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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0일 목요일

“전자기기 고쳐 쓰자” 이재명이 ‘수리할 권리’ 공약 내건 이유

 

제조사 횡포에 사설·셀프 수리 제한…주요국은 이미 권리 보장 제도화 추세


애플은 한국과 일본, 호주를 포함한 30여개국에서 개별 수리 서비스 제공업체 프로그램(IRP)을 시행한다고 3월 30일 밝혔다. ⓒ애플


전자기기 수리 시장은 제조사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부품을 틀어쥔 채, 사설 업체와 소비자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제조사가 운영하는 공식 센터도 부품이 없다며 수리를 거부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사실상 독점 시장이니 비용도 제조사가 좌지우지한다. 이른바 ‘수리할 권리’ 보장 요구가 거세지면서, 정치권에서도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20일 애플과 스마트폰 사설 수리 업계에 따르면, 아이폰12 액정 수리 비용이 애플 공식 센터는 33만원, 사설 업체는 27만원 수준이다. 약 6만원 차이 난다. 

삼성전자 갤럭시 S20은 삼성전자 공식 센터가 17만원, 사설 업체는 11만원 정도다.

대체로 스마트폰 수리는 제조사 공식 센터보다 사설 업체가 더 싸다. 정보통신연구원의 ‘단말기 AS 실태조사 및 단말기유통법 개정 방향 연구’ 보고서를 보면, 2018~2019년 설문조사를 통해 유상 수리 건당 평균 비용을 조사한 결과 공식 센터는 12만 4,940원, 사설 업체는 8만 2,648원으로 나타났다.

가격이 저렴하지만, 소비자는 사설 업체 이용을 주저한다. 사설 업체를 한 번이라도 거친 제품은 공식 센터가 수리를 거부한다. 한국소비자원에 관련 민원이 제기되고 있다. 가령 한 아이폰 사용자는 수리 보증 기간에 액정 파손으로 애플 공식 센터를 찾았으나, 사설 업체에서 수리한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보증을 적용하지 않았다.

사설 업체는 수리 분야도 제한된다. 제조사가 부품과 장비를 제공하지 않는다. 사설 업체는 부품을 중고폰에서 추출하거나, 해외 사이트를 통해 구입한다. 조달이 안 되는 부품이 필요한 수리는 할 수 없다.

사설 업체가 해결하지 못하는 고장은 공식 센터를 가야 한다. 공식 센터에서도 부품이 없어 수리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듣기 십상이다.

공정위가 고시하는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따르면, 제조사는 스마트폰은 부품을 최소 4년간 보유해야 한다. TV·냉장고·세탁기 등 가전제품은 9년이다.

보유 의무 기간을 지키지 않으면, 소비자가 수리를 요구할 때 일정 금액을 환급해줘야 한다. 제품 사용 기간에 따라 감가상각이 들어간다. 소비자는 성에 차지 않는 환급금에 추가로 돈을 보태 새 제품을 사게 된다. 고치면 더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은 버려진다.
 

애플은 내년 초부터 셀프 수리 프로그램을 통해 사용자가 아이폰 일부 고장을 직접 수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지난해 11월 18일 밝혔다. ⓒ애플

이재명 공약으로 제도화 힘 받을 듯…계류안 보니, 제조사·사설 업체 의무 규정

수리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수리할 권리는 소비자가 스스로 또는 사설 업체를 통해 수리할 수 있도록 보장받을 권리를 이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수리할 권리 보장을 공약으로 내걸면서 제도화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후보는 최근 43번째 소확행 공약을 소개하면서, “전자·가전제품 소비자의 수리권을 확대하겠다”며 “수리용 부품 보유 의무 기간 확대와 수리 매뉴얼 보급 등으로 편리하게 고쳐 쓸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국회에 제출된 관련 법안도 조속히 통과되도록 하겠다”고도 덧붙였다.

현재 국회에는 수리할 권리 관련 법안이 두 건 계류돼 있다.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단통법 개정안은 스마트폰 제조사가 소비자와 사설 업체에 부품·장비·설명서를 지급하도록 의무화했다. 사설 업체가 수리를 하면 소프트웨어가 오류로 인식해 시스템을 차단하는 행태도 금지한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위반 사례를 신고받거나 인지하면 공정거래위원회에 조사·조치를 요청할 수 있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수리할 권리에 관한 법률안은 수리할 권리 보장 방안을 보다 포괄적으로 담았다. 적용 대상도 스마트폰뿐 아니라 부품으로 이뤄진 모든 제품으로 확대했다.

단통법 개정안과 같이 제조사가 부품·장비·설명서를 제공할 의무를 규정했다. 제조사는 제품 판매량과 부품별 수명, 소비자 수리 수요 등을 고려해 적정 수준의 부품을 보유해야 한다.

제조사가 납품가를 과도하게 받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도 마련했다. 사설 업체가 받는 부품을 비싸게 공급받으면, 소비자가 부담하는 수리 비용이 올라간다. 법률안은 제조사가 부품을 팔 때, 부품별로 출고가의 일정 비율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설 업체도 수리 비용을 제한받는다. 구체적인 기준은 시행령을 통해 구체화할 계획이다.

공식 센터가 사설 수리를 빌미로 수리를 거부하거나 추가 비용을 청구하는 등 불합리하게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이를 어기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

사설 업체를 양성화하고 관리·감독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사설 업체를 이용하면 공식 센터보다 수리 품질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소비자 인식을 반영했다.

등록제를 도입한다. 사설 업체를 운영하려면 지자체에 등록해야 한다. 시행령으로 일정 요건을 부여한다.

사설 업체 의무도 규정했다. 수리에 앞서 기간·내용·비용을 소비자에게 알려야 한다. 소비자 개인정보와 데이터 유출을 막기 위한 정부 지침을 따라야 한다.

환경부는 사설 업체가 수행할 수 있는 수리 범위와 난이도를 고려해 등급을 매긴다. 소비자가 사설 업체 정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수리 시장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한 취지다.

한국소비자연맹 정지연 사무총장은 “사설 업체가 양성화되면 소비자가 수리받을 때 선택권이 넓어진다”며 “소비자가 원하는 만큼 제품을 오래 쓸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지난 7일 서울 동작구 맘스하트카페에서 ‘아이 키우기 좋은 사회’ 국민반상회를 하고 있다. 2022.01.07. ⓒ뉴시스


제조사 난색 표하지만 이미 세계적인 추세

제조사는 난색을 표한다. 제품 수명이 길어지면 제조사는 판매량 감소 영향을 받는다. 공식 센터를 통한 매출도 줄어든다. 단통법 개정안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보면 분위기가 읽힌다. 검토보고서는 제조사에 부품 공급 의무를 부여하는 데 대해 영업 자유를 침해하는 과도한 규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애플은 수리할 권리 제도화를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난 2019년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19개 주가 관련 법안을 추진할 때다. 법안은 사설 업체에서도 수리가 가능하도록 제조사가 공정하고 합리적인 조건으로 부품을 제공하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당시 애플 측 로비스트가 캘리포니아주 의원들을 만나, 사설 수리 확대에 따른 우려를 설명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제조사 반발에도 주요국은 수리할 권리 보장을 위한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사설 업체 관리·감독 체계를 구축한 국가로는 일본이 대표적이다. 2015년부터 등록수리사업자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약 50만원을 내고 총무성에 등록해야 스마트폰 수리 사설 업체를 운영할 수 있다. 수리 대상은 전파에 영향을 주지 않는 액정·카메라·스피커 등이다. 수리는 반드시 설명서를 따라야 한다.

미국도 제도화를 추진 중이다.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지난해 7월, FTC가 소비자 수리 선택을 제한하는 관행에 대한 조치를 강화하는 정책성명을 채택했다. 관련 법률을 통해 불법적인 수리 제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내린 행정명령에 따른 움직임이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도 소비자가 손쉽게 수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각국에 권고했다. 제조사가 제품 설계 과정에서 수리 용이성을 고려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애플은 정책에 발맞추기 위한 조치에 돌입했다. 지난해부터 사설 업체도 개별 수리 서비스 제공업체 프로그램(IRP)에 가입하면 부품과 도구, 설명서를 제공하고 있다. 프로그램 가입비는 없고, 애플로부터 ‘테크니션(기술자)’ 인증을 받아야 한다. 올해부터는 미국을 시작으로 일반 소비자에도 200여개 부품과 장비, 설명서를 제공한다.

수리할 권리는 소비자 권익 보호뿐 아니라 기후변화 대응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원활한 수리를 통해 소비자가 제품을 장기간 사용하게 되면 폐기되는 전자제품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다. 유럽환경국에 따르면, 유럽 내 모든 스마트폰 수명을 1년 연장하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2030년까지 매년 210만톤 감축된다. 연간 100만대 이상의 자동차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량이다. 세계 주요국이 적극적으로 수리권 보장에 나서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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