작전권은 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1994년 12월 1일 미국 측과의 협의를 거쳐 되찾아 왔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평시작전권만 환수했음에도 불구하고 "44년 만에 작전권을 환수한 것은 우리 자주국방의 기틀을 확고히 하는 역사적 사실이며 제2의 창군(創軍)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기뻐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보수 정치인이지만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우리나라 주권과 관련해서 비원(悲願)처럼 내려왔고,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대선공약으로 내걸 만큼 중요한 과제였던 작전통제권 환수, 그것도 절반의 환수밖에 안되는 평시작전권 환수를 그렇게 높이 평가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2. 노무현, 이명박을 거쳐 박근혜까지 : 8년 간의 전작권 논란 전시작전통제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 시기에 강력하게 추진됐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인 2006년 12월 21일, 서울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자리에서 전시작전통제권 관련해 작심하고 기존 군 장성들을 비판했다. 이 연설은 지금까지도 보수-진보 논쟁을 일으키는 연설 가운데 하나다. 당시 노 대통령은 이렇게 언급했다. (연설 전문) "자기들 나라, 자기 군대, 작전통제도 한 개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맨들어(만들어) 놔 놓고, "나 국방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들(을) 달고 꺼드럭거리고(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얘기입니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전작권 환수 문제는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 간에 합의가 이뤄졌다. 2006년 노무현-부시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통해 전작권 전환에 공감대를 모았다. 이듬해인 2007년 2월 한미 양국은 국방장관 회담에서 2012년 4월 17일자로 전작권을 한국에 반환하기로 합의해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이를 뒤집었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이 터진 이후 전작권 전환 시기 연기론이 피어올랐다. 결국 2010년 6월 이명박-오바마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작권 전환 시기를 2015년 12월 1일로 연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2년 대선 때 '2015년 전시작전권 전환의 차질 없는 준비'를 공약했다. 하지만 지난 4월 청와대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끝난 뒤 양국 정상은 "현재 2015년으로 돼 있는 전환 시기와 조건을 재검토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이 대선 공약을 뒤집은 셈이다. 2013년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이상기류는 감지됐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양국은 오는 2015년 전작권 전환을 위한 작업을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전작권 전환은 한미연합방위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준비, 이행돼야 할 것이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했다"고 온도차를 보였다. 그해 7월에는 "우리 정부가 전작권 전환 재연기를 제안했다"는 미국 고위당국자의 말이 보도됐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심각해진 북한 핵 문제 등 안보상황을 중요한 조건으로 고려하면서 전작권 전환 준비를 점검해 나가자고 미 측에 제의한 상태로 한미 간 논의 중에 있다"고 적극 부인하지 않았다. 결국 23일 한미 국방장관이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전작권 전환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김영삼 정부 이래 20년, 노무현 정부에서 확정한 이래 8년 간 추진돼 온 전작권 전환은 기약 없이 무산됐다. 3. 이양 연기 찬성 : 강력한 대북 억지력 1 1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연기에 찬성하는 쪽은, 전작권을 미국과 분담하고 있는한 한국을 침공 하는건 곧바로 미국을 상대로 싸우겠단 의미라는 면에서 확실한 안보보장이 된다는 주장이다. 특히 한미연합사 체제를 통해 당분간 강력한 대북 억지력을 갖게 됐다는 장점을 내세운다. 동아일보는 24일 사설에서 "한국군의 전작권은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유엔군사령관에 이양된 뒤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과 함께 연합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에게 넘겨졌다"며 "전작권 전환으로 한미연합사가 해체되면 유사시 미군의 자동 개입과 병력 증원, 핵우산 제공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북한은 지난해 3차 핵실험을 한 뒤 핵 소형화와 미사일 개발을 통해 핵무기의 실전 배치를 추진하고 있다"며 "이번에 전작권 전환을 연기한 것은 전쟁 발발 시 미국의 즉각 개입을 담보하는 안전장치의 작동을 확실히 보장받은 것과 다름없다"며 전작권 전환 연기를 환영했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한·미 양국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재연기 합의에 대해 “예상했던 일”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문화일보에 따르면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23일 “전작권 전환 재연기는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연기를 검토하겠다고 밝힌 이후부터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라면서 “전작권을 조건에 기반해 전환하기로 한 것은 미국의 대한방위공약 약화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고 한국이 자체적 방어능력을 확충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작권 전환 재연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행 한미연합사령부 체제를 유지하기로 한 것으로, 이는 현명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4. 이양 연기 반대 : 주권국가로서의 위신 손상 1 F-15K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연기에 반대하는 쪽은 전작권을 회수하더라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 미국의 참전은 국제 조약상 당연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북한이 요구하는 것은 전시작전통제권의 반환이 아니라 한반도 내 미군의 전면철수이고, 오히려 그동안 미국은 전작권을 한국측에 반환하려 애써왔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 측에서는 "G20에 드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전작권을 회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전시작전권 전환 약속을 2010년에 이어 두번째로 오바마 미 대통령이 번복하도록 하는 대신, 한미연합사를 잔류시켜 용산기지를 누더기 상태로 반환받게 됐다. 군사비만 북한 GDP를 능가하는 G20 회원국인 한국의 국격과 군사주권이 손상을 입은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내일신문은 “환수시점을 명기하지 않은 이번 전작권 전환 재연기 결정은 이명박정부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2015년까지 3년 늦춰달라고 요청했던 것을 박근혜정부가 재차 뒤집은 것이어서 주권국가로서 위신이 땅에 추락하게 됐다”고 비판했다. 1 이번 협상에서 한미 양국이 ▲안정적인 전작권 전환에 부합하는 한반도 및 역내 안보 환경 ▲전작권 전환 이후 한미연합방위를 주도할 수 있는 한국군의 핵심군사능력 구비 - 미국, 보완 및 지속 제공 능력▲국지도발과 전면전 시 초기단계에서 북한 핵·미사일에 대한 한국군의 필수 대응능력 구비 등을 전작권 전환 가능 조건으로 제시했다. 사실상 전작권 전환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라는 비판이 나온다. 대표적인 민간 군사평론가인 김종대 ‘디펜스21 플러스’ 편집장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이 좋아 '조건에 기초한'이지 전작권에 대한 일체의 주권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사실상의 주권포기이고, 대표적인 대국민 거짓말이며, 미국에 의존해서 우리 생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는 한국군에 대한 비관적 전망의 다른 표현”이라고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보수언론에서조차도 우리나라의 자주국방이 약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유용원 조선일보 군사전문기자는 24일 기사에서 “한국군의 경각심이 이완되고 정보 감시 능력 등 독자적 방위 역량을 확보하려는 투자와 의지가 약해지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나온다”고 다음과 같이 전했다. 전작권 전환의 전제 조건인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처하는 우리 군의 핵심 전력 증강 사업이 '킬 체인(Kill Chain)'과 'KAMD(한국형 미사일 방어)' 체계다. 패트리엇 PAC-3 미사일, 국산 중거리 요격 미사일 M-SAM, 정찰위성, 타우러스 공대지(空對地) 미사일, 사거리 500~800㎞의 국산 신형 탄도미사일 등 다양한 탐지·타격·요격 무기 체계로 구성된다. 여기에 들어가는 돈은 17조원에 이르는데 사실상 무기 연기에 가까운 형태로 전작권 재연기가 결정된 상태에서 목표 시한인 2022~2025년쯤까지 이 천문학적인 돈이 과연 제대로 투자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한용섭 전 국방대 부총장은 "독자적 능력을 개발하는 데 돈이 많이 들 텐데 이것이 더 지연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10월 24일) 전작권 전환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함께 읽어보면 좋을 만한 기사 美, 한반도 '사드' 배치를 둘러싼 5가지 쟁점 (사진) F-35 등 미국산 무기, 한국으로 쏟아진다 세계 8대 무기수입국 한국, 미국산 비중 80% [인터뷰] 美 국제정책센터 윌리엄 하퉁 국장 : "F-35는 처음부터 잘못됐다" 전쟁이 일어나면 '이들'은 웃는다 : 美 무기산업 9.11로 회생 '삐라 총격' 있던 날, F-15K 미사일 장착했다 Close 한국이 도입한 주요 미국산 무기1 / 8   gettyimageskorea 한국에 도입될 F-35F-35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제1차 걸프전 당시 쓰였던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최신형 PAC-3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패트리엇(PAC)-3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 다음 Previous Next 더 보기:정치전시작전통제권박근혜 전시작전통제권노무현 전작권북핵북핵 위협한미연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