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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7일 토요일

다큐작가 신성욱의 삶


이권우 2015. 02. 05
조회수 3554 추천수 0

대안의 삶을 사는 이가 누리는 지복
-다큐멘터리 작가 신성욱을 만나다


두 사람은 회포가 풀린 듯했다. 오해가 있었고 이별이 있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사이였다. 젊은날, 새로운 꿈을 꿀 때 의기투합했던 사이다. 지리산  자락에 틀어앉아 공부하고 번역할 때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을까. 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똑같겠는가. 아,라고 했는데 어, 라고 알아들을 수도 있고, 어쩌면 처음부터 의도한 바가 서로 달랐을 수도 있겠다.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되었던 사람 사이에 미움과 원망이 스며들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먼저 마음을 열었으면 되었을 터다. 그러나 세상사가 어찌 그리 녹록하겠는가. 바쁘고 치이고 하다보니, 연락이 안되었다. 그러다 두 사람이 만났다. 술이 돌고 말이 돌고 마음이 돌았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나와 신성욱은 그 모습을 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게 인생사이지 않던가. 얽히고설켰는데 풀지 못하고 마는 것이. 저 술이 깨면 지금처럼 충만한 마음은 아니겠지만 실타래를 풀어갈 실마리는 쥐었을 듯싶다. 자리에 누이려고 두 사람을 끌고 오면서 그들의 얼굴에서 청년의 빛을 느꼈다. 다행이다. 내가 아는 이와 신성욱이 아는 이가 서로 아는 사이란다. 한뜻으로 열정을 품고 일을 같이 했는데, 일이 틀어졌다. 다행히 서로 간에 상처를 받거나 입은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자리를 마련했다. 밤새 술이나 마시면서 회포 풀자고. 신성욱이 입은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당장 발레타인 30년산이 동 나고 말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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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도 근무해야 하는 사람 깨워 아침 먹이고 보낸 다음 우리는 게으름을 피웠다. 그날 우리는 산을 타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다시 잠들었고 그는 음악을 들었다. 서두르지 않았도 되었다. 우리가 타기로 한 산은 그의 거처 바로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는 동네 이름도 참 상징적이다. 동막골. 건조한 행정구역명으로 하면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인데, 동막골이라는 지명에서 금세 떠오르는 영화제목이 있을 터. 웰컴 투 동막골! 속설에 따르면 동쪽의 막다른 곳이라는 뜻인데, 한편의 영화 때문에 이상향이나 은둔처의 상징이 되었다. 그곳에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문형산이 나오고 우리는 능선을 따라 분당에 있는 영장산까지 갈 계획이었다. 천천히 걸으면 세시간 반 정도 되는 길. 북한산을 좋아하는 나는, 그 자락 밑에 자리잡은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그냥 자리 박차고 나오면 북한산이지 않은가. 뒷짐 지고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되는 삶. 나는 뒷배 봐주는 사람 있는 이들보다 뒷산 있는 사람이 더 부럽다. 그래서 정신승리법으로 질투의 마음을 이겨내고는 한다. 북한산 치마폭에 휩싸여 사는 사람치고 산에 자주 올라가는 이는 별로 없으리라 하며 말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뒷산을 타기로 했으니, 얼마나 좋은고.

문형산에서 영장산에 이르는 길은 야트막하고 굴곡이 심하지 않다, 이런 산의 장점은 시야가 트여 풍광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혼자 가기보다 여럿이 가기 좋은 곳이란 뜻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둘레길에 어울리고, 산악 자전거 타기 좋은 산세다. 그래도 결코 만만한 산세가 아니다. 검단지맥에 속한지라 북쪽으로 산행을 하면 남한산성을 지나 팔당댐에 이를 수 있다. 무릇 산은 이어져 있는 법. 도로로 잘려 있을지라도 그 맥을 밟아가면 뭇 산들이 어깨동무하며 발흥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종교집단이 한다는 산삼밭을 지나니 넓찍한 임도가 나왔다. 오르자마자 예상한대로 산악자전거를 탄 이들이 쌩,하며 지나간다. 좋은 길이다. 문지방 능선만 넘으며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길이니까. 산이 낮고 도시에서 가깝고 한겨울이라 내세울만한 풍광은 없지만, 걸으며 생각하거나 이야기 나누기는 제격이었다. 더욱이 바로 집 뒤에 길이 열려있지 않은가. 그래서 물었다. 왜 이 골짜기로 들어왔냐고. 예상한대로 답이 나왔다. 도시생활이 싫었고 아파트 생활에 진절머리가 나서라고. 그 말을 그의 삶의 문맥에 맞춰 표현하면 대안적 삶에 대한 욕구가 이곳에 둥지를 틀게 했다는 말이 될 성싶다. 다큐멘터리 피디를 하다 때려치우고 대학원에서 과학저널리즘을 공부하겠다고 나선 것도, 늦은 나이에 본 딸아이가 마음껏 뛰놀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아파트가 싫어진 것은 결국 다른 삶에 대한 열망이 아니겠는가. 뒷산을 품고 사는 삶은 아무나 얻을 수있는 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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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욱이 살아온 삶의 변곡점에는 사람이 있다. 그 첫번째 사람은 이영돈 PD. 유명 피디로 이름 날린 그와는 가톨릭계에서 학생운동 하던 시절에 이어졌다. 바이블 로드라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는데 관련정보를 잘 아는 학생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에 누군가가 그를 소개해주었다. 어릴적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아온 그로서는 어려운 숙제가 아니었다. 이영돈 피디가 기대했던 바보다 더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고, 방송을 탄 다큐멘터리가 큰 인기를 끌었다. 당연히, 작가로 일해보라는 권유를 받았고 이를 수락하며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말하자면, 룸펜에서 프로로 전환한 셈이다. 다른 면에서는 겸손한 척하는 그지만, 방송계에서 활동한 것만큼은 자부심을 품고 말한다. 농담이지만 내가 확인해볼 도리가 없으니, 그는 자신이 참여한 작품들이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는지 신나게 말한다. 기실, 그래야 하는 법이다. 열정을 다하고 난 사람만이 당당히 자신의 한때를 한껏 추켜세워 말할 수 있다.

불교로 말하자면 묵언수행 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취재하자는 기획안을 제출했다. 그때 지금 kbs 사장이 된 조대현 피디가 프로그램을 도맡아 해보라고 했다. 파격이었다. 작가가 피디 역할도 한다는 것은 당시 방송가 분위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부 반발도 있었다. 그렇지만 조 피디가 믿고 밀어주었다. 기획안대로 취재했고 편집과정에 선배피디가 참여해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사내 안팎에서 칭찬이 잇따랐다. 마침 kbs가 자회사를 설립해 다큐멘터리 일부를 제작했는데, 그곳에 부장으로 들어가 pd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신나게 일했고 반응도 좋았고 자신감도 넘치던 시절이다. 그 시절을 정리한 약력을 보면 이렇다.

"1995년부터 다큐멘터리 작가 겸 프로듀서로 kbs일요스페셜 생로병사의 비밀 등의 제작에 참여했고 kbs스페셜 침묵으로의 초대 외 60여편의 tv 다큐메터리를 기획연출했다. AIBD(아시아방송개발원) 어워드다큐부문상, YWCA가 뽑은 올해의 좋은 프로그램상을 받았다."

한마디로 잘 나갔다는 말이다. 그러다 자신이 탈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하는 만큼 텅 비워짐을 몸서리치게 느꼈다. 변화가 있어야 하고,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이리저리 알아보았지만, 결국은 네트워크를 튼튼히 하는데 목적을 둔 곳이 많았다. 그러다 카이스트에 과학저널리즘 대학원 과정이 생기자 이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기득을 버리고 다시 도전해보기로 한 셈이다. 아마도 이 대목이 그의 삶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일 터이다. 직장인 가운데 지독하게 회의감을 품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적당히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을 타협하며 자리보전에 연연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질시와 무시 가운떼 이룬 성과라면 쉬이 버릴 수도 없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정직하기로 했다. 그만큼 했으면 다른 삶도 충분히 가능하다 믿었다. 어차피 삶은 늘 도전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대학원 다니며 프리랜서 피디로 처음 맡은 작품이 <읽기 혁명>.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히는 게 지능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대한민국 부모들의 일반화된 상식을 뒤엎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면서 국내외 독서전문가를 만나고 협력을 구한 것이 그의 삷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작품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다양한 독서단체가 그에게 강연을 요청했고, 뇌과학적 측면에서 올바른 독서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어 학부모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일년에 200건이 넘은 강연요청을 받는 유명 강사가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그가 학부모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간략하다. 그것이 공부든 책읽기든 어릴 때 강요해서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뇌과학적으로도 입증된 바이지만, 그런 과욕이 아이들을 망치기 마련이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의 대안은 단순하다. 실컷, 놀게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동막골로 이사한 것도 이런 삶의 철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남에게 말할 정도의 확신이라면 당연히 자신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공부보다는 놀이를, 사교육보다는 가정교육을 더 중요시 여기니 이른바 전원주택에서 살 수 있는 법이다.

그는 책도 꾸준히 낼 요량이다. <읽기혁명>을 바탕으로 <뇌가 좋은 아이>를 펴낸 바 있고, 2014년에는 <조급한 부모가 아이 뇌를 망친다>를 냈다. 두 권의 책이 열악한 출판상황에서도 꾸준히 나가자 여러 출판사들이 책을 함께 내고 싶어한다. 내가 보기에 그의 책들은 전문지식을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데 특장이 있다. 왜 아니겠는가. 십년 넘게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늘 하던 일이 그것이니. 그의 글을 읽으면 알 수 있지만, 잘 읽히고 잘 이해된다. 고수는 남다른 법이니, 그는 지금 활약상에 초점을 맞춰 독서관련 전문강연자라 보기보다는 저술가로 대하는 것이 온당한 평가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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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산에서 영장산까지 가다보면 중간에 강남 300cc골프장이 나와 산세가 잘린다. 당황하지 말고 내려가는 길을 보면 밧줄이 있으니, 이를 잡고 내려가 아스팔트길을 건너 다시 오르면 된다. 짧은 길을 전원주택을 끼고 걸어야 하는 것만 빼놓고는 불편하지 않다. 한겨울인데도 걷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도심에서 가까워서일 터다. 앞서 말한대로 남한산성으로도 이어진 길이 나있어 산행을 길게 하고 싶은 이들을 유혹한다. 실제로 인터넷을 검색하면 성남 일대의 산을 일주한 이야기들이 많이 올라와 있다. 산을 탈때마다 느끼지만, 늘 설악산이나 지리산을 그리워할 일이 아니다. 문을 열고 나서면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부터 오르면 된다.

신성욱도 늘 누군가와 연결된 삶이었다. 우뚝 솟아 있기보다는 여러 사람과 연결된 삶이었다. 그러기에 시작은 미약했더라도 성취는 클 수 있었다. 길을 함께 걸으며 그와 내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물었다. 그와 나는 공통분모가 없다. 책 프로그램에 자주 나갔지만 그와 함께 방송을 한 적은 없었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데 누군가 덕분에 서로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귀띔해주었다. 근데 그는 그이와 소원해져 있었다. 따지고보니, 별 일 아니었다. 좀처럼 풀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나, 이 일은 밤새 술마시면 될 일이었다. 이제, 남 좋은 일만 할 게 아니다. 인생 뭐 있다고 맺혀 사나, 풀면서 살지. 봄에 그의 집을 다시 찾아야겠다. 지금 기숙하고 있는 집이 팔려 가까운 동네로 옮긴다니, 핑계가 좋다. 다시 인연을 맺기 위해 밤새 술 마셔야겠다. 끊어지면 잇고, 이어지면 다른 인연을 끌어 안아 더 멀리  뻗어가게 해야 하는 법. 그래서 셋이서 다음엔 남한산성까지 가봐야겠다. 가는 길이 길면 할 말도 많고 웃어야 할 일도 많으니. 굴곡지고 힘들어도 끝까지 걸어보는 산행길이 어차피 우리네 삶과 많이 닮아있지 않은가. 신성욱, 부담 되겠지만, 발렌타인 30년산 얼른 준비해놓으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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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일컫는 책만 읽는 바보다. 책에 길이 있고, 그 길을 걸으면 참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다 책에 나온 길을 걸으며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고 술 마시면 더 큰 사람이 되리라 꿈꾸고 있다. 경희대 국문과를 나와 책 만드는 일을 하다 책 읽고 서평 쓰고 방송하는 일을 즐겁게 했다. 얼마 전까지 대학에서 교수 소리 들으며 살았는데, 분에 넘치고 적성에도 안 맞아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왔다. 지은 책으로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죽도록 책만 읽는>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등 다수가 있다.
이메일 : lkw10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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