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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3일 화요일

독재자는 민주열사의 주검까지도 서울 밖으로 쫓아냈다


[르포] 민주열사 묻힌 모란공원, 이제 기념관 건립 논할 때
2017.10.04 13:38:46




많은 이가 지난 겨울 길거리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새삼 깨달았다. 과거 한국은 혁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민이 피 흘려 독재체제를 민주공화정으로 바꿨다. 동북아에서 한국처럼 민주의 의의를 국가 정체성으로 확고히 새긴 나라는 없다. 

하지만, 달리 보면 우리는 지난겨울 촛불을 들기 전까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했다. 생생하게 경험해 보지 못한 탓이다. 우리는 4.19민주혁명의 의의가 무엇인지, 전태일의 항거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반추해보지 않았다. 수십 년간 이어진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사를 밑줄 그어가며 공부해본 경험도 없다. 기성세대 대부분이 한국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해 볼 겨를이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몸으로 체득한 이전 세대의 반민주적 교양을 자식에게 대물림할 뿐이었다. 

마석 모란공원 묘역이 특별한 이유다. 이곳은 방문한 이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의 의의를 되새기게끔 하는 곳이다.  
▲ 김근태 전 의원의 묘 인근에서 바라본 마석 모란공원 전경. ⓒ프레시안(최형락)

모란공원 묘역은 민주주의 산 교육장 

지난 19일 한국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인 모란공원을 찾았다. 모란공원 묘역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위치한 경춘선 마석역에서 도보로 약 20분가량 거리에 있다. 범 민주계열 정치인들이 중요한 시기마다 찾는 곳이다. 현재 약 13000기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약 160여 명의 민주열사가 묻혔다.  

공원 입구에서 위로 쭉 뻗은 길을 중심으로 묘역은 크게 좌우로 나뉜다. 오른편이 주로 민주열사가 묻힌 곳이다. 오른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민주열사 묘역 안내 책자 비치대와 민주열사가 묻힌 곳을 표시한 묘역도가 들어서 있다. 이들은 2013년 세워졌다. 묘역도는 구글 지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모란공원 묘역은 사설 묘지이기에 희망하는 누구나 안장은 가능하다. 실제 대부분 묘소는 일반인의 묘역이다. 3년에 25만 원가량 정도의 관리비, 약 1500만 원가량의 묘역비, 15년의 묘역권 등 묘역 이용 기준도 민주열사와 일반인에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모란공원 묘역이 상징성을 띈 이유는 1970년 분신한 전태일 열사가 이곳에 묻혔기 때문이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이하 추모연대)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 등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권은 노동권 존중을 요구하며 분신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낳은 전태일 열사의 유해가 서울시내에 묻히길 원치 않았다. 이에 보안당국은 유가족에게 전태일 열사의 묘지를 서울과 먼 거리에 조성하길 종용했다. 이에 유가족이 고른 곳이 모란공원이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은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기란 쉽지 않았다. 대중교통도 하루 두세 대 뿐이었고, 눈이 오는 날엔 접근도 어려웠다"며 "당시 정권은 최대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전태일 열사를 떨어뜨려두려 했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만 해도 모란공원은 새 묘지라 다른 묘를 찾기도 어려웠다"던 이소선 전 유가협 회장의 말과 일치한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전 회장은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평생을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이 전 회장은 지난 2011년 타계 후 전태일 열사 묘소 왼편 두 칸 뒤에 안장되었다. 대부분 언론이 이소선 전 회장을 '이소선 여사'로 표현하는데, 남성에게는 대체로 전 직책을 붙여 호명하는 것과 비교하면 부당한 표기로 보인다.  

전태일 열사가 묻힌 후, 점차 더 많은 민주열사가 모란공원 묘역에 안장되기 시작했다. 1971년 5월 노조 활동 중 구사대에게 피습 당해 살해된 김진수 열사(당시 한영섬유 노동자), 1973년 10월 이른바 '유럽거점대규모간첩단' 명단에 포함돼 안기부의 고문으로 숨진 최종길 열사(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 1979년 신민당사 점거 투쟁 중 경찰의 살인진압으로 사망한 김경숙 열사(당시 YH무역 노동자) 등이 모두 모란공원에 묻혔다. 이들 모두 문민정부가 들어서 시민권을 인정받기 전까지는 이른바 '빨갱이'로 모욕당한 민주화의 산증인들이다. 

추모연대에 따르면 사실 전태일 열사 이전 이곳에 묻힌 민주열사가 있다. 권재혁 열사다.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던 열사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추진하려 했으나, 1968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소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주범으로 내몰려 1969년 사형 당했다. 권재혁 열사는 사망 다음 날인 1969년 11월 5일, 모란공원 묘역에 안장됐다. 

모란공원이 본격적으로 세간에 알려진 계기는 박영진 열사 장례 투쟁이다. 박 열사는 1986년 신흥정밀에 입사해 임금 인상안을 놓고 사측과 맞서던 도중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했다.  

노동계는 박 열사 유해를 모란공원에 안장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상당수 민주열사 묘역이 모란공원에 조성된 터라 부담감을 느낀 정권과 대립, 한 달 열흘간의 투쟁 끝에 유해를 안장했다. 이 사건이 회자되면서 모란공원은 중요한 민주화의 성지로서 존재감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1987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가 이곳에 안장된 사건은 20년 넘게 지속된 독재에 지친 시민이 대대적 항쟁에 나서는 도화선이 되었다. 

자발적으로 조성된 민주화 성지 

전두환 정권 붕괴로 형식적 민주화를 이룩한 다음에도 이곳의 상징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직장 투쟁으로 노동 현장의 민주화를 이루자는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이후 모란공원에는 많은 노동열사를 비롯해 사회 각계의 누적된 모순과 싸우던 이들이 안장되었다. 수은 중독으로 15세 당시 입사 2개월 만에 사망한 문송면 열사, 백골단의 학생운동 폭력 진압으로 사망한 김귀정 열사, 원진레이온에서 근무하다 얻은 직업병으로 사망한 김봉환 열사와 고정자 열사 등 숱한 이가 이곳에 묻혔다.  

평생을 통일운동에 전념한 문익환 목사, 정부의 강경한 노점상 철거에 맞서 싸우다 위법적 공권력 행사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이덕인 열사, 항일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평생을 바친 계훈제 전 <사상계> 편집장, 효순이미선이 사건 당시 시민운동을 이끌다 귀가 도중 의문사한 제종철 열사, 레미콘 노동자 노동권 보장을 위해 사측과 협상 도중 사측이 고용한 대체차량에 치어 사망한 김태환 열사, 한미FTA 반대를 요구하며 분신한 허세욱 열사 등 숱한 이가 이곳에 묻혔다. 정권의 폭력적 철거에 맞서다 용산 남일당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숨진 이상림·양회성·한대성·이성수·윤용헌 열사는 나란히 이곳에 묻혔다. 민청련 사건으로 군부의 살인적 고문을 받았던 김근태 전 국회의원도 이곳에 묻혔다. 

모란공원이 일방적으로 주입받은 화장한 한국의 얼굴이 아닌,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역사의 장인 셈이다. 이창훈 추모연대 집행위원장은 "모란공원은 자연스럽게 조성된 민주열사 묘역"이라며 "권력의 인위적 조성이 아니라, 시민의 열망이 만든 일종의 성지"라고 강조했다.  
▲ 전태일 열사의 묘소 뒤로 이소선 전 유가협 회장의 묘소가 자리했다. 전태일 열사가 모란공원에 묻힌 후, 이곳은 점차 민주열사의 성지가 되어갔다. ⓒ프레시안(최형락)

언제까지 시민 손으로 관리를... 

그간 민주열사 묘역은 그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관리가 쉽지 않았다. 유가족을 중심으로 한 각 열사 추모단체가 개별적으로 개별 묘를 관리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어디에 묻혔는지 확인키도 어려웠다. 추모연대 등 여러 단체가 민주열사 묘역을 전반적으로 관리했지만, 인력과 자금의 부족으로 한계가 있었다. 

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때는 2013년이다. 최재성 의원 등이 주도해 지역구 예산 2억 원을 관리에 투입했다. 묘역을 크게 가로지르는 이동로가 시멘트로 포장되고, 약자의 이동을 돕기 위한 손잡이가 이동로에 설치되고, 주요 묘소를 안내하는 나무 표지판이 설치된 게 이 때다.  

이창훈 집행위원장은 "예전에는 길이 전부 흙이라,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노약자는 이동조차 어려웠다"며 "그나마 지금은 예전에 비해 민주열사를 찾기가 쉬워진 셈"이라고 말했다.  

유가협 등 각 단체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이 매월 둘째 주 일요일마다 전반적인 묘역 관리에 나선 때도 2013년이다. 이에 따라 개별 열사 묘역이 따로 관리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민주열사로 확인된 이들의 묘역이 함께 관리되고 있다. 묘역 관리자를 위해 공원 입구에 컨테이너 박스가 세워진 것도 이 즈음이다. 자원봉사자들의 주요 업무는 묘역 잔디 관리, 이동로 관리, 표지판 관리 등이다.  

하지만, 더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해 보였다. 안내 책자 비치대는 외력으로 추정되는 힘에 의해 찌그러져 있었고, 안내 책자는 모두 바닥났다. 일부 나무 표지판은 이미 썩어 조금만 손을 대도 흔들렸다. 한편으로 크게 기운 표지판도 눈에 띄었다. 

개별 민주열사 묘역에는 그들의 행적을 간략히 소개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일부 표지판은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훼손한 듯 부러져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후 사망해 이곳에 묻혔음에도, 자원봉사단 관리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이가 여전히 많다는 데 있다. 통상 민주열사는 매년 6월 열리는 범국민추모제에서 확인하는 민족민주열사 안장 명단에 들어간 이로 구성된다. 이 명단에 든 이 중 모란공원 묘역에 묻힌 이의 묘지가 자원봉사자들의 관리 대상이다. 하지만 유가족 중 이 절차를 모르는 이는 서류신청이 필요하다는 절차조차 알기 힘든 게 현실이다. 

이창훈 집행위원장은 "그나마 노동열사는 상급 단체 등이 추모사업회를 꾸려 관련 절차를 밟아주기에 괜찮지만, 개별적으로 우리 사회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가신 이의 유족은 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여기 묻힌 이 중에도 실제로는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음에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가 많다"고 말했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사진 왼쪽)과 이창훈 추모연대 집행위원장(사진 오른쪽)이 모란공원 기념관 설립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제 기념관 건립을 논할 때 

무엇보다 유가족 단체는 모란공원의 상징성을 후대에 더 적극적으로 알릴 방안을 우리 사회가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 아니냐고 묻는다. 

모란공원은 사설묘지여서 민주열사와 일반 안장자의 무덤이 혼재되어 있다. 이미 묘역이 꽉 차, 더 많은 이를 받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일부 민주열사의 묘지는 이동로에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이 문제는 단순히 공권력의 힘으로 해결하기란 어렵다. 묘지란 기본적으로 함부로 손대선 안 되는 공간인 데다, 이런 혼재성이 역설적으로 모란공원이 시민의 자발적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임을 알리는 상징성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가족 단체는 모란공원의 상징성을 살리되, 무엇보다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 장소인 이곳의 의의를 시민에게 더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안을 범정부 차원에서 논의해주기를 원했다. 구체적 대안으로 이들이 요구하는 안이 기념관 건립이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은 "모란공원을 비롯해 전국에 산재한 민주열사 묘역은 그 어느 곳보다 한국 현대사를 생생하게 공부할 수 있는 장소"라며 "궁극적으로 모란공원 기념관을 설립해 시민 누구나 이곳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의의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제화된 묘역보다, 살아있는 역사인 이곳에서 청소년이 우리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며 "자라는 세대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가장 좋은 곳이 모란공원"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정부는 과거 기념관 설립을 검토한 바 있다. 모란공원 입구에 위치한 모란미술관을 정부가 매입한 후, 이곳을 추모시설로 바꾸는 방안이다. 당시 정부는 약 200여억 원의 사업비가 소요될 것으로 봤다. 하지만, 일반 묘역이 민주열사 묘역과 섞인 만큼 당시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와 관련해 최근 유가협, 추모연대 등 민주열사 관련 단체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모란공원 재정비 방안을 마련해 다시금 정부에 관련 논의를 이어줄 것으로 요청할 예정이다.  

이창훈 집행위원장은 "엄밀히 말해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은 관리가 어렵다기 보다,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대통령을 비롯해 주요 민주계 정치인이 찾는 곳인데, 그에 걸맞은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올해로 시민의 힘으로 군부 독재를 끝내고 민주화 체제를 이룩한 지 30년이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기를 위해 시민이 흘린 피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선거권 획득이라는 중대한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민주화의 의의를 상징할 모란공원은 더 큰 관심을 원한다. 

민주화의 상징 묘역들

모란공원 외에도 전국 각지에 한국 현대사의 상흔을 보여주는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 

먼저 손꼽을 곳은 광주 망월동 구 묘역(3묘역)이다. 망월 구 묘역은 5.18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상징성을 얻었다. 1980년 신군부는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숱한 이를 학살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이 사건의 희생자 상당수가 망월 묘역에 묻혔다. 이후 이곳은 80년대 학생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광주에 빚을 진 숱한 민주화운동가들이 망월동을 찾았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망월동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민주화 운동이었다. 전두환 정권 당시는 유족마저 망월동을 방문하기 어려웠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망월 구 묘역에서 추모제를 열었다는 이유만으로 징역형을 살았다. 

이후에도 숱한 민주 열사가 망월 구 묘역에 묻혔다. 이한열 열사가 대표적이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한열 열사는 사후 망월 구 묘역에 묻혔다. 1991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다 숨진 강경대 열사도 망월 구 묘역에 안장됐다. 경찰의 물대포로 인해 숨진 백남기 열사도 망월 구 묘역에 안장됐다. 

망월 구 묘역은 최근까지도 접근이 쉽지 않은 공간이었다. 지난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곳을 찾을 당시 8000여 명의 전투경찰이 망월동 인근을 에워싸, 구 묘역을 참배한 후 신 묘역으로 이동하던 유족을 막았다. 현재 구 묘역에는 민주열사 묘지 40여기와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149명의 가묘가 조성돼 있다. 본래 망월 구 묘역에 있던 5.18 희생자들의 묘소는 1997년 신 묘역이 완성된 후 그곳으로 이장됐다. 신 묘역은 2002년 국립 묘지로 승격됐다. 

경남 양산 솥발산 공원묘역은 한국의 대표적인 노동열사 묘역이다. 경남 일대는 중공업 단지가 밀집된 탓에, 일찍부터 노동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 상당수가 솥발산 공원묘역에 묻혔다. 이곳이 ‘노동운동의 성지’가 된 까닭이다. 

2003년 사측의 탄압에 항의하다 살인적 손배소에 짓눌린 끝에 분신한 배달호 열사가 이곳에 묻혔다. 배달호 열사의 죽음은 형식적 민주화가 완성됐다 여겨진 당시 사회에 직장 민주화가 여전히 요원함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이후 노동운동가와 싸우던 주요 회사는 가장 손 쉬우면서도 잔인한 무기로 손배소를 꺼내들어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현재 이곳에는 노동열사 30여 명이 묻혀 있다. 

'보수의 성지'로 알려진 대구에도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 대구 현대공원 묘역이다. 

현대공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 악명 높았던 인민혁명당 사건 희생자들의 유해가 남은 곳이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의 유신에 반대하리라 점찍은 인물들을 증거 없이 연행해 대법원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유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 속칭 인혁당 사건으로 불리는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도예종 삼화토건 회장, 여정남 전 경북대 학생회장, 서도원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김용원 경기여고 교사 등 8명이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현대공원에는 인혁당 희생자 8명을 비롯해 민주열사 17명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이들의 죽음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음을 발표한 후, 2007년 정부가 희생자 유가족에게 245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뒤늦게 바로 잡혔다. 인혁당 사건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희생자 유가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처럼 전국 각지에 자리한 민주열사 묘역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의 성지로 자리 잡게 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마석 모란공원과 대구 현대공원, 양산 솥발산 묘역은 지금도 사설 묘지다. 망월 구 묘역은 현재 광주광역시가 관리하는 시립묘다. 

민주열사를 모시는 유일한 국립 묘역은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있다. 지난 2001년 민주공원 묘역 사업이 결정된 후 수년 간 적절한 후보지를 물색하던 정부는 2007년 12월 이천시 모가면 공원로를 최종 부지로 확정했다. 이후 2016년 6월, 총예산 497억 원을 들여 시공한 국립 묘역을 개원했다. 

이곳에는 90년대 초반 학원 민주화와 노태우 정권 타도, 노동 해방 등을 요구하며 민주화 이후에도 학생운동이 이어지게끔 산화한 강경대 열사를 비롯해 민주열사 56명이 안장되어 있다. 전체 안치 규모는 136기다. 일정한 조건에 부합하는 국가 인정 사망자만 안장될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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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다 잊었다” 말하지만...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족의 명절




67년 세월 동안 수많은 미제사건으로 남아
구자환 기자 hanhit@vop.co.kr
발행 2017-10-04 10:15:23
수정 2017-10-04 10:4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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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자료사진
민중의소리 자료사진ⓒ구자환 기자

 ‘사랑의 자리’낙엽이 떨어져도 생각이 나고
강물이 흘러가도 생각이 난다.
돌아온다고 약속해놓고 오지않는 무정한 님아.
사랑이 머물던 자리 그님은 어디가고
어디가고 돌아올 줄 모르나.
할머니는 불쑥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둘째 딸이 ‘어머니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다’는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88세의 고령에 맞지 않게 고운 음색과 음정을 갖춘 노래가 잔잔한 침묵을 뚫고 있었다.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며 먼저 가버린 남편의 그리움과 원통함을 애써 달랬다. 어떤 때 할아버지(남편) 생각이 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이젠 다 잊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대답은 외려 무덤덤했다. 수십년이 흐르면서 눈물도 말라버렸다. 숱한 세월이 흐르면서 죽은 사람을 슬퍼하기보다 당장 삶을 이어가는 것이 급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하는 것이다. 가해자들이 침묵을 강요하며 노린 것이 ‘시간’이었을까. 통한의 아픔도 숱한 세월 속에 묻혔다. 당시 농사를 지으며 마산소방서에 다녔던 남편 황치원씨는 21세 나이의 청춘이었다. 20세인 할머니는 첫딸에 이어 둘째 딸을 태안에 품고 있었다. 다행히 열서너 마지기의 논이 있어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 수가 있었지만 남편이 없는 농사일은 ‘골병’ 그 자체였다. 홀로 어린 딸을 키워야 했던 가혹한 시간이 어느새 67년이 흘렀다. 할머니는 가혹한 시간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하느냐고 했다.
20세의 나이에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이귀선 할머니
20세의 나이에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이귀선 할머니ⓒ구자환 기자
노래를 마친 이귀선 할머니는 잠시 자리를 벗어낫다. 67년의 세월이 흐른 동안 국가는 할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 진상조사에서 진실규명이 되었지만 법원은 증거능력이 부족하고 마산형무소 수감된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심마저 기각했다. 현재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부역 사건 등 다수의 유족들은 법원으로부터 ‘국가 잘못’이라는 판결을 받고 보상을 받았으나 유족 일부는 법원으로부터 비슷한 이유로 기각 당했다. 보도연맹학살 사건 등 진실규명 미신청 유족은 신청자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다.
“돌아와서 들에 풀어놓은 소를 찾아오겠다고 나갔어. 그리고 안 돌아오데”
2일 찾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8월 11일 미군 폭격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2002년 영국 BBC에서 이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 방송은 미처 알지 못했거나 침묵했던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국민보도연맹학살 사건이 그 이전에 있었다. 당시 마산과 진주일대 국민보도연맹원은 한국전쟁 초기인 음력 6월1일 소집 통보를 받고 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산의 계곡과 인근 바다에서 집단 학살됐다.
“아침에 ‘나중에 돌아와서 들에 풀어놓은 소를 찾아오겠다’고 하고 나갔어. 그리고 안 돌아오데”
남편은 진전지서에서 ‘가입하면 군에도 안 가고 좋다’는 권유를 받고 가입했다. 그것이 국민보도연맹인 줄은 알지 못했다. 1949년 이승만 정권은 좌익세력을 대상으로 사상을 전향하고 계도하기 위한 관변단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역 할당제가 실시되면서 국민보도연맹원에는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농민이 다수 가입됐고, ‘말 깨나 한다’는 지식층과 중고등학생까지도 가입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은 위협하고, 농민에게는 대출과 농기계 대여를 해주고, 가입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취급한다고 협박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가입시켰다. 시골마을에서는 이장이 주민에게 알리지도 않고 지니고 있던 도장을 찍기도 했다. 이때부터 ‘도장을 함부로 주지 말라’는 말이 생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37만명으로 추정되는 국민보도연맹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민군에게 동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예비 검속되고 전국 곳곳에서 무차별 학살됐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에는 가입하지 않은 인사들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논과 밭을 팔아 뇌물을 주고 풀려난 보도연맹원도 곧잘 회자된다. 집안이 부유했던 아버지는 자식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논과 밭을 팔아 포대자루에 담아 뇌물을 전했다. 그럼에도 돌아오지 못한 자식도 있었다. 뇌물을 받은 순경 등은 ‘담배 사가져 오라’는 등의 말로 풀어주었지만 순박했던 사람은 담배를 사들고 다시 되돌아와 죽임을 당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한 순경이 자신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를 살리기 위해 ‘선생님, 목욕하고 오시라’고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 독립운동가 역시 목욕을 하고 다시 돌아왔다. 죄가 없으니 도망갈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순경은 크게 탄식을 하면서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욕설을 마구 퍼부으며 울었다고 한다.
유족들이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헌화하고 있다.
유족들이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헌화하고 있다.ⓒ구자환 기자
남편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풀려난 마을주민으로부터 남편의 소식을 들었다. 이 마을에는 진전면장의 힘으로 주민 3명이 살아서 돌아왔다. 마을로 돌아온 주민 중 한 사람은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음력 7월 10일 제사를 지내라’는 단 한마디만 전했다. 이날이 남편인 황치원씨가 마산 구산면 ‘괭이바다’에서 수장 학살된 날이었다.
마산 괭이바다에 수장된 음력 7월 10일
“우짤거고, 아무리 한이 맺혀도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
할머니는 끝내 그 비통했을 순간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오랜 고통을 되새기는 질문을 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던 것에 비해 무척 허탈한 답변이었다. 듣고 있던 둘째 딸이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는 듯이 대신 거들었다. 당시 할머니의 태안에 있던 유복자다.
“말 안 해도 뻔 한 거 아닙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을 치고 대성통곡을 했겠지. 죽은 사람은 그렇다 치고 산 사람의 원이라도 풀어줘야 하지 않습니까.”
할머니는 참혹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이제는 남편의 생각도 잊었고 눈물도 말라버렸다. 담배와 술을 먹으며 지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애써 웃었다. 살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체념이다. 너무 어이없고 황당한 일을 당하면 사람은 웃는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이 벌어진지 67년이 지났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당시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수많은 민간인학살 사건 등에 대해 진실규명을 했지만 이명박 정부로 접어들면서 활동기간을 연장하지 못하고 종료됐다. 짧은 활동기간은 여전히 수많은 미제 사건을 남겼다.
문재인 정부는 ‘민간인학살 사건’을 10대 국정과제로 설정하고 2018년 초 ‘제2의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재조사 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현재 남편을 잃은 유족들 대부분은 기억을 상실하거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나마 생존한 유족들도 오랜 시간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 체념하거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이것이 제2의 진실위가 하루빨리 활동을 재개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침묵을 강요당하고, 역대 반공우파 정권에서 배척한 대한민국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 이제 살아있는 자들을 몫으로 남았다. 

추석은 원래 ‘하루’만 쉬는 날이었다?


등록 :2017-10-04 09:29수정 :2017-10-04 09:51

추석 풍경 변천사
1970년 고향길 대표 풍경은
‘만원 열차·무임 승차’
첫 ‘연휴’는 전쟁 중인 1951년
작년까지 최장 추석연휴는 5일
가족·친척들과의 긴 만남보다 해외여행과 ‘방콕’이 일상이 되고, 극장가가 붐비는 지금 추석 모습은 예전과 어떻게 다를까? 대체휴일과 임시공휴일이 만나 사상 초유 ‘10일 연휴’를 갖게 된 2017년 추석을 맞아, 추석 연휴의 역사와 모습을 살펴봤다.
■ 추석은 원래 ‘하루’만 쉬는 날이었다
추석이 법정공휴일로 제정된 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이다. 이후 1986년에는 추석 다음날, 1989년에는 추석 전날이 휴일로 지정되면서 지금과 같은 ‘3일 연휴’ 체제가 완성됐다.
하루만 쉬던 추석이 2일 이상 쉬는 ’연휴’가 된 건 추석 다음날 일요일이 붙은 1951년이 처음이었다. 이후 연휴가 법제화된 1986년에 이르기까지 일요일을 앞뒤로 낀 추석연휴는 1951, 1954, 1958, 1967, 1974, 1975, 1981, 1984년 등 모두 8번 있었다. 10월3일 개천절과 이어진 이틀짜리 연휴는 1963년 한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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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연휴가 법제화된 1989년 전까지 3일짜리 추석 연휴는 이틀짜리 추석 연휴(10월7일, 8일) 뒤로 한글날이 맞물린 1987년 단 한 차례 뿐이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하루 또는 이틀 안에 고향을 다녀오려는 귀성객들로 열차와 버스가 몸살을 앓았다. 추석 3일 연휴가 5일로 길어진 때도 있긴 했다. 1990년 당시 법정공휴일이었던 국군의날(10월1일·월)이 일요일과 추석 연휴 사이에 끼면서 사상 첫 5일 연휴를 만들어냈다. 그 탓이었을까. 국군의날은 그해 11월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됐다.
4일 이상의 연휴가 흔해진 건 2004년 토요일을 쉬는 ‘주5일제’가 시행된 이후다. 2014년 대체휴일제가 도입되면서 추석은 어지간하면 4일을 쉬는 ‘가을 휴가’가 됐다. 해외를 다녀오려고 여행객들로 공항이 붐비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사람들은 주변 휴일과 공휴일 사이로 개인 휴가를 끼워 일주일 안팎의 기간 동안 해외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 광복 이전: 하루만 쉬어도 텅~비었던 서울
가족끼리 모여 차례를 지내고 송편을 나눠 먹는 추석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장거리·대규모 귀성은 과거에 흔치 않았다. 일가친적이 가까운 곳에서 대가족을 이루며 사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적 의미의 귀성은 일자리와 학업을 위해 타지로 나간 이들이 늘어난 일제시대부터 본격화했다. 당시 추석은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대규모 귀성은 없었으며, 고향이 가까운 사람들만 주말을 끼고 가족을 찾아갔다. 1924년 9월12일자 <동아일보> ‘임박한 추석과 가을의 선물’ 기사는 당시 모습을 이렇게 쓰고 있다.
“고향 가까운 사람들은 부모형제 모여앉아 송편 한 개라도 달게 먹으려고 고향으로 다니러 가는 사람이 많다는 바, 추석날은 마침 토요일이므로 학생들도 일찍 공부를 마치고 나오리라는 데 금년에는 여러 가지 재앙으로 연사가 전만 못함으로 따라서 추석 놀이도 전에 비하면 매우 쓸쓸하리라더라.”-1924년 9월12일 <동아일보>
그런 상황임에도 추석이 되면 서울은 텅 비었던 것 같다. 1921년 <동아일보>는 텅 빈 서울의 모습을 잘 묘사해 놓았다. 100여년의 세월 차이에도 불구하고 낯설지 않다.
“어제 16일은 음력 추석이라. 있는 집에서는 곰국을 푸지게 끓여놓고 아이들까지도 모두 재미있게 지내는 모양. 더욱이 어제 하루 동안은 시내의 각병문에 인력거 구경을 할 수가 없었고 3~4전 하던 무 한 단에 십전씩 주어도 얻어볼 수가 없었으며 관에는 고기가 동이 났다 함은 아무리 죽네 하여도 경황이 전보다 나은 것을 증명”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신세를 비관해 명절에 자살하는 이들이 있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사람마다 그 준비에 분망중인 지난 29일 밤 극도의 생활난으로 세상을 비관하여 사랑하는 자식 두 명을 양팔에 안고서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참극이 있었다.”-1933년 10월3일자 동아일보 3면 ‘명절이 고통 애자양명을 포옹코 진행차에 투신자살’
“한 노파가 (열차에) 뛰어들어 무참히도 자살을 하였는데, 조사 결과 그는 서성리 김씨(61)로서 추석 명절이 닥쳐왔건만 생활이 곤궁하여 한끼니의 밥도 지어 먹을 수 없음을 비관하고 추석날 미명에 목숨을 끊고 말았다 한다.”-1935년 9월14일 동아일보 5면 ‘생활난 비관 노파가 자살’
■ 광복부터 1950년대까지: 승차권 못구한 승객들 무임승차…미군 객차까지 투입돼
1949년 추석 당일이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고향을 찾는 이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귀성의 핵심은 기차였다. “서울역 광장에는 차 탈 사랑들이 문재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섰다. 서울역 오후 5시45분발 열차는 개찰도 하지 않았는데, 용산에서부터 초만원이 되었다” 1949년 10월7일자 <경향신문>이 묘사한 추석 하루 전날 서울역의 풍경이다.
1951년은 사상 첫번째 연휴였지만, 전쟁으로 명절 분위기를 한껏 낼 수는 없었다. <동아일보는> 9월15일자 신문에서 “고난과 궁색 중에서 맞이한 조상의 제례도 못 올리는 오늘의 추석 명절…(중략) 그래도 무심히 뛰노는 새 옷 입은 거리의 아이들이 조국의 꽃봉오리다. 그리고 변함없이 반가이 맞아주는 만월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새 희망으로 고난극복”이라고 짧게 썼다.
고향가는 길은 휴전선이 정해진 뒤인 1952년부터 다시 혼잡해졌다. ‘대규모 무임승차’로 열차가 연착하는 등 지연운행이 극에 달했다.
“추석을 앞둔 부산역의 혼잡은 극도에 달하여 비난의 초점이 되어있는데, 지난 2일 부산역을 출발한 서울행 급행열차와 대전행 여객열차는 승차권을 구입치 않은 여객들도 초만원을 이루어 여객차는 스프링이 주저앉아 이날 아침 8시에 출발, 6열차는 삼랑진에 이르러 2시간이나 늦어 대구역에 이르렀으나 극도의 초만원을 이루어 열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1952년 10월3일자 <경향신문> 2면 ’삼랑진 대구서 연발소동‘
열차 귀성객이 폭증하자 정부는 1955년에는 미군에 객차 10량을 긴급 요청해 투입했으며, 1956년에는 임시열차를 증편 운행했다. 하지만 열차만으로 장거리 여객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서민들이 정원 초과 열차표마저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일부 국회의원은 역무원에게 특권을 요구하는 등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추석의 명절을 앞두고 제각기 고향으로 내려가려는 시민들은 서울역이 갑자기 좁아진 듯 터져라고 몰려들고 있다. 언제나 2~3할 정도의 여유를 보여주던 각선 열차는 그 전날에 벌써 정원을 초과하고 차표를 못산 승객들은 이리저리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특히 가족 수행원들을 이끌고 귀향하는 국회의원 제공들의 접대에 서울역장실은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1955년 9월29일 <경향신문> 3면 ‘혼잡한 추석 열차 어제 서울역 풍경’
무리하게 승객을 태우다보니 크고 작은 교통사고도 잇따랐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사고는 ‘평해호 침몰 사고’다. 1949년 10월 5일 인천항을 출발한 여객선 평해호가 강화군 작약도 100m 앞에서 전복해 71명이 숨졌다. 50인승 ‘똑딱선’에 귀성객을 비롯해 200여명이 넘는 승객을 태워 발생한 인재로, 당시 선장은 만취한 상황이었다.
■ 1960년대: 기차로, 비행기로…빈부 따라 갈라진 고향길
산업화로 고향을 떠난 ‘이촌향도’ 현상이 사회문제로 떠오른 60년대의 귀성길 혼잡은 극심했다. 몰려든 승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열차의 스프링이 내려앉는 등의 사고가 잇따랐다.
6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부유층이 이용하는 백화점과 아파트 상가를 중심으로 흥청거리는 명절 분위기가 퍼졌다. 1968년 10월4일자 경향신문 ‘추석경기 흥청-사치품이 날개돋혀’ 기사는 서울 시내 일부 백화점에서 매상목표 5천만원을 예상했던 상품권이 매진되는가 하면, 귀금속 등 사치품과 냉장고, 에어컨 등 고가 전자제품의 거래가 늘어나는 등 과거와 다소 다른 명절 분위기를 전했다. 항공편을 이용하는 귀성객이 부쩍 늘어 서울-부산을 비롯한 주요 노선의 예매가 완료됐다는 소식과 함께 ‘초만원’ 서울역에 질서 유지를 위해 사복경찰이 투입됐다는 소식이 함께 전해졌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의 1977년 추석 모습. 국가기록원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의 1977년 추석 모습. 국가기록원
■ 1970년대: ‘고속도로 시대’ 개막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가 대전-대구 구간을 끝으로 전 구간 개통하면서 본격적인 고속도로 시대가 열렸다. 철도를 이용한 귀성객은 1969년 60만5000여명이었으나 1970년에는 36만명 수준으로 줄었다. 귀성객들은 출발 간격이 짧고 정류장이 가까운 고속버스를 선호했다. 역 앞에서 펼쳐졌던 귀성길 혼잡은 고스란히 버스정류장으로 옮겨갔다. 고속버스가 입석 승객을 받는 위험천만한 일도 빈번했다.
고속버스로 승객이 분산된 데다 승차원 예매제도가 시작되면서 추석 당일 서울역 등 주요 기차역의 혼잡은 줄었다. 하지만 날짜가 옮겨졌을 뿐 매표소에 길게 늘어선 줄은 버스터미널과 기차역에서 여전했다. 1970년 9월12일 <매일경제>는 “추석을 사흘 앞둔 12일 서울역을 비롯한 시내 35개 열차표 매표소는 이날 낮부터 귀성객들로 붐비고 있으며, 이미 12일용의 호남선 특급열차 태극호와 백마호의 차표는 11일의 예매에서 매진됐다”고 전했다.
한꺼번에 몰린 귀성객들로 주차장이 된 1989년 경부고속도로 궁내동 톨게이트 모습. 연합뉴스
한꺼번에 몰린 귀성객들로 주차장이 된 1989년 경부고속도로 궁내동 톨게이트 모습. 연합뉴스
■ 1980년대 이후: 사라질뻔한 5일 연휴
1986년 추석 다음 날이, 1989년 추석 전날이 휴일로 지정되면서 지금과 같은 ‘3일 연휴’가 시작됐다. 길어진 휴일과 승용차 보급으로 명절 고속도로 혼잡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매표전쟁에 질린 시민들은 포니 엑셀, 프레스토, 르망, 프라이드 등 신형 국산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쏟아져 나왔다.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됐다. 마을로 묘지로 향하는 시골길도 마찬가지였다.
80년대의 성묫길 풍경. 연합뉴스
80년대의 성묫길 풍경. 연합뉴스
“붐비는 건 고속도로뿐이 아니었다. 인터체인지를 빠져 국도와 시골길을 거쳐 고향 마을에 들어서자 황토길에도 서울 넘버의 포니와 르망과 시골택시와 봉고차에 경운기까지 뒤엉켜 마을안길 역시 차량들로 어수선했다.-1986년 9월19일자 <동아일보> 5면 ‘고향찾는 마음’
승용차의 증가로 고속도로 정체가 절정에 이르면서 사람들은 막히지 않는 철도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PC통신’의 전성기인 1990년대 중반부터 역과 터미널 앞에 길게 늘어선 예매 줄이 모니터로 옮겨갔고, 혼잡을 피해 서울의 가족 친지를 찾는 ‘역귀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1984년 추석 연휴를 맞아 서울역에 몰린 귀성객들. 연합뉴스
1984년 추석 연휴를 맞아 서울역에 몰린 귀성객들. 연합뉴스
지금은 5일 연휴가 비교적 흔하지만, 1990년대 전까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공휴일 조정’을 구실로 추석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990년 8월24일 국무회의에서 국군의날과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내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정부는 일주일 만에 백기를 들었다. 5일 연휴가 ‘기사회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짧았던 일주일 동안 여행을 계획했다가 취소한 사람들도 있었다. 시민들은 정부의 오락가락 졸속행정에 분통을 터뜨기도 했다. 그해 유지됐던 국군의날과 한글날은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2017년. 역 앞에 늘어선 긴 줄은, 컴퓨터 화면을 거쳐 모바일로 들어왔다. 명절엔 반드시 고향을 찾아야 한다는 의식도 희미해지면서 3일 이상 연휴를 여행이나 긴 휴식으로 보내는 이들도 늘어났다. 올해는 ‘7일 연휴’도 아쉽다는 여론에, 정부가 10월2일 하루를 더 붙여 10일을 쉬기로 했다. 추석이 법정공휴일로 지정된 지 68년 만에 하루였던 휴가가 10일이 된 것이다. 5일 쉬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며 휴일의 허리를 자르고자 했던 과거 정부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세상이 바뀌었다. 다음번의 추석은 어떤 모습일까.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

일본의 조선학교 차별 4년 반...그 재판 결과는?


[기고] 전면승소와 최악의 부당판결: 판단이 갈라진 조선학교 '무상화'재판


일본정부가 교육의 기회균등을 목적으로 창설한 '고교무상화'제도의 적용 대상에서 일본 전역의 조선고급학교(10교) 학생만 제외한 것이 2013년2월. 그로부터 4년 반의 세월이 흘렀다. 

이 부당한 차별조치에 항의해 오사카, 아이치, 히로시마, 규슈, 도쿄의 조선고급학교 학생 또는 학교법인이 일본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일으켰다. 길고 힘든 재판투쟁 끝에, 올해 들어 히로시마, 오사카,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각기 판결이 선고되었다. 그 중 오사카의 판결(7월 28일)에서는 원고가 전면 승소하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뒀지만, 히로시마(7월 19일)와 도쿄(9월 13일)에서는 원고 패소라는 부당판결이 선고되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나는 일제 식민지시기를 중심으로 한 한국근현대사 연구자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 정책의 범죄성에 대해서는 숙지하고 있다. 또 재일조선인에게 대한 일본정부의 무자비한 탄압과 억압의 역사에 대해서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각지의 재판 진행과정과 결과를 지켜보면서, 일본국가가 바로 식민지주의적 가치판단의 기준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부정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의 인식이 부족했음을 통감하고 있다. 나는 민족차별 정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사법부가 민족교육의 의의를 처음으로 인정한 오사카지방재판소의 판결 의의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오사카의 판결(7월 28일)에서는 원고가 전면 승소했다.ⓒ후지나가 다케시
▲그러나 히로시마와 도쿄에서는 '최악의 부당 판결'이라는 평이 나왔다. ⓒ후지나가 다케시
무상화제도 적용을 막은 '불령선인(不逞鮮人)'관  

각지의 고교무상화 재판에서 피고인 일본국가가 주장하는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북한, 조선총련'의 '부당한 지배'를 받고 있다고 의혹이 있는 조선학교에 취학지원금을 지급하면 지원금이 '북한, 조선총련'에 유용될 의혹이 있으므로 조선고급학교를 지원금 지급 대상 학교로 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로시마와 도쿄의 판결은 둘 다 이 논리를 추인해 원고패소의 부당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국가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제2차 아베 신조(安倍晋三)정권은 발족 직후 우선 조선학교를 고교무상화 제도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조선고급학교의 지정을 염두에 둔 근거규정을 삭제하는 문부과학성령을 개악했다. 그 이유가 정치적 외교적 판단에 의한 것임은 너무나 명확하다. 예를 들면, 2012년 12월 28일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과학대신(당시)이 기자회견에서 "조선학교에 대해서는 납치문제의 진전이 없는 점, 조선총련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교육 내용, 인사, 재정에 그 영향이 미치고 있는 점 등으로, 현시점에서 지정에는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없어 불지정의 방향으로 수속을 진행한다"고 말한 것 등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부당한 지배'를 들고 나온 것은 정치적 외교적 이유에 의한 근거규정 삭제 조치가 교육의 기회 균등을 추구한 무상화 제도의 목적에 반하는 것임을 정부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나중에 덧붙여 억지로 꾸며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심리 과정에서 일본국가 측은 근거규정의 삭제가 쟁점화되는 것을 피하고자 대부분 소문에 지나지 않는 산케이신문의 보도나 공안조사청의 치안관리 정책 의의를 강조하는 보고서 등의 기술에 근거해, 조선학교의 교육이 조선총련의 '부당한 지배' 아래 실시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공안조사청 보고서에는 조선학교의 교직원과 학생, 일본인 지원자들이 고교무상화 적용을 호소하는 활동조차 조선총련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히로시마 및 도쿄 지방재판소는 이러한 공안기관의 편견적인 '분석'이 "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이며…… 일정한 조사, 분석 능력을 대비한 조직"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해 증거로 채용했다.  

이렇게 고교무상화제도 부적용이라는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정책을 정당화한 것은 그뿌리를 파고들면 실은 국가에 의한 치안관리의 사상이었다. 원래 이 재판은 교육행정의 본연의 자세를 둘러싼 것이었을 터인데, 일본국가 측이 재일조선인에 대한 치안대책이라는 논점으로 몰고가는 전략을 취했다. 결국 일본의 공안기관에 식민지시기부터 뿌리 깊게 자리잡은 '불령선인'관에 기초한 차별의식이, 조선고급학교에 대한 무상화 적용을 가로막는 벽으로 작용한 것이다.  

'짜고 친' 국책 판결  

물론 가령 '부당한 지배'이 논점이 되었다 하더라도, 조선학교가 취학지원금을 부정 수급할 "의혹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지정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히로시마와 도쿄의 지방재판소는 일본국가 측의 의도에 부응한 판결을 내렸다. 

특히 도쿄의 원고 변호인단은 조선고급학교가 무상화제도에서 배제된 과정을 면밀히 분석하고, 또 증인심문에서는 문부과학성의 당시 담당자에게 철저히 따져, 조선고급학교 지정의 근거규정을 삭제하고 불지정으로 정한 진짜 이유가 정치적 외교적 판단에 의한 것임을 논증했다. 조선고급학교에 대한 불지정이 위법임을 확실한 증거로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부당한 지배'론에 가담한 도쿄지방재판소는 치안정책적 관점에서 문부과학대신의 판단을 적법으로 인정하고, 정치적 외교적 판단에 의한 근거규정 삭제에 대해서는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판단할 필요가 없다"고 내쳤다. 원고 변호인단의 주된 주장을 무시하고 전혀 응답하지 않는 모욕적이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짜고 친' 판결이었던 것이다. 임기가 아직 남아있던 전 담당 재판관을 결심 직전에 교대시킨 이례적인 조치에 대해 의혹의 시선이 가는 것도 당연하다.  

한편, 도쿄 지방재판소의 경우는 문부과학대신의 판단을 "불합리한 것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며"라고 언급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는 보다 노골적으로 조선학원이 "취학지원금을 부풀려 대리 수령"할 경우 "부당한 공작 등에 의해" "그러한 사태가 표면화되지 못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는 피고 일본국가의 주장을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고까지 단언했다. 즉, 히로시마의 판결은 사실상 '조선인은 신용할 수 없기에 취학지원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판결이 있던 날 저녁에 열린 판결보고집회에서 아다치 슈이치(足立修一) 원고변호인 단장이 "조선학교 아이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헤이트(혐오) 판결"이라고 엄중히 지탄한 것도 당연하다 (히로시마 "헤이트 판결": 역전 승리를 맹세한 재출발의 날' <월간 이어> 제22권 제9호, 2017년 9월, 7쪽).

오사카 판결의 역사적 의의 

한편,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일본국가에 대해 오사카조선고급학교에 대한 취학지원금 지급에 관한 불지정 처분을 취소할 것, 이 학교를 취학지원금 지급 대상 학교로 지정할 것을 명하는 원고 전면승소의 판결을 내렸다. 쟁점이 된 조선고급학교 지정에 관한 근거규정 삭제에 대해서는 시모무라 문부과학대신이 재량권을 일탈 남용한 것으로 위법이며, 또 오사카조선고급학교는 적정한 학교 운영을 요구한 '규정' 제13조에 대해서도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부당한 지배'에 관한 일본국가 쪽의 주장을 물리치고 히로시마·도쿄 판결과는 정반대인, 역사에 기록될 만한 획기적인 판결이 선고된 것이다.  

판결에서는 시모무라 문부과학대신이 "교육의 기회균등의 확보와 관계없는 외교적 정치적 판단에 근거해" 근거규정을 삭제한 것은 고교무상화법에 정해진 위임의 취지를 일탈한 것이라고 명확히 인정했다. 또한 '규정' 제13조 적합성 판단, 특히 '부당한 지배'에 관한 판단에 대해 문부과학대신의 재량권은 인정받을 수 없고, 이 쟁점에 관한 일본국가의 주장의 대부분이 "합리적 근거에 기초하는 것으로서의 주장도 입증도 없다"는 등의 이유로 "본건은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판결은 조선학교와 조선총련과의 관계, 재일조선인에서 민족교육의 의의 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조선총련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우리나라(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자주적 민족교육이 수많은 곤란을 겪는 가운데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실시를 하나의 목적으로 결성되어 조선학교의 건설과 인허가 수속 등을 진행해 왔으며, 조선학교는 조선총련의 협력 아래 자주적 민족교육시설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기에 …… 이같은 역사적 사정 등에 비춰보면, 조선총련이 조선학교의 교육활동 또는 학교운영에 어떤 관련이 있다고 한들 양측의 관계가 우리나라(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의 유지 발전을 목적으로 한 협력관계일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양측의 관계가 적정하지 못하다고 바로 추인할 수는 없다. 또한 조선고급학교는 재일조선인 자녀에게 조선인으로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하나의 목적인 외국인학교인 바, …… 모국어와 모국의 역사 및 문화에 대한 교육은 민족교육에 있어 중요한 의의를 가지며, 민족적 자각 및 민족적 자존심을 양성하는 데 기본적인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고급학교가 조선어로 수업을 실시하고, 북조선의 시각에서 역사적, 사회적, 지리적 사정을 가르침과 동시에 북조선을 건국하고 현재까지 통치해 온 북조선의 지도자, 국가이념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조선고급학교의 앞의 교육목적 그 자체에는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에, 조선고급학교가 북조선이나 조선총련의 부당한 지배로 인해 자주성을 잃고 앞서 언급한 교육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바로 인정하기 어렵다."

이렇듯 오사카 지방재판소 판결은 일본 사법이 처음으로 조선학교의 민족교육 의의를 정면에서 인정한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재판투쟁  

히로시마와 도쿄의 판결은 행정부의 조선학교 차별정책을 사법부가 자신의 권위와 신뢰성을 해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잡한 논리로 추인한 것이었다. 우리가 이러한 부당판결을 용인한다면, 일본국가는 자의적으로 '반일' 딱지를 붙인 개인과 집단에 대해 마음놓고 차별 정책을 취할 것이다. 만약 제소를 당하더라도 사법부가 정당화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조선고급학교에 대한 무상화제도 부적용은 이미 민족차별이라는 틀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의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사법 독립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다. 부당판결을 내린 재판관은 마땅히 수치스러운 국책 판결의 장본인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오사카에서 획기적인 판결이 내려진 뒤라서 국가권력의 중심지인 수도 도쿄 지방재판소의 판결 내용은 한층 비정상적으로 비쳐졌다. 배외주의를 선동해 차별정책을 정당화하려는 일본국가의 의도는 이미 명백하다. 무상화 재판의 행방에 대한 일본사회의 관심은 그리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국지인 아사히신문 이외에 도쿄신문, 가나가와신문, 시나노일일신문, 교토신문 등의 지방지도 도쿄 판결의 부당성을 엄중히 비판하는 사설, 해설기사 등을 게재했다. 

히로시마에서는 8월1일에, 도쿄에서는 9월25일에 원고가 항소해 조선학교 관계자와 지원자들은 불굴한 투지로 역전 승소를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오사카 판결에 대해서는 8월 10일 일본국가가 항소해 국가측이 총력을 다해 공격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내년에는 아이치와 규슈에서 판결이 선고될 전망이다.  

투쟁은 이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홍익인간 실천하면 우리민족에게 평화 올 것”

민족종교.단체, 개천절 기념식 개최..남북해외 공동행사 불발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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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03  22: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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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민족종교협의회와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3일 광화문광장에서 ‘단기4350년 개천절 민족공동행사’를 개최했다. [사진제공 - 개천절준비위]
“조국통일의 주체는 전체 단군민족이며 온 민족이 힘을 합쳐 민족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한반도 방방곡곡에서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확립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와 300여 민족단체가 참가한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3일 정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전쟁반대! 평화가 답이다!’는 기치 아래 ‘단기4350년 개천절 민족공동행사’를 개최했다.
민족종교와 민족단체 소속 참가자들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 선의식’을 봉행한 뒤 기념식을 갖고 ‘남북·해외 8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남북·해외 온 겨레가 분단을 걷어치우고, 조국통일의 그날을 속히 앞당길 것을 단군민족의 이름으로 뜨겁게 호소한다”고 밝혔다.
주최측은 당초 평양 단군릉에서 남북해외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개천절 민족공동행사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남북관계 악화로 불발돼 북측은 평양 단군릉에서 별도의 천제와 기념식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해외 8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 역시 남북 간 협의가 진행되지 못해 남측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와 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의의 목소리만을 담았다.
참가자들은 도천수 공동대회장이 낭독한 호소문에서 “홍익정신으로 단군민족 본래의 모습을 찾고, 단군 민족의 저력을 배가시켜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갈 것을 호소한다”며 “홍익인간이라는 개천정신으로 동북아와 한반도 모두가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며, 한반도 통일을 방해하는 그 어떤 행위도 결단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일본의 집단자위권을 명백히 반대하고 역사왜곡과 독도침탈 책동에 대해 결단코 맞설 것이며, 동북아와 인류 전체의 평화와 공동이익, 발전을 위해 앞장설 것”이라고 일본과 대립각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개천절은 우리민족의 생명의 근원이며, 우리민족 건국의 기원”이라며 “민족의 분열을 타파하여 모든 대립과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관계를 민족공동의 이익에 맞게 확대발전시키고 자주통일, 평화번영의 길을 열어나가기 위해 적극 나설 것을 호소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한 이강산 한민족운동단체연합 공동대표가 낭독한 ‘개천선언문’을 통해 “우리민족의 원형질(D.N.A)인 3․1 독립정신, 8․15 단결정신, 홍익인간 정신이야말로 오늘날까지 민족의 3대 한민족의 정신문화”라며 “민족수난의 역사를 하나로 한 결 같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 오게 한 단군성조의 개천절 홍익인간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 하였던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이 혼불에 남과 북이 함께 되돌아가 민족의 숙원인 통일의 담론을 하나로 소통시키지 못할 일이 없다”고 강조했다.
  
▲ 이날 기념식에는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소속 민족종교 관계자와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 소속 300여개 민족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사진제공 - 개천절준비위]
앞서, 박우균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회장은 대회사 나서 “우리는 민족종교와 민족운동진영을 중심으로 지난 2002년, 2003년 그리고 2014년 평양 단군릉에서 남북이 하나되어 개천절민족공동행사를 개최해 왔다”며 “올해 개천절은 남북간의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사죄했다.
이어 “개천절을 계기로 남과 북은 무한정 대결을 지양하고 교류와 협력을 통한 평화의 새장을 열어가기 위해 남북이 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면서 “온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민족에게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은 기념사에서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은 바로 문화의 힘”이라며 “‘홍익인간’의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나아가 세계 정신문화를 선도한다는 자부심으로 오늘의 개천절을 기려주시기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윤승길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 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기념식에서 김영두 대종교 종무원장과 이범창 천도교 종무원장 등이 축사를 했고, 개천절 노래와 단군 경배.분향으로 마무리했다.
기념식에 앞서 강화도 참성단 마니산 천제를 지내는 항일운동의 총본산 대종교가 주관하여 천제 선의식을 봉행하고 기념식에 이어 이정희 문화위원장의 사회로 ‘개천절 민족화합대축제’를 같은 장소에서 진행했다.

<남북·해외 8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 (전문)>
오늘은 원시조 단군성조께서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하늘 이치로 이 땅과 인간을 깨우치시고 나라를 세우신 지 건국 4350년이 되는 뜻깊은 날입니다.
원시조 단군성조 이래 ‘우리는 하나’라는 정신은 민족 전체의 합의로 일구어낸 정신이기에, 그 어떤 정세의 변화에도 흔들림 없이 지켜나가야 할 통일의 기치이며, 종교와 이념, 지역과 계층을 떠나 모두 하나가 되어야 단군민족의 저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분단 72년인 금년 단기4350년(2017) 개천절을 맞아, 우리는 원시조 단군의 한 후손으로 하늘에 천제를 올리고 하나가 되어, 온 민족이 단합하여 거족적인 통일운동으로 조국통일을 이룸으로써 단군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담아 남과 북, 해외 8천만 온 겨레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첫째, 자주는 민족의 자존이며,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 존엄한 자주민족입니다.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단군민족의 자존으로 긍지와 자부심을 안고 자주통일의 길을 열어갈 것이며, 우리의 역사와 철학, 전통문화가 전 인류를 홍익인간으로 이끌어갈 인류의 문화유산임을 자각하고, 홍익정신으로 단군민족 본래의 모습을 찾고, 단군 민족의 저력을 배가시켜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갈 것을 호소합니다.
조국통일의 주체는 전체 단군민족이며 온 민족이 힘을 합쳐 민족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한반도 방방곡곡에서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확립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 겨레를 사랑하는 단군민족의 후손들인 우리들은 민족의 안녕과 이 땅의 평화번영을 지키기 위한 운동에 단합하여, 홍익인간이라는 개천정신으로 동북아와 한반도 모두가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며, 한반도 통일을 방해하는 그 어떤 행위도 결단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고대사에 대한 내외의 어떠한 왜곡도 막아내고, 특히 일본의 집단자위권을 명백히 반대하고 역사왜곡과 독도침탈 책동에 대해 결단코 맞설 것이며, 동북아와 인류 전체의 평화와 공동이익, 발전을 위해 앞장설 것입니다.
셋째, 단군민족이라면 남과 북, 해외 어디에 살건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남북관계 개선과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남북관계를 전진시키고, 공동선언을 계승, 실천하여 남북 화해와 협력을 더욱 강화함과 동시에 한겨레로서 동질성을 확인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잡아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대단합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자주, 자강, 자립의 정신과 원칙으로 민족의 분열을 타파하여 모든 대립과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관계를 민족공동의 이익에 맞게 확대발전시키고 자주통일, 평화번영의 길을 열어나가기 위해 적극 나설 것을 호소합니다.
개천절은 우리민족의 생명의 근원이며, 우리민족 건국의 기원입니다!
건국 반만년! 뜻깊은 단기4350년(2017) 개천절을 맞이하여, 우리 선조들이 발휘한 호국정신을 되새기며 경천·숭조·애인의 미덕을 이어받아 남과 북, 해외의 동포가 개천절의 큰 뜻으로 하나가 될 것을 호소합니다!
남북·해외 온 겨레가 분단을 걷어치우고, 조국통일의 그날을 속히 앞당길 것을 단군민족의 이름으로 뜨겁게 호소합니다! 단군민족 통일만세!
단기 4350년(2017) 10월 3일
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
개천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

2017년 10월 2일 월요일

청년의열단, 전쟁 주범 트럼프를 응징하다

청년의열단, 전쟁 주범 트럼프를 응징하다
대학생통신원
기사입력: 2017/10/03 [14:3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트럼프 참수작전을 진행하고 있는 청년의열단     ⓒ대학생통신원

전쟁을 반대하고 트럼프를 규탄하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높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지난 27일부터 29일 3일 동안 미국 대사관 앞에서 ‘청년의열단’이 전쟁막말을 일삼는 트럼프를 규탄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 가장 고통스럽다는 능지처참 벌을 내린 청년의열단     ⓒ 대학생통신원

▲ 한반도에 있어서는 안될 사드와 트럼프를 토르의 망치로 응징한 청년의열단     ⓒ 대학생통신원

이들은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쏟아내는 북에 대한 제재와 압박 발언, 한-미 연합훈련에서 공개적인 북한 지도부 참수작전 등이 한반도 전쟁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며 이를 규탄하며 ‘전쟁주범 트럼프 참수작전’ 이라는 행동을 했다.

▲ 한반도 화의 근원 트럼프의 입을 봉합하라!     ⓒ대학생통신원

▲ 한반도의 전쟁 위기를 몰고오는 트럼프의 온갖 발언들을 다시 트럼프 입으로 넣는 청년의열단     ⓒ 대학생통신원

▲ 트럼프의 입을 봉해버린 청년의열단     ⓒ대학생통신원

이 청년들은 트럼프 대통령 입 봉합작전,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트럼프 대통령 막말과 함께 사진 불태우기, 장난감 말로 사진 능지처참 등 3일간 다양한 방식으로 '참수작전’이라는 무거운 단어와 상반되게 밝고 유쾌한 분위기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입 봉합작전을 펼친 이나현 씨는 “미국은 철저하게 자기네 나라의 이익만 지키며 우리의 주권을 해치고 있다”며 “한반도에 전쟁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고 퍼포먼스에 참가한 이유를 밝혔다. 특히 이 씨는 “(트럼프대통령이) 수 천명이 죽어도 한반도에서 죽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전쟁에 대한 공포가 극대화 됐다”며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대화를 통한 평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들의 주장은 동일하다.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주범이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 라는 것.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고통 받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인데 미국 대통령이 전쟁의 결정권을 쥐고 한반도의 상황을 쥐고 흔드는 상황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분노를 표출했다.

▲ 트럼프에게 화염과 분노를 보여주기 위해 돋보기를 준비한 청년의열단     ⓒ대학생통신원

▲ 함부로 화염과 분노를 내뱉으면 이렇게 응징할꺼야!     ⓒ 대학생통신원

▲ 트위터 더 못하게 손에도 응징! 함부로 말 못하게 입에도 응징하는 청년의열단     ⓒ 대학생통신원

▲ 트럼프의 최후     ⓒ대학생통신원

또 다른 참가자 유승우 씨는 “대화만이 현재 전쟁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며 “남과 북이 자주적으로 협상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청년들은 앞으로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는 트럼프 대통령을 규탄하고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칠 예정이다.

이 청년들이 진행한 트럼프 참수작전 영상은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1. https://youtu.be/ISP-8n0aijg 참수작전 1
2. https://youtu.be/8DbLg0nEiPg 참수작전 2
3. https://youtu.be/7qwh_9yQ4kQ 참수작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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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일 일요일

국민 77.9% “검찰, 이명박 전 대통령 수사해야”


경향신문 여론조사… “MB국정원 ‘블랙리스트’ 사건 수사 정당” 70,7%
▲사진 : 뉴시스
국민 10명 가운데 7명은 검찰의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수사가 ‘정당한 수사이며, 규명해야 한다’고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국민 10명 가운데 8명 가까이(77.9%)는 검찰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수사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는 경향신문이 지난달 29~30일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2일 발표한 ‘문재인 정부가 진행 중인 국정원의 블랙리스트 등 과거 사건 재조사’에 관한 국민인식 조사결과에서 나타났다.
즉 70.7%가 ‘규명해야 할 사건에 대한 정당한 수사’라고 답했다. ‘과거 정권을 겨냥한 정치보복 성격’이란 응답은 27.4%에 그쳤다.
모든 지역에서 ‘규명해야 할 사건·정당한 수사’라는 응답 비율이 높았다. ‘정치보복 성격’(42.0%)이란 응답이 가장 높았던 대구·경북에서도 ‘정당한 수사’(55.6%)란 반응이 더 많았다. 연령대에선 60세 이상을 뺀 20대~50대에서 ‘규명 필요·정당한 수사’란 답변이 더 많았다. 60대 이상에서도 ‘정치보복 성격’(48.4%)과 ‘정당한 수사’(47.9%) 응답은 엇비슷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의 선거 개입·블랙리스트 등과 관련해 “검찰이 이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77.9%가 ‘수사해야 한다’고 답했다. ‘수사해서는 안 된다’(18.5%)는 응답자의 4배 이상이 이명박 전 대통령 수사 필요성에 공감한 것이다. 전 연령대, 전 지역에서 마찬가지였다. 60세 이상(55.2%)부터 30대(93%), 대구·경북(72.5%)부터 광주·전라(90.7%)까지 골고루 ‘수사해야 한다’는 응답이 많았다.
한편,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및 부정부패 척결’에 대한 평가엔 69.9%가 ‘잘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의 과거 사건 조사에 대해 ‘규명 필요·정당한 수사’라는 응답 70.7%와 비슷한 수치이다.
‘이 전 대통령을 수사해야 한다’는 비율은 이보다 7.2~8.0%p 높게 나타났다. 현 정부의 적폐청산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응답자의 일부도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 필요성에 공감한다는 뜻이라고 경향신문은 해석된다.
이번 여론조사는 지난달 29~30일 이틀 동안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구조화된 설문지를 이용, 임의전화걸기(유선전화 230명, 무선전화 770명) 방식으로 진행됐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응답률은 12.7%이다. 세부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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