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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5일 목요일

우공이산 정신에 실패란 없다

우공이산 정신에 실패란 없다

이권우 2015. 06. 25
조회수 141 추천수 0

우공이산의 정신으로
보령의 소설가 황선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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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왔다. 한학의 전통이 배어 있으면서도 토박이말을 능수능란하게 구가하는 작가. 풍자와 해학의 정신이 살아있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의 삶을 탁월하게 복원해내는 작가. 이문구를 일컫는 말이다. 그의 대표작 <관촌수필>을 태어나게 한 보령시 관촌마을을 다시 찾았다. 이문구가 <관촌수필>을 연재하던 70년대 이미 관촌이나 보령은 옛 모습을 잃었다. 그가 작품에 그려낸 관촌은 50년대의 그곳이다. 그러니, 지금 찾아간 관촌에서 작품에 묘사된 풍광을 확인하는 것은 애초에 글러먹었다. 왕소나무는 베어졌고, 칠성바위는 흔적도 없다. 방조제가 있던 방향은 간척이 되어 논으로 바뀌었고, 장항선 철길은 뜯긴 지 오래다. 그래도 보령에 오면 이 사람 때문에라도 관촌에 오게 된다. 황선만. 이문구를 흠모하고 이문구 소설을 사랑하고 언젠가는 자신도 대작을 쓰겠노라 큰소리치며 고향 보령을 지키는 이다. 하지만 나는 그이를 매번 실패만 하는 이라고 평한다.

맏형이 쓰려졌다. 좀처럼 병이 낫지 않았다. 집안은 온통 장남의 건강을 되찾는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요즘 와서 따져보면 신장염인 듯했다. 그때는 그 병을 잡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아버님은 어렵게 늘려갔던 땅을 팔았다. 가세는 자꾸 기울어갔지만 차도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고향에서 더는 공부하기가 어려웠다. 형 병구완에도 진력이 났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대처로 나가기로 했다. 부모님 부담 줄여드리고 자신의 힘으로 공부를 마치기로 마음먹었다.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와 구로나 부천 일대를 돌아다녔다. 변변한 기술 없는 이가 큰 돈 벌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악착같이 매달려 일했다.
그 나이 또래에서는 경험한 이가 적은 주경야독을 했다. 친구들이 고2될 무렵 고졸 검정고시에 붙었다. 가끔 내려오면 고향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외지에 나가 고생한다더니 졸업장을 먼저 거머쥔 셈이잖은가.

안타깝게 형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장남을 살리지 못한 무력감에 짓눌려 농사일을 내팽개치셨다. 집안에 있기 답답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이 일 저 일 하며 돈을 벌다 갓 창간된 시사주간지 판매원을 겸했다. 제법 짭짤했다. 보급소장이 청양사람이었다. 열심히 하고 똘똘하니 격려하느라 한 말이었을 터다. 세상 살아보니 대학은 나오는 게 좋더라며 들어만 가면 지원해주겠노라 했다. 일을 그만 두었다. 치기 어린 짓이었지만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남에게 의존할 일이 아니다. 4년 장학생으로 들어가면 되는 문제이지 않은가. 일하며 공부했고 시험을 봤다.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의 무역학과에 붙었다. 그러나 4년 장학생은 아니었다. 농협에서 융자받아 근근이 대학을 다녔다. 내가 농삼아 말했다. 그럼 실패한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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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 선생의 집필실을 보러갔다 황선만 씨 집으로 가는 도중에 눈에 띄는 풍경이 있어 차를 세웠다. 황혼 무렵이어서 더 아름다워 보였겠지만, 한순간에 어떤 처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성주사 터였다. 한눈에 묘한 기운을 느낀 것은 기시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고향에 있는 보원사 터랑 상당히 유사했다. 두 지역 다 바다를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산을 품고 있다. 그 산자락 곳곳에는 말씀의 자궁들이 숨어 있다. 보령에 몇 차례 갔지만 이 터로 나를 데려다준 적은 없었다. 괜히 황선만 씨에게 투덜댔다. 하도 유명한 곳이라 내가 다녀갔으리라 여겼단다. 성주사는 백제 때의 오합사(烏合寺)가 통일신라 들어 이름을 바꾸고 크게 중창했다가 오늘에 이르렀단다. 절터가 9천 평에 이른다. 절터 앞뒤로 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지만 가슴이 탁 트인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다. 절터에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돌로 된 것들 뿐이었다. 석탑과  석불입상, 그리고 석조연꽃대좌와 최치원이 글을 지었다는 낭혜화상 부도비. 이 절이 남긴 사리였을까? 고단한 세상을 강건한 믿음으로 버티려 했던 이들이 염원이 담겨 있는. 터만 남아 오히려 더 큰 감흥을 주는 폐사지를 한참 거닐었다.

그러다 김시습의 자화상과 부도가 있는 무량사에 가잔다. 거기는 전에 가보았다. 그래도 이문구 선생이 <매월당 김시습>을 쓰려고 자주 찾아보았을 곳이라 여겨 찾아갔다. 무량사는 여전했다. 하늘을 떠받칠 듯 서있는 그 나무들을 바라보면 절로 힘이 난다. 국내망명의 길을 걸은 김시습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 무량사다. 자료를 찾아보니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왔다.
김시습은 자화상으로 알려진 초상화를 그리고는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에 너를 버릴지어다"라 했단다. 유언으로 화장하지 말라 했는데, 3년 후에 시신을 보니 여전히 살아있는 듯해서 그가 부처가 되었다 여겼다고 한다. 화장을 했더니 사리가 나와 부도를 세웠다.

대학에 들어간 황선만 씨는 열병을 앓았다. 문학에 대한 지독한 짝사랑이 시작되었던 것.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너무 일찍 몸을 굴려 돈을 벌어본 적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활자는 지적 세계를 상징한다 여겼고, 그 분야에서 여봐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다. 그러면 명예와 돈을 동시에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솔직하다. 문학에 대한 열정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사람을 흔하게 만날 수 없다. 문학을 하고자 하는 마음에는 분명히 변형된 권력욕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지고지순한, 오로지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동경도 있겠지만, 무의식에 이것이 없다면 그 힘든 길을 가려할 리 없잖은가. 물론, 그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대의 영향도 컸다. 문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문청생활도 쉽지는 않았다. 문예장학생으로 들어온 국문과 학생들이 무시했다. 문학동아리 같이 한 이들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내가 아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런 법이다. 작은 재주를 스스로 크게 여기며 우쭐대는 법이다.

그래도 열정은 식지 않았다. 학교신문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 응모해 당선되었다. 그때 했던 심사위원의 말이 잊히지 않는단다. "괜히 고단한 문학의 길로 들어오도록 자극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동아리에서 대접이 달라졌다. 문학하는 데 전공이 무슨 소용 있고, 어린 날의 재능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졸업하고 직장 다니다 고향에 내려와 학원사업해 성공하면서 바빠져 소설을 한동안 쓰지 못했다. 그러다 충남작가회의 기관지인 작가마루에 기고한 산문이 소설이라는 간판을 달고 세상에 선보였다. 그 다음부터 소설가란 말을 들었다. 내가 또 기분 상하는 말을 했다. 일반적인 등단절차를 보면 실패한 셈이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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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만 씨는 지역신문에 마을길 걷기를 연재한 적이 있다. 내가 사는 지역에 난 길을 걷는 즐거움을 기록한 글이었다.
몇 년 전 보령에 갔을 적에 그의 안내로 마을길을 걸은 적이 있다. 나처럼 걷는 데 중독이 된 사람한테는 짧은 길이라 아쉬웠지만 같이 간 이들은 무척 즐거워했더랬다. 이번에는 어떤 길을 걸을 텐가?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잔뜩 기대하는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성주산 자연휴양림이었다. 다재다능한 그는 숲해설가 일도 하고 있다. 아내도 끌어들여 판을 키웠다. 그런 그가 학동들 데리고 가서 공부하고 놀고 하는 곳이라니 가볼만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보령은 정말 갈 곳이 많구나 싶었다. 머드축제로 유명한 대천해수욕장은 물론이고 바닷길이 열리는 걸로 이름난 무창포해수욕장이 있다. 옛날 탄광으로 유명했던 곳이라 폐광을 활용한 관광지도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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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산 자연휴양림 들어가는 곳에서 멀지않은 곳에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있었고, 산책로를 따라 가다보면 통나무집이 여럿 있었다. 산책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등산도 할 수 있다. 본디 탄광이 산재해 있던 곳인데, 폐광된 다음에 휴양림을 조성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수풀 사이로 검은 색의 흙이 보인다. 성주산 휴양림은 화장골과 심연동 계곡으로 나뉜다. 나는 화장골을 걸었다. 길이 좋았다. 특별히 편백나무 숲을 거닐 적에는 유럽의 어느 지역을 걷는 듯싶었다. 내가 마냥 좋아하는 표정을 짓자 그가 더 좋아했다. 고향을 지키는 이만이 느낄 만족감이었다.

고향에 내려온 그는 시민운동도 활발히 펼쳤다. 본디 전통야댱의 유명한 정치인을 오랫동안 국회의원으로 내세웠던 보령이건만, 자민련이 나타난 이후 줄곧 보수정치인들이 득세했다. 내가 사는 동네부터 바꾸고 싶었다. 뜻 맞는 젊은이들이 모여 시민단체를 세우고, 목소리를 키웠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설레발친다고 욕도 엄청 먹었다. 그래도 영향력이 커지면서 시민들의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 사안에 따라 1인 시위도 성공리에 이끌고, 시의회에서 농성도 했다. 함부로 시정을 농단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달은 내부에서 났다. 그 지긋지긋한 정파적 관점, 그러니까 자주파와 평등파의 대립이 심각해졌다. 실질적인 대표 역할을 맡았던 황선만 씨는 자리를 넘겨주었다. 시민단체가 잘 되면 되니까 자리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이만큼 헌신적인 사람은 또 없었다. 시민단체는 사실상 해체됐다.

생일을 맞은 지역선배한테 책을 선물했다. 그랬더니 그 선배가 그이에게 책을 선물해주었다. 통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독서회를 구성했다. 처음부터 방식을 달리 했다. 읽고 토론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신났다. 생업에 바쁜 이들이 너도나도 가입하고 싶어했다. 처음에는 고민했다. 사람 많아지면 탈도 많고 집중도도 떨어지는 법이라서 그랬다. 그러다 문호를 개방했다. 지역에서 책 읽고 토론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오게 했다. 조직이 커지니까 저자를 초청할 정도의 자금도 모였다. 몇 차례 공개행사도 했다. 규모가 커지니 조직의 안정화를 위해 내부 교육이 필요하다싶었다. 이 사업을 진행하다 암초를 만났다. 운영방식이 비민주적이라는 문제제기가 나왔고, 잘 해결되겠다 싶었으나 심한 내홍을 겪어야만 했다. 한번 경험해보지 않았던가. 미련을 두면 상처가 더 커지는 법이다. 그이는 독서회에서 탈퇴했다. 이번에도 나는 그이에게 비수를 꽂았다. 실패했네!

황선만 씨는 정말 실패했을까? 내가 아무리 염장을 질러도 그가 넉넉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서로 진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를 우공(愚公)이라 여긴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끝까지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형의 투병으로 더는 공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어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공부했다. 고향에 내려와 지역신문 기자하면서 학원선생 할 적에 이때 공부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주변에서 소설가라 불러주지만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도 일기장을 버리지 않은 것은 언젠가 소설을 쓰려는 열망 때문이다. 아직도 준비기간이고 습작기간일 뿐이다. 일찍 피어났다 빨리 사라진 작가들이 얼마나 많던가. 단 한권이라도 무시 못 할 소설을 쓰고 싶다. 아니, 더 욕심낸다. 문학으로 돈도 벌고 대접받고 싶다는 마음은 아직 살아있다.

그의 영혼에는 여러 작가들이 득시글거린다. 맨 먼저 이문구 선생.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목이다. 그리고 이문구 선생을 십년동안 모셨던 아동문학가 안학수 선생이 있다. 불편한 몸으로 동시와 소설을 쓰며 후배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동네 후배로 <경찰서여 안녕>으로 유명한 김종광이 있고 그의 문재를 알아보아 준 홍성 출신의 시인 이종록이 있다. 고향출신 문인으로 최시한 선생과 이혜경도 있다. 아, 김성동 선생은 어찌 빼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작품을 읽고 그들의 삶을 흉내 내고 그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언젠가 세상에 내놓을 작품을 궁굴리고 있다.

독서회를 나와서는 두 개의 독서회를 만들었다. 하나는 철학책을 읽는 모임이고, 하나는 지역 청소년들의 독서를 도와주는 모임이다. 하고 싶은 공부하면서도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려 했던 처음 마음을 잃지 않은 셈이다. 무엇 하나 이루지 못했으나, 포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산을 금세 옮길 수 있나. 죽을 때까지 하다보면 이 산을 저쪽으로 옮겨놓을 수 있겠지 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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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도 자주 찾아뵙고 책도 집중해서 읽으려 황선만 씨는 어머님 계신 집에 서가를 마련했다. 보령 내려가면 만나는 인연 있는 분들 모시고 그 집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으며 한바탕 축제 분위기로 어울렸다. 잠을 험하게 자는지라 따로 자자고 했다. 잠결에 뒤척이다 보니 새벽에 황선만 씨가 내 옆에서 자고 있었다. 이상한 상상은 마시게.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은 우정을 느꼈으니. 그래서 이게 무슨 복인가 싶었다. 그러다 퍼뜩 든 생각이 있었다. 이 우정을 나는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까? 우공이 이산(移山)하는 날을 기다려주는 것으로 족할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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