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영기 조지워싱턴대 명예교수
미국서 한국어·한국학 교육 60년
한국학 불모지서 첫 교육 시작해
대학 내 한국학연구소 설립 주도
이화여대에 ‘김·르노 인문과학 연구상’ 제정

김영기 조지워싱턴대 동아시아어문학과 명예교수. ⓒ이하나 기자
김영기 조지워싱턴대 동아시아어문학과 명예교수. ⓒ이하나 기자

‘한국어 전도사’ 김영기(83·사진) 조지워싱턴대 동아시아어문학과 명예교수가 미국에 한국어와 한국학을 전파한 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았다. 한국어 교육교재도 없던 1960년대 미국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그는 학문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한국학의 가치를 알리고 한국어를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섰다. 그가 처음 뿌리내린 한국어 교육은 현재 미국 전역에 퍼져 조지워싱턴대를 비롯해 85개 대학에 한국어가 정식 수강 과목으로 개설돼 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언어학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 1963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다음 해부터 버클리대 동양학과 조교 신분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정식 프로그램으로 마련된 한국어 수업이었어요. 당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은 8명이 전부였어요. 순수한 호기심으로 아무런 편견 없이 오직 호기심이 원동력이 되어,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하여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이 학생들에게 존경심이 저절로 생겼어요. 한국어 교과서도 없던 시절이라 학생들과 함께 연구하는 태도로 하나씩 쌓아갔습니다. 이러한 교육 방식은 나중에 좋은 교과서가 나왔을 때도 지키게 되었지요.”

미국 내 한국어와 한국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김 교수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국 학계에서도 동아시아를 알려면 중국, 일본과 함께 반드시 한국을 알아야 한다는 인식도 널리 퍼졌다. 지난 2008년 미 의회도서관이 독도 관련 주제어를 변경하려던 계획을 알아내 한국과 미국 사회에서 이슈화함으로써 이를 보류토록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며 ‘민간 외교관’ 역할도 했다.

김 교수는 1963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버클리대와 하와이주립대에서 언어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명문 조지워싱턴대에서 1983년부터 30년 넘게 동아시아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마지막 12년은 동양인으로, 여성으로 예외적으로 학과장을 네 번 역임했다. 한국학연구소 설립을 주도하는 등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해외 전파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국제 한국언어학회(International Circle of Korean Linguistics) 첫 여성 회장을 역임한 그는 『한국어 자음음운론』 『한글의 역사와 구조』 『15세기 한국의 빛 세종대왕』 『한국의 창조적인 여인들』 등 한국어와 한국 인문학에 관한 14권의 저서를 펴내며 우리말과 문화를 학문적으로, 교육적으로 세계에 알리는 데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공로로 2006년 한국 정부에서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현재도 조지워싱턴대 한국어문화 및 국제관계학 명예교수이자 한국학연구소 수석 고문을 맡고 있다.

미 연방정부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에서 언어학과 부 과장을 한국계로는 처음 역임했고, 국제 한국언어학회 학술지 ‘한국학(Korean Linguistics)’의 첫 여성 편집장을 지냈다. 김 교수는 2010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열린 일본/한국 언어학 학술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했고, 하버드대학, 서강대학, 남경대학 등에서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김 교수는 대하소설 『역사는 흐른다』를 펴낸 한무숙(1918~1993) 작가의 장녀다. 어린 시절 ‘명륜장’이라 불렸던 그의 집에는 다양한 인사들이 드나들었고 외국인들도 다수 포함됐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외교’를 옆에서 지켜봤던 그에게 한국을 알리는 일이 몸에 밴 것은 당연했다.

“명륜장에는 노벨상 수상자 소설가 펄 벅과 가와바타 야스나리, 존 업다이크를 비롯해 문화, 과학, 외교관, 경제계의 다양한 인사들이 오셨어요. 창조적인 분위기 속에서 ‘오픈 마인드’를 자연스럽게 배웠어요. 외국인들을 자주 만나며 주눅 들지 않고 우리가 가진 좋은 점을 널리 알리는 태도도 배웠지요.”

그는 미국 유학 시절 만난 프랑스인 경제학자 베르트 르노씨와 결혼했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날 참석했던 대학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친구로 지내다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김 교수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친 두 사람은 원치 않는 결별을 맞아야 했다. 거리를 두기 위해 프랑스 소르본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김 교수는 그곳에서 오히려 “새 세상을 만났다”고 했다.

“미국식 언어학만 공부하던 제가 그곳에서 불어와 유럽 언어학 이론을 공부하면서 다른 관점으로 언어를 바라볼 수 있게 됐어요. 한 달 반 만에 입이 트였어요. 새 세상이 열린 거죠. 가장 참혹하다고 생각했던 시기에 언어학자로서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된 겁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전화위복’이라는 사자성어가 일생의 모토가 됐지요.”

1년에 학위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운명적으로 남편을 만났고 결국 결혼에도 골인했다. 김 교수는 당시를 “삶에 대한 낙천적 태도를 배운 계기였다”고 회상했다.

이후 언어학자로서 한국어 프로그램도 꾸준히 이어갔다. 1980년대는 선교사나 국제결혼 자녀, 교포, 뜨문 뜨문 외교관과 군인 등 필요에 의해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언어로서 가치보다는 실용성에 초점이 맞춰진 교육이었다. 30여년이 흐른 지금 한국어와 한국학을 대하는 학생들과 연구자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한국어의 가치를 보고 배우려는 학생들이 점점 늘었어요. 학문으로 접근하는 연구자도 늘면서 동아시아과에서도 언어로서 정식 과목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요.”

김 교수는 방탄소년단, 오징어게임 등 K-문화의 확산과 삼성, 현대자동차 등 한국 제품의 인기는 “창조성을 추구하는 한국인이 만들어 낸 문화활동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교육의 힘이 결국 창조성을 불러온다”고도 했다.

최근 김 교수는 모교인 이화여대에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 연구와 후학 양성에 써달라며 1억원 이상(10만불)을 기부했다. 한국어와 한국학 등 인문학에 일생을 바쳐 연구를 해온 그가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 연구 발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에 이화여대는 김 교수의 헌신과 뜻을 기리기 위해 ‘김·르노(Kim·Renaud) 인문과학 연구상’을 신설, 매년 1회 우수한 연구자를 선정해 시상할 예정이다. 상의 이름은 김영기 교수의 남편인 프랑스 경제학자 베르트 르노(Bertrand Renaud)씨의 성인 ‘르노’와 한국 성 ‘김’을 합쳐 정해졌다. 제1회 김·르노 인문과학 연구상은 내년 이화여대에서 시상될 예정이다.

김 교수는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 연구 발전에 기여할 후학들에 대해 큰 기대를 드러냈다. “생각하지 못했던 분야와의 융합에 대한 인식과 그 수준이 더욱 높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연구를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이 상이 격려도 되고 경력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