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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4일 목요일

전쟁터 된 노량진 수산시장, 붉은 글씨로 가득


16.03.24 21:07l최종 업데이트 16.03.24 22:23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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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거중'이라는 글씨가 적힌 노량진 수산시장 벽면
ⓒ 박병학

3월 23일 오전 10시 40분, 노량진 전철역에서 수산시장으로 이어지는 육교를 지나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 한구석에 래커 스프레이를 하나씩 손에 쥔 장정들이 대여섯 모여 있었다. 주차장 벽면 이곳저곳에는 이미 '철거중', '위험', '신축으로' 같은 글자들이 붉게 휘갈겨져 있었다. 곧 장정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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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벽에 래커 칠을 하고 있다. (사진 : 칼라TV)
ⓒ 박병학

주차장에서 두 층을 내려가면 노량진 수산시장이다. 2층엔 상인들이 쓰는 사무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장정들은 계단을 내려가며 보이는 벽면마다 붉은 래커로 똑같은 글자들을 휘갈겼다. 

'철거 중', '위험' 

글자가 없는 곳은 'X'자로 채워졌다. 장정들을 발견한 상인들이 시장 여기저기서 호루라기를 불어댔고 성난 상인들 수십 명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2층으로 올라왔다. 장정들은 아랑곳없이 래커로 글씨를 쓰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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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 내벽에도 래커 칠을 하고 있다. (사진 : 칼라TV)
ⓒ 박병학

2층을 한 바퀴 훑으며 벽을 온통 붉은 글씨로 채운 장정들은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시장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상인들이 고함을 지르며 우르르 뒤를 쫓았다. 상인들과 잠시 몸싸움을 벌이던 장정들은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대신 상인들은 얼마 전부터 새로이 영업을 시작한 '신축 수산시장' 건물 입구로 밀고 들어갔다. 

장정들이 상인들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영업 방해하지 마시고 나가세요!" 상인들은 쫓겨났고 곧 방패를 든 경찰들이 몰려와 입구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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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건물 입구를 막아선 경찰들. (사진 : 칼라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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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협 측이 노량진 수산시장에 게시한 공고문. 상인들이 직접 공고문을 떼어 냈다.
ⓒ 박병학

시장을 사이에 두고 신축 건물과 반대편에 있는 주차장 앞으로 상인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집회가 벌어졌다. 상인들은 '노량진 수산시장 현대화 전면 중단!', '전통 노량진 수산시장을 꼭 지키겠습니다!'라는 글귀가 박힌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상인들 다 죽이는 현대화 사업 중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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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회를 열고 있는 수산시장 상인들.
ⓒ 박병학

3월 15일 이후, 수산시장은 전쟁터가 되었다

2004년경부터 추진되기 시작한 '노량진 수산시장 현대화 사업'은 2012년 수협중앙회가 시장 부지 옆에 새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다. 오랫동안 단층으로 있어 온 수산시장을 6층짜리 건물 안으로 집어넣겠다는 것이 수협의 계획이었다. 

지난해 말부터 수협은 거의 다 지어진 새 건물로 예외 없이 들어와야 한다고 상인들에게 통보했지만 상인들은 "새 건물에 들어가면 다 망한다"며 격렬히 맞섰다(관련 기사 : 새 노량진 수산시장... "저기 들어가면 다 망한다"). 결국 임대차 계약 만료는 3월까지 연기되었다.

계약 만료일인 3월 15일을 앞두고 일부 상인들은 새 건물로 들어가 영업을 시작했다. 현재 단층 수산시장 군데군데엔 이 빠진 듯 휑하니 비어 버린 자리들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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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 상인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현재 비어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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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매상인들 대부분은 여전히 새 건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수협이 "3월 15일 이후에는 명도 소송을 걸겠다"고 경고했음에도 상인들은 완강했다. 23일 집회 현장에서 만난 한 상인에게서 15일 이후의 상황을 들어볼 수 있었다.

"월요일(21일)부터 용역이 들어와서 건물 외벽에 폐쇄 경고문을 붙이고 래커 칠을 하고 있어요. 각 정당들이 걸었던 현수막도 다 찢었고요. 그게 다 불법이에요. 저희 상인들은 불법적인 행동을 한 게 전혀 없어요. 

수협은 현재 저희한테 아직 정식으로 명도 소송도 걸지 않았어요. 내용증명 하나 떨렁 보내 놓고서, 3월 15일 이후부터 너희들은 불법 점유다, 이렇게 나오는데 오히려 이게 불법 아닌가요? 이건 위화감 조성해서 저희를 내쫓으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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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글씨로 가득한 수산시장 벽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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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부터 투입되기 시작한 용역들이 시장으로 들어오는 화물 차량을 못 들어오게 막았어요. 해수(바닷물)하고 경매용 물건들 같은 것들이 들어와야 저희가 장사를 하는데 그걸 막은 거예요. 어제(22일)도 해수 차량을 용역들이 막았지만 저희 상인들이 몸으로 차량을 에워싸 겨우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수협 측은 자꾸 해수를 끊으려 해요. 밸브를 잠그기도 하고. 수족관에 해수가 안 들어가면 고기들 다 죽는데 저희들 장사하지 말라는 소리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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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뒤에 'security'라고 적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수산시장으로 들어오는 차량을 막아서고 있다. (사진 : 노량진수산시장 현대화비상대책총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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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할 때 필요한 얼음도 공급을 끊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비용을 부담해 얼음을 인천 쪽에서 따로 들여오고 있습니다. 얼음은 수협이 실수한 거예요. 저희가 얘네 얼음 다 팔아 주고 있었는데."

"쓰레기 문제도 있어요. 수협 측과 일부 상인들이 새 건물로 이사 가면서 무단 투기한 쓰레기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습니다. 그걸 저희가 비용까지 부담해 가며 다 치웠어요. 이미 25톤 차량 8대 분량이 나갔고 오늘도 두 대 분량을 작업하고 있습니다. 시장을 마비시키려고 고의적으로 쓰레기를 무단 투기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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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레기를 치우는 수산시장 상인들. (사진 : 노량진수산시장 현대화비상대책총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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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협 측은 저희가 공간이 좁고 임대료가 올라서 새 건물에 안 들어간다고 얘기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지금 총체적인 난국이에요. 새 건물 자체가 노량진 수산시장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 아닙니다. 설계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됐어요. 새 건물 가 보시면 천장에 다 구멍 뚫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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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외기를 연결하기 위해 천장에 구멍을 뚫어 놓은 새 건물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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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협 측에 요구합니다. 용역 철수시키고 저희 장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건 영업 방해나 다름없습니다. 수협 측은 지금 여러 가지 위법 행위를 알면서도 저지르고 있는데 저희도 변호사를 통해 고발 조치를 할 예정입니다." 

수협 측의 이야기 "상인들이 불법 점유를 하고 있다"

노량진 수산시장 현대화 사업을 담당하는 수협 측 관계자의 이야기를 전화를 통해 들어볼 수 있었다. 

- 시장에 용역이 들어와 있다는데.
"용역이 아니라 시설 관리업체 직원입니다. 현재 직원들 인력으로는 구시장까지 관리가 안 되니까 시설 관리업체를 따로 선정한 거죠." 

- 시장으로 들어오는 해수 차량을 막은 사실이 있는가?
"막은 게 아니라 다른 쪽으로 안내를 한 거예요. 그 해수 차량은 저희 쪽에서 처리가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들어왔습니다. 이러이러한 차량이 들어온다고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들어오게 해 드렸을 텐데 그런 과정이 없이 갑자기 들어오니 저희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막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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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부터 영업을 시작한 새 건물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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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 공급도 끊었다고 하는데 
"16일부터 얼음 공급을 끊었습니다. 새 건물에서 신시장이 운영되고 있는데 저희가 기존의 인력으로 구시장까지 관리할 여력이 없어요. 직원 수는 똑같은데 면적이 두 배로 늘었으니 관리가 힘듭니다. 얼음은 상인분들께서 자체적으로 구입을 하시겠다고 했어요."

- 쓰레기 무단 투기는?
"새 건물로 들어가신 분들이 다 치우고 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며칠 동안은 쓰레기들이 쌓여 있긴 했습니다. 구시장 쪽에 계신 상인 분들께서도 거기다 버리기도 했고요. 어쨌든 지금은 다 치워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현재 사태에 대한 향후 대책은?
"일단은 저쪽(구시장)에서 불법적으로 점유를 하고 계시는 건 사실이잖아요. 아직 명도 소송을 들어가진 않았지만 현재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쪽(신시장)으로 오시는 걸 희망하시면 그 부분도 병행해서 검토를 해야 할 거고요. 지금 비대위 분들 접촉을 해서 협의를 하고 있습니다. 몇 개월 동안의 갈등이 하루아침에 타결되기는 힘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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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산시장 내에서 집회를 열고 있는 상인들. (사진 : 노량진수산시장 현대화비상대책총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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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으로 쪼개진 시장, 어떻게 풀어 갈 것인가

수협 측은 '신시장'과 '구시장'이라는 언급을 통해, 새 건물로 들어온 일부 상인들과 기존의 수산시장에서 여전히 영업을 하는 상인들 사이에 선을 그었다. 그러나 상인들은 '수협'과 '상인들' 사이에 선을 긋는다. 수산시장이 반으로 쪼개진 것엔 누구나 동의하지만 어느 쪽과 어느 쪽으로 쪼개졌는지는 서로 의견이 다르다.

3월 23일, 용역 혹은 관리업체 직원이 시장 벽면에 래커로 붉은 글씨를 휘갈기고 있는 동안 새 건물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정례회의가 열렸다. 해양수산부, 서울시, 수협, 상인연합회가 참여한 그 회의에서는 앞으로 계속 협의를 해 보자는 가닥만 잡혔을 뿐 근본적인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수협 측은 상인들에게 무조건 새 건물로 들어오라 통보했고, 상인들은 수협 측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며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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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회를 열고 있는 수산시장 상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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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명도 소송도 걸지 않은 상태에서, 계고장 하나 없이, 어디선가 데려온 외부 직원들을 동원해 벽에 붉은 래커로 '철거', '위험'이라는 글씨를 휘갈기는 모습은 분명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철거민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철거촌에서 용역들이 쇠망치와 곡괭이를 들고 쳐들어오기 직전에 흔히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상인들은 수협 측이 동원한 '관리업체 직원'들을 서슴없이 '용역'이라 부르고 있다. 최악의 사태까지 치닫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합의가 도출되어야 한다. 

오는 4월 첫째 주에 노동당 서울시당 주최로 노량진 수산시장 현대화 사업의 현황을 짚는 공청회가 열릴 예정이다. 상인연합회 측은 "수협에 공청회 관련 공문을 보냈으나 참석하겠다는 답변을 받진 못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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