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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5일 수요일

숫자가 보여주는 것들

 

  • 장창준 객원기자
  •  

  •  승인 2023.10.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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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레스타인 비극사 ②

    • 누구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라 하고, 누구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전쟁이라 한다. 또 누구는 ‘민주’ 이스라엘과 ‘테러’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은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이다. 7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독립전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억압사, 팔레스타인 비극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도와 숫자, 국제 협정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양한 명칭을 통해 팔레스타인 비극사를 정리한다.<편집자주>

    ① 지도가 보여주는 것들

    ② 숫자가 보여주는 것들

    ③ 국제 협정이 보여주는 것들

    ④ 명칭이 보여주는 것들

    6%의 땅에 살던 31%가 52%를 차지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지역 분할안을 제시했다. 아래 표는 팔레스타인 지역 인구 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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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의 비중은 31%였다. 이에 반해 소유하거나 정착하고 있던 땅 비율은 6%에 불과했다. 이는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상당히 많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했다. 둘째, 31%의 인구가 소유한 땅이 6%였으니, 유대인들이 거주한 지역은 극히 일부였다.

    그런데 유엔은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의 52%를 분배하는 안을 제시했다. 유엔은 애당초 편파적이었다. 유엔의 분할안은 공정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인근 아랍 국가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75만 명이 30%의 물을, 4만 5천 명이 70%의 물을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는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갔다. 1987년 가자지구에는 (조사 시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점령한 후 유대인을 이주시켜 이스라엘 정착촌을 확대해 갔다. 1987년 가자지구에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4만 5천 명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이스라엘 군대의 폭격으로 가자지구의 수도시설은 거의 파괴되었다. 가자지구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공급하는 물에 의존해야 했다.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가 사용하는 물의 30%을 75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공급했다. 나머지 70%의 물은 4만 5천 이스라엘 정착민들에게 주어졌다.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말려 죽이려’ 했다.

    분노에 차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봉기에 나섰다. 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1차 인티파다는 1987년에 시작되어 1993년까지 계속되었다. 1차 인티파다의 직접적 발단 계기는 이스라엘 탱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들이박아 4명이 즉사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것이었지만, 1967년 가자지구 점령 이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말려 죽이기’ 정책의 결과였다.

    미국, 점령지역 도로 건설에 1조 이상을 지원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평화 협상'을 중재했던 것은 미국. 그러나 이스라엘은 '평화 협상' 기간에도 정착촌을 늘렸다. 당시 총리였던 네타냐후(지금도 총리!)는 정착촌을 4배로 늘렸다. '평화 협상'의 중재자 미국은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대를 지원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있는 모든 정착촌을 도로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 도로 건설에 1조 원이 넘는 돈을 지원했다. 당시 미국이 팔레스타인에 지원한 액수는 50억이었다.

    7년에 걸친 '평화 협상'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표하여 PLO가 팔레스타인 측 대표로 참석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미국의 중재에 ‘고분고분한’ PLO에 조금씩 실망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50% 증가, 팔레스타인은 36% 감소

    1995년부터 1999년 사이 이스라엘의 GDP는 50% 증가했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단지 10% 증가에 그쳤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경제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20개국 이상의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고 그들과의 무역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평화 협상'은 이스라엘에 커다란 이익을 안겨 주었다.

    1993년 오슬로협상이 시작되었지만,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대한 봉쇄 조치는 계속되었다. 아니 정착촌 확대에서 볼 수 있듯이 더 강화되었다. 이 시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0억 달러 이상 손실을 보았고, 그들의 1인당 GNP는 36% 감소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업률은 1995년 9월 18.5%에서 1996년 28.4%로 증가했다. 이 수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장이 아니라 1997년 유엔 보고서에 적혀있다. '평화 협상'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중했다.

    7년의 '평화 협상' 기간 PLO가 이스라엘을 위한 “추잡한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확대되었다. 외교적으로 관대하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 측의 “굴욕적인”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PLO에 실망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마스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마스는 2006년 가자지구 총선에서 승리한다.

    이스라엘 정착민, 7만 5천 명에서 40만 명으로 늘어

    1990년대 초반 이스라엘 정착민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합해 7만 5천 명 정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이스라엘 정착민은 급증하여 서안지구에 19만, 가자지구에 5천~7천, 동예루살렘에 19만 명의 이스라엘 정착민이 거주한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시리아 영토인 골란고원에도 이스라엘 정착민이 1만 7천 명 이상 거주한다.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 정착민이 6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충돌을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래 표는 2000년부터 2011년까지 물리적 충돌로 인한 양측 사망자 통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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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서안지구의 베이드 아리에(Beit Arye) 지역의 한 마을. 이스라엘 정착민과 군대는 올리브나무 4,000그루를 제거했다. 미처 제거하지 않은 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올리브나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몇 안 되는 수입원 중의 하나이다.

    ▲ 이스라엘군이 올리브나무를 베려 하자 이를 막고 있는 팔레스타인 여성

    1991년 미국은 PLO에 서한을 보내 “미국은 1967년에 점령된 영토에서 정착촌 활동을 하는 것을 반대해 왔고 앞으로도 반대할 것”이라고 확약했다. 1999년 올브라이트 미 국무부 장관 역시 “정착촌 활동이 평화구축에 파괴적인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이 이스라엘 정착촌은 몇 배 늘어났고, 미국의 원조금은 정착촌 건설에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정착촌의 확대는 2차 인티파다의 주원인이 되었다.

    2017년 국제 앰네스티 사무총장은 “50년이 지난 지금,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장을 단순히 규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명백하게 국제법을 위반하고 전쟁범죄에 해당할 행위를 하는 불법 정착촌에 자금 지원을 멈춰야 한다. 이제는 세계가 구체적인 국제 행동을 취해야 할 때이다”라고 말했다.

    6m 높이의 분리 장벽, 65km(가자지구)와 714㎞(서안지구) 길이로 설치

    2차 인티파다는 1차 인티파다와 달리 폭력적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이스라엘은 군대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점령지역에 분리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6미터에 달하는 분리 장벽이 가자지구에 65km, 서안지구에 714km 길이로 설치되어 있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2004년 7월 분리 장벽이 국제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하고, 철거 조처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리 장벽을 가리키며 “일리걸”이라고 외친다. 불법(illegal)이라는 것이다. 분리 장벽을 다녀온 세계 평화 활동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분리 장벽은 팔레스타인을 옥죄는 뱀”이라고.

    ▲ 가자지구 분리장벽

    ▲ 서안지구 분리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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