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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6일 일요일

‘8·15 집회 참여’ 전광훈 재구속된다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 2020-09-07 10:18:40
수정 2020-09-07 10: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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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전 코로나19 확진 판정으로 치료중이던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가 음성 판정을 받고 나온 뒤 서울 성북구 장위동 사랑제일교회를 찾아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을 하고 있다.<br
2일 오전 코로나19 확진 판정으로 치료중이던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가 음성 판정을 받고 나온 뒤 서울 성북구 장위동 사랑제일교회를 찾아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을 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재구속된다.

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4부(부장판사 허선아)는 전 목사에 대한 보석을 취소하고 보석보증금 5천만 원 중 3천만 원을 몰취했다.

재판부는 형사소송법 제102조 제2항 제5호 ‘법원이 정한 조건을 위반’ 의 사유가 있으므로 보석 취소를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전 목사는 지난 3월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 됐으나 한 달 뒤 이 사건 관련 집회·시위에 참여해선 안 된다는 조건 등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전 목사가 지난 8월 15일 광화문 집회에서 발언하면서 검찰은 보석을 취소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재판부는 이날 별도의 심문기일을 열지 않고 보석 취소를 결정했다.

이에 전 목사는 보석 140일 만에 재구속된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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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5일 토요일

이재명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에 원망 배신 뚜렷···미안합니다” 재난지원금 ‘호소’

 박홍두 기자 phd@kyunghyang.com


입력 : 2020.09.06 08:26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6일 정치권의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 문제를 놓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원망·배신감이 불길처럼 퍼져가는 것이 뚜렷히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 지사는 최근까지 전 국민 대상 재난지원금 지급을 주장해왔다.

이 지사는 이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과문’을 올렸다. 이 지사는 “젊은 남편이 너무 살기 힘들어 아내와 함께 결혼반지를 팔고 돌아와,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밤새 하염없이 우는 아내의 어깨를 싸안고 같이 울었다는 글을 봤다. 짧은 글을 읽는 동안 어느새 제 눈에서도 눈물이 난다”면서 “그러나 이 젊은 부부와 같이 갑자기 사정이 나빠진 사람은 이번 지원의 대상이 못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어 “분열에 따른 갈등과 혼란, 배제에 의한 소외감,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나아가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대한 원망과 배신감이 불길처럼 퍼져가는 것이 제 눈에 뚜렷히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지사는 “적폐세력과 악성 보수언론이 장막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권토중래를 노리는 것도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그는 ‘환불균 불환빈’(患不均 不患貧, 백성은 가난이 아니라 불공정한 것에 분노한다는 뜻)이라는 논어 구절을 인용하면서 “2400년전 중국의 맹자도, 250년전 조선왕조시대에 다산도 ‘백성은 가난보다도 불공정에 분노하니 정치에선 가난보다 불공정을 더 걱정하라’고 가르쳤다”며 “하물며,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공화국에서 모두가 어렵고 불안한 위기에 대리인에 의해 강제당한 차별이 가져올 후폭풍이 너무 두렵다”고 비판했다.

이 지사는 “어쩔 수 없이 선별 지원하게 되더라도 세심하고 명확한 기준에 의한 엄밀한 심사로 불만과 갈등, 연대성의 훼손이 최소화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촉구했다.

그는 “결혼반지를 팔고 밤새 울었다는 그 젊은 부부에게 지금은 하나마나한 얘기겠지만 ‘그래도 내일은 해가 다시 뜬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며 “저도 잠이 안 온다”고 토로했다.

앞서 이 지사는 전날 <홍남기 부총리님께 드리는 마지막 호소>라는 SNS 글을 올려 “당정에서 2차 재난지원과 관련해 8조~10조원을 선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보도가 있는데, 국민 1인당 10만원씩 3개월 시한부 지역화폐로 지급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국민 1인당 30만원씩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치권 내에서 ‘선별 지급’ 쪽 의견이 강하게 나오자 절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 지사는 “어차피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는 장기화 될 것이고 지금의 경제 재정 정책으로는 코로나 극복 후에도 기술혁명에 따른 디지털화와 노동소멸, 소득의 극단적 양극화와 소비수요 절벽에 따른 경제침체는 계속될 것이니, 뉴노멀(새 일상)에 맞는 질적으로 새로운 정책을 미리 고민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달 20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에서 코로나19 수도권 대유행에 따른 대도민 호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경기사진공동취재단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달 20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에서 코로나19 수도권 대유행에 따른 대도민 호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경기사진공동취재단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9060826001&code=910402#csidxbd82477f76993b58a1a7290bf19ab12 


"풍찬노숙" 시절보다 험난... 국민의힘 쇄신의 성공조건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헝가리사회당과 국민의힘

20.09.05 19:40l최종 업데이트 20.09.05 19:40l김종성(qqqkim2000)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비대위원장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비대위원장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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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으로 개명한 보수 정당의 변신 노력은 지난 2004년 봄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천막 당사'로 상징되는 쇄신 작업을 벌였을 때보다 치열하다. 당시는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려다가 역풍을 당하고 대선 불법자금으로 인해 차떼기 사건이 발생한 뒤였다. 

한나라당이 국회 앞 10층 당사를 나와 여의도 공터의 천막당사에 입주한 날은 정확히 2004년 3월 24일이다. 이날 서울의 낮 기온은 제주·강릉·부산보다 3℃ 낮은 13℃였고, 구름도 많고 안개와 비도 있어서 다른 지방에 비해 다소 음산했다.

천막당사 입주식에서 박근혜는 "말이 아닌 실천으로 개혁의 참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국민에게 공약했다. 자서전인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그는 이때를 회상하며 "그것은 우리가 부패와의 절연을 선언하고 풍찬노숙의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고 평가했다.

지금 국민의힘은 10층 당사를 나와 천막 당사로 갈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모험의 길을 걷고 있다. 박근혜는 '부패와의 절연을 선언했다'고 했지만, 그 정도 절연과도 비교도 할 수 없는 험난한 상황이 국민의힘 앞에 놓여 있다. 임시정부 법통을 인정하고 5.18 정신의 계승을 선언하며 사회적 약자 배려 및 경제민주화를 지향하는 정강정책만 봐도, 과거 기억의 상당부분을 지워버리고자 애쓰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1990년 전후 동유럽 공산당의 사례

국민의힘보다 더 절박한 상황에서 당 쇄신을 시도한 정당들이 있다. 1990년을 전후한 동유럽 공산당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공산당의 존립 기반이 극히 취약해진 정치지형 속에서 생존과 활로를 모색했다.

동유럽 정당들은 공산주의를 추구했고, 국민의힘의 전신인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은 극단적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를 추구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존립기반이 크게 동요해 기존의 지배적 지위가 위태로워지고, 무엇보다 '너희들은 안돼!'라는 국민의 신호를 명확히 수신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동구권 몰락 후로는 이곳에서 공산당이 소멸됐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공산당 계열의 정당들이 있다. 헝가리어 약자가 MSZP인 헝가리사회당(Hungarian Socialist Party)도 그중 하나다. 
 

 헝가리사회당 홈페이지의 영문판.
▲  헝가리사회당 홈페이지의 영문판.
ⓒ 헝가리사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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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조상인 훈족은 중국 한나라의 압박정책에 밀려 몽골초원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흉노족과 동일하다는 역사학계의 학설이 있다. 이 훈족의 이동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낳고 유럽문명의 원형을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훈족의 후예인 헝가리는 또 다른 면에서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동유럽 공산권의 몰락과 미소 냉전체제의 와해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13명의 유럽 고교 교사 및 대학 교수들이 쓴 <새 유럽의 역사>는 1980년대 후반부터 확산된 세계적 탈냉전 속에서 일어난 헝가리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미 경제 자유화의 선두주자로 나와 있던 헝가리인들이 최초로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1988년 5월,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56년 이래 국가원수 자리를 지켜온 야노슈 카다르의 축출을 결의했다. 이듬해 초부터는 소련에 의한 탄압의 피해자들이 복권되었으며, 40년 넘게 유지된 일당 독재가 막을 내리고 복수정당제가 부활했다.<br /><br />이어서 헝가리 지도부가 내린 상징적인 결단은 유럽 전역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선을 가로지르는 철조망을 절단하고 그럼으로써 철의 장막을 뚫는 돌파구를 연 것이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 구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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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는 1989년 11월 9일 있었다. 헝가리 정세는 이 사건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동독보다도 먼저 공산당이 약해진 헝가리에서, 김종인과 국민의힘처럼 당의 쇄신을 도모하는 그룹이 있었다. 헝가리 공산당인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개혁파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1989년 10월 헝가리사회당을 창당했다. 이 당은 자본주의 당이 아니라 여전히 공산주의 색채를 띤 정당이었다. 당명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산당 경력이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전 이름과 비슷한 당명을 갖고 활로를 모색했으므로, 이들이 처한 난관은 국민의힘이 처한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자산 90% 사회 환원... 처절한 생존전략

하지만 헝가리사회당의 도전은 결국 성공했다. 그동안 부침이 있긴 했지만, 이들은 소련도 몰락하고 동구 공산권도 몰락한 세상에서 지난 30년간 유력 정당 지위를 유지해왔다. 이들의 쇄신 작업이 성공한 비결과 관련해, 2013년에 명지대 미래정치연구소가 발행한 <미래정치연구> 제3권 제1호에 실린 정치학자 박경미의 '탈공산화 이후 공산당 계승정당의 생존전략'은 이들의 전략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 번째 전략은 공산당의 법적 정통성을 계승하되 차별화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나왔지만 그곳과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이들은 정강정책을 사회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수정하고 좌파가 아닌 중도좌파의 노선을 표방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중은 정치인들을 대체로 불신한다. 과거와의 차별을 선언하고 이념을 수정하면 당이 어느 정도는 바뀌겠지만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문서나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대중은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헝가리사회당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어떻게 했는지,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공산당이 보유하였던 자산을 버림으로써 공산당과 실질적인 거리두기를 실현하는 방식을 꼽을 수 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다는 명분에서 공산당을 잇는다는 법적 연속성은 유지한다고 하였지만, 1990년 초까지 공산당 자산의 90%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여 실질적인 단절을 추진하였다."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둘 수는 없지만, 자기 재산을 무언가에 사용하는 것은 진심을 명확히 보여주는 방법 중 하나다. 공산당 때 확보한 재산의 90% 이상을 환원하는 조치는 헝가리사회당의 진심을 보여주는 첩경이 됐다. "이는 MSZP가 초기에 대중적 인기를 얻게 한 중요한 요인"이라고 위 논문은 평가한다.

2004년 3월 24일 한나라당과 박근혜는 10층짜리 당사를 나와 천막당사로 들어갔다. 헝가리사회당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재산을 거의 다 버리고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당 쇄신의 격이 달랐던 것이다.

헝가리사회당의 두 번째 전략은 체질을 바꾸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산당의 조직 원리인 민주집중제에 연연하지 않았다. 당 간부나 기관들을 상향식으로 선거하되 하부가 상부에 복종하는 민주집중제에 집착하지 않고, 지방 지부에 정책결정권과 공직선거 후보자 선출권 등을 나눠줬다. 당비 액수도 지방 지부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했다. 이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당에 애착을 갖도록 하고 그들에 의해 당이 살아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세 번째 전략은 특정 그룹의 유권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러브콜'을 보내는 것이었다. 공산당 몰락이라는 위기 상황 앞에서 여러 그룹을 죄다 끌어들이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노동조합 쪽으로 집중적인 구애 작전을 벌였다. 과거 공산당의 지지 기반과 겹치는 노동조합 쪽에서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직을 확충하는 확실한 방안을 선택했던 것이다.

헝가리사회당은 재산을 내놓고 권한을 이양하는 과감한 전략을 구사하면서도 지지 계층을 고를 때만큼은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이전에 거리를 뒀던 그룹을 상대로 '앞으로는 우리가 책임질 테니 지지해달라'며 접근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핵심은 외형 아닌 '내면 혁신'에 있다
 
 3일 오전 국민의힘 관계자가 국회 당 대회의실 백드롭을 교체하고 있다. 미래통합당은 지난 2일 '국민의 힘'으로 당명을 교체했다. 당명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힘, 국민을 위해 행사하는 힘,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힘을 함축한 것이라는 것이 당의 설명이다. 2020.9.3
▲  3일 오전 국민의힘 관계자가 국회 당 대회의실 백드롭을 교체하고 있다. 미래통합당은 지난 2일 "국민의 힘"으로 당명을 교체했다. 당명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힘, 국민을 위해 행사하는 힘,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힘을 함축한 것이라는 것이 당의 설명이다. 2020.9.3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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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사회당의 노력은 서서히 결실을 맺었다. 1990년 의회 선거에서는 10.9% 득표율로 386석 중 33석을 얻는 데 그쳤지만, 4년 뒤에는 33.0%로 209석을 차지해 제1당에 올랐다. 1998년에는 28.2%, 2002년에는 42.0%, 2006년에는 43.2%, 2010년에는 19.3%, 2014년에는 25.7%, 2018년에는 12.3%를 기록했다. 2010년부터는 세가 약해졌지만 동구권 몰락 후로도 오랫동안 상당한 득표율을 올렸던 것이다. 공산당의 법통을 승계하면서도 이런 생존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동구 공산권 몰락 뒤의 공산당 후예정당은 '몰락한 부잣집 자녀' 같은 존재였다. 공산당 일당독재 하에서 그들은 형식적 선거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공산권 몰락 뒤에는 수많은 정당들이 난립하는 속에서 일종의 자유경쟁을 벌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헝가리사회당이 유력 정당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가진 것에 집착하지 않고 체질을 전면 개선하면서, 가까워지기 쉬운 유권자들에게 집중 구애를 벌인 데 있다. 헝가리사회당은 이전의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과 당명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당명을 확 바꾸지 않고도 생존에 성공한 것은 외형적 혁신보다 내면적 혁신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여성해방>은 여성들 자신이 이룩한 업적

 

전쟁은 여성들이라고 하여 인도주의를 선사하지 않는다

김현환 박사 | 기사입력 2020/09/05 [16:21]

<여성해방>은 여성들 자신이 이룩한 업적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애국의 일념으로 불타는 조선의 어머니들과 딸들은 남성들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적 부담과 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과감하게 혁명의 길에 나셨으며 일제를 조국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성스러운 싸움에 생명도 청춘도 가정도 다 바쳤다. 1936년 봄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사단을 편성하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조직하였던 <여성중대>에 대하여 김일성주석은 감회깊게 회고하였다. <여성중대>를 따로 조직한 것은 유격대오의 급속한 확대발전과 전반적 항일무장투쟁의 새로운 앙양을 시사해주는 경이적인 사변이었다고 김주석은 언급했다. <여성중대>의 탄생은 봉건적 질곡에 의해 수천년 동안 뒷방에 갇혀있던 조선의 여성들이 혁명투쟁의 제일선에 당당히 나섰다는 것을 의미하는 중대사였다. 지금은 우리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두고 말할 때마다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항일혁명시기에만 해도 여성이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는 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우기 여자가 총을 잡고 남성들과 같이 장기간 무장투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일성주석 자신도 초기에는 여성들의 참군을 불합리한 것으로 보았다고 고백했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육체적으로 연약하다는 생각, 그들이 그 연약한 몸으로 유격투쟁 앞에 나서는 모든 난관을 극복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그의 머리를 지배하였다고 그는 진술했다.

 

사실상, 항일유격전쟁에서는 여성들이 간호원이나 재봉대원이나 취사원과 같은 보조적 역할 뿐 아니라 전투원으로서의 사명도 동시에 감당해야 하였다. 일단 참군이 결정되면 여성들도 무자비한 전쟁의 논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전쟁은 여성들이라고 하여 인도주의를 선사하지 않는다. 정세가 요구하면 남자들과 똑같이 무거운 짐들을 이고지고 며칠씩 강행군도 해야 하고 언땅에 배를 붙이고 포화 속에서 싸움도 해야 한다. 정치공작이나 식량공작을 위해 적구에 파견될 수도 있고 강추위 속에서 토목일 같은 것도 해야 한다. 엄동설한에 풍찬노숙하며 몇 년을 싸워야 할지, 몇십 년을 싸워야 할지 그것도 알 수 없다. 이 모든 난관을 과연 여성들이 감당해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지판에 여성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 처사로 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음을 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김주석은 그때의 심정을 토로했다. 여자들이 무장투쟁에 참가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그것은 남성들이나 할 일이다, 여자들에게는 여자들만이 하는 일이 따로 있다, 여성들을 뒷방에서 끌어내어 사회혁명에 참가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들에게 어떻게 무장투쟁까지 하라고 하겠는가 하고 김주석도 생각했다.

 

무장투쟁준비가 성숙되고 여기저기에서 유격대들이 계속 조직되자 참군을 열망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지하조직들에서 활동하던 여성들 가운데는 남들이야 뭐라건말건 막무가내로 유격대에 들어와 승인도 없이 그대로 주저앉는 동무들이 적지 않았다. 형세가 이쯤되자 김주석은 여성들의 참군문제를 정식으로 논의에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참군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일부 기혼자들은 한마디로 그 가능성을 부정해버렸다. 여성들은 집안 일을 보고 남성들은 집 밖의 일을 보는 것이 조상전래의 관례이다, 여성들이야 어떻게 험한 산발을 타고다니며 남자들도 감당키 어려운 유격활동을 하겠는가, 여성들을 전쟁마당에 끌어내는 것은 모험이라고 대부분 주장하였다.

 

한편, 차광수를 비롯한 일부 대원들은 자식이 불 속에 들면 그 속에 맨먼저 뛰어드는 것이 여성이다, 하물며 나라가 피눈물에 잠겼는데 여자라고 왜 가만히 앉아만 있겠는가, 여성참군은 여성들 자신의 요구일 뿐 아니라 시대의 부름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참군을 찬성하였다.

 

이렇게 의견이 갈리자 결국 여성참군에 대한 논쟁은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일시 중단되었다. 그렇게 미루어오던 여성참군문제가 아무런 의견충돌도 없이 모두의 지지 속에 매듭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계기로 된 것은 무장을 탈취하기 위한 간도여성들의 투쟁소식이었다. 화룡현에 사는 용감한 두 여성이 빨래방망이로 일본경찰을 때려눕히고 보총을 빼앗아냈다는 희소식이 날아들어 여성참군을 반대하던 사람들의 입을 봉해버렸다. 온 간도가 무장을 해결하기 위해 떨쳐나섰던 때였다. 무기를 빼앗은 두 처녀는 1933년 여름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였다.

 

 

수백년 동안 여성들을 구속하고 있던 봉건의 질곡을 대담하게 타파하고 무력항전에까지 참가하는 경지에 도달하게된 것은 손에 총을 잡고 나서는 길 외에는 달리 살 수 없는 조선여성들의 참혹한 생활이 마련해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고 김주석은 보았다. 여자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은 속박의 사슬과 원한 뿐 이었다. 조선의 봉건사회가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의 하나는 “남존여비”를 계율로 삼아 모든 여자들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구속하고 천대한 것이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음식이나 준비하고 밭을 가꾸고 길쌈이나 하는 집안의 머슴과도 같이 치부되고 있었다. 젊어서 남편을 잃어도 홀몸으로 늙어죽어야야 하는 것도 여자였고 빚에 팔려가는 것도 여자였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이 모든 불행위에 여성의 “도구화, 상품화”라는 불행을 더 첨가시켜 놓았다.

 

항일혁명은 그 모든 악적 조건과 부조리의 근원을 송두리채 쓸어버리는 “폭풍”이었으며 조선 여성들을 혁명의 길로 인도해준 “세기적인 사변”이었다. 조선의 여성들은 “펜이 아니라 선혈로써” 대지위에 자기의 새 역사를 쓰기 시작하였다고 김주석은 평했다.

 

여성참군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조선혁명군은 그들을 더 잘 돌봐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록 총은 잡았어도 여성은 역시 여성인 것만큼 유격전쟁을 하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여성고유의 생활을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하였다. 여대원들로 따로 대오를 편성해줌으로써 그들의 생활단위와 군사행동단위를 일원화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여대원들만으로 따로 <여성중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1936년 4월 만강부근의 수림 속에서 <여성중대>의 탄생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조선혁명군은 이 중대를 사령부직속으로 두고 소대와 분대들을 직접 편성해주었다. 첫 중대장으로는 박록금이 임명되었다. 여성중대는 우리 나라 군건설 역사상 처음으로 생겨난 여성전투부대였다.

 

< 여성중대>의 탄생은 수천년 동안 고질화되어 왔던 <남존여비> 사상과 인습을 타파하고 여성들의 지위를 실제적으로 남성들과 동등한 수평선상에 올려세운 하나의 사변이었다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또한 여성중대의 출현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전민족적인 폭과 인민적인 성격”을 뚜렷이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또한 의의가 크다고 김주석은 보았다.

 

조선항일혁명군에 <여성중대>가 있고 그 여성중대의 대원들이 남성군인들 못지 않게 용맹스럽게 잘 싸운다는 사실은 곧 전 만주일대와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고 세계를 경탄시키는 화제거리로 되었다. 여성들이 남성들과 똑같이 손에 총을 잡고 항일무장대오에서 용감하게 싸운다는 소식은 조선의 모든 여성들과 인민대중을 힘있게 고무추동하였다. 그 소식은 국내와 해외에서 인민혁명군에 입대할 것을 열망하는 수많은 참군지망자들을 낳게 하였다.

 

< 여성중대>는 어디에 가나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독차지하였다. 오각별이 빛나는 군모를 쓰고 어깨에 기병총을 멘 여대원들의 모습이 먼발치에 얼핏 나타나기만 해도 사람들은 <여자군대가 왔다!>고 소리치면서 동네방네를 뛰여다니었다. 여성중대가 사람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게된 것은 우선 여대원들이 어떤 정황에서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도덕품성”을 가지고 성심성의로 인민을 도와주고 존대하면서 처신을 잘한데 있었다고 김주석은 판단했다. 여성중대는 어느 부락에 주둔할 때나 주인집 뜨락을 쓸어주고 물을 길어주고 설겆이를 해주고 터밭의 김을 매주었다. 여대원들은 인민들 앞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연설도 하고 글도 가르쳐주었다. 여성중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자랑이었고 진귀한 꽃”이었다고 김주석은 표현했다.

 

여성중대는 여러 전투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웠다. 여성중대는 탄생후 반년 정도밖에 존재하지 못하였지만 조국이 영원히 기억하고 인민이 길이길이 따라배울 불멸의 위훈을 남기었다. 항일혁명의 일선에서 무장을 잡고 일제를 상대로 하여 피어린 싸움을 벌려온 여전사들이야말로 현대 조선여성들의 빛나는 귀감이며 <여성해방투쟁사>에서 뿐 아니라 <인류해방투쟁사>에서 참다운 전형으로 내세울 수 있는 여성영웅들이라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그들은 여성들의 <사회적 평등>을 남먼저 이룩하고 우리 나라 <여성해방>의 길을 피로써 개척한 선구자들이었다. 김일성주석은 생전에 조국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전장과 교수대에서 장열하게 최후를 마친 여투사들과 마지막까지 혁명적 의리에 충실하였던 여대원들에 대해서 자주 회고하였다.

 

초기 대성산에 건설된 <혁명열사능>에는 10여명의 여성투사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김일성주석은 이들을 하나씩 기억하며 그들의 업적을 추억하였다. 공청일꾼으로 투쟁을 하다 적들에게 잡혀 무수한 고문을 받았지만 일체 비밀을 대지 않고 죽은 이순희동지, 혀를 깨물며 조직의 비밀을 지킨 마동희를 낳아키운 혁명가로서 딸과 며느리도 유격대에 보낸 장길부여사, 김주석의 부인으로 도천리일대에서 어려운 적후공작임무를 잘 수행하였으며 군복제작에 큰 공을 세운 김정숙여사와 그녀와 함께 임무를 다한 최희숙동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절대로 혁명가의 지조를 버리지 않았던 안순화동지, 북만에서 싸운 재봉대 책임자로 혁명가의 지조를 지킨 한주애동지, 혁명가답게 절개를 잘 지킨 남만유격대원들의 친근한 누나였던 이순절동지, 장백현 주경동에서 지하공작을 하다가 체포되어 희생된 김수복동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민의 충실한 복무자, 교양자, 선전자로서의 사명과 본분을 다한 이계순동지, 등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쳐 혁명가로서의 존엄과 절개를 지켜낸 여성들의 실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고 김주석은 술회하였다.

 

그 중에서 김일성주석은 김희숙동지를 가장 못잊어했다. 주력부대의 모든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최희숙동지의 뛰어난 “충실성과 혁명성”을 언제나 경이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김주석은 그녀의 숭고한 의리와 인격에 탄복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추억했다. 고난의 행군때 최희숙동지는 남들이 다 자는 한밤 중에도 우등불가에서 언 손을 녹여가며 전우들의 꿰진 옷들을 기워주었다. 그는 맹물로 끼니를 때우면서 이틀이건 사흘이건 맡은 일을 끝내기 전에는 절대로 쉬지 않았다.

 

소할바령회의후 소부대공작에 참가하였던 최희숙은 중요한 정보자료를 가지고 사령부로 찾아오다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적들에게 붙잡혔다. 적들은 비밀을 뽑아내려고 그녀에게 무지막지한 고문을 들이대었다. 나중에는 그녀의 두눈까지 뽑아냈다. 그러나 그 어떤 고문과 위협도 최희숙동지의 굳은 절개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부르짖었다.

 

“나에게는 지금 눈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위업의 정당성과 진리성을 확신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며 혁명절개가 강한 투사들만이 할수 있는 명언이라고 김주석은 생각했다. 그 말은 여투사 최희숙의 “한생의 총화”이기도 하다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오늘날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는 말은 조선인민들과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혁명적 낙관주의>를 상징하는 금언으로 되고 있다.

 

여성들이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를 담당한다”는 김주석의 주장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피로 물들여진 항일의 혁명역사와 조선 <여성해방운동>의 직접적인 참가자, 증견자로서의 산 체험에 기초한 것이라고 김주석은 주장했다.

 

오늘 김정은 시대에 조선인민군대에는 항일의 <혁명전통>을 이어받은 수많은 여성구분대들이 있다. 총을 잡고 조국의 국방을 지키고 있는 여전사들은 비단 인민군대의 여성구분대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농적위대, 붉은 청년근위대들에도 총을 잡은 여대원들이 많다. <전민무장화>를 실현한 조선에서는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1, 000만의 여성 전체가 유사시에 조국의 국토를 사수하기 위하여 총을 잡고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이 1, 000만 여성무장대의 원형이 바로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직속 <여성중대>였다.

 

지금 조선노동당시대는 항일혁명투쟁시기 여성중대원들이 발휘한 <백두의 혁명정신 과 투쟁전통>을 이어받은 무수한 여성 영웅들과 여성 활동가들, 여성 노력혁신자들을 배출하였다. 노동당시대가 낳은 여성영웅들의 사고와 실천을 지배한 것은 <백두의 넋>, <백두의 혁명정신>이었다. 조선의 수백만 여성들은 오늘 김정은시대에도 이 넋으로 조선 땅에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주체사회주의 보루를 쌓아가고 있다.


2020년 9월 4일 금요일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쓰지 말고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자

 


주권연대 문예위원회가 발표

문경환 | 기사입력 2020/09/04 [16:41]

국민주권연대는 오늘(4일) 문예위원회 명의로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쓰지 말고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글을 발표하였다. 

 

아래는 전문이다.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쓰지 말고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자

 

※원래 외래어와 외국어는 차이가 있다. 외래어는 외국에서 들어온 말이지만 대체할 우리말이 없어 우리말처럼 쓰는 말이며, 외국어는 대체할 우리말이 있는 말이다. 예를 들어 ‘빵’은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외래어로 우리말로 대체할 수 없다. 반면 ‘쿠키’는 원래 있던 우리말인 ‘과자’로 대체할 수 있으므로 외국어다. 

 

그런데 외국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급격히 많은 외국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여기에 더해 외국에서도 신조어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외국어를 우리말로 미처 순화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대체할 수 있는 우리말을 고안해내도 대중들에게 널리 쓰이지 못해 그대로 묻히는 경우도 많다. 이로 인해 외래어와 외국어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네티즌’은 ‘누리꾼’이라는 순화어가 분명히 있지만 널리 쓰이지 않아 ‘네티즌’을 외래어라 해야 할지, 외국어라 해야 할지 분명치 않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외래어와 외국어를 구분하지 않고 외국어로 통칭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문제 삼는 것은 대체할 수 있는 우리말이 있는 외국어다. 

 

1.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 실태

 

많은 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습관적으로 외국어를 쓴다. 어느새 외국어가 더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회의를 ‘미팅’이라고 하고 지각을 ‘딜레이’라고 한다. 생일잔치를 ‘생일파티’라고 하고 수련회나 연수를 ‘워크샵’(표준 표기는 워크숍)이라고 한다. 심지어 인사말도 ‘굿모닝’을 직역해 ‘좋은 아침’이라고 하거나 영어를 그대로 써서 ‘하이’라고 한다. 사과할 때도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쏘리’라고 하고 감사의 표시도 ‘땡큐’라고 한다. 칭찬할 때도 ‘굿’이나 ‘나이스’라고 하고 동의하거나 승인할 때도 ‘오케이’라고 한다. 예전에 한 축구선수는 승리의 기쁨을 누구에게 전하겠냐는 기자 질문에 “마누라와 와이프요”라는 황당한 답변을 하기도 했다.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이 낳은,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다. 

 

이런 모습은 진보진영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얼마 전 한 진보언론 기사에는 사람의 실명을 감추기 위해 ‘A 후보, B 후보’라는 표기를 썼다. 그냥 ‘가 후보, 나 후보’나 ‘ㄱ 후보, ㄴ 후보’라고 해도 의미 전달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지적이 있고서야 수정하였다. 다른 기사에서는 ‘외교안보라인’이라는 표현도 썼는데 이는 ‘외교안보진영’이나 ‘외교안보인사’로도 충분히 대체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기사에서는 ‘우점’을 ‘어드밴티지’라고도 했다. 

 

한 방송인은 “왜 ‘사실’이라는 우리말을 두고 ‘팩트’라는 외국어를 쓰느냐”는 지적에 “사실과 팩트는 같은 말이다. 하지만 어감이 다르다. ‘사실’이라는 말로는 의미를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며 앞으로도 ‘팩트’라는 말을 쓰겠다고 고집했다. 

 

어떤 가수는 자기 유튜브 채널에서 ‘라이브 방송’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가 ‘생방송’으로 고쳤다. 한 진보적 인터넷방송사는 제목에 종종 ‘ft.’라는 표기를 단다. 찬조출연을 뜻하는 ‘피처링’의 약자다. 

 

이런 모습은 과거에 비해 더 심해졌다. 과거에는 우리말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가 지금은 포기하고 외국어를 선택하는 경우도 생겼다. 진보적 언론으로 출발한 한겨레는 당시 언론 환경에서는 파격적으로 한자와 영문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언제부터인지 표기원칙을 포기하고 영문을 쓰고 있다.

 

대중문화로 넘어가면 상황은 정말 심각하다. 대중음악 사례를 보자. 요즘 청소년들에게 많은 인기를 받는 가수, 그룹은 거의 대부분 외국어 이름을 쓰고 있다. ‘BLACKPINK, 지코, 제시, 블루, 아이유, 오마이걸, 린다G, Tones And I, Maroon 5’처럼 대부분 국적 불명의 외국어에 아예 표기까지 영문으로 한다. 이들이 부르는 노랫말도 영어 범벅이며 분명 우리말인데도 영어 발음처럼 불러서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일찍부터 이런 노래를 최고로 여기며 들으면 어떤 영향을 받을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현재 우리의 말과 글 생활이 외국어에 심각하게 점령당했음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2. 외국어 남용의 문제점

 

흔히 민족의 징표로 핏줄과 언어, 문화, 지역 등을 꼽는다. 이 가운데서도 핵심 징표는 핏줄과 언어다. 따라서 언어를 잃어버리면 민족이 사라진다. 일제가 우리말을 빼앗고 일본어를 강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때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만주족이 하루아침에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여러 이유 중에도 자기 언어인 만주어를 잃어버리고 중국어를 썼다는 점이 크다. 

 

유엔은 지난해를 ‘세계 토착어의 해’로 지정했다. 전 세계에는 7천여 개의 언어가 있는데 소수민족의 언어가 2주에 1개꼴로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소수민족이 자기 언어를 포기하고 다수민족의 언어를 선택하면 단순히 말만 빌려다 쓰는 게 아니라 그 민족의 가치관, 사고방식, 문화도 따라하게 되고 결국 다수민족에 흡수되고 만다. 이런 문제 때문에 유엔도 소수민족의 언어에 관심을 갖고 ‘세계 토착어의 해’를 지정한 것이다. 유네스코 역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지면 인간의 사고와 세계관을 이해하는 도구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라며 언어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우리 민족이 살아남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대국에 민족의 자주권을 빼앗기고 제2의 일제강점기와 같은 노예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가 민족의 생존과 발전에 중요한 요소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언어는 사람의 가치관, 사고방식, 문화 등 정신과 행동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라도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사용하면 영미권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갖게 되고 행동까지도 영미권의 특징을 따라하게 된다. 영어에서 ‘나’(I)와 ‘우리’(we)의 구분은 분명하지만 우리말은 둘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다. 만약 미국인에게 자기 집을 가리키며 “저기가 우리 집이야”라고 하면 그 미국인은 “저기는 내 집이 아니다. 너의 집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미국에 개인주의가 발달한 반면 우리 민족은 집단주의가 발달한 것과 관련 있다. 

 

우리 조상들도 언어의 소중함을 잘 알았기에 일제강점기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우리말을 지켜왔다. 영화 「말모이」를 보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통해 우리말을 지켜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서고 분단이 되고 미군이 주둔하는 속에서 미국은 미국 문화와 함께 영어를 뿌리내리게 하려고 시도했다. 영어를 알아야 출세하고, 영어를 잘해야 선진적인 사람으로 대접받는 사회 문화 속에서도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백기완 선생은 영어는 물론 한자어도 순우리말로 고쳐 쓰자는 운동을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쓰는 동아리, 모꼬지, 새내기, 달동네 등은 백기완 선생이 생각해낸 말이다. 

 

한편 민족운동,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말을 버리고 외국어를 쓰기 시작하면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민족운동, 진보운동이라고 하면 미국의 예속정책에 반대해 자주독립을 이루고 일본의 재침시도에 맞서 반일태세를 갖추는 것이 첫째 과제다. 그리고 기득권층과 특권층이 아닌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둘째 과제다. 끝으로 남과 북 정상이 만나 합의한 평화와 번영,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 셋째 과제다. 

 

그런데 운동가들이 우리말을 천시하고 외국어 사용을 즐기면서 미국식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젖어들면 반미자주운동을 철저한 자세로 할 수 없게 된다. 미국의 예속정책을 두고도 미국의 입장에서 그럴 수 있다고 여기면서 약소국의 운명이라며 패배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반미도 좋지만 미국에게 배울 점도 있지 않나 하면서 ‘용미’를 주장하기도 한다. 물질만능주의를 받아들여 세계 최고의 국방력을 가진 미국을 우리가 어떻게 이기냐며 ‘공미’의식을 갖기도 한다. ‘설마’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우리 앞 세대에서 반미운동을 했던 선배들 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햄버거와 콜라를 좋아하고 영어를 즐겨 쓰며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사람이 반미운동을 한다고 하면 대중이 어떻게 생각할까?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미국식 가치관과 개인주의적인 방향에서 민주주의를 접근하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절대선으로 여기며 왜곡된 민주주의를 따르게 된다. 모든 억압과 제도를 부정하고 개인주의를 극단으로 발달시켜 무정부주의에 빠지기도 하며, 금권정치와 인종차별의 첨단을 달리는 미국을 민주주의의 모범사례로 여기기도 한다. 일부 진보단체에서 홍콩 사태를 주권 문제가 아닌 개인의 인권 문제, 집회 시위의 자유 문제로 바라보는 것도 이와 관련 있다. 

 

통일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남과 북이 통일을 하자는 것은 하나의 민족이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 만나면 체제가 달라 어색할 것 같지만 언어가 같아서 금방 친해지고 하나가 된다. 민족이 가진 힘이다. 그런데 통일운동을 한다는 사람부터 우리말을 경시하고 외국어를 남용하면 갈수록 남북 사이에 의사소통이 어려워지고 동질성도 느끼기 힘들어질 것이다. 미국식 실용주의에 빠져서 ‘비용도 많이 든다는데 굳이 복잡하게 통일을 해야 하나, 그냥 전쟁만 하지 말고 별개 나라로 살아가도 좋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북한은 집단주의가 강해서 개인의 자유와 개성도 보장 안 할 것 같은데... 난 그건 싫은데’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통일의지가 줄어들게 된다. 

 

한편으로 외국어 남용은 대중성을 거스르기도 한다. 대중의 눈길을 끌기 위해 외국어를 쓰면 일시적으로 관심을 받을 수는 있지만 정작 잘 알아듣기 어렵고 낯선 외국어로 된 말과 글이 쉽게 이해가 안 돼 대중의 외면을 받게도 된다. 대중은 아는 척하고 똑똑한 척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선거 시기에 매니페스토 운동을 하자고 하면 사람들은 ‘저게 뭐야?’라며 호기심을 갖지만 동시에 ‘자기들만 알아먹는 저런 운동 너네끼리나 해라’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3. 외국어 남용의 원인

 

가장 큰 원인은 미국의 사상문화공세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선교사를 앞세워 미국의 문물을 전파하면서 미국을 우월한 나라, 따라 배워야 할 나라, 이상적인 나라로 포장하였다. 그리고 햄버거, 콜라, 팝송, 헐리웃 영화를 들여보내 현지인의 사대주의를 부추긴다. 미국을 추종하는 사람은 당연히 미국인이 쓰는 말도 추종하게 되어 있다. 금발을 휘날리는 미국인 배우가 쓰는 말이 멋있어 보이고 자기도 따라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자신을 지배하는 민족의 언어를 쓰는 것을 처음에는 굴욕적으로 여기지만 재빨리 받아들여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류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옛날 사대주의에 빠진 조선의 양반 계급은 한자를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평소에 말도 한자어에 토씨만 한글인 이상한 말을 썼다. 그리고 한글을 ‘언문’이라 천시하며 천한 계급이 쓰는 문자로 여겼다. 중국을 숭상했기 때문이다. 

 

11세기 영국은 프랑스 노르망디공에게 점령당해 3백년정도 식민지가 됐다. 그 결과 영국 귀족은 프랑스 문화를 동경해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평민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문화가 정착됐다. 우리가 어려운 한자어나 사자성어를 섞어 쓰면서 자기가 유식하다고 뻐기는 것처럼 당시 영국인들도 프랑스 단어를 섞어 쓰면 유식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런 사대의식에 사로잡힌 사상문화는 이후 산업혁명으로 ‘대영제국’을 건설하고서야 사라졌다고 한다. 

 

두 번째 원인은 정부정책과 언론방송의 영향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정부가 우리말 파괴와 영어 사용을 부추겨왔다. 그 시작은 김영삼 정권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 민주당, 국민의힘(구 미통당)을 가릴 것 없이 누가 집권하든 이런 경향은 유지되었다. 동사무소를 주민센터로 바꾸는 등 정부와 지자체가 앞장서서 공식 행정용어에 영어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축제를 ‘페스티벌’로, 박람회를 ‘엑스포’로 표기한다. 창업을 ‘스타트업’으로 표기하고 대책본부 혹은 전문위원회를 ‘태스크포스’나 ‘TF’로 표기한다. 

 

아예 공공기관이나 공기업 이름을 외국어로 짓기도 한다. ‘aT’, ‘EX’, ‘코레일(KORAIL)’, ‘K-Water’, ‘코가스(KOGAS)’, ‘캠코(KAMCO)’, ‘SH공사’, ‘kepco’ 등 얼핏 외국계 기업의 이름 같은 공공기관, 공기업이 넘쳐난다. 

 

사실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과 문물이 출현하는 현실에서 새로운 외국어가 계속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외국어를 우리말로 고쳐 부를 수 있도록 정부기구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북한이나 중국은 새로운 외국어가 생길 때마다 정부 차원에서 번역을 해 자국어로 쓸 수 있도록 한다. 

 

언론방송도 영어 전파에 앞장섰다. 특히 앞서 언급한 대중음악처럼 대중이 널리 즐기는 대중문화예술 영역에서 이런 경향이 심하다. 언론사는 의견란을 ‘오피니언’으로 표기하고 방송사는 시청자 평가단을 ‘옴부즈맨’이라 부른다. 방송 프로그램 이름도 ‘패밀리’, ‘콘서트’, ‘해피’, ‘선데이’, ‘투게더’ 같은 외국어투성이다. 연예인, 방송인들도 외국어를 남발하고 방송편집인은 이를 여과 없이 내보낸다. 심지어는 이미 쓰는 외래어표기도 미국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언론도 있었다. 중앙일보는 한때 유전체를 뜻하는 ‘게놈’을 미국인들이 부르듯 ‘지놈’으로 써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세 번째 원인은 사회 전반에 퍼진 외국어 선호 분위기다.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외국어가 더 멋있다, 신선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면, 멋있어 보이려면 외국어를 써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는 특히 돈과 연결될 때 극대화된다. 상업광고나 상표, 가게 간판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국립국어원이 2005년에 ‘외국어 간판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에 대해 조사한 결과 50% 이상이 외국어 간판 사용에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했다. 

 

네 번째 원인은 진보개혁진영 안에 알게 모르게 퍼져있는 언어사대주의와 패배주의다. 매니패스토, 북스타트 같은 뜻 모를 말들을 한국에 처음 도입한 건 모두 시민단체들이다. 진보개혁진영 역시 대중의 관심과 참여가 중요하기 때문에 쉽게 눈길을 끌 수 있는 생소한 외국어를 선택하는 것이다. 또 주류사회, 제도권에 편입되고자하는 심리가 외국어 사용을 부추기기도 한다. 우리말을 쓰려고 애를 썼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고 호응도 없고 힘들어서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토론이나 세미나의 우리말인 ‘댓거리’도 대학생들이 많이 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쓰지 않게 되면서 지금 대학생 중에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다. 

 

4. 외국어보다 더 멋진 우리말을 쓰자

 

우리말을 외면하고 외국어를 선호하는 이런 문화를 그냥 둬서는 안 된다. 진보통일운동을 하는 우리부터 바꿔나가야 한다. 

 

가장 먼저,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우리말을 살리는 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일이 아니다. 언어운동가, 문화운동가나 하는 일이지 우리는 투쟁하느라 바빠서 모르겠다는 자세도 잘못됐다. 외국어를 배척하고 우리말을 아끼는 것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며 투쟁을 승리하는 길이라는 입장을 튼튼히 세워야 한다. 

 

다음으로,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말은 숨을 쉬는 것처럼 별 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나온다. 사람들마다 습관적인 말투가 있는데 자신은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언어생활은 다른 것보다 더 많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언어를 바꾸는 문제는 힘든 일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좀처럼 성과를 내기 어렵다. 

 

다음으로, 외국어보다 더 멋진 우리말 표현을 찾아내고 만들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우리말을 써야 하는 건 알겠는데 외국어가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국어를 쓴다고 주장한다. 외국어를 써야 멋있어 보이고 의미 전달도 정확하고 사람들 뇌리에 깊이 박힌다고 여긴다. 이런 사람들은 당장 대중이 우리 주장에 관심을 갖고 호응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외국어가 확실히 효과적이라고 항변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 외국어가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외국어보다 더 효과적인 우리말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백기완 선생이 처음 동아리, 모꼬지 같은 말들을 만들어 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낯설다며 기존의 써클, MT 같은 말을 계속 썼다. 하지만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해 동아리, 모꼬지라는 말을 써클, MT 보다 더 아름답고 세련되고 직관적인 말로 바꾸어냈다. 

 

진보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말이 외국어보다 못하다고 한탄할 게 아니라 외국어보다 더 멋진 우리말을 찾아내고,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대중의 공감을 얻어야 한다. 국민이 볼 때 외국어 범벅인 말을 하는 적폐세력보다 우리말을 하는 진보통일운동진영이 더 멋져 보여야 한다. 

 

그런데서 책읽기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책을 많이 읽을수록 자기 안에 우리말의 저수지가 커지고 깊어질 것이다.

 

우리 모두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여 민족의 주권을 지키고 발전시키자. 

 

2020년 9월 4일

국민주권연대 문예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