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 방승주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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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일 일요일
2025년 3월 1일 토요일
삼일절 광장에서 뭉친 야 5당 “내란세력 확실히 제압하자”
야 5당 대표들 “윤석열 파면 넘어 내란 종식까지 함께해야” 한목소리
- 남소연 기자 nsy@vop.co.kr
- 발행 2025-03-01 18:19:27

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진보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은 이날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거리에서 ‘윤석열 파면 촉구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극우화된 국민의힘을 비롯해 내란 동조 세력을 직격했다. 이 대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주권자 국민을 배반하고 민주공화국의 기본 질서와 가치를 부정하며 내란 반동에 동조하는 사람과 세력이 있다”며 “보수는 지켜야 할 가치와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헌정질서와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건 결코 보수일 수 없다. 수구조차도 못 되는 반동일 뿐”이라고 날을 세웠다.
이 대표는 “보수의 탈을 쓴 채 헌법과 법치를 파괴하는 이들을 넘어서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며 “아직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 빛의 혁명도 완성되지 않았다. 함께 손잡고 106년 전 이날 선대들이 외쳤던 것처럼 상식과 도의를 복구하자”고 말했다.
조국혁신당 김선민 대표 권한대행도 “윤석열과 그 일당이 제대로 된 보수인가. 국민의힘이 제대로 된 보수인가”라며 “이들은 탄핵 반대를 외치지만 이제 멀지 않았다. 윤석열은 반드시 파면 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김 대행은 윤 대통령의 파면을 끝이 아닌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내란 세력을 위축시킬 수 있는 ‘압도적인 승리’를 강조했다. 김 대행은 “내란세력을 제외한 모든 정당과 시민사회가 단단히 연합해 압도적인 승리로 집권해야 한다”며 “혁신당은 다가올 대선에서 정권교체의 쇄빙선이 되겠다. 우리 모두 함께하는 압도적 승리의 정권교체를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밝혔다.
진보당 김재연 상임대표 역시 내란세력에 맞선 민주진보세력의 연대를 강조했다. 김 대표는 “윤석열이 진짜 걱정하는 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단결하는 것이다. 내란 세력은 간첩을, 중국을, 북한을 입에 달고 살며 국민이 서로를 의심하며 분열하기를 바란다”며 “우리는 저들이 바라는 것에 반대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란세력, 헌정질서 파괴 세력에 맞서 다같이 단결하자. 더 크고 단단한 연대와 연합을 구축하자”고 당부했다.
김 대표는 “우리는 내란으로 시작된 혼란이 일시적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아주 길게 이어질 것인가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며 “윤석열 파면 이후로도 준동을 멈추지 않을 극우 정치를 확실하게 제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역사를 전두환, 아니 박정희 유신 시절까지 후퇴시킬 수 없다. 야당 정치인을 잡아 가두고 노동자 농민을 때려잡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남북 간 대결을 끌어올려 정권의 유지 수단으로 삼던 시대로 향해선 안 된다”며 “극우정치 집단에게 한국 정치의 운동장을 단 한 뼘도 허락할 수 없다. 국민을 향해 협박을 일삼고 헌정질서를 파괴하려는 국민의힘을 이제는 해체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대표는 “우리 역사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시민학살을 국민에 대한 폭압이자 반란죄로 정의했기 때문에 민주공화국의 시간은 다시 흘러갈 수 있었다. 우리 역시 내란 세력 책임자 모두를 진정으로 발본색원하고 처벌해서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자”라며 “그렇기에 우리는 윤석열 한 사람 파면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내란 사전 모의에 누가 얼마나 가담했는지, 알고도 묵인한 게 아닌지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사회민주당 한창민 대표도 “다시는 그 누구도 쿠데타, 내란을 일으킬 수 없는 나라를 만드는 길, 우리 민주주의와 법 제도를 더욱 단단하게 하는 길, 그 길로 우리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2025년 2월 28일 금요일
한국 극우 기독교의 뿌리, 이승만을 캔다
이승만 독립운동 노선은 ‘외교독립론’ 그의 지지세력은 친일 했다가 해방 후 또 친미 변신 미군정 때 “기독교 중심 사회로의 급속한 전환” 기독교계, 이승만 정권 탄생과 유지에 깊숙이 간여 이승만 몰락 후 사회적 불신과 지탄의 대상 돼 5.16 쿠데타가 되살린 ‘기독교 국가 건설 원형적 가치’ “고려는 불교, 조선은 유교, 한국은 기독교로 망한다”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전광훈 방치 개신교 신뢰도 21%, 지금 아니면 공멸 못 면한다 |
청년 대중 스타, 옥중에서 기독교 수용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연사로 나섬으로써 대중적 스타가 되었지요. 그는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역모사건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권총 탈옥을 시도했다가 붙잡혀 탈옥미수죄로 감옥생활을 했는데요, 그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감옥 안에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도서관과 학교를 운영하였고 신문 기고와 번역서 발간도 가능했어요. 원고 집필도 할 수 있어 그의 대표 저작인 『독립정신』도 감옥에서 집필한 것입니다. 그는 1899년경에 기독교를 받아들였어요.
『독립정신』에서 그는 서구열강의 정치제도를 수용하고 친밀한 외교를 주장했습니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일 것을 역설한 이유는, 서양 국가들이 부강한 이유를 기독교에서 찾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그에게 제국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었습니다.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이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서 일제 침략을 옹호해 왔던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이승만에게 법정 통역을 요청했으나,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의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어요. 오히려 그는 현지 한글신문이었던 <공립신보>에 기고하여, “감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오히려 서구 국가를 적으로 돌리게 되어 그들이 일본과 더더욱 밀착해 일본을 도우는 꼴이며, 독립에 도움은커녕 해악이 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무장투쟁 기피하고 외교독립론 주장한 이승만
그는 졸업 후 1910년에 귀국하여 YMCA에서 교육 활동을 하다가, 1912년 세계감리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는데요, 하와이에서 『한국교회핍박』을 발표하여 일본에 대한 의열투쟁과 군사적 행동을 비판하면서 기독교를 통한 외교독립론을 주장했어요.
1925년 이승만의 국내 지지자들은 흥업구락부를 창립해서 일제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 농촌사업을 진행했습니다. 1938년 흥업구락부는 대규모로 구속되어 해체되었는데, 검거된 회원들은 전향한 뒤 일제에 협력하였고, 단체의 모든 자산을 국방헌금으로 납부했어요.
미국 공격하던 친일 기독교, 해방 후 친미로 변신
그 후 신흥우의 주도로 「적극신앙단」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들은 히틀러의 영향을 받아 미국식 민주주의와 고전적 자본주의 및 공산주의를 비판하였어요. 「적극신앙단」은 전체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의 이념적 좌표는 국가사회주의, 즉 파시즘이었습니다.
미국 유학을 거친 ‘친미파’ 상당수가 반미파, 곧 친일파로 변신하여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라고 규정하고 백인사회와 선교사들의 인종차별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대동아전쟁’은 동양인의 생존권과 자위권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의 전쟁으로 규정되었어요.
해방이 되자 일본의 편에서 미국을 저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미국인과의 네트워크가 강력한 사회적 자본으로 급변하여 미군정의 특권적 일부로 편입되었습니다. “친미적이면서 반공적인 세력의 발견과 육성”이 필수적인 과제인 미군정과 자연스럽게 융합되었어요.
한국 기독교는 미군정을 지지했고, 가장 보수적인 이승만 진영을 압도적으로 응원했습니다. 좌익 세력과 무력충돌까지 서슴지 않았지요.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었던 서북청년단이 가장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미군정과 정권 지원 아래 급속히 팽창한 개신교 점유율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 시기에 한국 기독교는 많은 후원과 특혜를 받았어요. ‘사실상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했고, 자유당은 ‘기독교 정당’으로 통념화 되었습니다. 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 중에 개신교 신자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지요.
기독교를 나라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를 요청했어요. 미군정하에서 공휴일로 지내던 성탄절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그대로 공휴일로 인정했습니다.
정치지형 변동의 종교적 결과로 “개신교의 급팽창”과 “종교시장 내 개신교의 점유율 확대”가 나타났지요. 1945년 당시 15만이 안되던 신자 수가, 1955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여 불교에 이어 제2의 교세를 가진 종교로 급성장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KNCC)는 2대 대선에서 이승만 지지운동을 벌였습니다. “기독교계의 요청을 수용하여 국기경례를 주목례로 대신하도록 고쳤고, 군목제도를 설치했으며, 국가의식을 기독교식으로 지령하였다”고 설명했습니다.
1952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무소속 함태영 목사가 당선되었고 이기붕이 자유당의 제2인자로 떠올랐는데요. 개신교 인맥이 핵심 실세를 이루면서, 자유당의 지도자들 모두 개신교 신자들로 채웠습니다. 배은희는 장로교 목사, 이승만은 감리교 장로, 이기붕은 감리교 권사였어요.
국가의 제도와 행사, 물적 자산 배분을 기독교 중심으로
1954년 12월 기독교방송이 개국했는데,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높이고 교세를 신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와 천주교만의 참여로, 1951년 초부터 군종제도가 시행에 들어갔지요. 오로지 개신교에만 허용된 형목제도는 타 종교의 참여가 봉쇄되었습니다. 국가적인 장례식도 개신교 방식으로 진행되었어요. 기독교계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도 “국군장병의 ‘위령제’를 ‘추도식’으로 개칭할 것”, “‘충영탑’이란 명칭을 ‘기념탑’으로 변경할 것”, “‘33인 합동추념식’에서 ‘분향’을 실시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49년 당시 문교부 안호상 장관은 국기배례를 거부한 학생들에 대한 퇴학 처분을 옹호했어요. 개신교 측은 배례 방식이 ‘국기의 우상화’를 조장한다면서 변경을 요구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교회의 요구를 수용하였고, 문교장관을 기독교인으로 교체했어요.
1948년 제헌 선거일은 원래 일요일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교회는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결국 선거일은 일요일을 피해 5월 10일로 결정된 것이었어요. 1949년 이승만 정부는 일요일과 겹친 ‘제헌절 1주년 기념식’을 월요일에 거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울러 개신교는 이승만의 물질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미국으로부터 달러화로 들어온 선교자금과 관련된 외환정책을 통해서, 그리고 귀속재산 혹은 적산의 처리ㆍ배분 과정에서 천리교 부지를 영락교회를 비롯한 개신교회들이 차지하는 혜택을 입었지요.
국민들 죽어가는데, 독재자 송축한 기독교계
이승만 정부하에서 교회와 신자들은 권력자와 과도하게 일체화되었습니다. 교회는 온갖 영예를 받았고, 신자들에게도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자부심의 원천이었어요. 한국 사회 내의 지배적 종교의 하나로 확고한 위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토록 강성하던 이승만 정권이 4.19 혁명으로 붕괴위기에 직면하자, 교회는 이승만에 대한 동정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 하락과 그에 따른 신자 증가율의 하락으로 나타났어요. 독재와 부패에 대한 개신교의 공동 책임을 추궁 당했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살아있는 권력자의 동상이 남산공원에 있었어요. 25미터에 달하는 당시 세계 최대의 동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쫓겨나자, 동상은 끌어내려졌고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개신교계는 이승만의 개인 우상화 시도에 대해서 어떠한 비판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똑같은 개신교인였던 조병옥이 4대 대선에 나서자 “이 박사와 겨루는 것은 곧 하나님과 겨루는 것과 같다”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백만 기독교도는 강하고 담대한 사람 장로 이승만과 착하고 진실한 사람 권사 이기붕을 세우자“고 선거운동을 벌였어요.
개신교계는 자유당 후보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을 독려했고 부정선거 규탄시위의 원인을 ‘하루하루 첨예화해 가는 정당 싸움의 결과’로 분석했습니다. 심지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던 4.19혁명이 일어난 후인 4월 22일에조차, KNCC는 이승만의 “건강을 송축”했어요.
오늘날 광장의 성조기로 되살아난 이승만의 기독교 국가
4월 혁명은 한국 기독교에 중요한 변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려는 불교로, 조선은 유교로, 또 대한민국은 기독교로 망한다’는 말까지 돌았어요. 당시 개신교회의 모습은 ‘푸줏간에 끌려가는 송아지 모양으로 민중의 심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팎으로 정화와 혁신의 요구가 분출되었고. 새로운 정교 관계의 윤리를 토대로 갱신, 혁신될 것이 요청되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다시 권력과 손을 잡았어요. 결국 한국 개신교가 권력과의 유착을 끊고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잃었어요.
이승만이 만들었던 반공과 친미를 통한 기독교 국가의 건설이라는 틀은, 한국 교회의 원형적 가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미동맹은 신앙만큼이나 절대적인 가치를 이루었어요. 오늘날 극우 집회에서 태극기와 함께 미국의 성조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한국 교회는 윤석열 정권 아래서 이승만 정권 당시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과오를 범했어요. 무속에 의지하는 윤석열 부부를 치하하고 축복하며 지지했습니다. 국가조찬기도회를 개최해서 격려했고, 윤석열이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열렬히 환대해 주었어요.
오늘날 전광훈-손현보로 대표되는 극우 기독교가 한국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칭송하며 기념관을 건립하고 다큐 영화제작을 후원하고 있어요. 그리고 마치 한국 사회를 이승만 시대로 회귀시키려는 시대착오적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목사
지난 2019년 전광훈은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했습니다. 2021년에는 “하나님 사표 내고 나랑 바꾸자”라는 등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했는데도 한국교회는 전광훈을 방치했어요. 그 결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키웠고, 마침내 법원 폭동 사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현재 전광훈-손현보로 과잉 대표되고 있는 한국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는 21%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뒤늦게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이번 기회에 정리가 되지 못하면 개신교 전체의 공멸로 이어질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