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팟 인터뷰] 짜빈동 전투 참전 무공훈장 수훈자 김영만 해병이 '특검' 외치는 까닭
"베트남에 처음 도착했을 때 들은 얘기 중에 하나가 '만약 너희들이 부상을 입게 되면, 반드시 다낭의 미 해군병원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이었다. 당시엔 심한 부상을 입어도 미 해군병원으로 가기만 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는 얘기들이 있었다. 내 지휘관은 그 약속을 지켰다. 전투 현장에서 부상당한 나를 헬리콥터에 실어서 거기로 보내줬다.
또 '전투에서 죽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시신을 찾아 고향 땅에 묻어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해병대는 절대로 전우의 시신을 적진에 남겨두지 않았다. 동료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가 베트콩의 매복에 걸려 더 많은 해병이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해병대는 그렇게 했다. 이런 믿음도 없다면 어떻게 전쟁을 치를 수 있었겠나."
전화기 속 노병의 목소리는 아직도 카랑카랑했다. 김영만(79) 열린사회희망연대 고문은 예비역 해병(병165기)으로 1966년 말 베트남에 파병됐다. 이듬해 2월 김 고문은 베트남 쾅나이성 손틴군 짜빈동 인근 고지에서 벌어진 짜빈동 전투에 참전했다. 대한민국 해병대 7대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전투는 고립된 1개 중대 규모의 해병대가 2개 연대(자료에 따라 상이)의 북베트남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다.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김 고문은 다낭의 미 해군병원으로 후송돼 긴급 수술을 받은 다음 귀국해 진해 해군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전역했다. 전투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베트남전 파병 해병대원, 무공훈장 수훈자인 김 고문은 지난 2일 창원마산에서 열린 '6월 민주항쟁 37주년 기념 만날고개 걷기대회'에 참석했다(관련 기사: "윤석열, 국민 앞에 영원히 '안 보'이게 하는 게 안보").
빨간색 팔각모와 해병대 티셔츠를 입고 행사에 참가한 김씨의 등 뒤에는 "채 해병 특검 거부하는 윤석열 퇴진 국힘당 해체"라는 구호가 쓰인 천이 붙어 있었다. 그 사연이 궁금했다. 연락처를 수소문해 지난 3일 밤 김 고문과 전화로 인터뷰했다. 다음은 김 고문과 나눈 이야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한 것.
전쟁 직접 겪은 해병의 이야기
- 짜빈동 전투에 참전하신 걸로 안다. 기록을 찾아보니 이 전투는 해병2여단 3대대 11중대를 주축으로 치렀다고 나와 있던데 당시 소속은.
"난 '열한중대'(김 고문은 11중대를 열한중대로 읽었다) 소속은 아니고 4.2인치 박격포를 운용하는 중포중대 요원이었는데, 열한중대에 배속돼 있다가 전투에 참전하게 됐다."
- 전투에서 부상도 당하셨다는데.
"관자놀이 있는 데서 코 안까지 파편이 박혔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헬리콥터를 타고 다낭 미 해군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았다. 보름 정도 해군병원에 있다가 비행기로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를 거쳐 다시 진해 해군병원으로 와 치료를 받았다. 부상 때문에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새끼손가락 하나도 입 속으로 집어넣지 못할 정도였다. 입 안에서는 계속 피비린내가 났다. 밥도 먹을 수 없어서 몇 달을 계란과 미숫가루로 연명했다."
- 치료는 제대로 받았나.
"입을 벌릴 수 없으니 군의관이 신경이 손상된 줄 알고 나보고 미국으로 보내서 치료를 받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분 나름대로는 내게 잘해주려고 했던 건데, 그런 중에 전역 날짜가 다가왔다. 동기들은 전역하는데, 나는 군 병원에 머물러 있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군의관을 찾아가서 통사정을 했다. '제발 전역만 시켜달라'고.
당시엔 몰랐는데, 요즘 말로 트라우마를 심하게 겪고 있었던 거 같다. 군의관은 상이등급 심사를 받고 전역하라고 했는데, 그 심사가 석 달에 한 번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군대를 벗어나고 싶어서,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서, 일단 나가서 심사를 받겠다고 하고는 전역했다. 동기들은 다 이미 전역을 한 뒤에 병원에서 전역증만 받아서 나왔다."
- 짜빈동 전투에서의 전공으로 무공훈장도 받았다고 들었다.
"전투가 끝나자 열한중대원 전원(병사)들이 1계급 특진됐고, 몇 사람에게는 훈장이 수여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에게도 화랑무공훈장이 상신됐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일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고 행정 처리가 늦었다. 그때는 훈장을 받지 못하고 전역했는데, 이후 2000년대 초반 수소문을 한 끝에 훈장증을 받을 수 있었다. 해병대사령부는 화재가 나서 당시 기록이 소실됐다고 했는데, 행정안전부를 통해 알아보니 훈장 수여기록이 나왔다."
- 시민운동, 반전평화운동에 투신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베트남에는 5개월 정도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전투가 엄청나게 많았다. 우리 해병대도 피해가 컸다. 많은 전우들이 부상당하고 전사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다. 내가 겪었던 가장 충격적인 일은 베트콩(베트남 민족해방전선) 혐의자를 처형했던 사건이었다.
나는 기초적인 베트남어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 하루는 보초가 나를 찾아와서 통역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떤 할머니가 찾아와 울면서 사정을 하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거다. 나가보니 할머니 한 분이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찾아와 자기 아들이 며칠 전에 여기 잡혀왔는데, 좀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몇 시간 전 그 아들은 나와 우리 부대원들이 이미 사살해서 땅에 묻어 버린 뒤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그 할머니 옆에 10살, 6살쯤 되는 여자아이 둘이 매달려서 같이 울고 있더라. 그 뒤에도 이때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이틀 뒤에 짜빈동 전투가 벌어졌다.
돌이켜보면 내 정신으로 살아온 것 같지 않더라. 군복도 싫고 전쟁영화도 차마 보지 못했다. 옆에서 폭탄이 터지고,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전우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어가고, 전쟁이 한순간에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광경을 직접 봤다. 거창하게 '반전운동', 이런 거보다는 '전쟁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몸소 깨닫게 됐다. 특히 전쟁을 쉽게 입에 올리는 인간들, 그런 집단을 보면 화가 치밀었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걸핏하면 전쟁을 들먹이더라. 이건 한참 잘못됐다. 전쟁은 하면 안 된다."
"채 상병 순직 책임 떠넘기고 거짓말까지... 해병대에선 상상도 못할 일"
- 뒤늦게 무공훈장을 신청한 이유가 있나.
"내가 살고 있는 창원마산 지역은 보수적인 지역이다. 시민운동을 하면서 나를 '빨갱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훈장 수여 기록을 수소문했다. 다행히 기록이 나와서 보훈지청에 가서 훈장을 달라고 신청을 했는데, 이미 '훈장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고, '필요하면 훈장 만드는데 가서 몇만 원 주면 다시 제작해서 받을 수 있다'고 안내하더라. 하여튼 이때부터 나를 빨갱이라고 욕하던 사람들은 거의 없어졌다."
- 지난 주말 '6월항쟁 37주년 걷기대회'에 참가해서 채 상병 특검법 통과를 주장했다.
"나는 한동안 해병대전우회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 베트남전에서의 기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해병대를 사랑한다. 내가 해병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돌이켜보면 베트남전에서 내 지휘관은 약속을 지켰다. 나를 헬리콥터에 실어 미 해군병원에 보내줘서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해병대는 절대로 전우의 시신을 적진에 남겨두지 않는다. 동료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가 베트콩의 매복에 걸려 더 많은 해병이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해병대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채 해병 사건에서는 어떠했나. 최고 지휘관인 사단장은 수색작업이 불가능하다는 보고가 있었는데도, 장병들의 안전과 생명을 고려치 않고 최소한의 안전 장비도 없이 무리한 수색을 지시했다. 그 결과 채 해병이 급류에 휩쓸려 숨진 것이다. 사고가 나니 모든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겨 버리고, 거짓말을 하고 이런 건 정말 군대, 특히 해병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것은 '내가 쓰러져도 지휘관은 끝까지 나를 살리려는 노력을 다 할 것이다' '혹여 목숨을 잃더라도 내 시신은 고향땅으로 가서 묻힐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이런 믿음이 모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기 위해선 명명백백하게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 그게 바로 특검이 필요한 이유다."
- 사건 자체도 문제지만, 대통령이 수사과정에 외압을 행사했다는 물증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대통령이 격노해서 이렇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솔직한 말로 군대도 안 갔다 온 대통령이 어떻게 함부로 사건에 개입할 수 있는가 생각한다. 국가안보를 제일 먼저 지켜야 할 사람이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아닌가.
그런데 중간에 개입을 해서 '사단장은 안 된다', 이런 식으로 빼라고 한다면 국군통수권자로서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주말 <오마이뉴스>에 '대한민국 안보를 제대로 지키려고 하면 먼저 윤 대통령이 안 보여야 한다. 이게 안보다'라고 인터뷰했다(관련 기사 보기)."
- 21대 국회에서는 끝내 채 상병 특검법안이 폐기됐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 보시는가.
"내가 해병대에서 배운 정신 중에 하나는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라'는 것이다. 계속 추진해야 한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요즘 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해병대 예비역연대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쪽 눈은 이미 실명 상태고, 나머지 눈도 사물이 어렴풋하게만 보인다. 혼자서 서울까지 올라가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보수적이어서 이런 목소리를 내기도 쉽지 않은데,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무엇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다 할 것이다."
[짜빈동 전투는]
짜빈동 전투는 베트남전에 파병된 해병대 2여단(청룡부대) 3대대 11중대가 1967년 2월 14일~15일 베트남 쾅나이성 손틴군 짜빈동 인근의 고지에서 북베트남 정규군 및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과 처절한 사투를 벌인 끝에 승리한 전투다.
11중대 진지는 남북 300m, 동서 200m 남짓의 나지막한 야산에 타원형으로 구축된 사주방어 진지였다. 북베트남군이 이곳을 기습한 것은 추라이 지역에 있던 청룡부대 포병대와 미 해병대 비행장을 공격하기 위한 것으로, 그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던 11중대 진지를 먼저 함락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북베트남 정규군 제2사단 제1연대와 21연대 및 지방 게릴라 1개대대가 14일 심야에 기습공격을 가해왔지만, 해병대원들은 전술기지에 구축한 교통호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쳤다.
한때 진지 일부가 돌파되어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해병대는 진내사격까지 고려해야 할 위급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지만, 결사의 각오로 싸웠고 기적처럼 승리했다. 날이 밝자 북베트남군은 전사자 243명, 2명의 포로를 남겨놓고 퇴각했다. 해병대는 전사 15명, 부상 33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제11중대는 이 전투로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했고‚ 장교를 제외한 중대원 전원이 일계급 특진했다.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이듬해인 1968년 11중대는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