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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7일 금요일

사회주의자의 딸, 역사의 상처 견디고 가다

등록 : 2015.02.27 20:35수정 : 2015.02.2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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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전 7시20분께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김종필 전 총리 부인 박영옥씨의 발인식이 치러졌다. 김 전 총리, 딸 김예리(오른쪽 셋째)씨, 며느리 김리디아(오른쪽 둘째)씨, 박씨의 동생 박준홍(맨 오른쪽) 전 친박연합 대표 등 유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JP 부인 박영옥씨 장례식

▶ 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 박영옥(86)씨가 지난 21일 숨졌다. 발인은 25일이었다. 충남 부여의 김 전 총리 가족묘지에 묻혔다. 남편은 거물이었지만 본인은 겉으로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삶도 쉽지 않았다. 역사가 그의 가족에게 상처를 남겼다. 주로 ‘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 등으로 불린다. ‘사회주의자 박상희의 딸’이기도 하다. 그의 장례식장을 지켜봤다.
그는 그냥 자기 자신으로는 기억되지는 못했다. 24일 오전 11시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층에 화환이 늘어서 있다. ‘대구 신명여고 35회 동창회’ 화환 앞을 지나치면 빈소 입구가 보인다. 495㎡(150평) 넓이의 30호실 빈소 입구에 걸린 ‘근조-고 박영옥 여사 장례식’ 플래카드 아래 기자들이 서 있다. 부조함 옆에 ‘부조는 정중히 사양합니다’라는 글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영정 좌우에 화환이 늘어서 있다. 영정 왼편에 차례대로 노태우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정의화 국회의장, 이완구 총리의 화환이 있다. 오른편에 박근혜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의 화환이 서 있다. 오전 11시 남편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주로 빈소 안 내실에서 휠체어에 앉아 조문객을 맞았다. 김 전 총리의 부인 박영옥씨의 5일장 내내 조문객이 오고 갔다. 박씨는 서울 순천향대학 병원에서 21일 밤 숨졌다. 척추협착증과 요도암으로 투병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는 21일부터 5일장으로 치러졌다.
부모 박상희-조귀분, 황태성 소개로 결혼
박씨는 일단 ‘김종필의 아내’였다. 24일 오후 1시25분께 조문하고 나온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은 “(내가) 중구 국회의원이 된 이후 세배 가면 여사님이(박영옥씨가) 늘 차도 타주시고 잘해주셨다. 해마다 세배하러 갔다”고 <한겨레>에 말했다. 나 의원은 “정갈하게 내조하지 않았을까”라고 덧붙였다. ‘정갈하게 내조한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 박씨에 대한 주된 기억일 것이다. 김 전 총리는 두차례 총리를 지냈다. 1971년 6월~1975년 12월 처음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치적 연합 이후 1998년 8월~2000년 1월 두번째로 총리직을 수행했다.
박씨는 누군가의 아내이기 전에 잘 교육받은 ‘신여성’이었다. 박씨는 1929년 9월26일 경북 선산군에서 박상희·조귀분 부부의 장녀로 태어났다. 출신 소학교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9년 대구 신명여학교(현 신명고)에 35회로 입학했다. 신명여학교 앞에 ‘영남 최초의 여학교’라거나 ‘근대 여성 교육의 산실’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1907년 미국 장로교계 선교사가 설립했다. 민족교육 학풍이 강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인 3월8일 전교생이 ‘대구 3·8 만세 운동’에 참가한 사건이 유명하다. 고등교육을 받은 ‘배운 여자’는 그때 극소수였다. 국가통계포털에서 ‘교육정도별 인구 및 비율’ 자료를 보면, 1955년 당시 여고생은 5만5300명으로 전체 여성 인구의 0.5%였다.
고 박영옥씨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자료 사진
부모 둘 다 교육받은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아버지 박상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으로 진보적 민족주의자·독립운동가였다. 사회주의자로 불러도 틀리지 않다. 박상희는 1906년 경북 칠곡군 약목면 관남리에서 5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7남매 중 재능이 뛰어난 박상희와 박정희 전 대통령만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셋째 형인 박상희를 많이 따랐다고 알려져 있다. 1927년 2월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 ‘신간회’가 만들어졌다. 박상희는 신간회 활동을 했다. 1930년대 <조선중앙일보> 대구지국장, <동아일보> 구미지국장 등을 했다.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동맹에서 활동하다 194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1929년 박상희는 김천 출신의 조귀분과 결혼했다. 1908년생인 어머니 조귀분도 진보적 신여성이다. 대구 신명여학교를 졸업했다. 김천에서 야학교사를 하다 독립운동가 황태성의 소개로 박상희와 결혼했다.
박씨는 대외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24일 장례식장에서 만난 과거 자민련(자유민주연합) 시절 비서관들의 말을 종합하면, 가끔 테니스를 치는 것 외에 별다른 취미도 없었다. 교회나 절에 나갔지만 내조의 일환이었다. <동아일보> 1980년 3월1일치 기사에 ‘박 여사의 모습은 건강하고 단정하다’고 묘사된다. 박씨는 이 인터뷰에서 “나는 활달한 여장부도 못 되고 여권운동에 나선 적도 없어요. 단지 여필종부라는 말을 되새기며 남편의 길을 따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정치를 모른다”고도 했다.
25일 아침 6시25분 빈소 옆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검은색 양복에 검은 넥타이, 쥐색 헌팅캡을 쓴 김 전 총리가 휠체어를 타고 빈소로 들어갔다. 갈색 레이밴 선글라스 아래 보이는 입을 다물었다. 아들 김진(54) 운정장학회 이사장, 딸 예리(64)씨, 남동생 박준홍(68) 전 친박연대 대표, 손자·손녀 등 상주 12명이 발인식을 시작했다. 김상윤 전 총리 특별보좌역의 설명을 종합하면, 21일 오후 8시43분 고인이 세상을 떠나던 순간 김 전 총리 등 가족 20여명이 함께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은 장례식장 후문에서 발인식과 노제를 했다. 상조업체가 준비한 검은색 ‘링컨 타운카’ 운구차와 영정을 실은 벤츠 s600 차량이 병원을 떠난 것은 아침 7시20분께였다. 서울추모공원에 들러 화장을 했다. 운구차는 오전 11시40분께 충남 부여로 향했다.
박씨는 역사에 상처입었다. 시대가 강퍅했다. 이념의 시대였고 모순의 시대였다. 남로당 활동을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의 최측근인 김 전 총리는 권력이 안정화되기 전까지 좌파 아니냐는 의혹을 야당에서 받았으나 훗날 비판자를 좌파로 몰아붙여 탄압하는 모순을 저질렀다. 95살의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이 24일 오후 1시 조문했다. 지팡이를 짚고도 잘 걷지 못했다. 기자들의 질문에도 직접 말하지 못했다. 부축하던 비서가 “(김 전 총리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고 짧게 답했다. 백 전 총장이 1948년 군부의 남로당 색출 때 적발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죽을 위기에서 구했다.
1961년 12월30일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부인 박영옥씨와 방한한 미국 영화배우 대니 케이와 만났을 때, 박씨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정치를 모른다고 했지만, 아마 박씨는 정치와 이념의 비정함을 알았을 것이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1950년까지 극심한 이념 대립이 있었다. 박상희는 좌우통합을 주장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했다.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미군정에 항의하는 ‘대구 10월사건’이 벌어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대구 10월사건 관련 진실규명 결정서’를 종합하면,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으로 정의된다. 박상희는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자나 극좌파가 아니라 중도좌파로 알려져 있다. 호방하며 인간적 매력이 컸던 인물로 전해진다. 경찰과 시민을 중재하다 경찰 발포로 10월6일 숨졌다. 장녀 박씨가 열일곱살 때였다. 김 전 총리의 장모 조귀분씨는 박씨를 포함해 5녀1남의 자녀들을 혼자 어렵게 길렀다. 대구 신명고 설명을 종합하면, 박씨는 뒤늦게 1949년 대구 신명여고에 입학해 1952년 졸업했다.
지난 21일 저녁 8시43분 별세
쿠데타-2인자-국무총리 등
남편은 현대사의 거물이었지만
부인은 조용하고 가정적이었다
“정치인 아내지만 정치 모릅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따랐던
진보적 민족주의자 박상희의 딸
대구10월사건 때 중재하다
경찰 총 맞은 아버지 죽음 아파해
그걸 알고도 제이피는 결혼했다
피학살자 유족회 도운 어머니 조씨
1950년 6·25가 벌어지자 박 전 대통령과 김 전 총리는 육군 정보국에서 함께 근무했다. 육군 정보국이 대구에 주둔하던 당시 김 전 총리는 박씨를 처음 만났다. 김 전 총리는 첫 만남을 이렇게 기록한다. “어느 날 문을 확 열고 나오다가 (육군본부) 사무실 앞에서 서성거리는 여인과 마주쳤다. 순간 마음에 모닥불과도 같은 강렬한 열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누구를 면회 오셨습니까?’ ‘저…실장님을….’ 여인의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어 올랐고 그것이 하나의 환한 달덩이와도 같이 황홀하게 어려왔다. ‘어떻게 되십니까?’ ‘저…조카가 찾아왔다고 하시면….’ ‘네 알겠습니다.’”(<비원의 번영탑>·진명문화사·1967)
김 전 총리는 소위였고 정보실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령이었다. 김 전 총리와 박씨는 1951년 2월 대구에서 결혼했다. 연좌제 피해자가 될 위기에 있던 사회주의자의 딸과 방첩이 임무인 육군 정보국 장교가 결혼한 것이다. 박씨는 김 전 총리의 배려로 1956년 숙명여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졸업하지는 못했다.
1960년 4·19가 일어났다. 6·25 때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이 북한군과 남한군 양쪽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국군 양민학살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피학살자 유족회를 결성해 국가 차원의 조사와 배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제시대 야학 활동가였던 김 전 총리의 장모 조씨는 이때 역사에 등장한다. 피학살자 유족회 일을 도왔다. 1960년 피학살자 유족회에서 활동했던 학살 피해자 유가족 김하종씨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60년 당시 대구시 동성로에 있던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 사무실에서 소위 몸뻬를 입은 조○○를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몸뻬 아줌마로 불렸으며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의 부녀부장, 또는 선산유족회 부녀부장으로 활동했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조○○’이 ‘조귀분’이다. 학살에 참여한 극우단체 회원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61년 5·16 쿠데타 뒤 상황이 정반대로 변했다. 당시 ‘혁명공약’ 1항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 것이었다. 김하종씨는 쿠데타 뒤 판결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2010년 재심을 청구해 뒤늦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하종씨는 24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나는 1960년 경주 피학살자 유족회와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에서 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산에서 군수사령관을 했다. 김 전 총리의 장모 조귀분씨가 대구의 경북유족회 사무실을 찾아 만났고 이후 조씨 집 등에서 모두 4번쯤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당시 조씨가 ‘사위가 울산유족회에 차량지원을 해줬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조씨는 연좌제의 피해자가 될 뻔한 시동생이 대통령이 되고 그의 측근인 사위가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비판자를 연좌제로 처벌하는 모순된 시대를 조용히 살다가, 1993년 11월 숨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이자 김종필 전 총리 부인 박영옥씨의 아버지인 박상희는 대구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진보적 민족주의자·독립운동가였다. 박준홍 전 친박연합 대표 제공
김 전 총리와 박씨는 금실 좋기로 유명하다. 김민하 세계일보 회장,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씨,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조문한 자리에서도 김 전 총리는 고인을 떠올리며 다시금 눈물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김 전 총리의 회고록이나 숱한 언론 인터뷰 어디에서도 장인의 불행한 죽음을 언급하지 않았다. <동아일보> 1967년 5월27일치에 당시 국회의원 선거 유세 중이던 김 전 총리가 경북 구미의 공동묘지에 ‘비석도 마련돼 있지 않았’던 장인의 묘소를 참배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기사는 박상희씨가 <동아일보> 구미지국장을 했다는 사실만 주민의 입을 통해 전할 뿐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 활동이나 건준 활동, 대구 사건 등은 소개하지 않았다.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에 운구차가 도착한 것은 25일 오후 2시20분께였다. 유골 안장식이 열렸다. 수백명의 마을 주민이 지켜봤다. 안장식 현장에서 만난 고인의 남동생 박준홍 전 대표는 박씨에 대해 “고인은 무척 가정적이었다. 아들, 딸, 남편 등 가족을 먼저 생각했고 배려했다. 공식적 모임은 피했다”고 전했다. 일기나 회고록을 따로 남기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박 전 대표에게 ‘아버지(박상희)의 불행한 죽음을 고인이 언급한 적 있느냐’고 묻자 박 전 대표는 “(박씨가) 많이 가슴 아파했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고 답했다. 박 전 대표는 부친 박상희씨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여운형의 건준에 참여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중도좌파’ 정도의 이념지향을 지녔다는 견해다. 박 전 대표는 “아버지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건준이 너무 왼쪽으로 가자 그 과정에서 황태성씨와도 결별했다”고 말했다. 황태성은 경북 출신의 사회주의자로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따랐다고 알려진다. 월북해 북한에서 무역상 서리 직위까지 올랐다. 5·16 쿠데타 뒤 1961년 8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만나겠다며 남한에 내려왔으나 1963년 10월 대선에서 박 전 대통령이 당선된 뒤 사형됐다. 박 전 대표는 아버지가 대구사건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것은 사실이 아니며 데모대와 경찰을 중재하다 사망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김 전 총리가 결혼 당시 장인의 불행한 죽음을 알고 있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물론이다. ‘장인은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는 말을 가끔 했다”고 말했다.
“기쁨보다는 어려움이 많았던 세월”
오후 2시30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가족묘지의 ‘김해김공위종필배고령박씨위영옥지묘’라고 적힌 비석이 햇빛에 반짝였다. 비석 앞에 선 김 전 총리의 선글라스에 흐릿하게 비석이 비쳤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면 기쁨보다는 어려움이 많았던 세월이었지요.”(<동아일보> 1980년 3월1일 박씨 인터뷰). 쿠데타로 반공국가를 만들었으나 진보적 인물까지 포섭해 공화당을 만들고자 했던 모순된 남자의 아내, 불행하게 숨진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딸, 박근혜 대통령의 사촌, 1남1녀의 어머니, 1949년에 흔치 않은 여고생이던 한 여성은, 86년의 삶을 마치고 25일 오후 땅에 묻혔다. 김 전 총리는 사후에 국립묘지 대신 박씨 옆에 묻히겠다고 밝혔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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