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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1일 일요일

아베의 '정신적 지주', 극우 '일본회의'의 놀랄 만한 실체

19.08.12 07:21l최종 업데이트 19.08.12 07:27l






 영화 <주전장>의 한 장면
▲  영화 <주전장>의 한 장면
ⓒ (주)시네마달
 
일본 최대 극우단체인 일본회의(닛폰카이기)가 아베 신조 내각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3만 8천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회의는 자신들의 조국을 패망 이전으로 '리셋' 시키는 것을 꿈꾸고 있다. 강력한 군대를 갖고 대륙 진출을 도모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일본 핵무장론도 여기서 나온다.

일본을 리셋한다는 일본회의

이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전체 242명인 참의원과 전체 465명인 중의원 의원 중에서 일본회의 의원간담회 회원이 차지하는 비중에서도 확인된다. 교도통신사 사회부·외신부 기자 및 서울특파원 등을 지낸 아오키 오사무가 집필한 <일본회의의 정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2016년에 발행됐다.
 
"일본회의 사무총국 홍보 담당자 등의 말에 따르면, 2005년 9월에 시행된 제44회 중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들 중 간담회에 속한 중의원 의원은 모두 158명이었다. 이후 계속 증가하여 2007년 9월에는 중의원 174명, 참의원 51명으로 모두 225명이 된다. 나아가 2008년 10월에는 중·참 양원에서 모두 250명으로 늘었고, 2012년과 2014년의 총선거를 거쳐 현재는 약 280명 내외다."

의회뿐 아니라 내각에도 그들이 포진해 있다. 2016년 현재 아베 내각의 각료 20명 중에서 13명이 일본회의 회원들이었다. 이 정도면, 일본회의가 일본열도를 운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칭 그대로, 일본에 관한 핵심 회의가 이루어지는 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영향력을 발판으로 일본회의는 한·일 현안에서도 강경 여론을 주도한다. 위안부·강제징용·역사교과서·독도 등과 관련해 한국을 자극하는 발언들이 거기서 많이 나온다.

일례로,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발언들을 서슴지 않고 있다. 7월 25일 한국에서 개봉한 위안부 다큐영화 <주전장>에서 일본회의 대표위원이자 도쿄도 본부회장인 가세 히데야키(외교 평론가)는 대중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어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이렇게 과도한 관심을 가지는 거죠? 역시 포르노 같은 매력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요?"

현재 35명인 일본회의 대표위원은 고문·회장단·감사·이사장·사무총장과 함께 이 단체를 이끄는 임원이다. 그런 간부가 위안부 문제를 두고 '포르노 같은 매력' 운운했다. 그것도, 곧 공개될 다큐영화의 인터뷰를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일본회의 내부의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이 참가한 시민촛불발언대에 참여해 일본 아배 정권을 규탄하고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이 참가한 시민촛불발언대에 참여해 일본 아배 정권을 규탄하고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 이희훈
 
위안부·강제징용·역사교과서·독도 이슈 주무르다

일본회의는 역사 교과서 문제와 관련해서도 극우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일본회의는 1997년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의 통합으로 발족했다.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는 지난 수십 년간 있었던 역사교과서 파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단체다. 이들은 그중 세 번째 파동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노다니엘 교토산업대 객원연구원의 <아베 신조와 일본>은 "세 번째 파동은 1986년에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는 일본의 우파 단체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지금의 일본회의)'가 편찬한 고교용 교과서 <신현일본사>를 둘러싸고 벌어졌다"고 설명한다. 1980년대부터 교과서 문제로 주목을 끌었던 극우 단체가 일본회의의 양대 모체 중 하나였던 것이다.

바로 이 일본회의가 지금의 한일관계 악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2020년까지 이루려 했던 자신들의 목표에 한반도가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회의는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까지 헌법 제9조를 바꿔 '전쟁할 수 있는 일본'으로 만들고 이를 토대로 패망 이전의 일본을 복원시킨다는 야심찬 목표를 갖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연초부터 전개된 한반도 평화 국면으로 인해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타개할 목적으로도 한일관계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7월 16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 전화 인터뷰에서 이영채 게이센여학원대 교수는 일본회의에 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발언 일부를 한국어 어법에 맞게 수정했다.

"제9조 폐기를 위한 시나리오를 해왔는데, 2015년 중의원 선거에 이겨서 희망을 갖게 되고, 작년이 일본회의 창립 20주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20주년 기념 때 올해 선거를 이기고 처음으로 헌법 개정안을 집어넣어, 내년 2020년에는 올림픽과 함께 일본이 전전(戰前)의 헌법으로 돌아감으로써 자기들의 숙원 사업이 다 성취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변수가 생겨버린 거예요. 2018년에 있었던 북미 정상회담과 문재인 정권의 등장에 의해서 박근혜 정권이 탄핵되고 남·북·미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올해 판문점 회동까지 이루어짐으로써 어떻게 보면 일본회의가 고려하지 못한 변수가 생긴 거고, 잘못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죠."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을 2017년 박근혜 탄핵 및 문재인 정부 출범 앞에 둔 것은, 발언 중에 무심코 나온 실수로 보인다. 헌법 제9조 개정으로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려면 한반도 주변에 위기가 상존해야 하는데 최근의 평화 국면으로 인해 지장을 받게 됐다는 것이 이영채 교수의 말이다. 이로 인한 당혹감이 아베 내각의 무리수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강제징용 판결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 국면도 일본회의와 아베의 강공 드라이브를 부추기고 있다는 거다.

위 인터뷰에서 강조된 것처럼 아베 내각 배후에 일본회의가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지만, 그 일본회의의 배후에 있는 실체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 배후에는, 1945년 당시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숨어 있다. 일본을 패망시켰을 당시의 미국이 당혹스러워 할 만한 일이 바로 거기에 있다.
 
 야스쿠니신사.
▲  야스쿠니신사.
ⓒ 위키백과

맥아더도 놀랄 일본회의의 자금줄

일본열도를 점령했을 당시, 미군의 눈에 위험하게 비친 곳이 야스쿠니 신사다. 일본군국주의를 위해 전사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맥아더를 비롯한 미군 장교들한테는 그곳이 일본 군국주의의 핵심 상징으로 보였다.

야스쿠니신사와 일본 신도에 대한 미군의 경계심을 반영하는 것이 1945년 12월의 신도지령(神道指令)이다. 정식 명칭은 '국가신도와 신사신도에 대한 정부의 보증·지원·보전·감독·선전의 금지에 관한 건'이다.

신도지령의 핵심 내용은 국가신도를 폐지하고 정교분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 신도가 더 이상 국가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이를 허용했다가는 일본이 또다시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하고 가미카제 특공대 같은 모험을 벌일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 같은 신도지령에 따라 신사신도에 대한 공적인 재정 지원, 국공립학교에서의 신도 교육 및 신사 참배, 공직자의 신사 참배, 국가신도에 관한 서적 배포 등이 금지됐다. 맥아더를 비롯한 미군은 그런 정교분리를 통해 신도와 일본군국주의의 연계를 차단하고자 했다. 그런데 맥아더가 금지한 그것이 지금 실현되고 있다. 바로 그 신도가 오늘날 일본회의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  더글러스 맥아더.
ⓒ 위키백과

기업도 아니고 정부기관도 아닌 민간단체가 장기간 활동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단체의 자금력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핵심적인 운영 자금이 회원들의 회비가 아닌 다른 데서 나오고 있다면, 단체가 배후의 무언가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 배후의 실체가 앞서 소개한 <일본회의의 정체>에 소개돼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회의 창설에 깊숙이 관여한 무라카미 마사쿠니 전 참의원 의원과 일본회의 도쿄도의회 회장대행을 역임한 고가 도시아키는 일본회의의 자금줄이 일본 신도라고 말했다. "일본회의의 자금에는 회원의 회비 외에 다른 것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고가 도시아키는 이렇게 답했다.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만, 회사를 경영하다가 일선에서 물러난 분들이 꽤 거액의 기부금을 낸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대료나 인건비를 충당하려면 가끔 들어오는 거액의 기부금으로는 부족하지요."

전직 기업 CEO들이 가끔씩 거액 기부금을 낸다고 답변했다. 평상시의 운영자금은 어디서 나오느냐는 추가 질문을 의도한 답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라는 추가 질문이 나오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니 뭐니 해도 신사본청이지요. 메이지신궁 등이 낼 겁니다."

앞에서 1997년 창설 당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일본회의의 모체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 중에서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신도계 종교단체들이 만든 모임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일본 신도가 일본회의의 자금줄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일본회의의 배후에 '일본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신도가 있다는 사실은 일본제국주의 때문에 시련을 당한 민족들한테는 끔찍한 추억을 연상시킬 만하다. 일본 군대가 종교적 신념에 취해 아시아 각국을 맹렬히 침략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맥아더는 신도와 일본 정치의 결합이 세계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정교분리를 강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신도가 일본회의라는 극우 단체를 앞세워 일본 정치에 또다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내각과 의회에 그들의 사람들이 포진해 있다. 유대인이 미국 정치를 주무르는 것처럼, 신도 역시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광분 속에 진행된 일본군국주의를 경험한 우리 한국인들로서는 경계심을 품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이다.

위대한 항일전쟁 종전의 역사

[개벽예감 360] 위대한 항일전쟁 종전의 역사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8/12 [07:56]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광복군과 전략외사실의 합동작전회의
2. 시안비행장으로 돌아간 C-47 수송기
3. 김구의 서한을 외면한 트루먼
4. 1945년 7월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
5. 연계를 맺으려고 애쓴 광복군과 조선인민혁명군


1. 광복군과 전략외사실의 합동작전회의

1896년 3월 29일 류인석 의병장이 지휘하는 항일의병 3,500명이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주둔하는 충주 관찰부를 공격하고 충주성을 점령한 것이 항일전쟁의 시작이다. 의병운동이라는 말이 쓰이지만,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의병부대들의 무장투쟁은 의병운동이 아니라 항일전쟁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항일전쟁은 1896년 3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49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일왕 히로히또가 라디오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하였던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일본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하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교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제2차 세계대전은 일제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1945년 9월 2일에 종전되었지만, 조선민족의 항일전쟁은 히로히또가 항복선언을 발표한 1945년 8월 15일에 사실상 종전되었다.  

49년 동안 지속된 항일전쟁은 항일의병전쟁 → 항일독립전쟁 → 항일혁명전쟁으로 발전하였다. 1896년부터 1910년까지 항일전쟁 제1단계에서는 항일의병전쟁이 전개되었고, 1911년부터 1931년까지 항일전쟁 제2단계에서는 항일독립전쟁이 전개되었고, 1932~1945년까지 항일전쟁 제3단계에서는 항일혁명전쟁이 전개되었다. 

1896년부터 근 반세기에 걸쳐 간고한 혈전이 계속된 항일전쟁은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조선민족의 승리로 끝났다. 항일전쟁 종전 74주년을 맞은 오늘 그 전쟁이 어떻게 종전되었는지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위대한 항일전쟁 종전의 역사는 7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8월 7일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에서 매우 특이한 작전회의가 진행되었다. 김구 임정 주석을 비롯한 임정 및 광복군 고위지휘관들과 윌리엄 도노반 미국 육군 소장을 비롯한 전략외사실(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 고위지휘관들의 합동작전회의였다. 전략외사실은 1942년 6월 13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저벌트의 특명으로 조직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활동하다가 1945년 9월 20일에 해체된 전시군사정보기관이다. 전략외사실을 모체로 하여 1947년 9월 18일에 중앙정보국(CIA)이 조직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전시군사정보기관 지휘관들이 왜 중국 시안에서 광복군 지휘관들을 만나 합동작전회의를 했을까? 거기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프랭클린 로저벌트 대통령은 자기의 특명으로 창설된 전략외사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 몫을 하리라고 기대했지만, 전략외사실은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워싱턴 정가에서 전략외사실 무용론이 나돌게 되었다. 존폐위기에 내몰린 전략외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격전지로 떠오른 아시아전선에서 반드시 전과를 거두어야 하였다. 다급해진 전략외사실은 일제가 강점한 한반도에 공수특전대를 침투시키는 작전계획을 1945년 1월에 수립했다. 

그런데 조선의 언어, 지리, 풍습도 모르고, 외모도 조선인과 전혀 다르게 생긴 미국인 공수특전대원들이 식민지조선에 침투하여 일본군과 일제통치기관을 공격하는 것은 실패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대안을 모색하던 전략외사실의 시선을 끌어당긴 것은 광복군이었다. 그때부터 광복군 대원들을 훈련시켜 식민지조선에 침투시키려는 전략외사실의 전략구상이 무르익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그 전략구상은 ‘독수리작전’이라는 비정규전계획으로 구체화되었다고 한다. 1945년 이른 봄 도노반 전략외사실 실장은 그런 작전계획을 가지고 김구 주석을 만났다. 광복군과 전략외사실이 국내침투작전을 함께 수행하기로 최종 합의한 때는 1945년 4월 3일이었다. <사진 1>


▲ <사진 1> 위쪽 사진은 1945년 8월 7일 김구 임정 주석과 윌리엄 도노반 미국 전략외사실 실장이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광복군과 전략외사실의 합동작전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장면이다. 김구 주석 왼쪽에 보이는 사람이 엄항섭 임정 판공비서 겸 선전부장이고, 김구 주석과 도노반 실장 사이에 보이는 두 사람이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검은 옷)과 이범석 광복군 제2지대장(흰 옷)이다. 아래쪽 사진은 1945년 8월 4일 공수특전훈련을 마친 광복군 제3지대 대원 20여 명이 다른 대원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가운데 안경을 낀 미국인 장교가 광복군 제3지대에서 선발된 20여 명 대원들에게 공수특전훈련을 시킨 클레어런스 윔스 대위이고, 그 왼쪽에 양복을 입은 사람은 김학규 광복군 제3지대장이다. 광복군 제3지대에서 선발되어 공수특전훈련을 받은 20여 명 대원들 가운데는 재미동포 통일운동가였던 윤영무 선생(1920~2015)도 있다. 나는 윤영무 선생으로부터 광복군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앞으로 언젠가 그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1945년 5월 11일부터 석 달 동안 광복군 대원 50여 명은 전략외사실 장교들로부터 식민지조선에 침투하기 위한 공수특전훈련을 받았다. 국내침투작전은 일제가 조선을 불법병탄한 날인 1945년 8월 29일에 개시하기로 정했다.     

전략외사실에게 위와 같은 내부사정이 있었던 것처럼, 임정에게도 내부사정이 있었는데, 그 내부사정은 다음과 같다. 1941년 9월 17일 임정이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하던 때 장졔스 정부(국민당 정부)가 광복군 작전통제권을 장악했었는데, 임정은 1944년 8월에 가서야 광복군 작전통제권을 되찾았다. 작전통제권을 되찾았으나 광복군의 무장을 허용하지 않는 장졔스 정부의 저지선을 넘지 못하는 바람에 광복군은 전투를 벌이기는커녕 총도 만져보지도 못하고 목총훈련이나 하던 판이었다. 그런 침울한 분위기가 계속되던 중에 김구 주석은 식민지조선에 침투하는 비정규전에 광복군을 참가시키고 싶다는 도노반 실장의 제안을 받자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김구와 도노반 앞에는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리고 그들이 넘을 수 없는 큰 걸림돌이 가로놓였다. 그 걸림돌은 1945년 8월 15일 항일전쟁이 종전되던 날 임정과 광복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항일전쟁이 종전되었던 74년 전, 임정과 광복군의 앞길에 걸림돌을 놓아 마지막으로 찾아온 전투기회를 물거품으로 만든 장본인은 미국이었다. 미국이 조기종전을 밀어붙인 까닭에, 임정과 광복군은 전투기회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1945년 8월 임정과 광복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간 전시상황은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기폭시험도 미처 하지 않아 터질지 안 터질지조차 알지 못하는 핵폭탄을 황급히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전하면 미국군이 한반도와 일본렬도에 상륙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소련군이 만주와 홋까이도로 남하진격하여 한반도와 일본렬도를 점령하지 않을까 하고 우려하였다. 만약 소련군이 한반도와 일본렬도를 점령하면, 미국군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을 포기하고 하와이로 후퇴해야 하므로,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련군의 진격을 멈춰 세워보려고 날뛰었다. 당시 미국의 전략목표는 종전과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군의 남하진격을 저지하고 자기들이 먼저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다급한 상황에 내몰린 미국이 소련군의 남하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황급히 선택한 것이 핵폭탄 투하다. 

그래서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전하기 전인 1945년 8월 6일 우라늄핵폭탄을 서둘러 히로시마에 투하하였고, 소련이 일제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던 1945년 8월 9일에는 플루토늄핵폭탄을 나가사끼에 투하하였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점령하려는 제국주의야욕에 사로잡힌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핵공격으로 24만 명을 참혹하게 살육한 전쟁범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2. 시안비행장으로 돌아간 C-47 수송기

광복군 대원들 중에서 선발된 50여 명은 1945년 5월 11일부터 석 달 동안 전략외사실 장교들로부터 식민지조선에 침투하기 위한 공수특전훈련을 받았다. 광복군이 공수특전훈련을 마친 날은 1945년 8월 4일이었다. 후보생 50명 중에서 훈련 도중 12명이 탈락하는 바람에 공수특전훈련을 마친 대원은 38명이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8월 7일 서안에서 김구 주석과 광복군 지휘관들, 도노반 전략외사실 실장과 지휘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내침투작전을 위한 합동작전회의가 진행되었다. 국내침투작전은 일제가 조선을 불법병탄한 날인 1945년 8월 29일에 개시하기로 정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간은 그들의 편에 서지 않았다. 광복군 대원들이 국내침투작전을 시작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또가 항복하였다. 일제가 항복하였다는 놀라운 소식, 조선민족이 애타게 기다려온 기쁜 소식을 들은 김구 주석에게는 환희보다 실망이 앞섰다. 그가 남긴 자서전 ‘백범일지’에는 당시 그의 심정이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일제의 항복소식을 들었어도, 도노반 실장은 작전계획을 예정대로 추진하였다. 일제가 항복한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새벽 광복군 공수특전대원들을 태운 28인승 C-47 수송기 한 대가 국내침투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시안비행장을 이륙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C-47 수송기가 목적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서해 상공을 날아가고 있을 때, 도노반 실장이 느닷없이 무선통신으로 복귀명령을 내린 것이다.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였는데도 조선 점령 일본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하였다는 연락을 받은 그가 사태의 위험성을 직감하고 복귀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가 내린 복귀명령은 광복군의 국내침투작전이 중단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1945년 8월 18일 C-47 수송기에 탑승한 광복군 대원들이 서울 여의도에 있는 제2경성비행장에 내렸으나, 비행장을 경비하던 일본군들의 감시 속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이튿날 중국 시안비행장으로 복귀하던 중 수송기에 비행연료를 보급받기 위해 중국 산둥성 류팅비행장에 잠시 착륙하였을 때 촬영한 것이다. 광복군 대원들이 시안비행장을 출발하기 전, 도노반 전략외사실 실장은 그들에게 장졔스 군대의 군복과 중국옷을 입혔고, 제2경성비행장에 착륙하면 중국인처럼 행동하라고 명령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중국인 복장을 한 대원들과 장졔스 군대의 군복을 입은 대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도노반 실장이 중국인으로 위장한 광복군 대원들을 서울에 파견한 목적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미국군의 신변안전을 확인하고 그들을 미국으로 송환하는 문제를 일본측과 협의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또 일어났다. 일제가 항복한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1945년 8월 18일 새벽 3시 30분 광복군 대원들을 태운 C-47 수송기가 시안비행장을 이륙하여 한반도를 향해 날아간 것이다. 중국 대륙 상공을 가로지르며 8시간을 비행한 끝에 당일 오전 11시쯤 그 수송기는 제2경성비행장에 착륙했다. 제2경성비행장은 서울 여의도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임정과 광복군이 기대했던 국내침투작전이 아니었다. 도노반 실장은 그들에게 국내침투작전을 명령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국내침투작전을 명령했다면, 일본군이 삼엄하게 경비하는 제2경성비행장에 착륙하지 않고, 서울 근교에 있는, 일본군 경비망이 어느 낙하지점 상공에서 대원들이 낙하산을 타고 강하하였을 것이다. 시안비행장을 출발하기 전, 도노반 실장은 광복군 대원들에게 장졔스 군대의 군복과 중국옷을 입혔고, 제2경성비행장에 착륙하면 중국인처럼 행동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기이한 명령은 도노반 실장이 그들을 대일작전에 참가시킨 것이 아니라 군사사절단으로 서울에 파견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도노반 실장이 군사사절단을 서울에 파견한 목적은 한반도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미국군의 신변안전을 확인하고 그들을 미국으로 송환하는 문제를 일본측과 협의하려는 데 있었다.   

제2경성비행장 활주로에 멈춰선 수송기의 문을 열고 내려서던 광복군 대원들은 자기들에게 총을 겨누고 다가온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광복군 대원들을 인솔한 미국군 중령 버드는 일본군에게 자신들은 군사사절단으로 왔으므로 적대행위를 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일본군 지휘관은 군사사절단이 도착할 것이라는 상부의 통보를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들을 경비병막사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도노반 실장은 군사사절단을 서울에 보내겠다고 서울에 있는 일본군사령부에게 미리 통보하지 않았으므로, 제2경성비행장 경비대는 상부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했다. 8월의 무더위만큼 불편한 시간이 흘러갔다. 다음날 광복군 대원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수송기를 타고 시안으로 돌아갔다. 일제의 항복소식을 듣고 전의를 상실한 전략외사실의 비겁한 행동 때문에 광복군은 49년 항일전쟁이 끝나가던 종전과정에 일본군에게 총 한 방 쏘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3. 김구의 서한을 외면한 트루먼

만일 광복군 공수특전대가 전략외사실의 작전계획에 따라 식민지조선에 침투하여 일본군과 일제통치기관을 공격하는 비정규전을 벌였다면 항일전쟁 종전의 역사는 조선민족에게 유리하게 바뀌었을까? 1945년 8월 18일 광복군 대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제2경성비행장에 잠시 착륙했던 장준하는 대원들이 그 비행장에서 일본군과 결사전을 벌여 전사했더라면 연합국이 조선을 승전국으로 인정하지 않았을까 하면서 훗날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종전상황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단순하게 흘러간 것이 아니었다. 임정과 광복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꼬여가고 있었던 종전상황은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5일 직후 중국 시안에서 김구 주석은 임정 주석 명의로 작성한 자신의 친서를 도노반 실장에게 건네주면서 그것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병약한 프랭클린 로저벌트 대통령은 1945년 4월 12일 병환으로 갑자기 별세하였고, 당일 부통령 트루먼은 대통령에 즉각 취임하였다.) 도노반 실장은 워싱턴에 소환되는 자기 부하에게 김구 주석의 친서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하라고 지시하였다. 김구 주석의 친서는 1945년 8월 18일 백악관 비서실을 통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 있는 임정청사에서 진행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친 직후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그런데 태극기와 장졔스 정부가 사용한 국기가 서로 엇갈려 걸려있고, 장졔스 국방부 인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광복군은 창설 당시 대원이 30여 명밖에 없었다. 장졔스는 광복군이 자기 군대 총참모장의 명령과 통제에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광복군 작전통제권을 가져갔다. 이에 격노한 임정은 임정을 충칭에서 워싱턴으로 옮기겠다고 하면서 장졔스를 압박하여 광복군 작전통제권을 돌려받았지만, 광복군을 유지하는 재정을 장졔스로부터 계속 받아야 했다. 1945년 4월 현재 임정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당시 광복군은 339명이었다. 광복군 제1지대 대원이었던 독립운동가가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광복군은 장졔스 정부로부터 보급품을 더 많이 받아내기 위해 대원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대원이 아닌 사람들을 명단에 끼워넣었다고 한다.     

김구 주석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우리는 귀하가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것으로 확신하며, 조선의 독립이 원동의 평화를 위한 열쇠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썼다. 그러나 김구 주석의 친서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의 반응은 너무 냉담하였다. 그는 도노반 실장에게 이런 회신을 보냈다.

“나는 1945년 8월 18일 한국임시정부 수장이라고 소개한 김구 씨의 메시지에 답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미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자칭 정부의 대표가 보낸 메시지를 본인에게 전하는 통로로 당신의 요원들이 행동한 것이 부적절하다고 본 당신에게 사의를 표한다.”

트루먼 대통령이 임정과 광복군을 무시한 것은 항일전쟁이 일제의 패망으로 종전되었으나 조선이 승전국으로 인정받기는커녕 임정과 광복군의 존재마저 인정받기 힘들게 되었음을 예고한 불행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은 미국군이 보내준 C-47 수송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다. 그날 임정요인들의 뒤를 따라 김포비행장에 내렸던 광복군 대원 장준하는 훗날 자서전 ‘돌베개’에서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돌아온 시각, 자신에게 갈마든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벌판뿐이었다. 일행이 한 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하는 건 미군 병사 몇이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허공으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조국의 11월 바람은 퍽 쌀쌀하고 하늘도 청명하지 않았다. (중략) 나의 조국이 이렇게 황량한 것이었구나. 우리가 갈망한 국토가 이렇게 차가운 것이었구나. 나는 소처럼 힘주어 땅바닥을 군화발로 비벼댔다. 나부끼는 우리 국기, 환상의 환영인파, 그 목아프도록 불러줄 만세소리는 저만치 물러나 있고, 검푸레한 김포의 하오가 우리를 외면하고 있었다.”   


4. 1945년 7월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은 나치 치하의 베를린에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소련군 81,000명이 전사하고, 나치군 100,000명이  전사한 베를린격전은 두 주간 동안 계속되었고, 1945년 5월 2일 마침내 소련군의 승리로 격전이 끝났다. 1945년 5월 8일 나치는 항복하였고, 유럽전선에서 포성이 멎었다.  

그보다 석 달 앞서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연안 크라이미아반도 얄타에서 로저벌트 미국 대통령, 스딸린 소련 총리, 처칠 영국 수상이 정상회의를 진행하였다. 그 회의에서 스딸린 총리는 나치가 항복하여 유럽전선에서 전쟁이 끝나면, 2~3개월 안에 소련이 대일전쟁을 시작하겠노라고 공약하였다. 

1945년 5월 8일 나치의 항복으로 유럽전선에서 전쟁이 끝났으므로, 소련은 유럽전선에 배치했던 소련군의 전투병력, 무장장비, 군수물자를 수송렬차편으로  10,000km 떨어진 원동전선(Far East Front)까지 실어날랐다. 세계 역사상 가장 방대한 규모의 전투병력, 무장장비, 군수물자를 가장 멀리 이동하여 재배치하는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이동배치작전이 끝난 날은 1945년 7월 30일이었다. 

1945년 8월 3일 알렉싼드르 와씰렙스끼 원동소련군 총사령관은 스딸린 총리에게 소련군의 원동전선배치가 끝났으므로, 언제든지 명령만 내리면 일제관동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소련군이 유럽전선에서 원동전선으로 이동배치되고 있었던 1945년 7월 어느 날,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군 총참모부 청사에서 소련군 고위지휘관 전원이 참석한 중요한 전략회의가 진행되었다. 와씰렙스끼 원동소련군 총사령관이 주재한 그 회의에서 대일전쟁전략이 토의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끄는 김일성 사령관이 그 회의에 참석하였다. 1998년 평양에서 출판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는 1945년 여름 어느 날 대일전쟁을 앞두고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에 참석하였던 체험담이 상세히 수록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쏘련군 총참모부가 소집한 회의에 가보니 메레쯔꼬브와 스띠꼬브를 비롯해서 대일작전과 관련되여 있는 각 전선사령부의 책임일군들도 벌써 다 와있었습니다. 와씰렙스끼 총사령관도 거기에서 다시 만나보았습니다. (중략) 나는 모스크바에서 쥬꼬브도 만나보았습니다. 그가 독일주둔 소련점령군 총사령관과 독일관리감독리사회 쏘련측 대표로 있을 때입니다. 쥬꼬브가 무슨 일로 거기에 왔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로서는 매우 인상깊은 상봉이였습니다. 이름난 백전로장인 쥬꼬브는 대단히 서글서글하고 소탈한 사람이였습니다.”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끼릴 메레쯔꼬브는 대일전쟁 중에 제1원동전선군 사령관이었고, 테렌티 스띠꼬브는 대일전쟁 중에 제1원동전선군 정치위원이었다.

광복군 통수권자인 김구 주석이 워싱턴에서 진행된 미국군 합동참모본부 전략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상상하지 못할 일인데, 조선인민혁명군을 지휘하는 김일성 사령관이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에 참석하였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난 데는 두 가지 사연이 있었다.  

(1) <로동신문>은 2014년 8월 15일부와 8월 16일부에 김일성 사령관이 지휘한 반일인민유격대, 조선인민혁명군이 벌인 수많은 전투들 가운데서 주요전투들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1. 쟈피거우전투 (1933년 3월 31일)
2. 동녕현성전투 (1933년 9월 6일~9월 7일)
3. 소왕청유격구방위전투 (1933년 초~1934년 2월)
4. 라자구전투 (1934년 6월 26일~6월 28일)
5. 시난차전투 (1936년 7월 10일)
6. 무송현성전투 (1936년 8월 17일)
7. 만강전투 (1936년 8월 24일)
8. 보천보전투 (1937년 6월 4일)
9. 간삼봉전투 (1937년 6월 30일) 
10. 소사하수전투 (1937년 11월)
11. 남패자전투 (1938년 11월 중순)
12. 홍토산자전투 (1939년 1월 24일)
13. 사등방전투 (1939년 3월)
14. 13도구전투 (1939년 3월 상순)
15. 구가점전투 (1939년 4월 11일~4월 12일)
16. 올기강전투 (1939년 6월 10일)
17. 륙과송전투 (1939년 12월 17일)
18. 쟈신즈전투 (1939년 12월 24일)
19. 대마록구전투 (1940년 3월 11일)
20. 홍기하전투 (1940년 3월 25일)
21. 북2도구, 남2도구, 신성툰전투 (1940년 4월 29일)
22. 라진해방전투 (1945년 8월 12일) 

당시 소련군 총참모부는 김일성 사령관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한반도 북부지대와 동만주에서 1932년부터 13년 동안 계속해온 항일전쟁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30년대 후반 항일전쟁시기 김일성 사령관이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과 함께 촬영한 것이다. 원래는 흑백사진이었는데, 조선에서 천연색 사진으로 재생하여 보존하고 있다. 사진 배경에 통나무로 만든 밀영집이 보인다. 사진에서 김일성 사령관은 검은테 안경을 끼고 앉아 있다.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위장용으로 안경을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앞에는 나이가 매우 어려보이는 소년병이 군복을 입고 앉아있는데, 아마도 소년연락병인 듯하다. 사진에서 맨 오른쪽에 양복을 입은 사람은 조선인민혁명군과 연계되어 지하정치공작을 하는 조국광복회 성원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권총은 도이췰란드에서 생산된 마우저 C96이다. 이 권총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세계 각국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모젤권총이라고 불렸고, 중국인들은 싸창이라고 불렀다. 탄환이 10발 들어가는 이 권총의 유효사거리는 200m다.     

(2) 대일전쟁을 앞둔 1945년 여름 원동소련군 총사령부가 하바롭스크에 설치되었고, 와씰렙스끼가 원동소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자신이 하바롭스크에 드나들면서, 와실렙스끼 총사령관, 로디온 말리놉스끼(바이깔횡단전선군 사령관), 메레쯔꼬브(제1원동전선군 사령관), 스띠꼬브(제1원동전선군 정치위원), 니꼴라이 레베제브(제1원동전선군 고위지휘관), 와씰리 쥬꼬브(제2원동전선군 고위지휘관)를 비롯한 원동소련군 고위지휘관들과 친분관계를 맺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들 가운데서도 김일성 사령관이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은 메레쯔꼬브 제1원동전선군 사령관이다.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김일성 주석은 자신과 메레쯔꼬브 사령관의 첫 상봉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메레쯔꼬브는 구면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내 손을 꽉 잡아 흔들면서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리를 권하고 나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쟁에서는 조선 동지들이 우리들의 선배입니다, 대일작전에서 조선 동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활동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메레쯔꼬브는 국제련합군에서의 조선 지대의 활동에 대하여 간단히 료해한 다음 나에게 조선 국내의 군사정치정세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해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우리나라에서의 일본의 군사력량배치와 통치방법, 국내인민들의 반일투쟁과 혁명조직들의 분포정형, 비밀근거지들과 련결되여있는 무장대들의 활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에 참석한 직후 모스크바에서 게오르기 쥬다노브를 만나 담화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유럽전선에서 승리하여 나치의 항복을 받아내고 도이칠란드 주둔 소련군 사령관으로 활약한 쥬다노브는 김일성 사령관이 그를 만났던 1945년 7월 당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제2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김일성 사령관과 쥬다노브 제2비서의 담화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쥬다노브 제2비서 - “조선사람들이 나라가 해방된 후 몇 해 동안에 독립국가건설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김일성 사령관 - “늦어도 2~3년이면 해낼 것이다.” 
쥬다노브 제2비서 - “해방 후 조선인민의 건국투쟁에 어떤 형태의 지원을 주었으면 좋겠는가?”
김일성 사령관 - “쏘련이 독일과 4년 동안 전쟁을 했고 앞으로 일본과도 큰 전쟁을 치르어야 하겠는데 무슨 힘으로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도와준다면 물론 고맙겠지만 우리는 될수록 자체의 힘으로 나라를 일떠세우려고 생각한다. (중략)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쏘련의 정치적 지지이다, 쏘련이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조선문제가 조선인민의 리익과 의사에 맞게 해결되도록 힘써주기 바란다.”
쥬다노브 제2비서 - “당신과의 상봉결과를 쓰딸린에게 보고하겠다.”


5. 연계를 맺으려고 애쓴 광복군과 조선인민혁명군

조선인민혁명군은 제1원동전선군이 폭격기, 기갑부대, 보병부대를 총동원하여 동만주로 진격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함경북도로 진격하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김일성 주석이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밝힌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다.  

- 간백산 일대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한반도 북부지대로 진격한다. (간백산은 함경남도 혜산군과 함경북도 무산군에 걸쳐있는 해발고 2,164m의 높은 산이다.)
- 원동의 훈련기지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수송기를 타고 평양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강하하여 전투에 돌입한다. (원동의 훈련기지는 당시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이 소련군으로부터 현대전 훈련을 받은 야영학교인데, 하바롭스크 부근에 있었다.)
- 국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와 정치공작원들은 항쟁조직을 결성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격에 합세한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제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8월 9일 0시가 조금 지난 시각 원동소련군 160만 명은 세 방향에서 일제관동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김일성 주석은 “같은 날 나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에 조국해방을 위한 총공격전을 개시할 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고 회고하였다. 

김일성 사령관의 공격명령을 받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는 원동소련군이 총공격을 개시하기 약 15분 전인 8월 8일 밤 11시 50분 두만강변의 조선인 마을 토리에 있는 일제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그 마을을 해방하였다. 뒤이어 두만강 연안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일제의 국경요새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함경북도 경원과 경흥을 해방하였으며, 웅기에 상륙하여 웅기를 해방하고 청진으로 진격하였다. 라진은 소련군 태평양함대가 라진에 상륙하기 전에 조선인민혁명군 부대와 라진무장대가 해방하였고, 회령도 소련군이 공격하기 전에 조선인민혁명군 부대와 까치봉무장대가 해방하였다. 1945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에 함께 참가하였던 당시 소련 태평양함대 소속 해군병사 울라지미르 똘스찌꼬브가 항일전쟁이 끝난 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이 당시의 협동작전을 말해주고 있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45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에 함께 참가하였던 당시 소련 태평양함대 소속 해군병사 울라지미르 똘스찌꼬브가 항일전쟁이 끝난 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똘스찌꼬브다. 옷차림으로 보면 이 사진은 1945년 겨울에 촬영된 것 같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제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8월 9일 0시가 조금 지난 시각 원동소련군 160만 명은 세 방향에서 일제관동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김일성 사령관의 공격명령을 받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는 원동소련군이 총공격을 개시하기 약 15분 전인 8월 8일 밤 11시 50분 두만강변의 조선인 마을 토리에 있는 일제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그 마을을 해방하였다. 뒤이어 두만강 연안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일제의 국경요새들을 격파하고 함경북도 경원, 경흥, 웅기, 청진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과 지역무장대들, 그리고 소련군 제1원동전선군이 함경북도에 있는 일본군과 일제통치기관을 공격하고 있을 때, 원동의 훈련기지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공수특전대가 출전준비를 끝냈다. 공수특전대는 수송기를 타고 한반도 깊숙이 침투하여 후방교란전을 벌이라는 김일성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비행장으로 나갔다. 그날이 바로 1945년 8월 15일이었다. 비행장으로 나간 공수특전대는 일제가 항복하였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기지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항일선렬들이 피흘려 싸운 1940년대 항일전쟁 중에 민족주의무장세력은 광복군으로 집결했고, 사회주의무장세력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집결했다. 광복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은 너무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고, 정치이념도 서로 달랐지만, 항일전쟁 중에 서로 연계하려고 애썼다.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는 항일전쟁 중에 김일성 사령관이 조선인민혁명군과 광복군을 연계하기 위해 힘썼던 사실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강병선이 주관했던 신의주의 지하조직에 관내와의 련계를 확보할 데 대한 지령을 내려보냈습니다. 그 지령에 따라 신의주의 지하조직은 천진에 있는 한 공작원에게 중경과 연안쪽에 조선인민혁명군의 련락통로를 개척할 과업을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와 중경, 연안과의 합작을 위한 중간련락거점을 만들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김구 주석도 광복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을 연계하기 위해 여러 모로 힘썼는데,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구의 비서로 있던 안중근의 조카 안우생의 회상에 의하면 김구도 우리에게 련락원을 파견하였다고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련락원은 만주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중도에 해방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1942년 12월에는 림시정부파견원의 자격으로 김가 성을 가진 사람이 목단강까지 왔다가 우리를 만나지 못하고 중경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만일 조선인민혁명군과 광복군이 연계를 맺고 힘을 합쳐 일제와 싸웠더라면, 우리 민족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8.15 해방과 전혀 다른 8.15 해방을 맞았을 것이고, 우리나라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강대한 민족자주역량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항일전쟁의 위대한 역사가 분단시대에 주는 통일건국운동의 제1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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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토착왜구당'...

10일 오후, 노동자·대학생통선대오가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앞에서 함께 투쟁을 진행했다
자유한국당 부산시당이 지난 9일 오후, 통일선봉대를 ‘괴단체’라 칭하며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우선이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성명을 냈다.
이 같은 성명을 낸 이유는 민주노총 20기 통일선봉대가 지난 9일 오전, 자유한국당 부산시당 앞에서 ‘친일적폐 자유한국당해체’, ‘반평화·반통일 자유한국당 해체’, ‘반노동·친재벌 자유한국당 해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를 외치며 육교 위에서 펼침막을 내리고, 게양대에 걸린 자유한국당 당기를 내리는 퍼포먼스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부산시당의 성명에 대해 통일선봉대는 곧장 “민족자주와 평화통일, 친일적폐 청산을 염원하는 노동자 민중이 바라는 미래에 자유한국당의 자리는 없다”라고 자유한국당을 비판하며, “국민과 함께, 노동자의 힘으로 모두 다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넣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더불어 “자유한국당 부산시당을 시작해,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자유한국당 중앙당으로 간다”고 밝혔다.
자유한국당 부산시당의 당기를 내린 통일선봉대는 10일 오후, 발표한 입장과 같이 자유한국당 대구시당으로 이동했다. 이번 투쟁엔 대학생통일대행진단과 함께했다.
통일선봉대 10개 중대 중 대표 발언자로 나온 10중대 중대장은 “자유한국당 간판을 보면 욕도 아깝다, 토착왜구 외세의 꼭두각시 자유한국당은 해체하라”고 외쳤다. 이어 친일적폐의 현실을 표현한 노래인 ‘격문’에 맞춰 율동을 췄다.
대학생통일대행진단 총 단장은 “아베정권을 규탄하고 지소미아를 폐기해야 그래야 진정으로 해방이 된다, 진짜 독립된 세상이 무엇인지 친일적폐세력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자”며, “진정으로 통일 조국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 통일선봉대가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의했다.
주최 측은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지배로 강제로 징용된 우리의 선배 노동자에게 전범기업이 배상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막기 위해 사법농단도 서슴지 않던 것이 바로 자유한국당”이라고 꼬집어 말하면서, 이번 투쟁을 통해서 “‘우리 일본’이 입에 붙어있는 친일적폐, 토착왜구, 자유한국당을 노동자의 힘으로 해체시키자”고 강조했다.
투쟁 마지막엔 노동자·대학생통선대오들이 대치중인 경찰들을 뚫고 함께 자유한국당 현판을 ‘토착왜구당’으로 교체했다.
선현희 기자  shh412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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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님, “대한미국”을 “대한민국”으로 바로 잡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연재 <블로거 천하> 나의 이야기- 리인숙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8/12 [02:36]



문재인 대통령님, “대한미국”을 “대한민국”으로 바로 잡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일본경제가 우리 경제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경제규모와 내수시장으로, 남북간 경제협력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다”고 했는데, 조선을 겨냥한 첨단살인무기들을 명박그네보다 더 어마어마하게  들여오고 조선을 급습파괴하는 한미합동군사연습을 끓임없이 벌려놓으면서  아쉬운 경제에 가서는 조선과 평화경제라니 너무 파렴치하지 않은가? 

남북간 경제협력이라는 말은 우리 8천만 인민들이 모두 염원하고  소원하는 것이지만,  전쟁광 미국에게 목줄을 메고 있으면서  조선의 자원을  빨아먹자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웬수라며 박살내겠다고 도끼를 휘두르면서도 배곺푸니까 빵사달라고 '주적'의 동정을 바라는 것인지, 제대로 된 사고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지, 두개의 혀를 가진 야누스독사인지 내 머리로서는 헷갈린다.   

더하여 에스퍼 미국방장관과 볼턴은 ‘지상발사형 중거리미사일’을 한국이나 일본에 배치하려고 한다고 했다. 이 재앙덩어리가 한국이나 일본에 배치되면 발밑에서 시한폭탄이 재깍거리는 것과 다름없이, 핵전쟁은 시간문제가 된다.  

생화학, 방사능, 핵폭발대응임무를 수행하는 미군사단소속의 제23방어대대는 제7기동군단소속기계화사단인 ‘맹호부대’와 함께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지하훈련소에서 조선의 지하핵시설을 가상한 ‘대량살상무기 제거’ 훈련까지 감행했다.

조선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8일  “… 북침연습 올해만 100차례 이상의 북침합동군사연습을 강행…”했음을 지적하고, 지난 정권과 다를바 없는 배신행위라며 ‘진상공개장’을 발표했다.  “남조선당국은 《현존하는 북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면서 2019년도 국방예산을 력대 최대였던 2018년보다  8. 2% 늘인것도 모자라 얼마전에는 2020년도 국방예산을 그보다 8% 증가시켜 《국회》에 제출하였다.” 라며 문정권이 명박근혜 정권과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조선 외무성은 “…미국과 남조선당국의 군사적 적대행위들이 위험계선에 이른것과 관련하여 이를 준렬히 단죄규탄하며 다음과 같은 원칙적립장을 밝힌다.” “첫째, 미국과 남조선당국은 우리로 하여금 국가안전의 잠재적, 직접적위협들을 제거하기 위한 대응조치들을 취하도록 떠민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둘째,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립장에는 변함이 없지만 군사적적대행위들이 계속되는 한 대화의 동력은 점점 더 사라지게 될것이다….”라고 경고했다. 

6일 조선에서 발사한 신형전술유도탄미사일은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하라는 미국과 남한에 보내는 메시지라고했다. 연이어 북은 “새로운 길 모색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으며 문재인정권의 이중성에 대해 맹비난했다.  참음에도 한도가 있듯이 조선은 문재인에 대해서는  비난을 자제해 왔지만 그의  노골적인 2중행태에 대해  현대판《야누스》라고  언급했다.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른  문재인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2019년 8월 7일 <우리 민족끼리>에서는  “남조선당국이 앞에서는 공동선언이나 합의서같은 문건을 만지작거리고 뒤돌아앉아서는 최신공격형무기반입과 합동군사연습강행과 같은 못된짓을 일삼는 이중적행태를 보이고있는것은 민족우선이 아니라 외세굴종에 정치적명줄을 걸고있기때문이다….

남조선당국이 동족과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외세와 야합하여 첨단군사장비들의 반입과 합동군사연습의 강행으로 그 무엇인가를 얻어보려 한다면 그보다 더 큰 오산은 없으며 종당에 차례질것은 자멸밖에 없다.” 라고 강경하게  말했다.

이렇듯  한미는 제 할 임무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북과의 평화경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문재인의 생각은  망상 또는 국민을 호도하려는 언행불일치 속임수 말이 아니겠는가.

미국은 조미회담을 3번이나 했지만  지들이 할 책임은  무시하고  오히려  북에대한 날강도적 요구만  더해갔다. 전쟁에 환장하여 국제법이 금하는 무기까지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 연구개발실험하고 쌓아놓고 있으면서 살인강도 침략행위를 하루가 멀다하고 하는 주제에, 북에 대한 일방적인 완전한 비핵화와 생화학무기폐기를 요구했고, 강도높은 제재를 더 해갔으며, 심지어는  2011년 3월 1일 이후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에 대한 무비자 입국권을 취소했다고 미국 세관국경보호국이 밝혔다. 

조선선박  와이즈 어네스트 호를  제재 위반 혐의로 몰수하여  웜비어부모의 소유권으로  인정하여 매각할 수 있게했다. 윔비어 부모는 아들인 오토 웜비어가 북의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기를 치며(나는 이것이 미국 네오콘들의 음모사기라는 것을 누누히 밝혔었다) 미 워싱턴DC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12월에  5억 114만 달러의 승소 판결을 받았는데 그 돈을 조선의  자산인 와이즈 어네스트 호로 메꾼다는 것이다.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해적행위로 이 어찌 황당무개하지 않은가. 

아베로 부터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수모의 가장 큰 원인은 악덕 재벌기업과  한국정부가  수십년동안 일본의 자본에 기대어살던 한국의  뿌리깊은 외세추종과 사대매국질이 빚어낸  결과이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그룹들과 문재인 정부는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국은 일본과  한 해적단이기에  일본을 끼고 도는 미국이 나가면  일본은  그야말로  끈떨어진 매가 된다.  시시각각으로  우리민족을  핵전쟁으로 몰아  총받이로  써먹고 일본을 한국 상전으로 만들려는  미국을 한반도에서 쫒아내야 엉켰던 실들이 풀어진다.  서구미국에 대한 한국의 비굴함과 굴종은  이 세계에서  가장 으뜸일 것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직에 앉은 후  쓰레기 정권 명박근혜와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는가?  아니 오히려 더  모든 것이  악화됐다. 

우리민족의  허리를 동강낸  민족의 주적 미국네오콘의 나팔수가 되어  그들의 대변인 역활을 충실히 하며,  삶에 허덕이는 국민들의 신음소리는 외면하면서도  미국의 주둔비는  올려달라는대로 다 올려주고, 엄청난 살상무기들을  사라는대로 다 사재끼며,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이름만 살짝 바꿔가며  예전보다 더 억세게 하고 있다.

남북 우리민족의  문제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는 미국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며 “승인”을 받아야만 하고, 미영 이스라엘의 불의한 이란침략야욕으로 화약고가 터지면 어떤 재앙이 될지도 몰라 많은 나라들이 꺼려하여 불참하겠다는 호르무즈해협 파병요구도 그대로 응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호구가  바로 한국이다.   

통진당을 불법해산한 다카키 매국노들이  깨끗한 양심과 민족의 평화를 위하는 이석기 의원을  조작과 음모 어거지로 감옥소에 집어넣고, 그에 동조한 외세좀비들은 촛불을 이용하여 정권을 쥐고도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유괴납치한  조선의 식당 종업원 12명을 그대로  어딘가  비밀장소에서 (교도?)세뇌 시키고있을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과 4번이나 만났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한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죽쒀서 개준다고, 촛불시위가 엉뚱하게  명박근혜와 반대인 척하면서도 궁짝을 맞추었던  문재인에게  영광을  안겨주었듯이, 치떨리는 불행과 고통만을 우리민족에게  강요한 일본의  뻔뻔스런  경제보복으로  분노한  국민들이  벌리는  일제상품불매운동 역시 묘하게도 또, 명박근혜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를 바 없고 오히려 민주가면을 쓴 그 모습이 더욱 파괴적인데도 문재인의 줏가를 올려주고 있는 듯 하다. 

미국파워엘리트들이 꾸미는 작전의 치밀함이  - 악랄함에 분노하지만 - 언제나 나를 감탄하게한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일본에 맞서 45조원을  한국 재벌 회사에  투입한다고  했다.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죽어가면서 피땀으로 수출하여 벌어들인 돈들은 어디 갔는가?

노동자들의 눈에 흐르는 피눈물을 멈추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어야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정경유착 비리로 성장하고 외국자본에 종속된 재벌들과,  IMF를 기획하여 한국을 식민지화 하려고 침투해 들어온 외국자본들을, 미국이 조선의 배를 압류경매하고 그리고 베네수엘라 자산들을 압류한 것같이,  압류하고,  그 재벌 기업들을 노동자들에게 맡겨서 운영하고 기술개발 하도록 하면  단번에 해결된다.

그리고  외세의 목줄을  벗어나  우리 형제인 조선과 협력하고 힘을 합한다면  왜  45조원이나 필요하겠는가? 조선은 자원이 많을 뿐아니라 CNC를 비롯하여 세상이 부러워하는 세계 최첨단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의 혁명시절부터  자력갱생의 기치를 높이 들어 시작한  피땀의 산물인 모든 첨단기술의 산물들이  우리민족의 자랑이며  우리민족의 자산이 아니겠는가.

미국일본이 힘으로 난리치면  조선의 핵은 우리민족의 핵이라고  말한 조선의  막강한 힘이 있는데, 외세에 붙어먹는 매국노들이 아니라면 무엇이 두려운가?

남북정상들이 만난 이유는  바로  우리민족끼리  손을 잡고  경제도 함께하고 평화도 함께 만들어나가기 위함이 아니었겠는가.  우리민족의 분단 원수인  미국이 한국을 지켜준다고 돈뜯어내고  재벌들 살린다고 돈뜯어내면  그러지 않아도 어려운  서민경제는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또한 일본의 제재를 핑계대고 재벌들을 공공연하게  돕겠다는 말은  음지에서  진행하던  정경유착을  양지에서 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이다. 

노동력을 착취하고  노동자들을 죽이고,  억압하고  폭행한  악랄한  재벌 삼성의 후예 이재용이를 문재인은  감옥에서 나오게 하여  인도뿐 아니라  조선방문도  끼고 다닌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았는데  이젠  거칠 것 없이  드러나게  삼성을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 것 아닌가?  

최악의 산재국인  '대한미국',  최악의 인권유린   악덕제벌 기업들이  살판이났다.

삼성과 문재인의 피해자 김용희 노동자는 20년이상  이들로부터  말로 다 형언 할 수 없는 탄압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왔고  마지막으로 그는 고공농성에 올라가 그 좁은 곳에서  지내며 식음을 전폐한지가  2달이나 되었으며  죽음을 각오하거있다.  그렇게  절규하는  삼성노동자인 김용희가  죽어가고 있는데도  삼성과 문재인은 눈감고 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우리 경제를 가마우지에서 펠리컨으로” 탈바꿈하겠다고 했는데 , 지금까지  노동자의 피와 땀을 빨아먹던  자본이 펠리컨의  큰 부리 안에 먹이를 저장했다 자식들을 먹이는 새 같이  땀흘린 노동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성 장관은 "삼키지 못해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부리' 안에서 우리 것을 다시 한번 더 크게 만들겠다는 의미로 비유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꼴갑도 가자가지 아닌가?


나는 외세를 배격하고 남북이 손을 잡으면 세계를 이끌어갈수 있다고 많이도 떠들었다. 남부조국의 자본과 기술이 북부조국의 지리적 이점과 자원, 최상의 노동력과 결합하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될수 있다고 떠들었는데,

북이 100% 자체 기술로 인공위성을 날리고 CNC, 핵융합발전기술까지 있는 것을 보고 세계 최고의 기술력은 북이 가지고 있는데 반하여,

남녘은 이번에 왜구의 경제제재에 한국 기술력이 아직도 일제에 의존하는 형편없는 상태이며, 부자인 척하지만 빚이 1경2천조나 된다는 말을 들엇다.

북부조국은 세계를 이끌 자격이 이미 충분한데 남부조국은 개털정도가 아니라 다리밑 떨거지양아치 수준이다는 말이다. 허참 기가 막혀... 

  
자본주의 이론이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은 선진국 자기들이 가지고 부가가치가 낮은 산업재해와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는 산업은 후진국에게 넘기는  ‘분업형태’로 발전한다고한다. 

내가 한국을 떠나던 70년대는 다카키 매국노가 미국의 경제지침에 따라 ‘잘살아보세’하면서 한참 노동집약적 산업들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필요한 기술들은 모방으로 시작해서 10년 늦어도 20년이면 자체기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나는 ‘한국의 기술력’이라는 것을 높을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40년 5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기술에 의존한다니 한국의 지도급인사들은 개돼지 똥구데기 새끼들이 아닌가!

산업화를 위하여 외국자본을 들여올 수 밖에 없다해도, 그 돈은 빚이니까 한푼한푼을 꼭 필요한곳에만 바르게 써야한다.

그런데 다카키가 스위스 은행에 당시 10억달라를 빼돌렸다는 말이있었고(1978년 미 하원 ‘프레이저 보고서’ 를 보면  "박정희 비자금 스위스 은행에 8조5000억…현재가치 300조~400조"),  매국노 정권들과 정경유착비리 악덕재벌들은 해외로 돈 빼돌리고, 물쓰듯 해외에서 그 돈을 뿌렸다.  

미국을 방문한 똥구데기 갑부들이 베버리힐을 방문하여 한번 방문에 4만달라나 물건을 사고 와서 친구 엄마에게 한다는 말이 “겨우 4만불 어치밖에 안샀어요”라고 말했다. 미국방문을 온 한국인들은 미주동포들을 “거지들”이라고 했다한다.

외국자본들을 끌어들여 나라는 빚더미에 앉혀놓고 기술개발은 도외시하고, 매국노 도둑놈들은 횡재를하여 해외에 돈 빼돌리고 황제나 된듯이 돈 퍼쓰는 나라 – 이것도 나라인가? 한국의 상류계층이라는 작자들의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완전히 흉칙한 독사들로 보인다.   

정주영이 ‘종놈으로도 쓰지말라’고 말했다는 오사카 쥐새끼를 청와대에 앉혀놓고 나라를 개판치더니, 이완용과 동급 매국노 다카키 딸년이 국제창녀 같이 정치헤서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았는데, 촛불정권이라는 불법(부정선거 공모범)협잡정권은 명박근혜의 사악함에 더하여 천사의 가면까지 쓰고 생각할줄 모르고 꽥꽥거리는 개돼지들을 끓는 가마솥으로 몰아간다.

문재인은  일본과의 분쟁에 대해   트럼프에게  중재역할까지 요청했다니 같은 피를 나눈 민족으로서  낯이 다 부끄러워진다. 

조선은 그야말로  초토화된  잿더미 위에서   스스로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만들어내었고, 심지어는 세계  5개국에 속하는 자체  ICBM 까지 만들어내어,  세계에서 가장 전쟁을 많이 하는  전쟁국가 미국의 대통령이 조선에 간살간살 아부하는 말을하고있지 않은가!

부끄럼을 모르면  인간이 아니라 했다.  맨날 미국의 바지가랭이에 메달려  미국의 요구라는 요구는  빠짐없이 들어주고,  생활고에 시달린 사람들의 자살율이 세계  1위를 차지하고, 빈익빈 부익부의 차이는  날이 갈수록 더하고,  종교 문화  경제  도덕 윤리등 모든 것이   타락으로  달려가며   인간의 심성과 뇌가 썩어가는데도  아량곳 하지 않는다.   

자원은 전혀 없고  더욱이 ‘1경2천조’라는 빚더미에 올라 앉은 한국이 살아남을 길은  오직  우리의 분단의 원흉인  미국을 몰아내고  그들의 밥노릇을  중단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외세가  한국을 계속 식민지통치를 하기위하여 만든, 일제의 조선인 통치법이 기초인 국가보안법을 없애고 국정원을 폐쇄해야하며 우리민족을 죽이려는 대북적대정책들에 당장 반대해야한다. 그리고 자한당이나  태극부대 매국노들을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일제매국노들을 제때 청산하지 못한 휴유증이 지금 이렇게 크게 나타나고 있다.  문재인이 하고자 한다면 이들의 비리는 넘쳐나고 넘쳐나기때문에   이들의 손목을  당장 묶을 수 있다.

미국의 목줄에서  헤쳐 나올 수 있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가 바로 지금이며, 마찬가지로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비롯하여  일본과의 모든 협정을  폐기하면  된다. 

트럼프가 한미훈련을 싫다고 하고 주둔비를 올리라고 했다는데, 이것은 문재인이 “대한미국”을 대한민국으로 바로 잡을 수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는 말이다.  

《(2019.08.09연합) 트럼프 "김정은에게 아름다운 친서 받아" "또다른 만남 갖게될 것으로 생각"  ↳"김정은, 한미훈련 마음에 안들어해" …”나도 한미훈련 마음에 안들어" …비용 거론하며 韓방위비증액 간접 압박》  


문재인 대통령님,

“당신이 말한대로 주한미군 데리고 이땅에서 나가면 됩니다. 우리도 미군 필요 없거든요. 남북 우리 형제들이 같이 어울려 평화롭게 살고싶습니다.” 라고 트럼프의 말에 당장 대꾸하세요. 쓸데없는 미국무기 구입하지 말고  미군주둔비 없애고  미국에 “승인받아야”할 필요 없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그러면 당신을 한심한 명박근혜와 동급으로 보던 나의 시각이 찬양으로 바뀔 것입니다.

《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의 희망인가 야바위꾼인가?” 2017.05.28 http://blog.daum.net/win/10 》     

아베의 시건방에는 한일정보교환협정 파기는 물론 모든 군사관계를 당장 끊고, 미국이 다른 나라에게 하고있는 그대로, 일본이 한국에 투자한 모든  자산을 압류하십시요. 일본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지금까지 사과조차도 하지않은 우리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그리고 능라도에서 조선인민들에게 연설했던 말을 지키세요. 우리민족끼리 함께 살겠다는데  세계 어느누가 시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북부조국과 군사외교경제 등 모든면에서 같이하면 이 세계 어느나라도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문재인이라는 이름은 우리 역사에서 “주역”을 했다고 기록될 것입니다.


<사실 한국의 실정($빚,사고방식)을 보면 북은 한국을 ‘점령’하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아예 없애야 빚문제 등이 해결될 것입니다. 연방 연합은 그 빚을 그대로 조선에도 책임지도록하는 것입니다. 사상적으로도 노예근성이 쩔어 세계 모든 악을 저지르고 있는 미국이 없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래서 일전에 나는, “북은 남을 잊어버리고 미국과 직접 상대하라”고 했었지요. 주인을 굴복시켜야하지 그 노예를 굴복시켜봐야 의미가 없으니까요.>

<끝>

<블로거 천하> 나의 이야기는 필자개인의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침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음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