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일터에서 지지 않는 법>
.이명선 기자 | 기사입력 2024.05.05. 19:58:48
'프리랜서'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여성 노동자'가 됐지만, 정작 '노동자'라는 인식은 부족했다. 갑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갔다. 못 마시는 술도, 갑이 권하면 게워 내면서까지 먹었다. 갑이 목숨줄을 쥐고 있었다. 프리랜서 생활은 그랬다. 그나마도 20대 후반이 되자 일감이 줄었다. 갑이, 더는, 부르지 않았다.
번듯한 회사의 공개채용(공채)을 통과한 '여성 노동자'라고 달랐을까. 출산 휴가를 다녀온 친구는, 복직 후 자신의 책상에 온갖 서류 더미가 쌓여 있는 걸 보고 망연자실했다. '남성 노동자' 후배에게 진급이 밀린 언니는 7년 가까이 해온 홍보직이 아닌 현장직을 발령 받았다. 친구도, 언니도 결국 몇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회사를 그만뒀다. 두 사람의 퇴직은 자발적이었을까? 강요당한 것이었을까?
책 <일터에서 지지 않는 법>(페.페.로. 지음, 숨쉬는책공장 펴냄)은 나와 친구와 언니와 같은 '여성 노동자'들의 사회 생활을 위한 실전 가이드북다. 채용 단계에서부터 이뤄지는 성차별, 퇴직 항목까지 제대로 읽어봐야 하는 근로계약서, '증명'하지 않고 생리휴가 쓰는 법, 직장내괴롭힘 등이 실제 사례와 함께 자세하게 담겨 있다.
책의 공동 저자인 이슬아, 최여울, 여수진, 김한울 등 4명의 여성 노무사들은 노동인권실현을위한노무사모임(노노모)에서 인연을 맺은 뒤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고민하며 공부 모임을 만들었고, 이후 '페미니스트 노동자를 위한 노동법'이라는 강의를 계기로 '페.페.로.'라는 모임 이름을 만들어다. '페.페.로.'는 '페미니스트 노무사가 페미니스트 노동자에게 알려주는 노동법'의 앞 글자를 딴 말이다.
"남자 친구는? 결혼은? 출산은?"
'남자 친구 있어요?' '결혼은 언제?' '출산 계획 있어요?'(일명 '결남출') 여성 노동자라면 듣고 또 들었을 질문이다. '요즘도 그런 걸 묻는다고?'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결남출_그만 물어봐'는 채용 성차별을 고발하는 여성 시민단체 구호였다.
부산여성회가 2019년 6월부터 8월까지 부산지역 5인 미만 사업장 남녀 근무자 327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와 심층 면접을 한 결과, 10명 중 3명 이상(35.3%)이 채용 면접에서 직무능력과는 관계가 없는 '결남출' 질문을 받았다고 답했다.
여성 노동자를 향한 결혼과 출산에 대한 질문, 시간이 흘렀다고 다를까. 취업준비생들이 자주 찾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결남출'에 대한 고민이 올라온다. '면접 앞두고 있습니다. 남자 친구 있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요?'와 같은….
그나마 "채용공고에서의 성차별은 '채용공고'라는 명확한 물증이 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 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은 그렇지 않다". 기업들은 남녀 채용 비율을 정해놓는다거나 남성 지원자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거나 여성 지원자의 점수는 깎거나 하는 식으로 여성을 걸러내기 위한 갖가지 채용 꼼수를 쓴다. 하지만 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은 입증이 어려울 뿐 아니라 입증한다고 해도 최대 500만 원 벌금이 고작이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채용 성차별을 제대로 규제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 잇따르자 2018년 5월 24일 심상정 의원을 비롯한 12인은 고용상 성차별 처벌 강화에 대한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고용상 성차별 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이다. 2018년 8월 28일 환경노동위원회 역시 성차별적 채용 문제 방지를 위해 벌칙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으나, 2024년 3월 현재까지 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위의 책, 92쪽)
채용 단계부터 시작된 성차별은 어엿한 노동자로 자리 잡은 뒤에도 임금과 승진 격차로 이어진다. 2006년부터 남녀고용평등을 촉진하기 위한 '적극적고용개선조치(Affirmative Action)', 즉 AA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업의 '자율'에 맡겨진 제도이기 때문에 한계가 뚜렷하다. 심지어 경영계 화두인 'ESG경영'에도 사회적 책임의 일환으로 성평등한 일터 만들기가 있지만, 기업의 '양심'에 기댈 수밖에 없어 한계가 명확하다.
한국은 2022년 기준 남녀임금 격차가 31.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악이다. 그리고 이 기록을 27년째 보유하고 있다. 이는 27년째 남녀의 임금 격차가 줄어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읽어보고 서명하세요"
아르바이트생 1명이 전부인 작은 사업장이라고 해도 근로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근로계약서 미작성은 최대 500만 원까지의 벌금이 부과되는 범죄에 해당한다. 또 노동자들은 근로계약서 미작성이라는 범죄를 고용노동부에 신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근로계약서는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 것일까. "읽어보고 서명하세요"라고 하지만, 꼼꼼히 읽어보고 서명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선, '계약기간'과 '임금'은 꼭 확인해야 한다. "계약기간은 내가 정규직인지 계약직인지를 결정하는 사항"으로, "만일 계약서에 계약기간 종료일이 기재되어 있다면 이 부분은 반드시 삭제를 요청해야 한다". 임금의 경우, 보통 총액만 확인하지만 임금의 구성 항목 또한 잘 살펴봐야 한다. 연장근로수당, 휴일근로수당, 연차수당, 식대, 상여금 등이 포함되어 있는지 말이다. "임금 총액만 놓고 봤을 때는 임금이 높은 것처럼 보여도 시급으로 환산하면 최저시급에 미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음으로, 근로계약서에 있는 내용이라고 무조건 오케이하면 안 된다. "근로계약의 양 당사자는 회사와 노동자 개인이다. 그런데 회사와 노동자 개인은 '힘의 균형'에서 결코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근로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근로계약서상 퇴사와 관련된 규정은 주로 노동자가 퇴사를 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만둔 뒤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만두겠다'고 말한다고, 사직서를 냈다고 바로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근로계약서 퇴사 항목의 '퇴사 통보 시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한 달 전에 통보하도록 되어 있으며, 간혹 2주 전에 통보하도록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고로, 회사가 승낙해 주지 않으면 마음이 이미 떠났어도 이직을 할 다른 곳이 있더라도 그만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특히 '퇴사에 대한 손해배상' 규정이 있는지, '퇴사 후 노동자가 다른 회사에 취업하거나 혹은 자영업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다면 더더욱….
"생리를 '증명'하라"고?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정이 있고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여성 노동자의 노동 가치가 하락되는 것도 서러운데,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생리휴가를 쓰기 위해 생리를 '증명'해야 한다면?
아시아나 항공 승무원들의 생리휴가 쟁투기가 대표적이다. "회사는 2014년 4~12월 생리휴가 신청자 중 약 50%에게만 휴가를 허용했다. 그 이듬해 1~4월 신청자 중에는 약 20%만 생리휴가를 승인"했다. 이에 승무원 노조는 회사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노동청에 고발했는데, 이때 회사는 "생리휴가를 쓰려면 노동자들이 생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법원은 노동자들의 편이었다. 1심과 2심, 그리고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수천 전 아시아나항공 대표에게 잘못이 있다고 봤다. 대법원 3부는 지난 2021년 4월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수천 전 아시아나항공 대표의 상고심에서 벌금 2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근로기준법 제73조에 따르면 사용자는 여성 노동자가 청구하는 때에 월 1일의 생리휴가를 주어야 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판결에도, 여전히 생리휴가는 여성 노동자에게 '안 쓰고 만다'가 됐다. "2020년 전국지방공무원 중 생리휴가를 한 번이라도 사용한 사람은 단 1.9%에 불과했다."(2021년 기본소득당 신지예 의원실 발표 자료)
"나만 믿고 따라와. 잘 키워줄게"
직장 초년생에게 '나만 믿고 따라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잘 키워줄게'라는 상사의 말처럼 믿음직한 말이 또 있을까. 일을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이 말이 가스라이팅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터.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성격, 인격, 모든 것을 자기의 입맛대로 바꾸려 들고 통제하려 하는 행위는 당연히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서는 괴롭힘이다". 일명, 가스라이팅형 괴롭힘.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일터 괴롭힘 피해를 경험한 노동자가 전체 응답자 중 73.3%에 달했다. 10명 중 7명 이상의 노동자가 1년 사이에 일터 괴롭힘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는 뜻이며, 노동자의 노동 제공 기간 전체에 대해 질문한다면 더 많은 노동자가 괴롭힘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고 응답할 것이다.
이러한 일터 괴롭힘은 소수의 '이상한' 가해자에 의해 몇몇의 직장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효율적인 인사관리 방안(예컨대, 저성과자 퇴출 프로그램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넙무 배제 등)으로 활용될 정도로 보편적이다."(위의 책, 236쪽)
또한 직장 내 성폭력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대표적인 직장 내 성폭력이자 스토킹 범죄인 '신당역 살인사건'으로 발현됐다(2022년 9월). 직장 내 성폭력 혹은 스토킹은 피해자가 문제 의식을 느끼고 직장에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도 가해자와 피해자 간 분리 조처를 비롯한 내부 인트라넷을 통한 개인정보 유출 방지 등 현실적인 방지가 어렵다.
"서울교통공사 '젠더 폭력 사고'의 바탕에도 성차별적인 조직문화가 있었다. 2020년 서울시성별임금격차 공시에 따르면 서울교통공사의 여성 노동자 비율은 10.3%에 불과했고, 성별 임금 격차는 35.71%로 26개 기관 중 세 번째로 높았다. 동시에 회사는 구성원들 간 성차별적인 발언들을 너무 쉽게 용인하고 방치해 왔다. 생리휴가를 사용하는 여성 노동자에 대해 '왜 우리 사업장 여직원은 (생리휴가를) 월말에 쓰고 월초에 또 쓰냐'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추가 교대근무자로 여성 노동자가 오는 경우에 '남직원 받고 싶은데 여직원이 온다, 힘들어지니까 싫다'는 말들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조직문화에서 여성들은 움츠러들고 침묵하게 되며, 나아가 회사 내 신고 절차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위의 책, 246~247쪽)
여성 노동자가 여성의 목소리로 쓴 실전 가이드북
책 <일터에서 지지 않는 법>은 독자에게 노동 전문가의 정보 전달 이상을 제공한다. 같은 여성 노동자로,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일을 가감 없이 고백하며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이슬아 노무사는 노무사가 된 뒤에도 '아가씨'로 불리거나 '남성 노무사를 불러오라'는 무시를 당했던 경험, 또 자신의 어머니가 학습지 교사, 어린이집 보육교사, 요양보호사 등의 직업을 거치면서 겪은 방광염, 역류성식도염, 근골격계질환 등을 얘기한다.
최여울 노무사는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백화점에서 옷 판매를 할 때 근로계약서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예민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얘기하지 못한 일, 김한울 노무사는 영화관에서 평균 1일 1000장의 티켓을 팔며 300~400명을 상대하며 겪었던 감정노동과 '시간 또라이'였던 직장 상사의 가스라이팅 등을 전했다.
이에 더해 '남초' 조직으로만 알고 있는 건설노동자 직군에서 타워크레인 기사로 일하고 있는 김경신 씨,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자 작업치료사인 천은혜 씨·주정진 씨·전영은 씨, 대표적인 돌봄노동 최전선에 있는 보육교사 함미영 씨 등의 목소리를, 인터뷰를 통해 직접 들을 수 있다.
노무사 4인방이 각각 하나의 챕터를 맡아 총 4부로 구성된 책은, 내용이 일부 중첩되기도 하지만 노동법이라는 낯선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 책 중간중간 '지지 않는 법'이라는 코너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 노동자에게도 유용한 가이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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