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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6일 월요일

"떠올리고 싶지 않은..." 대전 골령골 학살 현장

"사람 죽이곤 발로 꽉꽉...그날 이후 한동안 밥 못먹어"

15.03.16 19:30l최종 업데이트 15.03.16 19:3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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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대전 골령골 첫 학살 현장에서 대한청년단원으로 구덩이를 파고 학살과정을 목격했다고 밝힌 A씨. 그가 14일 오후 현장을 방문해 당시 자신이 직접 판 구덩이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 심규상

"이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여기 도랑까지 핏물로 바닥이 뻘겋었다고 해. 얼마나 죽였길래..."

골령골로 접어드는 길머리인 산내초등학교 후문 앞(대전 동구 낭월동). A씨(82. 대전광역시 동구)가 혀를 차며 말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대전 골령골에서는 최대 약 7000여 명이 군경에 의해 살해됐다. A씨는 학살이 시작된 첫 날, 구덩이를 직접 파고, 시체가 쌓인 구덩이에 흙을 덮었다. 또 살해 현장을 목격했다. 당시 18살 때였다. 14일 오후 그는 자신이 겪은 65년 전 참혹한 현장 속으로 안내했다(관련기사 : 증언① "기자 양반이 봤다면 온정신으로 못 돌아다녔을겨").

1950년 여름 어느 날, 새벽 2시 "모여라"

1950년 여름 어느 날. 다급한 고함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2시쯤이었다. 대한청년단 마을 간부였다. 이 간부는 마을 대한청년단원이 있는 집을 일일이 돌며 괭이와 삽을 들고 모이라고 지시했다. 마을에서만 20명이 모였다. 다들 어디서 큰 사고가 나서 복구하러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대한청년단은?
대한청년단은 1948년 12월, 좌익계 청년단체에 맞서기 위해 결성된 우익청년단체였다. 출범 당시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을 절대 복종한다'는 선서문을 채택했다. 총재에 이승만, 최고 위원에 장택상, 유진산, 신성모 등을 추대, 200만 명에 달하는 단원을 규합했다.

A씨는 청년단 가입 동기에 대해 "당시 만 17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로 미뤄 A씨의 경우 충분한 설명 없이 반강제로 가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한편 대한청년단은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설치법'이 공포되면서 방위군으로 편입되었다. A씨도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돼 3개월동안 배를 곯고 구타를 당하며 고생했다고 한다. 
첫 집결지는 마을에서 1km 남짓 떨어진 당시 산내초등학교였다. 초등학교의 한 교실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대충 200여 명은 돼 보였다. 골령골 인근 여러 마을에서 온 대한청년단원들이었다. 

뜬눈으로 기다리는 사이 동이 터오르기 시작했다. A씨는 그때를 새벽 5시 쯤으로 추정했다. 청년단 간부들이 아무런 사전 설명도 없이 골령골로 데려 갔다. 골령골은 산내초등학교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길가에 앉으라고 하더니 높은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 조금 기다리니 트럭 몇 대가 왔어. 군인과 경찰들이 타고 왔는데 군인들은 군복 입고 권총을 차고 있더라구. 높은 사람들 같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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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오후 대전 산내유가족들이 유해를 수습하기 전 추모제를 지내고 이다. 앞쪽에 보이는 것이 희생자의 유해다.
ⓒ 모소영

"구덩이 파라!..군소리하면 '쏴 죽이겠다' 협박.."

동원된 청년단원들은 다시 인근 산 아래 고구마 밭으로 모였다. 몇몇 경찰들은 산등성이에서 경계를 섰다. 

"산밑 아래에 밭에 고구마  줄기(양손을 30∼40cm 사이로 벌려 보이며)가 이만큼 커 있었어. 한 경찰 경위가 인원을 조별로 나누고 각 조별로 고구마 밭을 폭과 깊이를 각각 6자씩(1m80cm, 약 2m) 파라고 지시했어. 3개조 씩 땅 파는데 투여됐어. 나머지 3개 조는 교대조로 편성해서 교대했어"

아침도 못 먹어 배가 고팠다. 아픈 사람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미친 듯이 구덩이를 팠다. 

"군인과 경찰들이 군소리를 하거나 제대로 일을 안 하면 가차 없이 쏴 죽이겠다고 했어.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될 만큼 구덩이를 잘 팠어. 안 그러면 죽인다니께……." 

아침 10시쯤 됐을까? '그만 파라'는 호령이 떨어졌다. 아침 6시가 좀 안 돼 땅을 파기 시작했으니까 약 4∼5시간 동안 쉬지 않고 구덩이를 팠다. 그가 판 구덩이 위치는 지난달 말 전국 시민사회단체가 자원봉사로 파헤친 구덩이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시민사회단체는 지난달 23일 부터 지난 1일까지 일주일동안 가로 6m X 세로 7m 정도의 구덩이에서 약 20구 정도의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시간과 경제적 여건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는 유해와 구덩이를 확인하고도 되묻어야 했다. 이 구덩이의 전체 길이는 얼마나 되는 걸까?

"그때 판 구덩이 길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에서 저기까지..? 아니 저기서 저기까지인가? 지형이 많이 바뀌어서 어디에서 어디까지 팠는지 잘 모르겠네. (비닐 막사를 가리키며) 저기까지인 것은 확실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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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대전 골령골 첫 학살 현장에서 대한청년단원으로 구덩이를 파고 학살과정을 목격했다고 밝힌 A씨. 그가 판 구덩이는 지난 달부터 지난 1일까지 전국 시민사회단체가 발굴한 유해가 묻힌 곳과 같은 곳(사진 왼쪽 소나무 부근)이다.
ⓒ 심규상

최근 시민사회 발굴한 구덩이와 같은 곳...길이만  30∼70미터

그가 가늠한 구덩이 길이는 최소 30m에서 최대 70m쯤 됐다. 군인과 경찰들이 청년단원들에게 구덩이를 판 옆 골짜기로 가라고 했다. 구덩이에서 불과 100여 m 쯤 떨어져 있는 골짜기다. 군인과 경찰들이 청년단원들에게 소리쳤다. 

"골짜기에서 내려오지 마라!.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보지도 마라!. 지시를 어기면 가만 안 두겠다"

황량한 산기슭에는 소나무가 겨우 사람 키보다 약간 더 큰 정도로 우거져 있었다. 때문에 일부러 보려하지 않아도 고개만 들면 아래 상황이 내려다 보였다.  

"트럭이 계속 들어왔어. 트럭에서 형무소 간수와 퍼런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내렸어. 죄수들은 두 사람씩 (양 팔목을 엇갈리게 해 보이며) 팔목을 묶어 놓았더라고. 대부분 죄수들인데 흰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여자들도 있었어. 민간인들은 모두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입고 있었어"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을 구덩이 쪽으로 향하게 쭉 세운 다음 다시 꿇어 앉혔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이날 끌려온 사람들이 대전형무소 죄수들 하고 전쟁 나고 서울쪽 형무소에서 풀려났던 죄수들이 다시 붙잡혀 온 거라고 하더라구. 보도연맹원들도 섞여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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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문과 함께 미육군정보부에 제출된 대전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
ⓒ 이도영 박사 제공

"3∼4시간 동안 총소리...핏물로 '질컥 질컥'..." 

곧이어 헌병대가 도열했다. "거∼총! 사격 개시!"  구령이 떨어지자 총을 쐈다. 거의 총구가 사람들의 뒷머리와 한 뼘 정도로 맞닿아 있었다. 손으로는 총을 쏘면서 동시에 발로는 사람들을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끌려온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는데 굉장했어. '나는 죄가 없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 '대한민국 만세!' 를 외치는 사람,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소리치는 사람….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골짜기가 뒤흔들렸지." 

희생자들을 실은 수십 대의 트럭이 길 가장자리를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트럭 한 대가 사람들을 내려놓고 빠지면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트럭이 들어섰다. 그렇게 총소리와 울부짖음이 이어졌다. 그러다 오후 1시 또는 2시 쯤 총소리가 멈췄다. 3∼4시간 동안 쉼 없이 총질을 한 것이다.

"각 동(마을)별로 2명씩 나오라고 해. 자기 동네로 가서 밥을 거둬오라는 거야. 군인과 경찰들은 자기들 먹을 걸 준비해 왔더라고. 동네에 가서 집집마다 돌며 우리네 먹을 걸 얻어다 지게다 짊어지고, 리어커에다 싣고 해서 가져왔지. 배는 고픈데 손이 벌벌 떨려서 밥을 못 먹겠더라고. 둘러 보니 다른 사람들도 죄 마찬가지야. 먹지를 못해."

이들에게 그 다음 주어진 일은 구덩이 앞에 쌓여 있는 흙으로 시신과 구덩이를 메우는 일이었다.

"말도 마. 파낸 흙을 구덩이 앞에 쌓아 놨었는데 가서 보니 흙이 전부 질컥질컥해. 장마철에 진흙길 걷는 것 마냥.. 비도 안 왔는데 왜 그런 줄 알아? 마른 흙이 피로 반죽이 돼서 그런 겨. 피 곤죽이 된 흙이 여기 무릎 아래까지 빠지더라고..아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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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일 시민사회단체가 발굴한 대전 골령골 현장 유해 중 일부. 6구정도의 유해가 엉켜 있어, 학살당시의 처참함을 보여준다. A씨는 이 곳이 자신이 판 구덩이와 같은 곳이라고 증언했다.
ⓒ 임재근

"가죽 장화 신은 경찰이 시체더미 밟고 꿈틀거리면 빵!빵!빵! 쐈어"

다시 정신없이 피 곤죽이 된 흙을 퍼다 구덩이 시신을 덮기 시작했다. A씨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가죽 장화를 신은 경찰(또는 군인)로 보이는 높은 놈이 구덩이에 들어가 시체더미를 발로 힘을 줘 꽉꽉 누르더라고. 그 때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소리를 내거나 꿈틀거리면 다시 시체 더미를 헤집고 권총을 빵빵빵 쐈어. 말도 마. 새우젓 담가 놓은 것하고 똑같았어."

일은 캄캄해서야 끝났다. 군인과 경찰들이 그때까지 미처 살해하지 못한 죄수들을 다시 트럭에 싣고 되돌아갔다. 

"그날 사람들을 트럭 40대에 싣고 왔는데 서른 트럭을 죽이고 열 트럭을 되싣고 갔다고 그랬어.  들은 얘긴데 그날 되돌아 가는 도중 트럭이 (길 아래쪽을 가리키며) 저기 오르막길에서 주춤하는 사이 죄수 한 명이 트럭에서 뛰어내려 도망갔다고 하대. 총을 쏘고 했는데 날이 어둡고 해 붙잡지 못했다고 했어. (도망간 사람은) 천운을 타고 난 게지."

그의 말대로라면 이 날만 최소 약 1000명(1트럭 당 30∼40명 추정) 남짓한 사람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전 구덩이를 판 흔적이 없는 것 등으로 미뤄 이 날을 골령골에서 첫 학살이 시작된 때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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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당시 촬영된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현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기억하고 싶지 않아.. 이런 난리 다시는 없어야 할 텐데..."

그는 그날 이후 두려움과 악몽으로 한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나마 나은 경우였지. 같은 마을에 사는 OO이라는 사람은 나보다 한살 더 많았는데 그 일로  놀래서  오랫동안 앓아 누웠어. 귀신이 붙었다고 무당 불러 푸닥거리를 하고 해서 겨우 살아났어"

그 날을 끝으로 그는 골령골 현장에 동원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의 골령골 소식이 전해져 왔다. 

"다음 날부터는 다른 동네 사람들이 구덩이를 파러 오고, 나중에는 청년방위대까지 동원돼 직접 구덩이 파고 총까지 쏘고 했다고 하더라구. 참 많이 죽였어. 그때 듣기로 한 20일 동안을 죽였다고 했으니께. 나중에 방위대원한테 시체 구덩이를 메울 새(시간)가 없어서 솔나무(소나무) 가지를 꺾어다 대충 덮고 말았다는 말도 들었어"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두 조르니 생각나는 그대로 얘기는 했지만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러고 보니 동네에서 구덩이 파러 갔던 사람들이 나이 먹어 다 죽고 나만 아직 살아 있네 그려. 이런 난리는 다시는 없어야 할 텐데…."
대전 산내 골령골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한국전쟁유족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4·9통일평화재단, 포럼진실과정의,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과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대책위원회'(대전지역 19개 시민사회단체)는 지난달 23일부터 3월 1일까지 7일간 일정으로 산내 골령골(대전시 동구 낭월동 산 13-1번지)에서 7일간 한국전쟁 관련 유해를 발굴했다.

이곳에서는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재소자를 대상으로 대량 학살(1차 : 6월 28~30일 1400명, 2차 : 7월 3~5일 1800명, 3차 : 7월 6~17일 1700~3700명)이 벌어졌다. 당시 희생자들은 충남지구 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됐다. 하지만 유해 대부분이 방치돼 훼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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