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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4일 수요일

한국 지구촌 기후변화 대응 모범생에서 낙제생 전락


김정수 2015. 06. 24
조회수 1854 추천수 0
기존 목표 밑도는 새 감축안 발표 뒤 한국 기후대응 평가 최하등급 강등
‘기후 불량국’ 꼽히던 미·중 아래로, 정부, 주요국 압박에 목표상향 고심 

01057949_R_0.JPG» 정부가 발표한 온실가스 감축 계획은 지난 정부의 약속보다 덜 야심적이고 선진국보다 훨씬 감축폭이 작아 국제 사회의 비판 도마에 오를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인 석탄 화력발전소 모습. 사진=탁기형 기자

평가는 냉정했다.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를 비롯한 유럽계 4개 주요 기후변화 관련 연구기관이 공동 운영하는 기후정책 평가·분석 기구인 기후행동추적(Climate Action Tracker·CAT)은 지난 15일 한국의 기후변화 대응 평가 등급을 ‘충분’에서 ‘불충분’으로 바꿨다.

한국 정부가 2020년 이후 새 기후체제에서의 ‘기여’(INDC) 계획 수립을 위해 4가지 온실가스 감축 시나리오를 발표한 지 나흘 만이었다. 이 기구가 한국에 매긴 평가 등급은 ‘모범적-충분-중간-불충분’으로 구분되는 4개 등급 가운데 최하위다.

기후변화 대응 모범생으로 국제사회의 찬사를 받던 한국이 순식간에 기후변화 낙제생으로 추락한 셈이다. 한꺼번에 두 단계나 강등되면서 한국의 평가 등급은 오랫동안 국제사회가 지구촌 기후변화 대응 노력의 진전을 막는 불량국가로 지목해온 미국과 중국보다 낮아졌다.

climate.jpg» 기후행동추적 누리집에 있는 한국의 평가. 지난해까지 충분에서 올해 불충분으로 떨어졌다.
 
한국이 기여 계획용 온실가스 감축 시나리오를 발표한 날 이 기구는 미국과 중국의 등급을 최하위 등급에서 한 계단 위인 ‘중간’으로 올렸다. 미국은 지난 3월말 유엔에 2025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5년 대비 26~28% 감축하겠다는 기여 계획을 제출한 것에, 중국은 2014년 11월 늦어도 2030년 이후로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한 것에 주목한 것이다.

2009년 발족한 기후행동추적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80%를 점유하는 32개국(유럽연합 포함)의 기후대응 수준을 평가해 인터넷에 공개해오고 있다.

낙제생 그림.jpg
 
이 기구는 누리집에 올린 보고서에서 한국이 발표한 2030년 대비 14.7~31.3% 온실가스 감축 계획안은 “한국의 기존 2020년 감축 약속보다 덜 야심적”이며 “(선진국들의 감축 기준연도인) 1990년 대비 98~146% 온실가스 배출량을 증가시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이 기구는 “한국의 계획안은 한국이 덜 줄인 만큼의 온실가스를 다른 나라들이 더 감축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대부분의 나라가 한국처럼 행동할 경우 지구 기온 상승폭은 섭씨 3~4도를 초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용어 정리

-배출전망치(BAU): 추가적인 온실가스 감축 노력을 하지 않아 현재 추세대로 온실가스가 계속 배출된다고 가정했을 때의 미래의 배출량.
-기여(INDC) 계획: ‘각국이 정하는 기여’(Intended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개발도상국들을 온실가스 감축에 참여시키기 위해 기존의 공약(commitment)보다 의무감이 덜한 표현으로 2013년 바르샤바기후회의에서 만들어졌다. 각 나라가 새 기후체제에서 부담할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핵심이다.
-새 기후체제: 교토의정서가 만료되는 2020년 이후의 국제사회 기후변화 대응 체제. 선진국과 개도국 그룹으로 나누어 선진국들만 의무적으로 온실가스를 감축하도록 한 교토의정서 체제와 달리 모든 나라가 감축에 참여하는 구조다.

이런 평가기구의 분석과 최하등급 평가로 미뤄볼 때 한국이 실제 발표한 감축 시나리오에 맞춰 기여 계획을 제출할 경우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대응에 무임승차하려는 불량국가로 규정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미국과 중국을 향했던 손가락이 한국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해외 수출로 지탱되는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국제사회에 선언한 2020년 감축 약속을 실제 파기할 경우 국가 신뢰도가 크게 추락하면서 국제 환경단체들의 시위 대상인 불량국가로 떨어질 수 있다”며 “이런 국가 이미지 훼손은 유럽 등 선진국에서 시민사회가 문제 있는 기업·국가에 대한 연기금 투자를 막는 등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점에 비춰 실질적인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과 유럽연합,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은 한국을 상대로 기여 계획을 마감시한인 9월말 이전에 서둘러 제출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적인 한국의 기여 계획 제출이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영향을 끼쳐 올해 말 파리기후회의에서 새 기후체제 협상을 타결짓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한국의 온실가스 감축 시나리오 발표는 이들에게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04902613_R_0.jpg» 2013년 12월4일 인천 송도 지타워에서 열린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 출범식 모습. 이때까지만 해도 국제사회는 한국의 기후대응 의지를 의심하지 않았다.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한국은 2009년 국제사회에 2020년 감축 목표를 발표하고, 2012년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을 유치해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 기후변화 대응의 가교 역할을 자임해온 터여서 실망은 더욱 컸을 법하다.

일부 선진국은 정부 공식 발표 전에 나온 감축 목표 후퇴 가능성을 알리는 언론 보도를 보고 진위 파악에 나서고, 독일 본에서 열린 파리기후회의 준비회의에 참석한 한국 대표단을 상대로 사실 확인에 들어가는 등 급박하게 움직였다.
 
이렇게 한국과 공식·비공식 접촉한 주요 나라들과 유엔은 모두 한국의 2030년 감축 목표가 기존의 2020년 목표보다 후퇴한 것에 초점을 맞춰 지난해 페루 리마기후회의에서 결정된 감축 목표 ‘후퇴금지 원칙’ 준수를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미국은 백악관에서 직접 한국의 기여 계획 수립상황을 점검하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나서 한국에 공정하고 의욕적인 목표 설정을 주문했다.
 
전례 없이 구체적이고 강력한 국제사회의 압박에 당황한 정부는 이미 발표한 온실가스 4가지 시나리오 감축안뿐 아니라 이보다 강한 새로운 안까지 놓고 숙의를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새로운 감축안까지 검토 대상에 들어가면서 애초 정부가 잡았던 기여 계획 제출 시한이 늦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장은 “유럽연합 쪽에서는 이번 새 기후체제에 주요 온실가스 배출국들이 공정하고 의욕적인 기여안을 내놓지 않으면 이들 나라에서 들어오는 제품에 국경탄소세를 붙이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수출을 많이 하는 국가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질문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감축 목표 후퇴는 박근혜 대통령 말바꾸기

“기후변화 적극 대응” 역설하다 약속파기 해명 처지로, 정상회의 무대 입지약화 불가피       

기존 감축 약속을 파기하는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시나리오 발표로 국제 기후변화 협상 담당자들은 고민에 빠졌다. 다른 나라 대표단에게서 쏟아질 질문들과 등 뒤에 꽂힐 따가운 시선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박근혜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에서 정부 발표로 가장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박 대통령일 수 있다.
 
프랑스는 올해 말 파리에서 열리는 기후회의를 성공시키기 위해 오는 9월 유엔 총회에 맞춰 기후정상회의를 연다. 파리기후회의 전반부에 각 나라 정상을 초청해 기후변화 대응 문제를 논의하는 일정도 준비하고 있다.

11월15~16일 터키에서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다. 파리기후회의 직전에 열리는 이 회의에서도 기후변화가 핵심 의제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박 대통령이 참석해야 할 행사들이다. 
 
정부가 발표한 시나리오대로 유엔에 기여(INDC) 계획을 제출하면 이런 모임에 참석하는 박 대통령은 회의장 안팎에서 예전과는 달라진 분위기를 만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기후변화 대응 모범국을 자처하며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까지 가져가고는 앞서 내걸었던 온실가스 감축 약속을 깬 나라의 지도자에 대한 시선이 고울 리 없다.

남은 임기 동안 참석할 다른 다자간 정상 외교 무대도 마찬가지다. 정상들의 화제에서 지구촌 최대 이슈인 기후변화 대응 문제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2009년 처음 국제사회에 온실가스 감축을 선언한 사람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지만 박 대통령도 여러 차례 국제 무대에서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밝혀왔기 때문에 더욱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2013년 12월4일 인천 송도 녹색기후기금 사무국 출범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크리스티아나 피게레스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총장 등 참석자들에게 “기후변화 대응을 국정과제로 선정해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며 “약속대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2020년 배출전망치(BAU) 대비 30%로 설정하고 목표 이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뉴욕 기후정상회의에서는 세계 각국 지도자들에게 “2100년까지 2도 상승 억제라는 인류 공동의 목표를 이루려면, 모든 나라가 자국의 역량과 여건에 부응하는 기여를 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고 역설해 박수를 받았다. 한국의 기후변화 대응 후퇴가 이 전 대통령의 약속 파기가 아니라 박 대통령의 말 바꾸기가 되는 까닭이다.
김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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