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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7일 월요일

양정철-서훈 '비밀회동' 보도, 적절한가

[미디어스=전혁수 기자] 양정철 민주연구원 원장과 서훈 국정원장이 지난 21일 저녁 서울 강남의 모 한정식집에서 만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총선이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총선 기획을 담당할 양 원장과 정부의 정보를 총괄하는 서 원장이 만났다는 것 자체에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만났다는 것 외에 다른 사실관계가 전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극적 단어를 사용한 무리한 추측성 보도는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또한 연예인 사생활 캐기식의 취재 행태가 인권침해가 될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27일자 더팩트 보도. (사진=더팩트 홈페이지 캡처)
27일 오전 <더팩트>는 <[단독] '文의 남자' 양정철, 서훈 국정원장과 한정식집 '밀담'> 기사를 게재했다. 지난 21일 서울의 한 한정식집에서 양 원장과 서 원장이 '비밀 회동'을 했다는 내용이다. 더팩트는 "야인 생활을 하던 양 원장이 2년 만에 여의도 정치권으로 복귀한 지 꼭 일주일만으로 배경에 관심이 모아진다"며 "특히 양 원장은 16일 문희상 국회의장을 독대한 데 이어 5일 만에 다시 국정원장을 독대할 정도로 광폭 행보를 이어가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했다.
더팩트는 비슷한 시각 <[단독영상] '4시간 밀담' 양정철 민주연구원장과 서훈 국정원장> 기사를 게재했다. 더팩트는 "양 원장과 서 국정원장은 이날 서울 강남구 모처의 한정식 식당에서 오후 6시 20분께부터 10시 45분께까지 4시간 이상 식사했다"며 "이후 식당에서 나온 양 원장과 서 국정원장이 여전히 할 말이 남은 듯 서서 약 2분가량 추가로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더팩트는 27일 오후에는 <[단독] '국정원장 밀담' 양정철 택시비, 식당 주인이 대납…"백수인 줄 알고"> 기사도 게재했다. 더팩트는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이자 '실세'로 알려진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장시간 비공개 미팅을 가진 뒤 귀가하는 과정에서 택시비는 식당 주인이 대납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양정철 원장과 서훈 원장의 만남 사실이 알려지자, 복수의 매체는 더팩트 보도를 기반으로 의혹제기에 나섰다. 야당을 중심으로 총선 개입 의혹을 제기하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이 나왔고, 이를 근거로 한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다.
이에 대해 양정철 원장은 "서훈 원장께서 모처럼 문자로 귀국인사를 드렸고, 서 원장께서 원래 잡혀있었고 저도 잘 아는 일행과 모임에 같이 하자고 해 잡힌 약속"이라며 "사적인 지인 모임이어서 특별히 민감한 얘기가 오갈 자리도 아니었고 그런 대화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양정철 원장은 "국정원장과 몰래 만날 이유도 없지만 남들 눈을 피해 비밀회동을 하려고 했으면 강남의 식당에서 모이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대한민국 국정원장이 비밀 얘기 할 장소가 없어 다 드러난 식당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는 가정 자체가, 정치를 전혀 모르는 매체의 허황된 프레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양정철 원장은 택시비 대납 보도에 대해서는 "식당 사장은 제가 일반 택시를 좀 불러달라고 했는데 모범 택시를 부른 게 미안하기도 하고 귀국해 오랜만에 식당을 찾은 제가 반갑고 (여전히 놀고 있는 줄 알고) 짠하다며 5만 원을 택시기사분에게 내줬다"며 "모처럼 귀국해 옛 지인들을 만나고 인사를 하고 밥을 먹고 음식값을 낸 것에서 택시비 5만원 깎아준 일이 다섯시간 미행과 촬영과 파파라치에 노출된 것이 전부다. 아무 생각 없이 폭로를 전문으로 하는 매체야 그렇다쳐도 숱한 매체들이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의혹 재생산에 부화뇌동 한다면 서글픈 일"이라고 말했다.
양정철 원장은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장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서훈 국정원장을 독대한 것이 언론에 포착됐다면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총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여당 핵심관계자가 국정원장을 만난 것은 부적절하단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참여연대는 "총선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정보기구의 수장인 국정원장이 여당의 총선을 기획하는 싱크탱크 원장과 만나는 것은 사적인 만남이라해도 적절하지 않다"며 "국정원이 다시 선거와 정치에 불법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정철 원장과 서훈 원장이 나눈 대화의 내용도 없이,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밀담'이란 식의 자극적 단어를 사용하며 추측성 보도를 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특히 더팩트의 보도는 국회의사당에서부터 양 원장의 뒤를 밟아 만들어진 보도로, 연예인 사생활 캐기식 보도의 전형이다. 양 원장이 "여의도 당사에서부터 지하철, 식당까지 저를 미행하고 식당 근처에 차를 세워둔 채 블랙박스로 영상을 촬영한 것으로 안다"며 "미행과 촬영에 급급해 헤어지는 장면 하나를 포착해 이를 바탕으로 근거없는 폭로를 재생하고 있다"고 했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기자가 어떤 범죄행위나 부정적 행위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밀착취재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본다"면서도 "그러나 만났다는 사실만을 단초로 의심하는 것이 맞는 얘기인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김서중 교수는 "물론 민주사회에서 양정철 원장과 서훈 원장이 민감한 위치에 있으니 만남을 자제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부정적 행위에 연루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는 사람끼리 만나는 것 자체가 부정적으로 비춰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국정원장은 국정원 일반과 다르게 공개돼 있는 인물이고, 만난 장소도 공개된 장소"라며 "(더팩트가) 비밀회동이라고 한 것은 자신들이 취재를 몰래 하니 비밀회동으로 본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비판했다.
정연우 세명대 광고홍보학부 교수는 "실제로 만나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그런 게 있다면 모르겠지만, 만남 자체를 가지고 뭔가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라며 "대통령의 복심이라고 하니 의도적으로 흠집을 내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인권침해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영향력 있는 공인이 문제적 행동을 할 때 그걸 감시하는 건 언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면서도 "언론이 스토킹하듯 접근하는 것은 파파라치에 가까운 행태다. 이게 과연 국민의 알 권리 측면에 부합하는 보도 태도인지 모르겠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더팩트가 '밀담', '비밀회동', '백수' 등의 자극적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양정철 원장과 서훈 원장이) 만난 것이 보기에 따라 논란이 될 수는 있다"면서 "그러나 자극적인 단어와 제목을 사용해 클릭을 유도하려고 하는 행위는 저널리즘의 가치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전혁수 기자  wjsgurtn@naver.com

2019년 5월 26일 일요일

‘사법농단의 검은손’ 김앤장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 ⑤]‘사법농단의 검은손’ 김앤장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입력 : 2019.05.27 06:00 수정 : 2019.05.27 09:04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사법농단
윤병세 등 로펌 출신 인맥들 활용

일본 기업 승소 위해 ‘전방위 로비’
서울 종로구의 김앤장 법률사무소 로비. 김앤장은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청와대’의 ‘재판 거래’에 관여한 의혹으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윤병세씨는 박근혜 정부의 초대 외교부 장관이 되기 전 김앤장 고문으로 4년간 재직했다.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의 김앤장 법률사무소 로비. 김앤장은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청와대’의 ‘재판 거래’에 관여한 의혹으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윤병세씨는 박근혜 정부의 초대 외교부 장관이 되기 전 김앤장 고문으로 4년간 재직했다. 연합뉴스
“이 사건에는 외교관계 측면에서 민감한 여러 가지 기밀사항이 포함돼 있습니다. 노출될 경우 국익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스럽습니다. 과거 (박근혜) 정부뿐만 아니라 현 (문재인) 정부도 앞으로 이웃 나라(일본)와 굉장히 민감한 협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는데 저희가 여기서 논의하는 내용이 연계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14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66)이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해달라고 요구했다. 윤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 초대 외교부 장관으로 4년 넘게 재임한 ‘장수 장관’이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둘러싸고 대법원과 청와대가 부적절한 거래를 했다는 시기도 이때였다. 재판은 ‘사법농단’이라는 위법행위,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인권침해를 다룬다. 하지만 윤 전 장관은 ‘외교관계’ ‘국익’을 그에 앞세웠다. 재판부는 재판을 공개로 진행했다. 그러나 윤 전 장관은 검사가 외교부 문건을 제시할 때마다 ‘비밀 자료’라며 공개해선 안된다고 막는가 하면, 답변도 어물쩍 넘어갔다. 검사가 질문할 때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곤 했다. 윤종섭 재판장이 “증인이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검사가 묻는 사항에 대해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하라”고 지적했다.
이날 윤 전 장관의 증언에서는 국내 1위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로비가 드러났다. 김앤장은 법정 안에서만 활약하지 않았다. 김앤장은 전직 고위 관료들을 ‘고문’으로 영입하고, 그 고문들은 현직 고위 관료들과의 연줄을 이용해 내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일본 기업에 한국 정부 입장을 속속 전해주고, 일본 기업의 승소를 위해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미칠 계획도 세웠다. 김앤장은 사법농단 속 또 하나의 사법농단이었다. 
■ ‘징용 소송’에 외교·법조 전관 총동원…박근혜 외교부와 ‘상부상조’
외교부 관료 출신인 윤 전 장관 역시 장관이 되기 전인 2009년부터 4년간 김앤장 고문으로 일했다. 2012년 5월24일 대법원이 피해자들 손을 들어주는 내용으로 일제 강제징용 사건을 파기환송했을 때도 김앤장 소속이었다. 파기환송 직후 김앤장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김영무 대표를 포함해 김용갑·조귀장 변호사 등이 모였다. 윤 전 장관도 참석했다. 윤 전 장관은 특별한 회의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미 그 시점에 1965년 이후 한국 정부의 입장과 입법부·법원의 조치 등 사실관계가 다 나와 있었기 때문에 제가 아마 설명을 뭔가 했다면 팩추얼한(사실에 기반을 둔) 설명을 했을 수 있습니다. 일본의 우려가 언론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공유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윤 전 장관은 2013년 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통일안보분과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김앤장 고문직을 그만뒀다. 그해 2월에는 박근혜 정부의 첫 외교부 장관으로 지명됐다.
김앤장은 김앤장 출신 장관을 활용할 계획을 세운다. 검찰에 따르면 2013년 1월10일 김앤장 조귀장 변호사가 내부 변호사들에게 전송한 e메일에는 미쓰비시중공업 고문이 된 무토 마사토시 전 주한 일본대사가 방한 일정을 조율하면서 윤 전 장관과 현홍주 전 주미대사,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 e메일에는 ‘일제 강제징용 사건은 일개 기업이 아니라 양국 정부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문구도 있다. 그 직후인 1월18일 김앤장의 한 변호사가 한상호 변호사에게 보낸 e메일을 보면 “미쓰비시중공업 측에서 ‘윤(외교통상부 차기 장관)’에게 직접 연락을 드린 모양”이라며 김앤장이 윤 전 장관과 무토 마사토시 전 대사의 오찬 일정을 맞춘 내용도 나온다. 
윤 전 장관은 장관 취임 후인 2013년 3월 김앤장 변호사들을 외교부에 초대했다. 김영무 대표와 현홍주 전 대사, 한상호 변호사 등이다. 현 전 대사는 윤 전 장관의 경기고, 서울대 법대 선배이고 외교부에서 함께 근무했다. 윤 전 장관을 김앤장에 스카우트한 사람이 현 전 대사이고 김앤장에서도 한팀으로 일했다. 한상호 변호사도 윤 전 장관의 경기고 선배다. 외교부 관료로 있을 때 윤 전 장관과 근무 인연이 있는 유명환 전 장관은 김앤장 고문으로 옮긴 뒤 현 전 대사와 함께 윤 전 장관을 수차례 만난다. 윤 전 장관은 이 같은 만남들이 모두 인사치레거나 친목도모 목적이었고 강제징용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했다. 그러나 외교와 정치와 재판에 얽힌 학교, 직장 선후배가 ‘친목’을 도모하는 순간, ‘공정함’의 외관은 무너진다. 
김앤장 고문 출신 윤 전 장관 
취임 후 김앤장 변호사들 초청
그해 11월 외교부 사무관 일지엔 
“판결 나오면 끝이다, 작살난다
청와대·관계부처 끌어내야”
 
그해 11월 외교부 정모 사무관 업무일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판결 나오면 끝이다, 외교부는 작살난다, 판결 나오고 방안 찾을 것이냐, 청와대·관계부처 끌어내야, 범정부적 입장 마련.” 정 사무관은 윤 전 장관이 격하게 말한 내용을 받아 적었다고 했다. 윤 전 장관은 “대법원 판결의 번복을 의도한 게 아니라 어떠한 판결이 나와도 좋은데 다만 그 판결에 국내적인 측면만 있는 게 아니라 한·일관계 등 국제법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대법원이) 충분히 고려해서 판결해주면 외교부가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 국익에도 유리하다는 입장이었다”고 설명했다.
■ “외교부 장관이 패소 전폭 협조” 
김앤장 분위기는 어땠을까. 한상호 변호사가 2015년 1월 신일철주금 관계자를 만나기 위해 작성했다는 문건은 상징적이다. 한국 정부에 대한 로비 현황을 김앤장이 일본 기업 측에 성과로 보고하는 내용이다. 
2년 뒤 김앤장 변호사 문건에선 
“외교부 최고책임자 접촉, 공감
특명 내려 패소에 전폭 협조 지시”
 
“문건을 보면 외교부 최고책임자인 증인(윤 전 장관)을 김앤장이 여러 차례 접촉해서 이야기했고, 증인이 공감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또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외교부의 최고책임자는 담당 국장에게 ‘특명’을 내려서 패소에 전폭적으로 협조하도록 지시하였음.”(검사)
“저는 국익을 다루는 외교부가 이런 문제에 대해 (외부와) 정보를 공유하는 것에 대해 (자제해야 한다는) 분명한 철학을 항상 갖고 있었습니다. 문건들은 과장돼 있는 것이고, 유명환 전 장관이 사건 이야기를 하길래 담당 국장을 만나보라고 넘겼을 뿐입니다.”(윤 전 장관)
김앤장 최건호 변호사가 작성한 문건에는 ‘외교부 동향, 2012년 대법원 판결 잘못됐다는 공감대 있음, 참고인 의견서 제도 알고 있음, 대법원 요청 있어야 한다는 입장, 참고인 의견서 제출 이후 신속히 판결 나왔으면 좋겠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 전 장관은 “윤 전 장관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윤 전 장관은 “제가 알려준 내용이라기보다는 외교부의 여러 인사들을 통해서 파악한 것 같다”며 “유 전 장관과 현 전 대사가 상세한 내용을 갖고 물어오면 선문답하듯이 말한 적은 있다”고 부인했다. 윤 전 장관이 흘려 이야기한 것이 김앤장에는 중요 정보가 됐고, 이 정보는 일본 기업으로까지 흘러갔다. 
2015년 12월15일 윤 전 장관이 현 전 대사·유 전 장관과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 내용도 문건에 남았다. 윤 전 장관은 ‘그동안 진전 있었다, 대법과 협의, 청와대 VIP 보고사항, 한·일 정상회담 후 일정 바빠, 조만간 타이밍 검토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나온다. 김앤장 측 답변으로는 ‘위안부 문제 연결 적절치 않다, 일 아베 총리 생각 바뀌지 않아 실기할 수 있다, 한·일관계 중대 영향 미치는 사항,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돼 있다. 대법원에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과 관련해 논의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윤 전 장관은 이 자리 발언도 의례적이었다고 했다. 외교부와 김앤장 사이에 정보는 수시로 오갔고, 결과적으로 외교부는 김앤장이 원한 대로 강제징용 사건 관련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했다. 2012년 대법원 판결에 문제가 있다는 데는 청와대와 법원행정처도 모두 입장이 같았다.
윤 전 장관도 위안부 합의 발표 전 
언론 기고 청탁 등 김앤장 활용
윤 전 장관 역시 필요할 땐 김앤장을 활용했다. 검찰에 따르면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 발표 전날인 2015년 12월27일 윤 전 장관은 유 전 장관과 또 만났다. 윤 전 장관은 검찰에서 “다음날 한·일 위안부 합의 발표를 앞두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여론 부담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해서 유 전 장관에게 (위안부 합의에 대한 이해를 돕는) 언론 기고를 부탁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진술했다. 그렇게 외교부와 김앤장은 상부상조했다. 
■ “기억 안 난다”는 윤병세 
2013년 10~11월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윤 전 장관에게 ‘친전’을 보냈다. “10.29. 대법원 임종헌 기획조정실장이 내방하여 주유엔대표부에 판사를 파견하기를 희망한다며 협조를 요청해왔습니다. 대법원 측에서 작성한 관련 자료를 첨부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 계기에 일본관계 현안도 협의 및 참고자료를 전한 바 있습니다. 외교안보수석 주철기.”
일본 기업 대변한 변호사들 
대부분 판사 출신, 김앤장 경력
최근까지도 판사들 김앤장으로
 
일제 강제징용 사건에 외교부 입장을 반영해주는 대신 법관 해외파견에 협조를 받으려고 한 것 아니냐는 검사 질문에 윤 전 장관은 친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청와대에서 장관에게 친전으로 내려보내서 무게 있게 다가왔다”는 김규현 전 외교부 1차관이나, 윤 전 장관이 강제징용 사건에 관심이 많아 회의에도 직접 참석했다는 외교부 직원들 증언과 상반된다.
윤 전 장관은 8시간의 증언을 마치고 난 뒤에 또 한·일관계를 걱정했다.
“현재 한·일 간에 외교적으로 전례 없이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고, 국제사회가 특히 일본 정부가 (사법농단 사건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기 때문에 국익과 관련해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법정에서의 성실한 증언에 추가해서 역사 앞에 증언한다는 심정으로 이렇게 섰습니다.” 윤 전 장관에겐 청와대·외교부·김앤장·대법원 선후배들의 ‘로비’도 ‘역사’가 될까.
강제징용 소송에서 일본 기업 측 일을 도맡은 김앤장 변호사들 대부분은 판사 출신이다. 최근까지도 법원행정처에서 일했던 판사 상당수가 김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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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270600025&code=940301#csidxd70e81277f250d587b04d2ed563c656 

[김종민의 청년전태일들] 구의역 3주기, 김군이 남기고 간 과제

김종민 전 청년전태일 대표
발행 2019-05-27 09:58:51
수정 2019-05-27 09:58:51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구의역 3주기 추모문화제가 5월25일 2시에 구의역 앞에서 열렸다. 400명의 시민들이 모인 자리에 산재로 사망한 청년노동자의 가족들이 함께했다. 특성화고 졸업생이자 CJ에서 일하다가 죽은 故김동준의 어머니, 故이한빛 PD의 아버지, 제주현장실습생 故이민호의 아버지와 어머니,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가 산재를 당한 한혜경님과 어머니, 그리고 청년 건설노동자 김태규의 누나가 함께했다. 필자는 추모제 사회를 보며 가족들을 한 분한 분 소개해 드렸다. 가족들이 일어나서 추모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때마다 참가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많은 사람들이 청년노동자 산재사망이 일어날 때마다 죽음에 슬퍼하고 추모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청년노동자들의 사망 소식을 보면서 2016년 5월28일 이후 3년이 지난 지금 과연 무엇이 바뀌었을까 의문이 든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참사가 일어난 지 3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 짚어보고자 한다.
25일 오후 서울 구의역 앞에서 '구의역 참사 3주기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25일 오후 서울 구의역 앞에서 '구의역 참사 3주기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뉴시스
김군 동료들은 정규직이 됐지만
여전히 또 다른 외주화에 시달리고 있는 공공부문 노동자들
필자는 구의역 김군이 한국사회에 남기고 간 과제를 3가지로 정리한다. 첫 번째는 청년비정규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직고용) 문제이다. 두 번째는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자들의 현장실습 및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이다. 세 번째는 위험의 외주화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이다.
구의역 김군은 서울시의 대표 공공기관인 서울메트로의 하청업체 은성PSD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구의역 김군이 사망한 뒤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김군의 동료들을 무기계약직인 안전업무직을 거쳐 정규직으로 직고용 했다. 여전히 비정규직 출신들의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차별은 존재하지만, 더 이상 하청 비정규직 신분은 아니다. 지하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는 서울 지하철뿐만 아니라 전국의 지하철에서 공통적으로 변한 부분이다.
하청비정규직 노동자가 본사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은 고용의 안정성과 노동자의 안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외주화는 하나의 현장에서 노동자가 하나의 운영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외주화된 회사 숫자만큼 여러 개의 운영시스템으로 움직이게 된다. 하청업체 직원들은 정보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직고용을 해서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야 안전을 지킬 수 있다. 더불어 직고용을 해야 노동자들 간의 동료의식이 생길 수 있다. 구의역 김군 사고 이후 장례식장에서 같은 하청업체 직원을 제외하고, 지하철 정규직 노동자들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이는 하나의 현장이지만 회사가 달랐기 때문에 동료의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이 된 직후 인천공사를 찾아갔다. 거기에서 문 대통령은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이야기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 이후 공공기관과 민간에서 모두 경쟁을 하듯이 정규직화를 선언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IMF이후 20년간 지속된 ‘민영화와 외주화는 끝났다’는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공공부문에서 정부가 말한 정규직은 대부분 또 하나의 외주, 자회사로 되고 있다. 자회사는 노동자들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이게 하지 못한다는 지점에서 안전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방식이다.
전국특성화고등학교졸업생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조합 결성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조합원들이 '구의역·제주·이마트 억울한 죽음 끝내자'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전국특성화고등학교졸업생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조합 결성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조합원들이 '구의역·제주·이마트 억울한 죽음 끝내자'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차별 없고 안전한 사회 만들려는 특성화고 졸업생들
구의역 김군은 특성화고 졸업생 출신 노동자였다. 은성PSD가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2014년 하반기 특성화고 학생들을 대거 고용할 때, 친구들과 함께 현장실습생으로 스크린도어 수리 업무를 시작했다.
‘구의역 김군’의 후배들은 김군 사망 직후 구의역스크린도어 9-4승강장 앞 포스트잇에 “선배의 죽음의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그 김군이 후배들이 2017년 7월 구의역에 모여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를 창립하면서 ‘제2의 김군’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다음 해인 2018년 5월에는 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이 설립되면서 한국사회에서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집단인 특성화고 출신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17년 11월 현장실습생 故이민호의 죽음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 문제가 한국사회에 많이 알려졌다. 제주라바를 만드는 생수업체 제이크레이션은 값싼 노동력을 얻고자 2017년 8월 물이 많이 팔리는 여름 성수기에 현장실습생을 대거 고용했다. 하루빨리 돈을 벌고 싶었던 현장실습생 故이민호는 안전설비는 뒤로한 채 값싼 노동력을 얻고자 했던 사장의 욕심에 삶을 마감했다. 이 사건이 사회에 알려지자 정부는 현장실습 폐지를 들고 나오면서, 특성화고 졸업생들의 노동안전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당사자들이 변화의 주체로 나서면서 한국사회에서 특성화고 졸업생들의 노동안전 문제, 현장에서 고졸출신 노동자들의 차별을 당연한 것이 아니라 바꿔야 할 과제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많은 회사에서 고졸 출신들의 승진차별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를 명문화한 공공기관도 있다. 그러나 특성화고 졸업생들은 학력이 아닌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다고 창립선언문에 이야기했다. 2019년 4월 건설현장에서 사망한 故김태규와 같은 20대의 특성화고 출신 노동자들의 노동안전 문제, 학력으로 인한 차별을 그만 받고 싶다는 특성화고 출신 노동자의 외침에 대해 이제는 한국사회가 무엇이든 화답을 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청년 비정규직 故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와 유족은 서울 광화문 분향소에서 '국회 산안법 개정에 대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입장'을 발표했다.
‘청년 비정규직 故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와 유족은 서울 광화문 분향소에서 '국회 산안법 개정에 대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입장'을 발표했다.ⓒ시민대책위 제공
줄어들지 않는 산재 사망사고
외주화가 노동자를 죽이는 근본적 원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인식한 사건이 ‘구의역 김군’ 사고였다. 기업이 노동안전 비용과 산업재해 이후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안전업무를 외주화 시킨 결과가 김군의 죽음이었다. 산재사망 90%가 외주화된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이 ‘구의역 김군’ 이후 지속적으로 안전업무 위험의 외주화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산재사망사고가 줄어들지 않았다.
2018년 11월 서부발전 하청업체 한국발전기술 노동자인 ‘김용균’이 사망했다. 김용균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과 노동자들의 싸움, 시민사회의 연대로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 이른바 ‘김용균법’이 통과됐다. ‘김용균법’은 산업안전에 있어서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고, 그동안 법으로 보호받지 못한 특수고용노동자, 라이더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시행령에 있어서 정부가 후퇴한 안을 들고 나와서 논란이 있지만 한국사회의 노동안전에서 진일보한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문재인 정부가 2017년 집권 이후 2020년까지 산재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목표아래 여러 가지를 추진했지만, 고용노동부는 2018년 2142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2017년보다 산재사망으로 줄어든 인원이 없었다. 김용균법 통과와 더불어, 정부가 김용균 사망사고 이후 내린 공공기관에서 2인1조 지침 등이 산재사망사고에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 정부는 우선 입법취지보다 후퇴한 산안법 시행령 개정부터 해야 할 것이다.
구의역 김군이 이후 한국사회는 많은 것이 변했고, 또 여러 과제들이 남아있다. 김군의 죽음을 잊지 않고, 슬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져야 한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3주기인 지금이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한국사회에서 아침에 인사하고 저녁에 집에서 가족을 보지 못하는 일이 더 이상 없길 바래본다.

김종민 전 청년전태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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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행진에 극우 지지자 난입 ‘아찔했던 순간’

언제까지 극우 지지자의 폭력을 묵과할 것인가?
임병도 | 2019-05-27 09:10:00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취재를 위해 찾은 5월 25일 토요일 광화문광장은 찢어질 듯한 스피커 소리에 귀가 아팠고, 옆 사람과의 대화조차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이날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는 자유한국당의 장외집회가 열리고, 광화문 중앙광장(세종대왕상)에서는 4월 16일 약속국민연대, 4.16가족협의회 공동주최로 ‘세월호 참사 진실은폐, 민주주의 훼손, 자유한국당 적폐세력 심판’을 촉구하는 대규모 범국민촛불문화제가 개최됐습니다.
자유한국당은 촛불문화제를 의식한 듯 빠른 템포의 가요 등을 연신 틀어댔고, 크레인에 매달린 대형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굉음 때문에 객석 뒤편에서는 촛불문화제 무대에서 발언하는 목소리나 4.16합창단의 공연을 거의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공간에 두 개 집회가 열리는 모습을 보면서, 충돌(?) 보다는 극우 지자자들의 폭언과 폭력이 걱정됐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촛불문화제 도중 극우 지지자들의 시비는 계속됐고, 폭력 사태도 벌어졌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의 애절한 마음을 조롱하는 피켓
촛불문화제 무대에서는 세월호 진상규명에 관한 영상과 세월호 유가족들의 애절한 마음이 담긴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그러자 객석 뒤편을 맴돌던 극우 지지자는 급조한 ‘세월호 시체팔이’라고 적은 피켓을 들고 조롱하듯 걸어 다녔습니다.
세월호 유가족과 촛불문화제 참가자가 통로를 지나가자 극우 지지자 여성 한 명은 그들을 향해 폭언을 했고, 황급히 피하는 그들을 쫓아가며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을 향한 폭언과 폭력은 이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광화문광장에서는 너무나 흔히 볼 수 있었던 모습입니다.
제발 부탁드린다.
우리 유가족 엄마들과 서명지기 그리고 피켓팅 하는 분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
365일 세월호 진상규명에 매달리는 유가족과 416연대 활동가들 그리고 우리 유가족 옆에서 봉사활동 하시는 분들은 괴롭히지 말아달라.
당신들이 괴롭힐 만큼 그분들이 잘못한 것 없다.
그분들 모두 내 가족이며 내 형제이다.
당신들이 두른 태극기의 숨은 뜻은 알고 있는가?
당신들이 내 뱉는 독설 속의 시체팔이가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당신들이 우상시하는 박근혜가 우리 국민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는가?
경찰은 불법적인 폭력을 단 한건도 용납하지 마라. 단 한번이라도 우리 유가족 엄마들이나 활동가들이 불법적인 폭력에 당한다면 경찰들이 전부 책임져야 할것이다. 
나 같이 못난 위원장 믿고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 아이들 억울함을 알리려고 나오신 분들이다. 
제발 우리를 보호하라. 
저들을 보호하지 말고. (장훈 4.16연대 공동대표/준형이 아빠)
장훈 4.16연대 공동대표는 전날 페이스북에 ‘유가족과 활동가들, 봉사자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며 경찰에게 ‘우리를 보호해달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태극기와 극우라는 완장이 있다고 해도 인간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는 법적으로 처벌받아야 마땅한 증오 범죄입니다. 이날 현장에서 목격한 모습 만으로도 경찰의 수사와 보호가 시급해 보였습니다.
촛불행진에 극우 지지자 난입 ‘아찔한 순간’
촛불문화제가 끝난 뒤 유가족과 참가자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행진이 시작되고 불과 몇 분 뒤 다급한 목소리로 ‘경찰’을 애타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극우 지지자 남성 한 명이 촛불행진을 향해 난입했고, 다행히 참가자들과 경찰의 제지로 안쪽까지는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이날 촛불행진에는 주말을 맞아 부모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유모차를 타고 온 아기들도 있었습니다. 만약 촛불행진 안쪽까지 들어왔다면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촛불행진 바깥쪽 차선은 교통이 통제되지 않았기에 극우 지지자로 아수라장이 됐다면 더 큰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언제까지 극우 지지자의 폭력을 묵과할 것인가?
집회 현장에 나가면 극우 지지자들의 폭언과 폭력을 매번 목격합니다. 이들은 과격한 행동과 충돌을 연출하기 위해 주변을 맴돌며 고의적으로 시비를 겁니다. 특히 생방송을 하는 극우 유튜버들이 많아지면서 클릭이나 후원을 위해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극우 지지자들은 세월호 유가족이나 진보 집회 참가자들과 싸우는 것을 자신의 애국을 증명하는 길이자 훈장처럼 여깁니다. 마치 서북청년단의 ‘빨갱이 처단’과도 같은 모습으로 광기마저 느낍니다.
문제는 경찰이 집회 도중 벌어지는 극우 지지자의 폭력과 폭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날 집회 도중 폭언과 폭력을 휘둘렀던 극우 남성은 경찰에게 체포되지도 않은 탓에 또다시 촛불행진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이 남성이 큰 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었음에도 경찰은 강력하게 제지하지 않았고, 촛불행진을 향한 조롱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날 촬영한 영상을 보면 극우 지지자 남성이 자유한국당 해체 손피켓을 든 여성의 눈을 찌르려고 했고, 여성의 얼굴에는 위협을 느낀 표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단호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집회 현장에서 극우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고 폭언과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극우 지지자들의 만행을 계속 봐야 할까요?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805 

중국이 연 판도라, 인류의 희망? 종(種)의 재앙?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유전자 변형 인간의 탄생

2018년 11월 홍콩에서 열린 제2회 국제인류유전자편집학술회의에서 허젠쿠이(贺建奎) 중국 남방과학기술대학 교수는 "유전자를 편집한 쌍둥이가 태어났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불임치료를 받고 있는 7쌍의 부부로부터 배아를 채취, 유전자가위(CRISPR)를 사용하여 유전자 교정을 했다. 그리고 한 쌍의 부부로부터 에이즈 바이러스(HIV)에 면역력을 가진 룰루(Lulu)와 나나(Nana)란 이름의 쌍둥이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동안 유전자 변형 아기의 탄생은 시간이 문제였지 이미 예견된 사건이었다. 과학자들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실험'을 허젠쿠이(贺建奎)가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중국은 이미 2015년 유전자 가위를 활용한 인간 배아 실험을 가장 먼저 허용하였다. 허젠쿠이가 무모한 '일탈'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중국 당국의 태도와 관련이 깊다.

중국은 2003년 12월 24일 과기부(科技部)와 위생부(卫生部)가 공동 발표한 <인간배아줄기세포 연구윤리 지도원칙(人胚胎干细胞研究论理指导原则)>을 통하여 유전자 편집기술을 통제하여 오고 있었다. 그러나 허젠쿠이는 엄격히 금지된 출산 목적의 인간 유전자 편집을 과감히 시도했다.  

크리스퍼(CRISPR), 판도라 상자를 여는 열쇠가 되다.
 

오늘날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는 생명 현상의 신비를 밝히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유전자 가위는 '판도라 상자(Pandora Box)'를 여는 열쇠가 됐다. 금단의 상자를 열어 인류에게 죽음과 질병을 안겨준 판도라, 그러나 그리스 신화의 원전을 찾아가면 그녀 자신도 원래 인류에 대한 재앙으로 만들어진 인조인간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미 보편화된 'GMO 곡물'의 경우처럼 그 위험성에 대한 아무런 검증도 없이 유전자 가위의 사용이 보편화된다면 인류가 창조한 '신인류'의 탄생으로 '현생인류'는 지구 역사 속으로 사라질 지도 모른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evolutinary theory)'에서 예언한 돌연변이와 적자(適者)생존을 통한 종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을 뛰어넘어, 인류 스스로 새로운 종을 창조하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자연임신이 아닌 인공수정 만으로만 아이를 출산하도록 통제하는 인류의 미래를 다룬 영화 '가타카(Gattaca)'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알파고(AlpaGo)가 인공지능에 대한 우려를 가져왔듯이, 유전자 조작기술 역시 유전자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호기심과 편리를 위하여 만들어진 기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대한 인간의 새로운 윤리관이 중요해졌다. 노화를 되돌리고, 신체를 자유롭게 교체하고, 태어날 아기를 마음대로 선별하거나 DNA를 조작, 편집하는 것이 인류를 더욱 행복하게 할까? 아니면 인간의 신체적 능력이나 조건조차도 경제력의 차이가 결정하는 세상이 될 것인가?

나아가 가까운 장래에는 유전자 분석과 줄기세포 치료 등에 부의 양극화가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다. 부유한 계층은 유전자 편집과 줄기세포 치료가 일반화되고 빈곤층은 아예 혜택을 못 누리거나 불법의 시술에 의존하게 되어 인류의 극심한 계층 분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미래의 생명공학은 인류에게 질병 치료, 수명연장, 식량, 에너지, 환경 등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같이 드리우고 있다. 새로운 윤리관에 바탕을 둔 정비된 법률과 제도 없이는 '판도라 상자(Pandora Box)'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까지도 아무 쓸모없게 된다.  

인간 유전자 편집 기술의 경우, 현재의 과학기술의 수준에서는 그 이득보다는 위험성이 훨씬 더 크다. 현재 하나의 유전자를 조작했을 때 또 다른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 지에 대한 충분한 지식마저도 없다. 특히 인간 배아의 유전자 조작은 후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재차의 검증을 통한 접근이 필요하다. 

소 잃은 뒤에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유전자편집은 지금까지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환상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영화 속의 현실이 실제로 우리 눈앞에 실현되고 있다. 인류 전체가 짊어져야 할 위기감과 윤리적 과제를 놓고 전 지구적인 합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허젠쿠이(贺建奎) 사건 이후에 세계 과학계는 물론 중국 정부도 유전자 과학기술의 인간 적용에 대하여 그 위험성과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2019년 2월 26일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国家卫生健康委员会)가 발표한 <생물의학신기술임상응용관리조례(生物医学新技术临床应用管理条例, 의견청구안)>는 이러한 우려에서 등장한 국무원 법령으로 앞으로 중국에서 유전자 가위를 통한 연구에 학술심사와 윤리심사를 대폭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본 조례의 <의견청구안>에서는 고위험생물의학기술에 DNA편집기술, 생물복제기술, 보조생식기술 등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고위험생물의학기술의 임상실험 시에 각 단계마다 엄격한 심사를 거친 후 등록을 하도록 강제하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이어 2019년 3월 14일 7개국의 과학자와 윤리학자 18명은 국제 공동의 규범이 정립되고 안전성이 입중되기 전까지는 최소 5년간 유전자 편집 인간 배아의 착상을 전면 중단하는 한편 인간 유전자 편집을 관리 감독할 국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과학저널 <네이처>( Nature)'에 발표하였다.  

생명과학을 통제 규율하는 법제도는 연구기술 본연의 도전성, 연구윤리, 사회질서를 모두 고려하는 균형 감각을 이루는 것이 필요하고 이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로 논의의 핵심이다. 허젠쿠이(贺建奎)의 무모한 실험이 있기 전에 각국이 실질적인 법제도를 만들어 규제하였더라면 하는 후회는 있지만 지금이라도 무너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우리나라는 2005년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생명윤리에 대한 규제가 강화된 후 생명과학기술에 대한 체계적 발전의 대안을 아직까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순수 연구 목적의 인간배아 유전자 편집마저도 금지하고 있다. 유전자 편집에 대한 실질적인 법제도 확립과 함께 생명공학의 발전을 위하여 금지한다고 규정하지 않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허용하는 네거티브(negative) 방식의 규제 개혁이 필요하다.  

백악관의 실패원인, 역사는 알고 있다

[개벽예감 349] 백악관의 실패원인, 역사는 알고 있다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5/27 [08:25]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백악관이 미사일협상에 매달린 이유
2. 즉석에서 제시된 파격적인 미사일해법
3.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 물고 늘어진 미국
4.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드는 조선
5. 완전히 파탄된 미국의 공중정찰작전


1. 백악관이 미사일협상에 매달린 이유

가을정취가 짙어가던 2000년 10월 24일 평양고려호텔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미국 국무장관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진행한 기자회견이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클린턴 대통령의 친서를 전하고 3시간 동안 회담하였으며, 조명록 차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백남순 외무상과 각각 회담하였다. 그처럼 중요한 방문일정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기자회견장에 나왔으므로, 내외신 취재진은 그가 과연 무슨 이야기를 꺼내놓을지 무척 궁금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기자회견 중에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킨 발언은 다음과 같다.

“김정일 위원장과 나는 조선의 고유한 미사일 프로그램과 미사일 수출 등 미사일에 관한 상호관심사를 폭넓게 논의하였다.”

“나는 다음 주에 두 나라 미사일전문가들이 회담을 재개할 것이라는 사실을 발표하게 되어 기쁘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위와 같은 발언을 들어보면, 2000년 당시 조미협상의제는 핵문제가 아니라 미사일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3년부터 2001년까지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백악관은 조선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었고, 조선의 미사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었다. 그런 사실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조선을 방문하기 14일 전인 2000년 10월 9일 조명록 차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회담한 직후, 10월 12일 평양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사이의 공동코뮈니케’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조미공동코뮈니케에는 다음과 같은 합의사항이 들어있다.  

“쌍방은 미사일문제의 해결이 조미관계의 근본적인 개선과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는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은 새로운 관계구축을 위한 또 하나의 노력으로 미사일문제와 관련한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모든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이라는데 대하여 미국측에 통보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백악관이 그처럼 핵문제를 외면하고 미사일문제에만 매달린 까닭은 다음과 같은 사연에서 밝혀진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00년 10월 2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선을 방문한 매들리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환영하기 위해 평양에 있는 백화원 영빈관에서 마련한 만찬 중에 축배를 드는 장면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파격적인 미사일해법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2000년 12월 안에 평양에서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미사일해법을 최종적으로 타결하자는 놀라운 제안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통해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냈다. 만약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이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사일해법을 받아들였다면, 오늘 우리 겨레는 자주적 평화통일이 실현된 나라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1)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은 조선이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조선이 핵무기 개발을 막 시작한 초보적 수준에 있는 것으로 오판하였다. 미국의 탐사보도기자 쎄이무어 허쉬가 잡지 <뉴욕커> 2003년 1월 27일부에 발표한 장문의 기사에 따르면, 2002년 6월 미국 중앙정보국은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에게 조선의 핵무기개발현황을 분석한 ‘국가정보평가서’를 제출하였는데, 거기에는 “1997년 이후 정밀기술, 핵탄두설계정보, 핵무기시험자료 등을 파키스탄으로부터 넘겨받은” 조선이 우라늄을 농축하여 핵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판단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1999년 조선이 파키스탄에게 정밀한 핵탄두설계도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미국 중앙정보국은 거꾸로 파키스탄이 핵탄두설계정보 등 핵무기기술자료를 조선에게 넘겨준 것으로 오판하였고, 조선이 파키스탄에서 핵무기기술을 이전받아 핵폭탄을 개발하는 중이라고 오판하였다. 오판이 더 큰 오판을 낳은 것이다.

2019년 5월 20일 <자주시보>에 실린, ‘파키스탄과 리비아를 거쳐 미국에 간 조선의 핵탄두설계도’라는 제목의 글에서 내가 상세히 논한 것처럼, 6.25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 말, 소련으로부터 핵폭탄설계도와 무기급 플루토늄 200kg을 입수하고 핵무기제조기술을 전수받았던 조선은 1960년대 중반에 핵폭탄을 10발 정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1998년 5월 30일 파키스탄 발로치스탄주 차가이사막에 건설된 임시핵시험장에서 비공식 핵시험을 진행하였으며, 1999년에 평양을 방문한 파키스탄 핵무기개발 총책임자 압둘 카디르 칸에게 소형화, 경량화, 정밀화된 핵탄두 3발을 보여주고 핵탄두설계도 사본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미국 중앙정보국은 그런 중요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고, ‘국가정보평가서’에 뚱딴지같은 소리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뚱딴지같은 소리가 담긴 ‘국가정보평가서’를 읽은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이 조선의 핵문제에 대해 오판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전략적 오판에 빠진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은 조선이 1999년에 파키스탄으로부터 기술자료를 넘겨받아 핵개발을 시작했으니, 2005년쯤 되면 일류쉰-76 전략수송기에 실을 크고 무거운 ‘원시적인 핵폭탄’이나 한 두 발쯤 만들지 않을까 예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핵협상을 외면하고, 미사일협상에 매달렸다.  

(2) 1991년에 파키스탄은 중국에서 탄도미사일을 수입하였다. 미사일을 해외에 수출하는 경우 사거리를 300km로 제한하고, 탄두중량을 500kg으로 제한한다는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의 규정을 준수하는 중국은 사거리가 290km밖에 되지 않는 전술미사일을 파키스탄에 수출하였다. 파키스탄은 중국산 전술미사일을 역설계한 복제품을 만들어 1997년 7월 4일에 시험발사를 진행하였는데, 당시 파키스탄이 절실히 요구한 것은 전략미사일이었다. 핵탄두를 장착할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파키스탄에게 전략미사일 개발기술을 지원해줄 나라는 조선밖에 없었다. 중국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의 수출규정을 위반하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로씨야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파키스탄은 그 두 나라에게 전략미사일수출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압둘 카디르 칸은 당시 파키스탄 총리 베나지르 부토에게 조선의 전략미사일 개발기술을 전수받는 의견을 내놓았다. 칸의 의견을 받아들인 부토 총리는 측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선을 방문하였다. 그날은 1993년도 다 저물어가던 12월 29일이었다. 영국 출신 언론인들이며 국제정치저술가들인 에이드리언 레비와 캐더린 스캇-클락이 공동집필하여 2007년 10월에 펴낸 ‘속임수: 파키스탄, 미국, 국제핵거래음모’라는 제목의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에 도착한 부토 총리는 김일성 주석에게 파키스탄의 숙적인 인디아로부터 핵공격위협을 받고 있는 심각한 상황에 관해 하소연하였고, 인디아 내륙 깊숙이 날아갈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미사일설계도를 요청하였다. 부토 총리의 하소연을 들으며 미국으로부터 핵공격위협을 받고 있는 조선의 상황을 생각한 김일성 주석은 파키스탄을 도와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김일성 주석은 부토 총리가 평양을 떠나기 전날 밤, 화성-7 설계도가 저장된 컴퓨터 디스크 보따리를 그에게 주었다. 

조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화성-7은 사거리가 1,500km이고, 5축10륜 발사대차량에 싣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이다. 화성-7 탄체에는 우리글 자음 ㅈ과 9개 자리 숫자가 일련번호로 새겨져 있는데, ㅈ은 전략미사일이라는 뜻이다. 당시 파키스탄의 숙적인 인디아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아직 갖지 못했다.    

파키스탄은 화성-7 설계도를 받았으나, 그들의 기술로는 전략미사일을 만드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다. 신속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다급한 심정을 안고 1994년에 조선을 찾아온 칸과 파키스탄 군사지휘관들에게 조선은 화성-7 완제품 10발을 넘겨주었고, 조선의 미사일기술자 10명을 파키스탄에 파견하여 전략미사일개발을 직접 지도해주었다. 그렇게 되어 파키스탄은 1998년 4월 6일 화성-7을 복제한 중거리탄도미사일 가우리를 시험발사할 수 있었다. 

인디아의 핵공격위협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파키스탄에게 보내는 조선의 지원과 방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조선의 전폭적인 기술지원을 받아 가우리 전략미사일을 만들었으나, 핵탄두를 가우리에 장착할 만큼 핵무기를 소형화, 경량화하는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칸과 파키스탄 군사지휘관들은 1999년에 조선을 또 다시 찾아갔다. 조선은 그들에게 소형화, 경량화된 핵탄두 실물 3발을 보여주면서 핵탄두설계도가 저장된 방대한 분량의 컴퓨터 파일 복사본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탄도미사일 200발도 수출하였다. 조선이 탄도미사일을 한번에 200발씩 대량수출한 것은 엄청난 미사일생산능력을 가졌음을 말해준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조선이 핵탄두설계도를 파키스탄에게 넘겨주었다는 극비정보는 알지 못했고, 조선이 파키스탄에게 화성-7 제조기술을 이전하고, 탄도미사일을 대량으로 수출하였다는 정보만 파악하였다. 중앙정보국의 정보보고를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백악관은 조선의 미사일기술이전을 차단하고, 미사일생산능력을 억제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다. 바로 이것이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이 조선과의 미사일협상에 매달리게 된 사연이다.    


2. 즉석에서 제시된 파격적인 미사일해법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은 자주적 평화통일의 앞길을 밝혀주는 6.15공동선언을 채택, 발표하였다. 민족의 가슴마다 통일열기가 끓어올랐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은 미국을 상대로 미사일협상을 진행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은 미사일협상을 넘어 원대한 목표를 지향하였다. 미사일협상이라는 강력한 지렛대로 백악관을 움직여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거하는 자주와 평화의 대격변을 일으키고, 6.15공동선언에 명시된 연방제통일을 실현하는 결정적인 국면을 열어놓으려는 것, 바로 이것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자주통일전략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자주통일전략은 미사일해법으로 펼쳐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시한 미사일해법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는데, 2001년 3월 22일 미국 외교문제협의회(CFR) ‘한반도변화관리특별전문의원회’가 부쉬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서한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시한 미사일해법은 조선이 미사일수출을 중단하는 것에 상응하여 미국은 매년 10억 달러를 현금 또는 현물로 보상한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조선의 인공위성발사를 지원해주는 것에 상응하여 조선은 장거리미사일시험발사 및 생산을 중단하고 미사일기술통제체제에 가입한다는 것이었다. 파격적인 미사일해법이었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12월 안으로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면 미사일해법을 최종적으로 합의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합의방법과 합의시한까지 제시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파격적인 미사일해법을 받은 클린턴 대통령은 이것이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호기임을 직감하였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 임기의 마지막 시기인 2000년 12월 중에 조선을 방문하여 미사일협상을 최종적으로 타결하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커다란 걸림돌이 평양으로 향하려던 클린턴 대통령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00년 10월 10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차수와 일행이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접견한 뒤에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조명록 차수는 먼저 국무부를 방문하였는데, 거기서 백악관으로 출발하기 직전 양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백악관에 들어섰다. 위의 사진을 보면, 클린턴 대통령 옆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리용호 부상의 모습이 보이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웬디 셔먼 국무부 특별보좌관의 모습이 보인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시한 미사일해법을 받아가지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으로부터 방문보고를 받은 직후 백악관에서 대책회의를 소집하였다. 2001년 5월 1일 서울에서 발간된 <민족 21>은 그 대책회의에 관해 다음과 같은 사연을 전해주었다. 

대책회의에는 주한미국대사 출신들인 제임스 릴리, 제임스 레이니, 도널드 그렉, 그리고 사회과학연구협의회 동북아시아협력안보프로그램 책임자 레온 씨걸 등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의 의견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레온 씨걸은 클린턴 대통령의 조선방문을 지지하는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았고, 제임스 릴리와 제임스 레이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시한 미사일해법을 검증하기 전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고, 도널드 그렉은 조선과 미사일협상을 개최하여 미사일해법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확인한 뒤에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면 좋겠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절충안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렇게 되어 2000년 11월 1일 말레이시아 수도 콸라룸푸르에서 조미미사일협상이 진행되었다. 

미사일협상에서 조선은 미국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사일해법을 실행하려는 의지를 재확인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이 2000년 12월에 조선을 방문하면 미사일해법이 최종적으로 타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워싱턴에 감돌던 지배적인 의견은 신중론이었다. 신중론은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사일해법에 대한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가 뒤엉킨 오판이었다. 워싱턴의 신중론자들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조선방문을 마치고 평양을 떠나기 직전 기자회견에서 이야기했던 다음과 같은 극적인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바로 어제(2000년 10월 23일) 우리는 대집단공연(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뜻함-옮긴이)을 함께 관람하던 중에 조선의 대포동미사일(인공위성 광명성-1호를 지구궤도에 올려놓은 백두산위성운반로켓을 뜻함-옮긴이)의 영상이 (공연장 배경대) 화면에 나타났다. 바로 그때 김정일 위원장이 나에게 이것은 첫 번째 위성발사이며 동시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처럼 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진정성 있는 미사일해법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힌 워싱턴의 신중론자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진심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신중론자들이 평양으로 향하려던 자신의 발걸음을 붙잡아버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좌고우면하며 어물어물하던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12월 21일 아침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대중 대통령 밑에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김하중은 2015년 1월에 출판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정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건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 전에 조선의 미사일문제를 해결하고 싶은데 자신의 조선방문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2001년 1월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워싱턴에 초청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튿날 클린턴 대통령은 유엔주재조선대표부를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워싱턴 방문을 희망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전하였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허망한 것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대통령 권한을 당선인 부쉬에게 넘겨주고 사실상 자연인으로 돌아간 클린턴과는 정상회담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2000년 11월 7일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복잡한 선거개표문제 때문에 12월 13일에 가서야 당선이 확정된 부쉬는 클린턴의 조선방문을 반대하였으므로, 정상회담은 고사하고 미사일협상마저 중단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여 미사일해법을 타결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야 보나마나, 조선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거기에 장착되는 메가톤급 열핵탄두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미국은 국가안보파탄위험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백악관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그로써 국가안보파탄위험이라는 불행 속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3.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 물고 늘어진 미국

1998년 4월 6일 파키스탄은 가우리 전략미사일을 시험발사하였다. 발사대차량에서 하늘로 솟구쳐 오른 그 미사일은 9분 58초 동안 비행하면서 정점고도 350km에 도달하였고, 1,100km를 날아가 발로치스탄 사막에 설치된 타격목표에 명중하였다. 파키스탄에 파견되어 미사일개발기술을 전수해온 조선의 미사일기술자 10명은 그것으로 자기 임무를 완수하였다. 

1998년 5월 어느 날, 귀국을 앞둔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에게 칸은 우라늄농축장비인 P-1(1세대 원심분리기) 20기를 감사표시로 조선에 보내겠다고 하였다.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은 이왕이면 P-2(2세대 원심분리기)를 달라고 했다. 칸은 상부와 협의하고 나서 그들이 요구한 P-2 원심분리기 4기를 감사표시로 조선에 보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감시하던 미국 중앙정보국은 파키스탄의 원심분리기가 조선에 넘어간 것을 알았다. 중앙정보국은 조선이 그 원심분리기를 역설계하여 독자적으로 원심분리기를 개발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중앙정보국은 감시의 눈초리를 조선의 우라늄농축에로 돌렸다.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이 P-2 원심분리기 4기를 가지고 귀국한 때로부터 4년이 지난 2002년 10월 3일 아침, 미국 공군 수송기 한 대가 평양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미국인 8명이 내렸다. 그들은 미국 대표단 성원들이었다. 대표단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를 단장으로 하고, 대조선교섭담당 대사 잭 프릿처드, 코리아과장 데이빗 스트로브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이 평양에 도착하였던 2002년은 조미관계가 악화된 때였다. 2002년 1월 29일 부쉬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발표하면서 조선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모독하는 폭언을 내뱉었고, 2002년 5월 국무차관 존 볼턴은 부쉬보다 한 술 더 떠서 조선, 이라크, 이란, 리비아, 수리아, 꾸바를 모조리 싸잡아 ‘악의 축’이라고 모독하는 2차 폭언을 토해냈다. 폭언과 모독의 광란은 협상을 중단하고, 대결을 재개하려는 흉심의 표출 이외에 다른 게 아니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02년 1월 29일 조지 부쉬 대통령이 연방상하원 앞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하는 장면이다. 그의 뒤에서 딕 체니 부통령과 데니스 해스터트 하원의장이 손뼉을 치고 있다. 부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조선, 이란, 이라크를 이른바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폭언을 내뱉었다. 그가 그런 폭언을 내뱉은 것은 이전 클린턴 행정부가 진행해오던 조선과의 미사일협상을 완전히 중단하고, 조선에 대한 핵대결도발책동을 시작하려는 흉심의 표출이었다. 부쉬 행정부는 2002년 10월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제네바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였고, 2003년에는 조선에 대한 핵대결을 도발하여 정세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8천만 민족의 안전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직접적으로 위협한 제2차 조미핵위기는 그렇게 조성되었다.     

조선과 미국이 그처럼 험악한 분위기 속에 있었던 때에 미국 대표단이 평양에 나타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사연은 2009년 11월 18일 데이빗 스트로브가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연합뉴스> 취재기자에서 털어놓은 회고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2002년 10월 국무부 코리아과장으로 미국 대표단에 망라되어 조선을 방문하였던 스트로브는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2002년 10월 3일 미국 대표단이 평양에 도착한 첫날 오후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켈리 국무부 차관보를 각각 양측 수석대표로 하는 협상이 진행되었다. 켈리 차관보는 “우리는 조선이 고농축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면서 추궁발언을 꺼내놓았다.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김계관 부상은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것은 조미관계의 진전을 바라지 않는 자들의 책동”이라고 맞받아쳤다. 첫째날 협상은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둘째날 오전에 협상이 재개되었는데, 켈리 차관보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우라늄농축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알고 있다느니 뭐니 하면서 추궁발언을 또 다시 꺼내들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셋째날 오후 5시에 마지막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김계관 부상보다 직급이 높은 강석주 제1부상이 나왔다. 그는 “어제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고위책임자들이 회의를 진행하여 논의한 내용을 설명하겠다”고 하면서 30분 동안 발언하였다. 

스트로브는 2009년 11월 서울에서 만난 취재기자에게 자신의 회고담을 들려줄 때, 강석주 제1부상의 발언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켈리 차관보의 발언내용만 주로 언급하였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정황은 덮어두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황만 드러내는 화술이다. 

켈리 차관보가 조선의 우라늄농축에 관한 의혹을 물고 늘어지자, 강석주 제1부상은 “그런 것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그것보다 더 강한 것도 있다”고 맞받아치면서, “미국이 우려하는 문제를 담판으로 해결할 수 있다. 최고령도자급 회담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석주 제1부상의 위와 같은 발언은 조선의 우라늄농축을 자인한 것이 아니라, 2000년 12월에 성사될 뻔하다가 부쉬의 반대로 무산된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여 핵문제를 해결하자는데 강조점을 찍은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조미정상회담밖에 없으므로, 당시 부쉬 대통령이 조선을 ‘악의 축’으로 모독하면서 조미관계를 악화시켰지만, 그런 그에게도 과거를 묻지 말고 조미정상회담을 다시 준비하자고 제안한 것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량 있는 협상의지였다.


4.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드는 조선  

그러나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량 있는 협상의지를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강석주 제1부상이 켈리 차관보와 회담하는 중에 조선의 우라늄농축을 사실상 인정하였다느니, 또는 조선이 원심분리기 제조에 사용할 고강도 알루미늄관을 수입했다느니 뭐니 하면서 마구 떠들어댔다.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이 2002년 10월부터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를 물고 늘어진 까닭은 제네바 기본합의를 파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1994년 10월 21일 조선과 미국이 채택, 발표한 제네바 기본합의에서 미국은 조선에게 경수로 2기를 2003년까지 지어주기로 하였고,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명의로 작성한 공약이행담보서한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냈으면서도 착공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1997년 10월에 착공식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공약이행시한으로 정해진 2003년이 눈앞에 다가온 2002년 말이 되자, 부쉬 행정부는 미국이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덮어버리기 위해 제네바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미국의 일방적인 합의파기는 핵대결도발음모로 이어졌다. 정세는 극도로 긴장되고 있었다. 8천만 민족의 안전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미국의 핵대결도발과 그에 맞서싸우는 조선의 대응행동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함경남도 신포의 금호지구에 있는 경수로 공사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미국은 1994년 10월 21일 조선과 채택한 제네바 기본합의에서 조선이 플루토늄핵시설을 폐쇄하는 것에 상응하여 신포에 100만킬로와트급 경수로 2기를 2003년까지 건설해주겠다고 공약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제네바 기본합의를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담보서한까지 보냈다. 신포 경수로 건설비는 46억 달러인데, 미국은 건설비의 70%인 32억2천만 달러를 김영상 정부에게 떠넘겼다. 클린턴 행정부가 경수로 건설비를 한국, 일본, 유럽연합에게 떠넘기기 위한 경비분담협상을 벌여놓은 바람에 경수로 건설공사 착공은 1997년 8월 19일로 늦춰졌다. 그런데 2002년 10월 부쉬 행정부는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이전 클린턴 행정부가 조선과 채택한 제네바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경수로 건설도 중단되고 말았다. 미국의 합의파기농간 때문에 한국이 경수로 건설비로 지출한 11억3,700만 달러, 일본이 지출한 4억700만달러, 유럽연합이 지출한 1,800만달러가 하루아침에 허공에 날아갔다.     

2002년 1월 부쉬 행정부는 ‘핵태세검토보고서(NPR)’를 연방의회에 비공개로 제출하였다. 그 문서에서 부쉬 행정부는 조선,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리아가 “즉시적이고, 잠재적이고, 예상할 수 없는 도발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비해 핵공격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는 나라들”이라고 지목하면서, 미국 국방부에게 핵전쟁계획을 작성할 것을 요구한다고 서술하였다. 그들이 말한 핵전쟁계획은 선제핵타격계획을 뜻하는 것이었고, 선제핵타격계획에 선정된 1차 대상은 미국의 전쟁광신자들이 가장 적대시하는 조선이었다.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 전쟁광신자들이 노골적인 핵전쟁도발책동까지 벌여놓았으니, 조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조선은 2003년 2월 10일 외무성이 발표한 성명에서 분노를 표출하였다. 

“미국이 핵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우리 제도를 기어이 없애버리겠다는 기도를 명백히 드러낸 이상 우리 인민이 선택한 사상과 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고를 늘이기 위한 대책을 취할 것이다. (중략) 우리는 이미 부쉬 행정부의 증대되는 대조선고립압살정책에 맞서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단호히 탈퇴하였고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 우리의 핵무기는 어디까지나 자위적 핵억제력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위에 명시된 것처럼, 조선은 미국의 핵공격위협에 대응하여 자위적 핵억제력으로 핵무기를 보유하였을 뿐 아니라, 앞으로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들겠다고 성명하였다. 조선이 그처럼 명백한 어법으로 성명했는데도,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힌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조선이 파키스탄으로부터 핵무기개발기술을 이전받은 것으로 오판한 그들은 조선이 실전에서 사용하지 못할 만큼 크고 무거운 핵폭탄 3~4발을 만들어놓고 허세를 부리는 줄로 착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이 그런 원시적인 핵폭탄을 몇 발 더 만든다고 해도 미국의 국가안보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으로 오판하였다.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이 그런 착각과 오판에 빠졌으므로, 그들은 2002년 10월 5일 평양에서 진행된 셋째날 협상에서 강석주 제1부상이 켈리 차관보에게 전한 조미정상회담 제의를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만일 부쉬 대통령이 상황을 오판하지 않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미정상회담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조선은 핵보유-핵증산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고, 조미핵대결은 중지되었을 것이며, 조미핵협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5. 완전히 파탄된 미국의 공중정찰작전

전략적 오판에 사로잡힌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길을 선택하였다. 핵협상을 중단하고 핵대결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결코 이기지 못하고 종당에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핵대결이었다. 

미국이 도발한 핵대결은 조선을 핵무기증산과 핵무력완성의 길로 이끌어갔다. 당시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핵대결을 선택한 때로부터 15년이 지난 2017년에 조선은 마침내 메가톤급 수소탄두 기폭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고,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조미핵대결 25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백악관의 전략적 오판은 미국의 국가안보를 파탄위험에 빠뜨리는 근본원인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조선은 부쉬 행정부의 핵대결도발에 단호한 대응조치로 맞섰다. 조선이 2003년 2월 10일 핵보유-핵증산 성명을 발표한 것은 부쉬 행정부의 핵대결도발을 강하게 내리친 대응조치였다. 

조선의 핵보유-핵증산 성명으로 심하게 얻어맞은 미국의 전쟁광신자들을 이성을 잃고 광분하였다. 그들은 조선에 대한 선제공격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뉴욕타임스> 2003년 2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미국 국방부는 조선에 대한 “외과수술식 미사일공격, 집중폭격, 전술핵무기를 사용하는 선제공격”을 검토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광신자들은 선제핵타격을 감행하기에 앞서 공중정찰활동부터 서둘렀다. 2003년 3월 2일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그날 오전 탄도미사일발사준비에 관련된 신호정보를 수집하는 미국 공군의 RC-135S 정찰기 한 대와 통신신호정보를 수집하는 일본해상자위대 EP-3E 정찰기 한 대가 겁도 없이 조선을 정찰하려고 동해 상공에 나타났다. RC-135S 정찰기가 앞섰고, EP-3E 정찰기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정찰비행을 감시하던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그 두 정찰기를 공중에서 나포해 강제착륙시키기 위해 미그-29 전투기 2대와 미그-23 전투기 2대를 긴급히 출동시켰다. 뜻밖의 위험에 빠진 정찰기들은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사진 5> 

▲ <사진 5> 2012년 1월 3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인민군 공군 제1017군부대를 시찰하고 전투비행사들의 비행훈련를 지도하였다. 평안북도 선천군에 있는 그 부대는 오중흡7련대 칭호를 받은 정예부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군부대 시찰과 전투비행훈련지도를 마치고 부대장의 집을 방문하였다. 위의 사진은 부대장의 집을 찾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허룡 부대장과 그의 아내 김성실의 손을 다정히 잡고 걸어나오는 장면이다. 허룡 부대장은 2003년 3월 2일 조선 동해안에서 241km 떨어진 공역에서 정찰활동을 벌이던 미국 공군 RC-135S 정찰기와 일본해상자위대 EP-3E 정찰기를 공중에서 나포하여 강제착륙시키는 항공작전에 출전하였던 4명의 전투비행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들은 정찰기들이 자기들의 접근비행을 포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전투기에서 발신되는 모든 전파장치를 끄고 오로지 전투비행사의 육안식별과 비행감각에만 의존하여 해수면을 스치는 듯한 무전파초저공비행으로 240km를 날아가, 15m까지 바짝 접근하였고, 20분 동안 그 정찰기들의 주위를 포위비행하면서 나포위협과 격추위협으로 그들의 정신을 쑥 빼놓았다. 혼비백산한 정찰기들은 전속력으로 도망쳐 나포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허룡 부대장은 이 항공작전에서 세운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미국과 일본이 정찰기 두 대를 동해에 출동시킨 것은 조선에 대한 선제핵타격을 준비하기 위해 감행한 공중정찰작전이었는데, 조선의 전투비행사들은 용맹한 무전파초저공비행으로 미일합동공중정찰작전을 완전히 파탄시켰다.     

조선인민군 전투기들은 정찰기 전방에 바짝 붙어 비행하다가 추력엔진을 분사하여 비행을 방해하는가 하면, 어느 새 정찰기 후방에 따라붙어 비행하다가 공대공미사일을 발사하는 사격통제레이더를 켜면서 격추위협을 가했다. 조선인민군 전투비행사가 엄지손가락 하나만 살짝 누르면 공대공미사일이 불을 뿜으며 날아가 그 두 정찰기를 바다에 쳐박을 판이었다. 20분 동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 두 정찰기는 전속력으로 도망쳐 나포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전쟁광신자들이 선제핵타격을 준비하기 위해 감행한 공중정찰작전은 완전히 파탄되었다.  

이 경악할 사태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발칵 뒤집어졌다. 전쟁광신자들은 새로운 핵전쟁계획을 작성하려고 서둘렀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제임스 엘리스 전략사령관에게 새로운 핵전쟁계획을 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지시에 따라 미국 전략사령부가 새로운 핵전쟁계획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2003년 3월 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된 ‘전략핵전쟁계획서’라는 제목의 극비문서다. 

미국이 핵전쟁을 도발하려면 계획서는 물론 작전계획도 필요하다. 그래서 미국 전략사령부는 조선의 군사전략거점들을 선제핵타격으로 파괴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2003년 11월에 완성된 ‘개념계획(CONPLAN) 8022’다. 2004년 6월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은 ‘개념계획 8022’를 발효시키는 ‘임시적인 전지구적 타격 경계명령(Interim Global Strike Alert Order)’을 전략사령부에 하달하였다. 이 명령은 조선에서 공격징후가 나타나는 즉시, 미국이 지상군을 파견하기 전에 장거리스텔스전략폭격기 B-2 편대와 장거리전략폭격기 B-52H 편대를 재빨리 출동시켜 조선의 군사전략거점들을 선제핵타격으로 파괴하는 실전준비를 명령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핵안보연구가 핸스 크리스텐슨이 2008년 7월 25일 미국과학자동맹(FAS) 웹싸이트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2004년 가을 제임스 카트롸잇 전략사령관은 ‘개념계획 8022’를 슬그머니 철회하였다고 한다. 전쟁광신자들이 광분했던 핵전쟁도발책동은 물거품처럼 꺼졌다. 

그로부터 어언 1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은 백악관이 2000년부터 2004년까지 기간에 겪었던 실패경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망각의 늪에 빠져있다. 조선에게 리비아식 비핵화를 적용하려는 망상이 망각의 늪에서 독초처럼 자랐다.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은 망각과 망상의 이중주에 맞춰 어지럽게 오판의 춤을 추며 돌아가고 있다. 망각과 망상은 2019년 12월이 가기 전에 그들에게 전략적 실패를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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