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복기(復棋)
(키톨릭뉴스 지금여기 / 2024-06-21)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렸던 북미 정상회담은 북핵 문제 해결과 북미 관계 정상화 등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여정에서 분수령이었다. 하노이 회담이 노딜(no deal)로 끝나면서 북미 협상은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후 북미 관계·남북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게 되며 지금 한반도는 전쟁의 위기를 넘나들고 있다. 당시 하노이 회담의 결렬 원인을 두고 숱한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해소되지 않았다. 하노이 회담은 왜 결렬된 걸까? 영변 핵 단지의 영구적 폐기와 핵무기 연구소 폐기 등 북한의 대담한 양보 제안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왜 노딜을 선택한 걸까? 당시 문재인 정부는 북미 회담 타결을 위해 좀 더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할 수는 없었던 걸까? 지난 5월 출간한 문재인 대통령의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는 이런 궁금증을 다루고 있다.
하노이 회담의 결렬 경과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은 8개월 전 싱가포르에서 열렸던 1차 북미정상회담의 ①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②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③ 북한 비핵화 등 원론적 합의를 구체화시키는 협상이었다. 북한의 비핵화와 그에 따른 단계별 보상을 미국이 약속하고 이에 대한 로드맵만 만들면 되는 회담이었다. 이미 북한은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유예,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를 선제적으로 단행하고, 추가로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폐기, 영변 핵단지 영구 폐기, 핵무기 연구소 폐기 등을 제시한 상태였다. 미국의 대북정책특별대표인 스티븐 비건 또한 회담 전 스탠퍼드대학 연설을 통해 북한 비핵화와 그 보상이 단계적 · 동시병행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회담의 타결 전망은 밝았다. 그런데도 미국은 북한의 제의를 거부하고 회담을 결렬시켰다.
왜 미국은 회담을 결렬시킨 걸까? 당시 추정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 정치를 의식해 노딜을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협상 중 마이클 코언 청문회가 열리며 트럼프 탄핵을 추진했는데, 그 상황에서 북한에게 양보한 것처럼 보이는 합의를 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북한이 요구했던 민생 관련 제재 완화도 미국 협상팀은 작은 구멍이 전체 댐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전면적 제재 해체로 연결될 것으로 인식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트럼프는 통화에서 자신은 북한의 제안을 수용할 생각이 있었는데,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아주 강하게 반대했고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여기에 동조해 어쩔 수 없이 노딜을 선택했다고 한다. 아마 트럼프는 다음에 다시 기회가 있을 것이고 그때 더 유리한 거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후 미국이 대선 국면에 들어서고 또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 다시 기회가 오지 않았다는 게 문 대통령의 추정이다.
미국 내 최고의 북한핵 전문가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의 분석으로는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의 협상팀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북한이 제안한 영변 핵 단지의 불가역적 폐기와 핵무기 연구소의 완전 폐쇄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에 비해 훨씬 확장되고 현대화된 영변 핵 단지의 폐기와 북한 핵 프로그램의 두뇌에 해당하는 핵무기 연구소 폐쇄는 북한 핵 프로그램의 궁극적 종식을 뜻하는 것인데 이를 몰랐던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 북한 비핵화 로드맵에 대한 체계적 정리는 비건 대표 때 비로소 이루어졌는데, 그 구상마저 폼페이오나 볼턴과는 공유하지 못했다.
“변방에서 중심으로-문재인 회고록 : 외교안보 편”, 문재인, 김영사, 2024. (이미지 출처 = 김영사)
하노이 회담 타결을 가로막은 사람들
볼턴 회고록이나 헤커의 책을 보면 하노이 회담의 실패는 존 볼턴으로 대표되는 네오콘들의 발목 잡기를 트럼프 대통령이 넘어서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볼턴은 처음부터 협상판을 깨려는 의도를 갖고 북한에 핵·화학·생물 무기 프로그램과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신고를 요구함으로써 회담을 결렬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종전 선언’에 대해서도 종전을 선언하게 되면 유엔사를 해체해야 되고,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는 주장을 펼쳤고 이것이 계속 트럼프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다.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종전 선언에 대한 대가로 북한에 핵 리스트를 제출하라고 요구해 북미 간 실무 협상을 경색시켰다. 펜스 부통령 또한 북한 비핵화가 ‘리비아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해 북한 반발로 인해 한때 싱가포르 회담이 취소되었다. 리비아 모델이란 핵무기·핵 물질·핵 시설 등을 먼저 폐기하면 그 후에 국제 사회가 보상하는 것으로서 북한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 방식이다.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은 이 모델을 따라 비핵화를 추진했다가 2011년 10월 내전에서 반군에게 사살되었다.
일본의 아베 총리도 끊임없이 북미 협상 타결을 방해했다. 아베는 북한에게 단거리 탄도미사일과 생화학 무기까지 포함한 핵 신고 리스트를 요구해야 한다며, 완전히 비핵화될 때까지 대북 제재를 완화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또 2017년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는 한국 내 일본인들을 철수시키는 훈련을 하겠다며 위기를 증폭시켰으며, 한반도 영역에서 한미 연합 훈련에 더해 일본도 참여하는 3국 연합 훈련을 하자고 미국에 요청했다. 심지어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올림픽 때문에 한미 군사 훈련을 연기해선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노이 회담 복기의 중요성
1994년 북미 제네바 협정에 관여했고,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 잡지 <38 노스>를 공동 설립한 조엘 위트는 지금 한반도 정세가 탈냉전 이후 지난 30년 사이에 가장 나쁜 상황이라고 한다. 북한은 그간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가장 중요한 외교 정책으로 삼아 왔는데, 지정학적 변화로 인해 지금은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담대해져야 한다며 미국이 먼저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 제재 해제, 한미 연합 군사 훈련 중단 등을 선제적으로 선언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미국은 절박하지 않다. 북한이 몇십 개의 핵무기를 보유한다고 해서 미국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북핵으로 인해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등 국제적 비확산 질서가 무너지는데도 바이든 행정부는 북핵 문제는 뒷전에 둔 채 눈앞의 자국 이익 확보에만 골몰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이 남의 손에서 결정되고 좌우되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남북이 먼저 행동으로 치고 나가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전쟁의 당사자가 남과 북이기 때문에 남북 간에 종전 선언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향후 언젠가 들어설 평화 정부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자율적 영역과 중재 영역의 최대치에 대해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노이 회담에 대한 철저한 복기가 필요하다.
백장현
정치학 박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장
저서 “통일코리아 가는길”, “북핵해법”
* 제휴매체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1일 자 에 실린 글 입니다.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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