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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일 화요일

새로운 통일운동을 향하여


<기고> 이재봉 원광대 교수
이재봉  |  pbp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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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02  10: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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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 남이랑북이랑 통일운동 대표)

올해 ‘분단 70년’이란 말을 많이 듣는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주제도 “분단 70년을 맞아 새로운 통일운동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분단된 지 70년이 흐르도록 통일의 문턱에도 이르지 못한 채 통일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분단의 골이 더 깊어지는 게 안타깝다. 나는 전업 또는 전문 시민운동가가 아니다. 북한 및 통일문제에 관해 공부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으며, 부업으로 평화와 통일운동에 한쪽 발이나마 걸쳐온 것이다. 부업 통일운동가로서 시민단체의 새로운 통일운동을 모색해보는 게 부담스럽지만 지금까지 겪어온 일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통일운동에 관해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내가 통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는 북한의 식량난이었다. 1995년 북한은 극심한 식량난을 겪으며 세계식량계획 (WFP)에 긴급구호를 요청했다. 일본에도 식량지원을 부탁했다. 쌀이 남아돌아 보관하기 어렵다면 창고에서 썩고 있는 쌀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에 따른 남한의 ‘조문 파동’으로 남북 사이에 대화나 접촉이 끊긴 터였다. 북한이 남한에 손을 내밀지 못하던 차에 김영삼 정부가 ‘뜨거운 동포애’를 발휘했다. 일본보다 한국이 먼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외무무장관은 한국이 식량을 보낸 뒤 일본이 지원해달라며 협조를 부탁하고, 통일부장관은 일본이 한국보다 먼저 보내면 한일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위협하기도 했다. 1995년 6월 27일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앞두고 ‘표심’을 얻기 위한 정치적 속셈이었다. 6.25전쟁 발발 45주년 기념일에 “잊지 말자 6.25, 쳐부수자 공산당”을 외치는 대신 부랴부랴 쌀을 보낸 배경이다. 쌀을 보낸 다음날 그리고 지방자치단체 선거 하루 전날, 청진항에서 이른바 ‘인공기게양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쌀을 주면서도 뺨을 맞았다”는 보수언론의 주장에 대북 식량지원에 호의적이던 여론이 싸늘하게 식기 시작했다. 6월 27일 선거에서 여당이 재미를 보지도 못했다. ‘순수한 인도적 차원’이 아닌 ‘불순한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대북 식량지원의 불행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두 달 뒤인 8월 북한에서 이른바 ‘100년 만의 물난리’가 나서 식량난이 더욱 심각해졌는데도 김영삼 정부는 남은 임기 동안 민간 차원의 식량 지원까지 방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6년 7월 북한 및 통일 관련 월간지에 “조건 없이 북한을 지원하자”는 내용의 글을 썼다. 잡지사에서 대북 식량지원을 반대하는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기에 난 지지한다고 했더니, 그럼 찬성의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것이었다. 나중에 잡지를 받아보니 “이 달의 쟁점”이라는 주제로 대북 식량지원에 관해 찬성과 반대의 글이 각각 한 편씩 실려 있었다. 반대의 글은 통일부 관리가 쓴 것이었다. 그 글 때문이었는지 여러 통일운동 단체들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기 시작했다. 정부의 반대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북 식량지원 운동이 고조되던 때였다. 그 무렵 <전북 종교인 연합회> 대표라는 분이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전주고백교회 한상렬 목사였다. 그가 <북녘동포 돕기운동 전북본부>를 주도하면서 전북 도내 14개 시와 군에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사람을 모아놓으면 내가 왜 북한에 식량을 보내주는 게 바람직한지 강연했다. 그 때부터 학자가 대중 강연이라는 외도를 시작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서울 이외엔 전북 지역에서 가장 많은 돈을 모았다. 1998년까지 2년 동안 5억 원 정도 모금했을 것이다. 전라북도와 함경남도 사이에 역사 문화적 공통점이 적지 않다는 점을 찾아내, 남쪽에서 가장 차별 받는 전라도 사람들이 북녘의 가장 어려운 함경도 사람들에게 식량을 보내면서 자매결연으로 발전시켜보자는 목표를 세웠다. 1998년 5월 이러한 취지로 북한 당국자들과 협상하고 싶으니 주선해달라는 편지를 중국 연변의 조선족 교수에게 보냈다. 6월 긍정적 회답을 받았다. 평양 사람들이 우리와 베이징에서 만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통일부에 신고하고 허락을 받아 한 목사와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그들은 처음 만나자마자 초청장을 건넸다.
1998년 10월 한 목사와 둘이 일주일 일정으로 북녘 땅을 밟게 된 것은 상당한 뉴스거리였다. 남북 사이의 인적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계기였던 2000년 6.15 정상회담 2년 전이었고,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기도 전이었기 때문이다. 평양에 다녀오자 여러 언론매체에서 인터뷰나 방북기 게재를 요청해왔고 다양한 단체와 기관에서 강연을 부탁해왔다. 그런 가운데 많은 대북지원 단체 임원들이 조용히 묻는 게 있었다. 어떻게 하면 지원 물자를 평양에 직접 갖고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의 대북지원 운동엔 북한을 방문해보고 싶다는 의도가 배어있었던 것이다. 평양 방문을 위해 북녘동포 돕기 운동을 주도하는 듯한 사람들도 적지 않아 보였다.
1999년 6월 1차 서해교전이 일어났다. 원인과 과정이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30명 안팎의 북녘 젊은이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남북 사이에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는 위험한 사건이 터졌는데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전투에서 이겼다고 환호하는 분위기가 사회에 퍼졌다. 국방부는 거의 모든 일간신문에 대문짝만한 광고를 실어 “민과 군이 함께 애창할 수 있는 승전가”를 현상 공모하기도 했다. 남북관계가 더욱 나빠지는 가운데 서해에서의 싸움에 이겼다고 축제 분위기에 빠져드는 우리 사회를 지켜보며 나는 열흘 남짓 밤잠을 설쳤다. 고민 끝에 시작한 게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이었다. 남북을 공멸로 이끌 전쟁의 가능성을 단 1%라도 줄이려면 북한에 대한 원한이나 적대감을 누그러뜨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1999년 8월부터 매달 1-2차례 10쪽 안팎의 ≪남이랑북이랑≫ 소식지를 만들어 먼저 가족과 친지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냈다. 내 글을 읽고 동의하면 구독료나 회비라 생각하고 매달 1,000원씩 보내달라고 했다. 매달 1,000원씩 보내기 귀찮겠으면 1년치 10,000원 또는 평생회비 100,000원을 한꺼번에 보내도 좋다고 했다. 소식지를 만들고 보내는 비용은 모두 내가 부담하고, 구독료나 회비는 전부 북녘동포를 돕는데 쓰겠다고 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원한과 적대감이 줄어들지 않겠느냐며 호소했다. 배부른 남쪽 사람들은 북한에 대한 편견과 왜곡에서 벗어나 북녘동포를 도우며 원한과 적대감을 줄이고, 배고픈 북녘 사람들은 남쪽동포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원한과 적대감을 줄인다면, 서해교전 같은 불행하고 위험한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 달 만에 200만 원 이상 모였고 1년 만에 1,200만 원 이상 들어왔다. 2007년 말 ≪남이랑북이랑≫이 서울의 <남북평화재단>과 합칠 때까지 8년 남짓 구독자 또는 회원은 5,000명을 넘었고 모금액은 1억 원 가까이 되었다.
회원이나 구독자 또는 후원자들을 분류해보니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처음엔 내 글의 내용보다 나와의 친분 때문에 회비를 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둘째,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모르지만 내 의견이나 호소에 동감한다며 구독료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셋째,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 <우리겨레 하나되기 운동본부>, <개성 평화의숲 가꾸기> 등 큰 단체들을 통해 북녘동포를 도우며 회원들이 평양이나 개성을 방문할 수 있도록 주선하자 북녘 땅을 밟아보기 위해 후원금을 내는 사람들도 생겼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은 인적으로나 물적으로나 남북교류 활성화를 불러왔다. 교류라지만 남북 경제력의 커다란 격차 때문에 남쪽의 일방적 지원이나 다름없었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남쪽 사람들은 서서 주고 북녘 사람들은 앉아서 받는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남쪽의 수많은 민간단체들이 경쟁하듯 저마다 북녘의 서너 개 관변기관 가운데 한 곳과 접촉하느라, 주는 쪽이 오히려 낮은 자세를 취하며 줄을 서는 듯했다. 북녘 땅에 한 번이라도 더 들어가 보고 싶은 호기심이나 후원자 한 명이라도 더 보내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 아니었을까.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교류가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완전히 끊어졌다. 대북지원과 남북교류를 주요활동으로 삼아온 많은 통일운동 단체들이 거의 모두 개점휴업 상태에 빠졌다. 평화와 통일을 외쳐온 활동가들은 감옥에 갇혔다. 보수정권과 수구언론 그리고 극우단체 등에 의해 모든 통일운동은 ‘친북’이나 ‘종북’ 행위로 매도당하게 되었다. 정부의 각종 정책에 대한 비판은 물론 2014년 4월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모조차 ‘친북’이나 ‘종북’과 연결되었다.
2014년 11월 ‘신은미-황선의 통일토크 콘서트’가 서울 조계사에서 열렸다. 종편이 이를 악의적으로 보도하면서 ‘종북몰이’ 광풍이 시작되었다. 극우언론의 왜곡과 억지 그리고 횡포가 얼마나 극심한지 전국 각지에서 예정되었던 콘서트가 줄줄이 취소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고위관리를 지낸 분들이 중심이 된 단체의 초청도 취소되고, 현직 국회의원들이 초청한 국회에서의 행사까지 무산되었다. 더구나 신은미 씨는 그녀의 방북기 때문에 바로 몇 달 전 각종 언론단체들로부터 상을 받았고 박근혜 정부의 통일부와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특혜를 받은 터였다. 그 무렵 박근혜 정권의 공안통치와 극우언론의 ‘종북몰이’에 숨죽이는 야당 정치인들이 한심했고, 무기력하게 침묵을 지키는 다양한 진보운동 단체와 조직들이 야속하기도 했다. 소나기는 우선 피하고 보자는 말이 있지만, 그렇게 미쳐 돌아가는 사회를 도저히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중북 아줌마’로 매도당하며 미국으로 돌아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극우언론에 굴복하지 말고 소신껏 강연하라고 부추겼다. 나 홀로 만용을 부리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녀의 행사가 전국 모든 곳에서 취소되더라도 익산에서는 꼭 성사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주관한 12월 10일의 익산 콘서트는 ‘일베’ 고교생의 테러로 중단되고 나는 화상을 입었다. 통일운동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맛보게 되었다.
지난주 5월 24일 세계의 여성 평화운동가들이 북녘에서 남쪽으로 비무장지대를 건너 왔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며 추구하기 위한 ‘여성 비무장지대 건너기 (Women Cross DMZ)’였다. 오래전 행사의 기획 단계부터 주관자로부터 자문을 부탁받아온 터라, 여기저기서 미국, 북한, 남한에서의 진행 상황을 수시로 귀띔 받을 수 있었다. 4월 초 남한 정보부의 끄나풀로 여겨지는 한 미국인이 남한 정권에 꽤 영향력 있는 극우인사에게 이메일을 보내 이 ‘종북’ 행사를 반대하거나 방해하라고 부탁했다. 여성들이 처음 계획했던 대로 판문점을 통해 휴전선을 건너오지 못하고 개성을 거쳐 경의선 도로를 따라 내려온 데다 300여명 우익세력의 시위를 받은 배경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기에 한 재미동포 여성은 반대 시위의 규모가 예상보다 작고 강도가 약해 ‘무사히’ 남쪽 땅을 밟은 자체에 안도하는 뜻을 서울 도착 직후 전해오기도 했다. 이제는 세계적 여성운동가들의 순수한 평화와 통일을 위한 행사조차 ‘한미 공조’에 의해 반대와 방해를 받게 된 것이다. 2015년 5월 현재 민간 통일운동의 서글프고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다.
이에 앞서 나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부터 10여 차례 법정에서 이른바 ‘전문가 증언’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 통일운동을 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거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변론하기 위한 것이었다. 냉전 시대엔 ‘승공통일’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공산당을 쳐부수자고 주장하는 게 애국이었을지라도, 노태우 정부 이래 지금까지 남한의 공식 통일정책은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통한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이제는 ‘친북’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호소했다. 이러한 증언을 묶어 2015년 1월 ≪이재봉의 법정 증언≫을 펴냈는데, 이를 계기로 국내외에서 강연 요청을 많이 받아왔다. 오늘 이 자리도 그렇게 마련된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데 해외에서든 국내에서든, 서울에서든 지방에서든, 북한 및 통일문제와 관련된 강연장에선 젊은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70-80대 어르신들이 청중의 대부분이다. 내가 올해 회갑을 맞는데 나보다 어린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참 안타가운 현실이다.
부업 통일운동가가 새로운 통일운동을 제안해보기 위해 지금까지 직접 겪고 느낀 점을 위와 같이 시시콜콜 밝혔다. 1996년 북한 식량난을 계기로 대북지원에 관해 짧은 글 한 편 쓰는 바람에 통일 관련 대중강연에 나서기 시작하고, 1999년 1차 서해교전을 계기로 소박하게나마 내 나름대로 통일운동을 주도하게 된 사연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몇 가지 보고들은 점을 얘기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의 통일운동은 주로 대북지원과 남북교류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엔 북녘 땅을 밟아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 같다. 둘째,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 따라 민간 차원의 대북지원과 남북교류조차 끊어지자 통일운동 단체들의 일거리가 없어지다시피 했다. 셋째,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 및 박근혜 정부의 공안통치 강화로 평화와 통일 운동이 ‘친북’이나 ‘종북’ 행위로 매도당하며 활동가들이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넷째, 시간이 흐를수록 통일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이 줄어들고 있다. 나아가 ‘종편’의 영향력 확대로 통일운동에 대한 무관심이 반감이나 적대감으로까지 이어지는 경향도 나타난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찾아보는 게 내가 제안하고 싶은 통일운동의 방향이다. 첫째, 대북지원과 남북교류 중심의 통일운동을 지속하는 게 현실적이고 바람직하다면 ‘5.24 조치’의 부당성과 비현실성을 지적해야 한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의 활성화가 막힘으로써 북녘의 고통보다 오히려 남쪽의 피해가 훨씬 크지 않은가. 남북교류가 끊어지면서 북한 정권의 붕괴를 불러오기보다 남한 중소상공인들의 붕괴가 초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널리 알려 ‘5.24조치’의 해제를 이끌어내고 남북교류가 재개되도록 해야 한다. 대북지원과 남북교류 없이는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질 수 없고 ‘통일대박’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홍보해야 한다. 북한 붕괴를 바탕으로 한 ‘통일대박론’의 문제점에 대해 “박근혜 정부 대북정책의 문제점: ‘통일대박론’의 허상”이라는 글을 참고자료로 덧붙인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827
둘째, 통일운동 단체들의 연대와 단합이 필요하다. 분단 70년을 맞아 가장 절실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인데, 한국전쟁의 법적 종식조차 끝내지 못하고 있다. 60여년 이상 정전협정을 종전/평화협정으로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 때문이다. 평화협정이 맺어지면 주한미군이 유지되어야 할 법적 명분이 약해지거나 사라지게 되고,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미국이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데 구멍이 뚫리기 된다. 거꾸로 말해, 미국은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북한을 끊임없이 ‘악마’로 만들며 정전협정을 고수해야 한다.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들어서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궁극적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가 주한미군과 평화협정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평화/통일운동 단체가 드물다. 이 분야에선 아마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평통사)>이 거의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활발하게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운동해온 것 같다. 주한미군과 평화협정 문제를 제기하면 ‘반미용공’으로 매도되고 ‘이적단체’로 처벌받기 쉽기 때문에 많은 단체들이 나서기 곤란하겠지만, 이 기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어떠한 평화/통일운동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셈이라는 생각으로 모두 힘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
셋째, ‘종북몰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추구할 수 없다. 1989년부터 2015년 현재까지, 노태우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남한의 공식 통일정책 1단계는 남북 사이의 화해와 협력 또는 공존공영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반대와 비난을 일삼으며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추구한다는 것은 큰 모순이다. ‘반북’이 아니라 ‘친북’을 해야만 화해협력과 공존공영을 통한 평화통일을 성취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남한이 북한보다 나은 사회라도 단점이 있고, 북한이 남한보다 못한 사회라도 장점이 있기 마련이다. 상황에 따라 남한을 비판할 수 있고 북한을 칭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전쟁에 의한 통일이 아니라 화해협력을 통한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친북’ 운동도 펼치고, 북한 사회의 훌륭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본받는 ‘종북’ 행위도 떳떳하게 벌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넷째, 요즘 통일운동은 특별한 사람들의 유별난 행동으로 취급당하는 듯하다. 통일운동이 대중성을 확보하려면 통일에 관한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특히 젊은 세대들이 통일에 관심을 갖고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통일운동에 기꺼이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먼저 통일운동가들의 어려운 그리고 투쟁적 언어부터 조금 쉽고 부드럽게 고치는 게 바람직하다. 1980-90년대 그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민주화를 진전시킬 수 있었지만, 그들의 말투는 나에게도 생경하게 들릴 때가 적지 않다. 하물며 요즘 젊은이들에게 어떠하랴.
또한 통일운동가들조차 분단의 폐해와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예를 들어, 사회혼란이나 세금부담 때문에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겐 북한붕괴와 흡수통일이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취업이나 실업 문제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에겐 통일이 되면 일자리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어야 한다. 요즘처럼 군대 안에서의 사고가 잦거나 병역 비리가 그치지 않을 때는 징병제를 폐지할 수 있도록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내야 한다. 또한 얼마 전 경남에서 있었던 일처럼 수천 만 원의 예산을 아낀다고 아이들 급식을 중단하겠다면 ‘아줌마’들까지 들고 일어서지만, 수 억 원의 경비가 들어갈 고고도미사일 방어망 (THAAD)을 구축하겠다는 데는 통일운동가들조차 조용하다. 통일이 되면 그렇게 천문학적으로 들어갈 쓸데없는 파괴 비용도 생산적 복지비용으로 돌릴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렇듯 통일은 거의 모든 사람의 일상생활 또는 ‘민생 문제’에 직접 커다란 혜택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며 온 국민이 통일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없을까. 분단의 문제점과 통일의 필요성 및 방법 등에 관해서는 “분단 70년에 생각해보는 통일”이라는 글을 참고자료로 덧붙인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857
* 이 글은 2015년 6월 1일 목원대학교와 대전YMCA가 주최한 <시민단체의 통일운동>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필자 주
  이재봉 교수
  
 
화와이대학교 정치학 박사
원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남이랑북이랑 더불어 살기 위한 통일운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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