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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일 월요일

등산로, 신당역 화장실, 캠퍼스…어느날 '한' 여자의 죽음이 알려졌다


[프레시안 books] <목록>, 전 세계 김지영'들'의 이야기



어느 날 한 여자의 죽음이 알려진다.

현장에 출동한 소방대원, 혹은 여자가 이송된 병원의 의사가 여자의 사망을 확인한다. 경찰은 곧바로 수사에 돌입한다. 여자의 연령대, 여자가 발견된 장소, 여자를 본 목격자의 짤막한 인터뷰 등이 언론을 통해 소개된다. 그 사이 여자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던 한 남자가 체포된다. '다투다가 홧김에', '보복하려 일부러', 혹은 '강간하다 실수로'. 어렵지 않게 범행의 동기가 밝혀진다. 사건은 며칠 후 남자가 검찰로 송치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종결된다.

한 여자의 죽음, 그리고 죽음 뒤로 이어진 이 이야기들은 물론 가정이다. 다만 실재하는 사건을 이 이야기에 대입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마 당신은 올해 8월 신림 등산로에서 벌어진 성폭행‧살인 사건의 피해 여성을, 7월 인천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스토킹 살해사건의 피해 여성을, 혹은 지난해 9월 서울지하철 신당역 화장실에서 죽은 여성을, 그해 7월 인하대학교 캠퍼스에서 숨진 채 발견된 여성을 이야기 속 한 여자의 자리에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네 건의 독립사건을 접한 당신은 아마도 높은 확률로 분노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정말 "충격적인, 비극적인, 예상 밖의, 막을 수 없었던" 사건들이었다고. 전에 없이 "기괴하고 충격적인 비일상"이었다고. 가해자에 대한 당신의 분노, 피해자에 대한 당신의 공감과 애도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영국의 저명한 페미니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로라 베이츠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비슷한 이야기를 해보자. 지난 2021년 3월 영국에선 세라 에버라드라는 이름의 한 젊은 여성이 실종된다. 인터넷과 신문이 세라의 사진으로 도배되는 사이 그녀의 시신이 켄트주 애시퍼드의 숲속에서 발견된다. "거의 모든 주요 신문 1면에 세라의 사진이 실리고 해외 매체에서도 보도된다." 로라 베이츠는 저서 <목록>에서 이 사건을 소개하면서, 세라에 대해 "온 국민이 애도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이 일이 "절대로 비일상은 아니"라고 꼬집는다.

가령 로라에 따르면 세라가 실종되기 전날에도 서맨사 히프라는 여성이 체셔주 콩글턴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얼마 뒤 한 남자가 서맨사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세라가 실종된 다음 날엔 기티카 고열이 레스터의 인도 위에서 자상을 입은 채 발견됐고, 곧 사망했다. 역시 한 남자가 살해 혐의로 기소됐다. 또 있다. 같은 날엔 이머전 보하이추크가, 이튿날엔 원징 린이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달이 끝나기 전에 적어도 여덟 명의 여성이 더 살해당했고 남자들이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그중 대부분의 사건들이 세라와 달리 알려지지 못했다. 

"수전 부스, 마야 줄피카, 마리아 롤링스, 셰니즈 그레고리, 애그니스 에이컴, 웬디 콜, 스베틀라나 미할라치, 니컬라 커크, 아기타 게슬레어, 로런 월슨, 페니나 카베바, 질 히커리, 베서니 빈센트 … 

이 중에 들어본 이름이 있는가? 당신은 아마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 여자들이 수백 명씩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당신이 그들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국 여성 네 명 중 한 명은 가정폭력을 경험하고 1년에 8만 5천 명은 강간 또는 강간 미수를 겪는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당연시하고 지워버리는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여성살해 사건을 돌아보면 한국의 사정 또한 영국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8월 17일 발생한 신림 등산로 강간살인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같은 달 19일 해당 사건의 피해자가 사망하며 페미사이드(여성살해) 문제가 언론의 폭발적 관심을 받았지만, 등산로 사건이 있기 이틀 전인 그달 15일에도 목포의 한 상가건물 화장실에선 30대 여성이 살해된 채 발견됐다. 범인은 현직 해경인 그의 남자친구였다. 

같은 달 25일엔 강릉의 한 공장에서 60대 남성이 50대 여성을 흉기로 살해해 경찰에 붙잡혔다. 가해 남성은 피해 여성의 동거인으로, 경찰은 범행 며칠 전 가해자가 피해자와 다퉜던 일을 범행의 배경으로 봤다. 3일 뒤인 28일엔 서울 미아동의 한 빌라에서 40대 남녀가 숨진 채 발견됐는데, 둘 중 여성은 양손이 묶여있었고 얼굴과 다리 등에 폭행 흔적이 남아있었다. 경찰은 "숨진 남성이 여성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모든 사건은 정말 각각의 '독립사건'일까? 국내에 페미사이드에 대한 공식통계는 여전히 집계되지 않고 있다. 다만 언론보도 등을 분석한 한국여성의전화의 최신 민간통계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 내의 여성살해 피해자만 최소 86명(미수 포함 시 311명)에 이른다. 이 각각의 여성들은 운이 없어서, 혹은 '부적절한 옷차림'이나 '부주의한 태도' 등의 '빌미'를 줘서 각각의 악마 같은 남자들에게 살해당한 걸까? 

로라의 말을 인용한다. "사흘에 한 번꼴로 일어나는 일은 독립사건이 아니며 그것이 영국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살해당하는 빈도다." 한국여성의전화의 위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선최소 1.17일에 1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한다. "이것들은 독립사건이 아니다. 그 반대다. 그리고 독립사건의 반대는 '패턴'이다." 남성이 여성을 계속해서 죽이거나 강간하고 있다는 간단명료한 패턴 말이다.

책에서 로라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들은 도처에서 죽어가고 있다. 여자가 뭔가를 잘못했거나 부적절한 옷을 입었거나 엉뚱한 길로 갔기 때문이 아니다. 남자들이 여자들을 죽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들이 개인의 문제라고, 사적이고 우연한 목록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말은 우리가 아니라 시스템이 문제라는 뜻이었다."

▲'신림동 등산로 성폭행 살인 사건' 피의자 최윤종 이 25일 오전 서울 관악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연합뉴스

저자가 언급한 시스템이란 뭘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언어로 번역하자면, 당연히 "구조적 성차별"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직 대통령도 여성가족부 장관도 차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도 이 시스템의 문제를 인정하진 않고 있다. "구조적 차별은 없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되어 "(신당역 사건은) 남녀문제로 볼 게 아니"라는 김현숙 장관의 말과 "젠더 이야기는 소모적인 논쟁"이라는 김행 장관 후보자의 말로 이어졌다.

국가의 시스템을 확립하는 주체들이 시스템의 문제를 부정하는 사이 '패턴'은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 지난 12일 검찰에 따르면 신림 등산로 강간살인 사건의 가해자 최윤종(30)은 '부산 돌려차기' 사건 보도를 본 뒤 '피해자를 기절시켜 CCTV가 없는 곳에서 성폭행을 저지르기로 계획'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은 지난해 5월 부산 서면에서 한 남성이 일면식 없던 20대 여성을 폭행하고 성폭행을 시도하다 도주한 사건이다. 젠더폭력이 젠더폭력으로 이어진 이 명백한 '혐오의 재생산'에도 당국은 해당 사건을 흉기난동 등 이상동기범죄의 연장선으로 파악했다. 대책은 폐쇠회로(CC)TV 확충 등 물리적인 치안강화 대책에만 그쳤다. 그 사이, 어떤 사람들은 유족에게 피해자의 평소 행실, 사건 당시 옷차림, 동선 등을 따져 물었다. 

꼭 1년 전, 한 대학생이 본인의 대학 건물 내에서 남성 동료에게 살해당한 인하대 성폭력‧사망 사건 당시에도 대책은 CCTV 강화였다. 여가부 장관이 '이 사건을 남녀갈등으로 몰고가선 안 된다'는 등의 발언을 남기는 사이, 인터넷에는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는 댓글이 쏟아져 유족이 그 중단을 호소했다. 당시 인하대의 한 학생은 '구조적 성폭력'을 이야기하며 학내에 대자보를 게시했지만, 곧 그 대자보는 비난 속에서 뜯겨 나갔다.

세라의 실종 이후 영국의 여성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로라는 이렇게 꼬집는다. 

“2021년 세라 에버라드가 실종된 후, 클래펌의 여성들은 경찰이 집집마다 방문해서 절대 혼자 외출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무대는 준비됐다. 우리의 안전을 지켜야 할 자들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이것은 여자들 문제다. 여자들이 더 조심해야 한다. 강간과 살인을 피하는 것은 여자들 책임이다.” 

일련의 사건에서 보인 사회적 경향성들, 즉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비난', '성적 대상화 문화', '성폭력 범죄가 빈번히 발생한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 등을 가리켜 흔히 '강간문화'라 일컫는다. '강간문화'란 성폭력이 만연하고, 또 만연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경향성을 설명하는 사회학적 개념이다. 여성살해가 성폭력 문제로, 성폭력 문제가 강간문화로. 어느 날 알려진 한 여자의 죽음은 이렇게 사회의 '구조'로 이어진다. 

그래서 <목록>은 여성살해, 여성의 죽음에 관해서만 다룬 책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목록'이란 아주 어린시절부터 시작된 성폭력과 성차별의 경험‘들’을 목록화한 것이다. 이를테면 지난 2016년 출간돼 한국사회에 파장을 불러일으킨 <82년생 김지영>의 전 세계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전 세계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목록을 기록하고 공유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일상 속 성차별 프로젝트'를 창립했고, 쉰 명 정도가 이야기를 올릴 것이라는 저자의 예상과 다르게 현재 해당 플랫폼에는 20만 개가 넘는 글이 올라와 있다.

한 여성은 자신의 '목록'을 풀어내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아주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너무 많아서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그리고 20만 개의 게시물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분석한 로라 베이츠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하나하나가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였다. … (그러나) 경험담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자 다양한 억압의 형태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에 따르면 수많은 여성들이 겪은 이 수많은 사건들은 "보다 큰 스펙트럼의 일부"다. 저자는 "성 불평등, 선정적인 휘파람, 캣콜링, 성적인 농담, 성 편향적 언어, 싸잡아 말하는 고정관념"에서부터 "강간, 가정폭력, 강제결혼, 여성할례, 명예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있다고,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하나의 구성체에 순위를 매기거나 비교하는 게 아니라 "단지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관계성과 복잡한 맥락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령 ‘일상 속 성차별 프로젝트’에서 강간과 성착취, 여성살해 등 자신이 겪은 일보다 좀 더 끔찍한 이야기들을 확인한 한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마흔아홉 살 여자인 나에게는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많은 여자들이 여기서 용감하게 공개한 것 같은 끔찍한 성폭력은 아니고 그저 평생 남자들에게 괴롭힘당한 이야기다. 우선은 나보다 어린 여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고 싶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말없이 참아서, 대부분 신고하지 않아서, 나에게 일어난 일을 소리 내어 외치지 않아서 미안하다. 내가 그렇게 침묵을 지킨 탓에 여러분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24일 서울 신림동 일대에서 열린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국가 규탄 긴급행동' 현장 사진. 참여자들이 현장 추모를 마친 후 신림역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프레시안(한예섭)

다만 저자는 '침묵'의 책임이 마흔아홉 살 여자가 아닌 사회에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한다. 2018년 미투 국면 당시와 같은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여성 개인의 목소리는 사회적으로 묵살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너무 어렸을 때부터 너무 효과적으로 침묵당한 나머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많은 것을 바꿔낸 미투 운동도 모든 것을 바꾸진 못했고, 반동은 그보다 더욱 거셌다.

한 여성의 일생을 따라다니는, 아주 사소한 성차별부터 아주 심각한 성폭력까지의 연결성에 주목한 <82년생 김지영>이 직면한 정치적 공격을 돌이켜보자. "(여성이 밤길을) 걷기 싫어하는 이유가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보행 환경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는데 이는 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이라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발언은, 이후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는 여성들을 공격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가 됐다. 

지난해 7월 인하대 성폭력‧사망 사건 당시 언론, 사법, 교육, 정치, 문화 등 광범위한 범주의 구조적 책임을 역설했던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두고 국민의힘 측 박민영, 신주호 대변인 등은 '개인의 비극'을 '구조적 문제'라 호명하는 것은 정치적 의도를 지닌 "갈라치기"라고 비판했다. 시간을 좀 더 돌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당시에는 '혐오범죄냐 묻지마범죄냐'의 논란을 두고 시민사회와 경찰이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경찰은 결국 사건의 혐오 성격을 부정했다. 

지난 8월, 신림 등산로 강간살인 사건 당시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대표에게 '여성폭력 사건의 해결책을 어떻게 제시해야 할까' 조언을 구했다. 송 대표는 "사회전반에서 여성폭력을 감소시키기 위해선 결국은 원론적인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라며 난감하게 웃었다. 언론, 사법, 교육, 정치, 문화와 같은 '뻔하고 거시적인 얘기'들을 내놓으면 기사가 되겠느냐는 의미가 섞여 있었다. 

로라 또한 <목록>에서 같은 말을 한다. "마법 같은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는 이유로 페미니즘 책을 조롱하는 리뷰를 수없이 봤다"는 것이다. 강간사건의 해답으로 문화를 이야기하면 '망상'이 되고, 살인사건의 해답으로 정치를 이야기하면 '갈라치기'가 되는 이 현상에 대해 로라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이런 연관성을 보고 싶지 않은 듯하다. 내가 라디오에서 여성 정치인들이 직면하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언론매체의 성차별을 언급한다면 논점에서 벗어났다고 질책당할 것이다. 실제로 성폭력에 대한 칼럼을 쓸 때 영국 교과과정에서 성 고정관념을 다루지 않는다는 내용을 넣었다가 담당 편집자로부터 논점을 벗어나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공교롭게도 "여자들과 억압받은 사람들은 수십년 동안 해결책을 제시해왔다. 단지 귀 기울이는 이가 거의 없었을 뿐이다." 기사거리가 되겠느냐는 민망한 웃음이 따라 나올 만한 그 '뻔하고 거시적인' 얘기들 말이다.

가령 △성폭력 및 가정폭력 피해자 구호단체만을 위한 안정적 재원 △학교에서 일어나는 성희롱과 여성혐오에 교사들이 더 잘 대처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훈련 △경찰 조직과 형법 제도에 만연한 구조적 여성혐오와 인종차별에 대한 조사 △모든 사업장, 단체, 학교가 성희롱 및 성폭력에 대한 명확한 피해자 중심 정책을 갖추도록 강제하는 법 혹은 △여성혐오를 혐오범죄로 기록하기... (<목록>에서 제시된 수많은 해결책 중 일부들이다.) 

로라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런 제안을 즉흥적이고 피상적이고 무지하다며 일축하는 대신, 이 보고서 중 하나를 집어 들어서 읽기만 했다면 정부는 필요한 모든 재원을 한순간에 가져올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25일 오전 서울 국회 앞에서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와 19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24년간 여성노동자를 지켜온 고용평등상담실 폐지, 퇴행하는 고용노동부 규탄한다'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프레시안(한예섭)

최근 고용노동부는 시민사회, 연구단체의 수많은 우려를 무릅쓰며 고용평등상담실의 운영예산을 50% 이상 삭감했다. 운영방식 또한 기존의 전문민간단체 지원 방식에서 노동부 지청에서의 상담실 직접 운영방식으로 변경했다. 수십 차례의 밀착상담, 상담활동가의 장기적이고 심리적인 동행과 지지가 큰 영향을 미치는 고용평등상담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 예산삭감이었다. 

지난 25일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는 내담자들이 직접 쓴 편지를 대독하며 정부의 예산삭감에 항의했다. 편지에서 내담자들은 자신이 어떤 차별을 당했는지, 어떤 성폭력을 당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자신이 어떻게 고립됐는지 등을 상세히 기술하며 고용평등상담실의 유지를 청원했다. 누군가 겪은 직장 내 성차별이라는, 또 다른 '목록'이라 할 수 있겠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이 내담자들의 호소를 "즉흥적이고 피상적이고 무지하다며" 일축할지, 아니면 그 편지 중 하나를 집어 들어서 읽어볼지는 모를 일이다. 아마도 전자의 확률이 더 클 것이다.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들 목록들 각각이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게끔 훈련받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제일 먼저 취해야 할 가장 작고 간단하고 시급한 저항의 행동은 목록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로라는 제안한다. 그의 '목록'이 다른 20만 개의 '목록'을 만나 <목록>이라는 책으로 튀어나왔듯.

"당신의 목록을 만들어라. 그것은 당신의 이야기다. 그것으로 뭘 할 건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좋은 의도 또는 성차별적이고 구시대적인 핑계로 그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가거나 부정하거 무시하거나 묵살하거나 없애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당신의 것, 당신만의 것이다. 그것은 진짜다."

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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