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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1일 수요일

달곰한 우리말 발자국과 발자욱

 달곰한 우리말

발자국과 발자욱

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바닷가 모래밭에 발자국이 선명하다. 앞서 걸은 이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게티이미지뱅크


걷기에 자신 있다. 매일 만 보 이상 걷는다. 머릿속이 복잡할 땐 좀 더 오래 걷는다. 그러면 몸도 머리도 가벼워져 편안하게 나를 돌아볼 수 있다. 걷다 보면 꼬일 대로 꼬인 마음도 풀어지니 걷기는 마법 같은 운동이다. 운동화만 신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 참 착한 운동이다.

걷기 하면 철학자와 작가를 빼놓을 수 없다. 사상가이자 시인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 생각도 흐르기 시작한다"고 했다.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손잡이에 펜과 잉크병을 넣을 수 있는 산책용 지팡이를 제작했다. 걷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적기 위해서였다.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하는 칸트를 보고 동네 사람들이 고장 난 시계를 맞췄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졌다.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 미안해, 너의 집 앞이야.”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가수 임종환은 사랑에 빠진 이의 걷기에 대해 노래했다. “(…) 걷다가 보면, 항상 이렇게 너를, 바라만 보던 너를 기다린다고 말할까.” 장범준 역시 걷다 보면 절로 짝사랑하는 이가 떠올라, 고백할까 말까 고민하는 상황을 노래해 뭇사람을 설레게 했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 걷기를 좋아한다. 밤새 눈 내린 다음 날 새벽 걷기는 매우 낭만적이다. 나보다 앞서 걸은 이의 발자국을 밟으며 따라 걷는 재미는 덤이다. 발자국은 발로 밟은 자리에 남은 모양이다. 그러니 발자국은 눈에 보일 뿐 소리가 나진 않는다. 걸을 때 나는 소리는 발소리, 혹은 발걸음 소리로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문학작품과 노랫말엔 ’발자욱‘이 많이 등장해 헷갈리게 한다. 윤동주의 시 ‘눈오는 지도’ 속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는 몇 년 전 경기 수원시 희망글판에 올라 시민들의 마음을 녹였다. 가수 마야가 아버지와의 애틋한 사연을 담아 노래한 곡의 제목도 ‘발자욱’이다. ‘발자욱’은 시적 허용의 대표적 사례로, 일상에서는 틀린 말이다.

‘발자욱’도 표준어에 오를 수 있을까. 세를 확장해 일상에서도 많이 쓰인다면 표준어가 될 수 있다. 내음(냄새), 잎새(잎사귀), 나래(날개)도 문학 세계의 문을 열고 나와 이미 표준어에 올랐다.

일식(日蝕)을 정확히 예측해낸 고대 철학자 탈레스가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 하늘만 보고 걷다가 우물에 빠진 날이다. 이처럼 걷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어깨와 가슴을 펴고 턱은 살짝 당긴 상태로 10∼15m 앞을 보면서 힘차게 걸으시라.


노경아 교열팀장
 
 
입력
 
2023.10.12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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