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16년 2월 29일 월요일

예나 지금이나 민중의 희생과 선각자의 공로를 가로채는 사람들

33인, 그들이 정말 ‘민족대표’일까
예나 지금이나 민중의 희생과 선각자의 공로를 가로채는 사람들
김갑수 | 2016-03-01 09:44:15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기미독립선언은 2·8독립선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독립선언의 배경에 일찍부터 중국과 노령으로 건너가 개인의 영달을 포기한 채 목숨 내놓고 활약했던 선각 항쟁가의 결정적인 공헌이 있다는 것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1918년 무오년 11월, 독립운동가 39명이 망라된 조선 최초의 독립선언문을 내놓았다. 이른바 ‘무오독립선언문’이었고 정식 명칭은 ‘대한독립선언문’이었다. 2·8독립선언문은 이 선언문을 전범으로 삼은 것이다.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게 하라.’고 요구한 이 선언문은 2천만 동포에게는 육탄 혈전을 주문했고 일제에 대하여는 무력적 대응을 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일면 선전포고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기미독립선언문이 손병희와 최남선의 의도로 온건하게 바뀌면서 내세운 명분이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말대로 과연 조선의 민중은 피를 흘리지 않았는가? 과연 누구를 위한 비폭력이고 무엇을 위한 질서 존중이었는지를 회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선언서에 서명한 대표 33인을 민족 대표라고 여기는 사람도 그 시대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나약성과 타협성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무단정치의 공포 분위기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선언서를 작성 배포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구국 행위였다. 그들의 용감한 활동이 전국 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운동 벽두부터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약속한 시간과 장소인 오전 10시와 탑골공원을 일방적으로 바꿔 버렸다. 그들의 말로는 폭동의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사후 공판의 변론에서 유효하게 작용했다. 그들은 오후 3시, 명월관이 이름을 바꾼 요릿집 태화관에서 모였다. 그들은 민중의 동향이 예상보다 거칠어지자 스스로 운동의 주도권을 놓아 버렸다.
그들 중의 다수는 국제 정세를 읽는 실력이 부족했다. 그런 나머지 그들은 적국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는 정도에 그쳤고 미국의 도움을 과신하는 타협적이고 의존적인 자세를 보였다. 특히 33인의 대표 격으로,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손병희는 이미 러일전쟁 때 ‘일본이 패망하면 동양이 파멸한다.’고 생각하여 일본에 군비 일만 원을 헌납한 일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운동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이해력이 현저히 부족했다. 민중은 자기들처럼 무슨 일을 흉내나 내고 그만 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실제로 그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도 않은 채, 한용운의 간단한 취지 설명으로 대신하고 곧장 요리를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포승에 줄줄이 달려가는 모습을 민중이 본다면 얼마나 감격할 것인지를 헤아리는 두뇌도 없었다. 그들이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인력거 대신 자동차를 요구하자, 일본 헌병의 일부는 혀를 찼고 나머지는 비웃었다고 한다. ‘사의 천박한 학생과 군중이 모였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손병희)’ ‘무식한 자들이 불온한 일을 할 것 같아서 (박희도)’ 장소를 변경했다고 그들은 법정에서 말했다.
이와 같은 점으로 볼 때, 그들 33인을 민족 대표라고 존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들을 가리켜 더 이상 민족 대표라고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국내 종교계 대표라는 칭호가 적합하다.
3·1운동의 주체는 중국 독립 운동가들과 방방곡곡의 초동급부들이었다. 그들은 비폭력 타협주의의 한계를 깨고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했다. 그들은 탄압에 대한 반발에서 그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폭압적 본질을 피부로 느낀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3·1운동이란 용어에도 문제가 있다. 조선인들은 3, 4월 두 달에 걸쳐 200만 명이 시위에 가담했고 7,500명이 생명을 조국에 바쳤다. 33인을 보고 비웃었던 일본 헌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은 바로 민중들이었다.
민중은 자발적으로 뭉쳤고 그 뭉친 이들 중에서 지도자가 나왔다. 33인은 길어야 3년의 옥고를 치렀지만 학생과 농민 지도자들은 15년씩이나 되는 무거운 형량을 받았다. 동학란이 아니라 갑오년 항쟁이라면, 3·1운동은 최소한 ‘기미년항쟁’으로 용어 변경을 해야 마땅하다.
어리석은 공동체는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한다. 예나 지금이나 민중의 희생과 선각자의 공로를 가로채 유명인사가 되는 사람은 많다. 어리석은 국민일수록 유명인사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점도 같다. 더민당과 국민의당과 정의당 사람들, 그들이 과연 야당일까? 여기에다가 정치인 이상으로 기만적인 지식인들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유명세를 타며 득세하고 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4&table=c_booking&uid=285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