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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7일 화요일

달걀 맞은 노무현, '폭탄' 터뜨린 정몽준


15.02.17 17:35l최종 업데이트 15.02.17 17:35l




언론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가 2월 22일로 창간 15주년을 맞이합니다. 돌이켜보면, 오마이뉴스가 헤쳐온 길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사다난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오마이뉴스 15년의 역사를 100대 기사와 사건으로 풀어 5회에 걸쳐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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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왼쪽)와 시사평론가 유창선 박사가 2002년 3월 24일 춘천 호반체육관에서 열린 새천년민주당 강원 경선을 생중계하고 있다.
ⓒ 이종호

[21]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 현장중계 (2002. 3. 16)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은 정당 사상 최초의 '국민참여' 이벤트였다.

오마이뉴스는 광주 경선부터 동영상 생중계를 시작했다. 이날 노무현 후보가 이인제 후보의 대세론을 무너뜨리고 1위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고 오마이뉴스 생중계의 인기도 덩달아 뛰었다(http://omn.kr/bn5e). 

앵커와 해설자가 스포츠 중계를 하듯 5시간의 정당 행사를 전한 것도 새로운 형식의 실험이었다. 경선이 주말마다 열리면서 평일의 절반 수준이던 주말 조회수가 평일 조회수를 오히려 웃돌기도 했다. 페이지뷰는 16일 광주의 325만을 시작으로 24일 강원 367만, 30일 경남 427만, 4월6일 인천 512만 건으로 껑충 뛰었다.

당시 공중파 방송사들은 특정 정당의 내부 경선을 생중계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마이뉴스는 오프라인 매체가 파고들 수 없는,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틈새 시장을 개척했다.

[22] 오마이뉴스 종이신문 창간호 발간(2002.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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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4월 30일 발행된 <주간 오마이뉴스> 창간호 표지
ⓒ 오마이뉴스
온라인 기반의 오마이뉴스가 오프라인 종이신문으로 영역 확장을 시도한 사건이었다.

온라인 콘텐츠를 종이신문으로도 배포한다는 아이디어는 창간 초부터 나왔다. 하지만, 2001년 2월19일 열린인터뷰 재개를 위해 궁여지책으로 문화관광부에 오프라인 주간지로 <주간 오마이뉴스>를 등록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초대 편집장은 <시사저널> 출신의 김당 기자였고, 창간호 커버스토리는 '백악관에 건네진 노무현 비(秘) 파일-미국은 한국 대선에서 손떼라'였다.

타블로이드판 64면으로 발행된 <오마이뉴스 2002>는 그해 말 대선을 겨냥해 지면의 80∼90%를 정치 기사로 채우는 '대선 테마신문'이었다. 주간 오마이뉴스는 이듬해 6월 13일 무가지로 전환됐다가 2011년 말 폐간됐다.

[23] "97년 이회창 아들 병역비리 '은폐 대책회의' 열었다"(2002. 5. 21) 

2002년 대선에서 파란을 일으킨 이회창 후보 아들 정연씨의 병역비리 보도는 고위층 병역 비리가 은폐되고 있다는 2001년의 연속보도에서 나왔다(http://omn.kr/bipz).

2001년 취재 과정에서 당시 군 수사기관 관계자들의 입에서 "수사 보조요원 중에 김대업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흘러나왔고, 이듬해 봄 김씨의 입에서 "정연씨 병적기록표가 위·변조됐고 '은폐' 대책회의도 있었다"는 진술이 나온 것이다.

보도 후 5개월 뒤인 10월 25일 검찰은 "이정연이 27세 나이로 군에 입대하게 되었던 점 등에 비추어 고의감량의 증거는 없으나 체중으로 병역면제를 받기 위해 노력했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병적기록표가 위·변조되었거나 은폐 대책회의가 열렸다고 볼 증거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특이한 것은 검찰이 사건을 정식 수사가 아닌 '내사 종결'로 처리해 관련 당사자들이 사건의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수사기록에 접근할 길 자체를 막았다는 점이다.

2005년 4월 29일 대법원은 일련의 병풍 보도와 관련한 한나라당의 민사소송에 대해 총 9000만 원의 배상 판결을 확정했다. 이후 한나라당과 오마이뉴스 모두 특검을 통한 재수사를 주장했지만 흐지부지되고 만다.

[24] 지만원 대 시민기자... 표현의 자유 한계는?(2002. 8. 24) 

2002년 8월 시사평론가 지만원씨의 신문광고, 특히 "광주사태는 소수 좌익과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일으킨 폭동"이라는 대목이 많은 이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권태윤 시민기자는 지씨에 대해 '분열적 정신상태', '야당이 집권하면 인정받고 출세할 수 있을 것이란 착각 속에서 이성을 잃고 마구 울부짖는다'고 지적했다(http://omn.kr/3wgr). 이에 지씨는 "나를 정신병자로 낙인찍어 개인의 명예를 고의적-악의적으로 훼손했다"며 고소했다.

2004년 6월 15일 서울지법 민사소송 1심은 "원고의 인격은 언론 비판의 자유에 속하지 않는다"며 권 기자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듬해 1월12일 서울고법의 판단은 또 달랐다. 문제의 기사가 일부 과장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씨가 신문광고를 게재한 경위, 내용, 표현 정도 등을 감안하면 기사 수준은 언론 자유의 용인된 범위 내에 있다며 권 기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같은 해 6월 9일 대법원(주심 고현철 대법관)은 지씨의 패소를 확정했다.

[25] 종로서 경찰들과 한총련 학생들의 친선 축구 경기(2002. 11. 10) 

'경찰과 수배자의 친선 축구'라는 해외토픽 같은 일이 벌어진 2002년이었다. 

오마이뉴스 주최 '대화가 있는 축구시합'에서 종로경찰서 상대 서총련(한총련 산하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팀에는 A급 수배자였던 서총련 의장 정종성, 서부총련 의장 이재희씨가 속해 있었다(http://omn.kr/bjm5). "법을 집행해야 할 경찰이 수배자와 어울려 공을 찼다는 사실은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는 질타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해 선거 바람 속에 큰 논란거리가 되지 않고 묻혔다.

이듬해 5월 7일 한총련 수배자 문제 해결을 위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주최 간담회에는 정부를 대표해서 법무부 김경수 검찰3과장이 참여하기도 했다. 강금실 법무장관은 2012년 10월 19일 여성신문 인터뷰에서 "서로 다독여주며 끝난 토론회를 보면서 어떤 주장의 옳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자리에 모여 수평적 판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실감했다"고 회고했다.

검찰은 2003년 7월 25일 내사·지명수배 중인 한총련 대학생 152명 중 79명을 불구속 수사 하겠다고 발표해 이 문제를 매듭지었다.

[26] '달걀 맞는 노무현' 포착한 카메라(2002.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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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걀 맞은 노무현 후보 지난 2002년 11월 13일 여의도 둔치공원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서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가 연설하는 도중 군중들 사이에서 날아온 달걀이 얼굴에 맞고 있다. 이날 농민, 학생 등 집회 참석자 일부가 여야 후보들이 자리잡은 연단을 향해 돌과 달걀을 던지는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후보가 직접 맞은 것은 노 후보가 유일했다. (주월간사진공동취재단)
ⓒ 권우성

대선을 5주 앞둔 2002년 11월 12일 서울 여의도 둔치에서 농민대회가 열렸다. 3파전에서 1등을 달리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불참했고, 민주당 노무현, 국민통합21 정몽준,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잇달아 연단에 올랐다.

노 후보가 "한국농업을 반드시 살려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연단으로 날아온 달걀이 그의 얼굴을 정통으로 맞혔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가 찍은 사진으로 그날의 사건은 더 유명해졌다(http://omn.kr/bl2g).

이틀 뒤 노 후보는 인터넷신문협회 토론회에서 "내가 정치하면서 계란을 세 번 맞았는데, 내가 계란을 맞고 나면 그 문제는 반드시 풀린다"고 웃었다. 실제로 그 사건은 노 후보에 대한 동정 여론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27] 일일 페이지뷰 1000만 뷰 돌파(2002 11.22)

12월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가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그리고 양자간 협상이 타결된 이날 오마이뉴스의 하루 페이지뷰는 1124만2139회를 기록했다. 방문객들이 갑자기 늘어나며 접속에 차질을 빚는 바람에 그해 11월 25일과 12월 9일 두 차례나 서버를 증설해야 했다.

[28] 오마이뉴스에 '촛불시위' 제안 기사 올린 앙마(2002. 11. 29) 

대선을 빼고 2002년 12월을 달군 가장 큰 이슈는 여중생 장갑차 사건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신효순, 심미선양이 훈련 중인 주한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사건이 한 여름인 6월 13일에 발생했다. 그러나 11월 20일과 22일 미 군사법원이 사건에 관련된 관제병과 운전병에게 잇달아 무죄 선고를 내리자 한미행정협정(SOFA)을 개정하자는 촛불시위가 불 붙었다.

11월 27일 온라인 공간에서 촛불시위를 처음 제안한 사람은 '앙마'라는 닉네임을 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김기보씨였다(http://omn.kr/bjr3). 그런데 문제는 김씨가 자신의 제안을 제3자의 주장인 것처럼 기사를 썼고, 오마이뉴스가 이 기사를 29일 정식 기사로 채택했다는 점이었다.

오마이뉴스는 그를 '2002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고, 해가 바뀐 뒤 누리꾼들의 지적이 있고서야 기사의 문제점을 알게 됐다. 오마이뉴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만큼 더 많은 책임도 감수해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준 사건이었다.

[29] 오마이뉴스 여론조사 보도가 거짓이라고? (2002. 12. 9) 

2002년 대선까지만 해도 여론의 소재와 흐름을 파악할 수 없는 '깜깜이 기간'이 무려 22일에 달했다. 여론조사 결과의 보도금지를 명시한 선거법 108조를 악용해 정당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엉터리 선거 판세를 내놓기도 했다.

오마이뉴스가 용기를 내보았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이 이회창보다 표본오차 이상으로, 두 여론조사 기관의 경우 두 자리 수 격차를 보인다"고 투표일 10일 전의 여론조사 경향을 보도한 것이다(http://omn.kr/bipy). 한나라당 서청원 대표는 이튿날 허위사실 유포 등 선거법 위반 혐의로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와 기자 2명 등 4명을 고발했다.

2013년 8월 22일 서울고등법원은 여론조사 공표 금지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 오 대표에게 벌금 50만 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2015년 6월30일 국회는 여론조사 공표금지기간을 22일에서 6일로 크게 줄인 선거법을 여야 합의로 개정했다. 오마이뉴스를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한 한나라당도 법 조항 자체의 전근대성은 뒤늦게 인정한 셈이다.

[30] 정몽준의 '폭탄'이 떨어진 날 1~24신(200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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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전박대 당한 노무현 후보 대선을 하루앞둔 2002년 12월 18일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고 발표한 가운데, 노 후보가 정몽준 대표 집을 방문했으나, 정 대표가 자고 있다는 이유로 방문을 거부당해 발길을 돌렸다.
ⓒ 이종호

2002년 대선판은 투표일 직전 정몽준 의원의 노무현 지지 철회 선언으로 다시 한 번 출렁이게 된다.

오마이뉴스는 18일 밤 10시30분 김행 국민통합21 대변인의 깜짝 발표 직후에 나온 1신부터 다음날 오후 2시의 24신까지 30분 단위로 속보를 쏟아냈다(http://omn.kr/bfoq). 기사를 본 독자들이 투표 종료 시점까지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전화를 돌리는 가운데 선거는 노무현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31] 자발적 유료화 시작(2002. 12. 27) 

오마이뉴스는 '대선 특수'를 대비해 급히 데이터서버를 증설했지만, 재정난으로 인해 중고 서버를 구입했다. 때문에 선거 이후에도 서버 하드디스크의 장애가 빈번했다. 오마이뉴스는 27일부터 30일까지 독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월 3000원의 자발적 유료화를 제안했다(http://omn.kr/7pqc). 그 결과, 5일 만에 6600만 원이 모이고, 2003년 4월까지 1억 6000만원이 적립됐다.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새 서버를 마련했음은 물론이다.

[32] "현대상선, 북한에 2240억 송금" 특종 보도(2003. 1. 29) 

김대중 정부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현대가 북측에 수천억 원의 자금을 보냈다는 설이 분분했지만, 실체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국정원 취재 전문 김당 기자가 현대상선의 대북 송금을 확인했다. 김 기자는 퇴임을 앞둔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마지막 확인을 시도했지만, 박 실장은 묵묵부답이었다. 현대의 대북송금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그의 태도를 본 김 기자는 정운현 편집국장에게 '확인했음'이라고 보고했고, 문제의 기사는 자정 직전 보도됐다(http://omn.kr/bndc).

박 실장은 "여기저기서 확인전화가 온다"는 박선숙 공보수석의 전화에 "응, (기자가) 여기 와있어. 근데, 기사를 다 써놓고 왔대"라고 남 말 하듯이 답변했다. 

김당 기자의 기사는 대북 송금 특검의 촉매제가 됐다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의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해 7월부터는 특검으로 촉발된 '박지원 현대비자금 150억 원 수뢰' 사건의 무죄 가능성을 추적 보도했다. 대법원은 2006년 9월28일 박 실장의 수뢰 혐의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33] 노무현 대통령 첫 인터뷰 보도(200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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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취임식이 며칠 남지 않은 지난 2002년 2월 22일 오전 대통령직 인수위 집무실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오연호 대표기자(가운데)와 김당 정치부장(왼쪽).
ⓒ 이종호

노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후 처음으로 인터뷰한 곳은 오마이뉴스였다(http://omn.kr/bnl6
).

"인터넷에 능숙한 세계 최초의 직선 지도자인만큼 인터넷매체와 인터뷰해야 의미가 있다"는 오마이뉴스의 요청에 노 대통령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당선 후 첫 인터뷰도) 노무현 방식으로 해야지"라고 화답했다.

노 대통령 인터뷰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정부의 가판신문 구독을 중단하고 소주 사주며 기사 빼달라는 얘기하지 않겠다"는 등 언론개혁에 대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언론의 '서열'을 무시한 그의 선택을 불편해했던 오프라인 매체, 특히 신문들이 크게 반발했다.

[34] 국정원 간부 단체사진 공개 파문(2003. 6. 20) 

오마이뉴스는 6월 20일 오후 7시경 노 대통령의 국정원 방문 스케치를 담은 김당 기자의 기사에 외부에 공개되서는 안 되는 중간간부 22명의 단체 사진을 게시했다가 39시간이 지나서야 삭제했다. 김 기자는 문제의 사진이 오마이뉴스에만 제공된 사실을 모르고 청와대의 보안의식을 질타하는 기사를 썼다가 더 큰 여론의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3일 뒤 회사 차원의 사과문을 내고 해당 기자(정직 1개월)와 편집국장(감봉 3개월)에게 자체 징계를 내렸다. 하지만, 청와대가 출입기자 교체를 요구하는 등 양측의 긴장이 지속되기도 했다.

[35] 시사저널-미디어리서치 '영향력 있는 언론매체' 6위(2003. 10. 20) 

시사저널이 매년 정·관·학·언론계 등 전문가 그룹 상대로 실시해 발표하는 '언론매체 영향력' 설문조사는 언론계의 관심거리였다.

오마이뉴스는 창간 첫해인 2000년 10위, 2001년 8위를 기록하다가 2003년 이후 3년 연속 6위까지 올라갔다. 상위 언론사는 KBS와 조선일보, MBC, 동아일보, 중앙일보였다. 당시 미디어오늘은 "내부에서 온라인매체 등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강했는데 이번 조사결과는 전문가 그룹에서도 SBS보다 온라인매체의 영향력을 인정한다는 의미 아니냐"며 8위를 기록한 SBS 보도국 기자의 우려 섞인 반응을 전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해 매체 영향력 조사에서는 14위에 머물렀다.

[36] 오마이TV 개국(2003. 11. 8) 

그 동안 외주 형태로 운영되던 오마이TV가 정식으로 개국했다. 지원자 168명 중 최종합격한 개국 요원은 4명이었다. 2015년 현재 오마이TV 상근기자는 8명으로 개국에 비해 두 배 늘어났다.

[37] 누리꾼들 성원으로 미국에 간 '백범 암살' 취재팀(2003. 11. 28)  

2007년 11월 16일 타계한 권중희씨는 생전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 행방을 찾아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박도 기자의 연재기사를 통해 그가 "죽기 전에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 있는 백범 관련 기밀해제 문서를 보고싶다"고 하자 그의 미국행을 돕자는 누리꾼 모금 캠페인이 시작됐다. 두 달 만에 4036만 원의 성금이 걷혔는데, 미국과 독일의 유학생부터 일당 노동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다(http://omn.kr/bnme).

그러나 노근리 사건이 파장을 일으킨 후 김구 암살 사건의 내막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들 대부분은 미국 CIA와 국무성이 수거해간 사실이 뒤늦게 확인돼 그들의 취재는 시도에 만족해야 했다.

[38] 한-칠레 FTA 비준 경제5단체 배너광고 파문(2003. 11. 20) 

오마이뉴스 메인 화면에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을 촉구하는 경제5단체(한국무역협회·대한상공회의소·전국경제인연합회·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한국경영자총협회)의 배너광고가 걸리자 독자들과 시민기자들의 항의가 촉발됐다.

오마이뉴스의 논조는 FTA에 비판적이었으나 "독자들이 광고와 기사를 별개로 볼 수 있겠냐"는 반론은 편집국 내부에서도 터져 나왔다. 오마이뉴스는 하루 만에 팝업 대신 메인면 상단의 '의견' 형식으로 광고를 바꿔 걸었지만, 12월 3일 인권운동사랑방이 기자회원을 탈퇴하는 등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민언련의 기관지 <시민과언론> 2003년 11/12월호에서 건국대 언론홍보학과 황용석 교수는 "신문의 역사 자체가 이념형 정파지에서 대중지로 나아갔듯 '대안매체'로 출발한 매체들이 '주류매체'로 변모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며 "초기 오마이뉴스의 역할을 또 다른 대안매체가 대신해야 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39] 온라인 생방송 '뉴스게릴라 라디오 습격사건'(2003.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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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2월 11일 오후 종로구 내수동 <오마이뉴스> 스튜디오에서 뉴스게릴라 3만명 돌파를 기념하는 온라인 생방송 '뉴스게릴라 라디오 습격사건'이 오연호 대표기자와 송민성 뉴스게릴라의 진행으로 2시간여동안 진행됐다.
ⓒ 권우성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3만 명 돌파를 기념하는 특별 이벤트의 진행은 오연호 대표와 송민성 시민기자가 맡았다. 3만 번째 시민기자는 목포의 퇴임 교원 장생주씨였다(http://omn.kr/bnnv).

[40] 오마이뉴스 노동조합 결성(2003. 12. 11)

"오마이뉴스에는 왜 노조가 없냐?"는 외부의 물음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 왔다. 

노조원 32명이 참석한 창립 총회에서 임기 2년의 초대 노조위원장에는 당시 입사 3년차였던 황방열 기자, 회계감사에는 김미선 편집부 기자가 각각 선출됐다(http://omn.kr/2i1s). 황 위원장은 2010년 9월 29일 기자협회 오마이뉴스 초대 지회장에도 선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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