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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1일 수요일

‘리영길 처형설’ 만들고 흘리고 발뺌하는 청와대·국정원

등록 :2016-05-11 19:14수정 :2016-05-11 22:08
[뉴스분석] ‘대북정보’ 왜곡이 빚은 참사

국정원이 만든 ‘엉터리 첩보’
통일부는 ‘아님 말고 식’ 흘려
개성공단 중단 여론악화 물타기

박근혜 정부 ‘북 붕괴론’ 인식
정치용 쓰려다 ‘오보’ 재생산
통일부가 배포한 ‘리영길 숙청’ 문건
통일부가 배포한 ‘리영길 숙청’ 문건
개성공단이 폐쇄된 지 석달이다. 개성공단 문이 닫힌 날 박근혜 정부가 ‘처형’됐다고 밝힌 북한 리영길 전 인민군 총참모장(한국군의 합참의장에 해당)은 9일 끝난 조선노동당 제7차 대회에서 ‘부활’했다. 정부가 엉터리 북한 첩보를 흘렸다가 ‘망신살’이 뻗친 것이다. 이런 ‘정보 참사’는 왜 일어났을까?
2월10일 오전 11시48분이었다. 정부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을 최종 결정하고 언론에 발표하겠다고 알렸다. 개성공단 폐쇄로 술렁이던 그날 오후 3시께 통일부는 “북한, 군총참모장 이영길을 2월초 전격 숙청”이라는 제목의 피디에프(PDF)파일 문건을 기자들한테 전자우편으로 제공했다. ‘대북소식통으로 인용’하라는 조건이 달렸다. ‘비공식’ 공개인 셈이다. 이 문건은 “북한은 2월초 군총참모장인 이영길(61세, 대장)을 ‘종파분자’ 및 ‘세도·비리’ 혐의로 처형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가 “두주불사로 간 기능이 약화”됐다는 ‘특기사항’까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정보’는, 리영길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1차 전원회의에서 중앙군사위원과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된 사실이 10일 <노동신문>에 보도돼 엉터리로 판명났다.
통일부의 ‘리영길 처형설’ 공개는 그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통일부가 북한 정보를 이런 식으로 공개한 건 창설 이래 없던 일”이라는 게 통일부를 오래 취재해온 기자들의 말이다. 통일부는 ‘북한 관련 정보’를 분석할 뿐 생산하지 않는다. 국정원에서 넘겨받은 정보도 언론에 문건 형식으로 공개한 일이 없는 통일부가 ‘리영길 처형설’을 ‘유관기관의 정보’라며 대북소식통 뒤에 숨어 뿌렸다. 총선을 닷새 앞둔 4월8일 통일부가 중국 소재 북한식당 종업원들의 집단 탈북 사실을 갑자기 발표했을 때도 관련 정보를 ‘유관기관’에서 얻었다고 했다. 이때 ‘유관기관’은 사실상 국정원을 가리킨다.
정작 국정원은 ‘리영길 처형설’ 공개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리영길 처형설’이 사실무근으로 드러났다는 기사가 <한겨레> 11일치에 실리자 국정원 관계자는 기자한테 전화를 걸어와 “국정원은 해당 정보를 공개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통일부에 정보 공개를 주문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통일부는 실행만 했고, 정보 생산자인 국정원도 공개할 뜻이 없었다면, 남는 건 이 둘을 모두 움직일 수 있는 청와대뿐이다.
확인되지 않은 첩보를 정보로 부풀린 이런 어설픈 언론플레이는 개성공단 폐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개성공단 폐쇄로 불어닥칠지 모를 여론 악화를 ‘포악한 북한 정권의 불안정성’을 확대재생산함으로써 물타기하려 했을 공산이 크다. 해당 문건은 “김정은의 공포통치”로 “북한 고위간부들은 겉으로는 맹종할 것이지만 속으로는 회의적 시각이 점차 심화될 것”이고 “북한 정권의 불안정성을 증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오래 묵은’ 북한붕괴론적 인식이 ‘정보 실패 및 오남용’ 사태의 구조적 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북한 정보를 다룬 경험이 많은 한 관계자는 “정보기관의 실무자들은 정보 장난질을 치지 않는다. 정보 실패라 불리는 사례의 대부분은 최고권력자와 그에 빌붙은 부나방들이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북한 문제’를 활용하려다 빚은 참사”라고 짚었다.
이명박 정부 때도 다르지 않았다. 2010년 12월 이명박 대통령은 말레이시아 동포 간담회에서 “통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해 2월 천영우 외교부 2차관은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미국대사한테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면 2~3년 안에 정치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런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던 한국 정보기관이 정작 결정적 순간엔 먹통이 됐다. 2011년 12월17일 오전 8시30분(북한 공식 발표 기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정부는 이틀 뒤인 12월19일 낮 12시 북한 <조선중앙텔레비전>이 ‘특별방송’으로 공표한 뒤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남북관계와 국가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시기에 50시간 넘게 정보기관이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직 정부 고위 인사는 “장성택·현영철·리영길 등 북한 군·당 고위 인사의 숙청 또는 처형을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과 붕괴 조짐으로 해석하고 싶어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편향된 인식이 문제”라며 “정부가 처형됐다고 사실상 발표한 리영길이 버젓이 살아 있음이 확인된 이번 사태는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과 관련해 깊은 성찰의 필요성을 웅변하는 중대한 정보 실패·오용 사례”라고 말했다.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11일 정례브리핑에서 “(리영길 처형설과 관련해) 따로 더는 드릴 말씀이 없다”고 밝혔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리영길이 한동안 나타나지 않길래 그런 판단을 했고, 휴민트(인적 네트워크) 정보는 맞는 게 절반 정도”라고 말했다.
김진철 이제훈 최혜정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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