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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7일 월요일

탈핵, 일본 할매가 왔다!


조현 2015. 09. 07
조회수 282 추천수 0


“일본 정부도 언론도 숨기지만 후쿠시마 사고는 진행중”

팔순의 일본 탈핵운동가 동지  미토 기요코 사와무라 가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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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사와무라 가즈요 씨, 미토 기요코 씨.
 

때로는 나비의 작은 몸짓이 태풍이 된다. 나비처럼 연약한 두 할머니가 한국을 찾았다. 일본의 탈핵운동가 미토 기요코(80)와 사와무라 가즈요(80)다. 원불교환경연대 등 시민단체 초청으로 온 이들은 지난 1일 삼척을 시작으로 영덕, 서울, 부안, 위도, 영광 등 핵(원자력)발전소와 관련된 지역을 차례로 돌며 ‘탈핵, 할매가 간다’는 토크콘서트를 열고 있다. 삶이 곧 웅변인 두 할머니를 지난 4일 서울 용산 원불교 서울교당에서 만났다.

기요코는 아시아 탈핵운동가들의 정신적 사부로 불리는 미토 이와오 교수의 부인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를 통해 핵의 두려움을 인지한 이와오 교수는 1970년 도쿄대 교수 시절부터 일본의 핵발전소 건설 붐에 맞서 반핵 바람을 일으켰다. 협박이 난무했다. 어린 아들에게 “네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등의 편지가 오고, 어느 날은 잘린 손가락이 집으로 배달되기도 했다. 신변 위협을 느낀 가족은 오사카로 이사했다. 그러나 이와오는 반핵운동만은 중단하지 않았다.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과 86년 소련의 체르노빌 핵 사고가 잇따라 터지자 그는 일본 내 사고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러다 86년 12월 일본 알프스 스루기다케 등산에 나섰던 이와오는 물리학도였던 쌍둥이 아들과 함께 주검으로 발견됐다. 가장 먼저 현장에 출동했던 산악구조대장은 ‘이건 그냥 조난사가 아니다. 특수부대원에 의해 살해된 것 같다’고 귀띔했다.

가족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울지도 못했던 기요코는 배낭을 메고 외국을 떠돌았다. 그러다 2002년 대만에서 우연히 ‘핵발전소 필요 없다. 시모노세키 모임’의 대표 가즈요를 만났다. 그때 가즈요는 “마침 한국 서해 위도에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을 도우러 부안에 가는데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상당한 보상금 유혹을 뿌리치고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펼치던 주민 서대석씨를 비롯해 문규현 신부, 김인경 교무 등을 보고 감동을 받은 그는 노후 비상금 100만엔을 남몰래 기부하기도 했다.

그를 다시 깨어나게 한 것은 4년 전 후쿠시마 사고였다. 그는 “이런 엄청난 사고가 터졌는데도 남편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것을 보고야, 그가 죽은 게 틀림없다고 실감했다”고 했다. 그는 몇날 며칠을 오열로 보냈다. “그제야 남편이 뭘 하려고 했는지, 아들이 뭘 원했는지, 남편과 아들이 제 몸속으로 들어왔다. 세 사람 몫까지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요코의 남편은 고 이와오 교수
‘아시아 탈핵운동의 정신적 사부’
30년전 두아들과 의문의 사고사
“4년전 핵사고때 해야할 일 깨달아”

은행원 출신 주부였던 가즈요
“딸에게 평화세상 물려주고 싶어”
핵발전소 예정지 3곳 건설무산 앞장

그는 후쿠시마의 아이들이 더 이상 방사능에 피폭당하지 않고 교육받을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지라는 ‘아동 탈피폭 소송’을 제기하는 재판모임을 이끌었다. 또 오사카 인근 후쿠이현에 있는 다카하마 핵발전소의 영구 가동중지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경제와 생명을 같은 선상에서 얘기할 수 없다”는 멋진 판결문으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일본인들도 잊고 있지만 후쿠시마 사고 이후 긴급사태 선언은 지금도 해제되지 않았다. 정부는 일반인의 연간 방사능 피폭선량 한도를 1m㏜에서 20m㏜로 올리고, 식품은 500~1000배나 기준치를 올렸다. 식수는 무려 25만배나 올렸다. 후쿠시마 인근 18살 이하 거주자의 건강검진 결과 사고 전 100만명 중 1명꼴이던 갑상선암 발생자가 3000명당 1명꼴로 급증했다. 지금도 후쿠시마의 원자로 배관에서는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누출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코피를 쏟지만 일본 정부는 방사능과 코피는 아무 관련이 없다며 다시 핵(원전) 안전 신화를 설파하고 있다. 언론도 방사능으로 인한 인체 영향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있다.”

그는 “미국은 후쿠시마 사고가 난 뒤에도 일본이 절대 핵발전소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해왔다”며 “핵발전소의 플루토늄이 핵무기의 원료여서 동북아에서 군사적인 이유로 플루토늄 확보를 해둬야 한다는 논리다”라고 말했다. “일단 핵발전소를 가동하면 죽음의 재가 나올 수밖에 없고, 이 재를 없앨 방법은 없다”고 전제한 그는 “국가기관들이 국제 핵마피아와 결탁돼 있지만, 우리의 미래 세대에게 몇만년 동안 빚을 떠넘길 수는 없기에 우리 아이들을 위해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의 모든 종교집단에서 태평양전쟁 때 군국주의를 지원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회의를 갖고 믿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는 그러나 남편은 "독실한 크리스찬인 양친의 영향으로, `신 이외에는 두려운 것이 없다'며 `세상 그 어떤 것도 인간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해, 사람들에게 늘 따뜻했다"고 회고했다.

함께 온 가즈요는 고교 졸업 뒤 은행에 근무하면서 <부인공론>이란 여성계몽지 독자모임을 통해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일본이 핵 피폭 피해자만이 아니라 주변국에 대한 가해자였음을 알고 군국주의 교육 반대운동을 지지했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는 못하던 그는 “서른살에 첫딸을 낳은 뒤 내 아이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환경운동에 나선 그는 핵발전소 예정지 세 곳의 건설을 무산시켰다. 식민지 한국의 물자를 실어온 시모노세키에서 사는 그는 가족·친구들과 30여차례나 방한해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임진왜란 때 불탄 사찰 등을 돌며 참회의 순례를 했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부술 때는 “나도 망치를 들고 함께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그는 “운동은 노래도 불러가면서 즐겁게 해야 한다”며 “운동가들이 주민들을 가르치거나 좌지우지하려 들어서는 안 되고 주민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원해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가난하지만 용감한 두 할머니는 이번에도 사비를 들여 건너와 한국 운동가들을 격려하고 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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