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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6일 일요일

‘故 박현채 선생 20주기 추모행사’, ‘박현채 기념사업회’ 설립 추진

"민족적인 것은 민중적이고 민중적인 것은 민족적일 수밖에 없다"‘故 박현채 선생 20주기 추모행사’, ‘박현채 기념사업회’ 설립 추진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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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05  23:4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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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박현채 선생 20주기 추모행사가 5일 12시 충남 천안시 광덕면 천안공원묘역 고인의 묘소에서 진행됐다. 전국에서 온 50여 명의 참석자들이 추모행사를 마친 후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우리 상황에서 민족적인 것은 민중적이고 민중적인 것은 민족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충남 천안시 광덕면에 있는 천안 공원묘역 광활한 부지 정상 부근에 『민족경제론』의 저자인 고 박현채 선생의 묘가 있다. ‘밀양 박공 현채의 묘’라고 쓰여 있는 묘비 아래쪽에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복잡한 구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체득한 필생의 명제가 오롯이 새겨져있다.
전국 곳곳에 비 소식이 있던 5일 12시 이곳 박현채 선생의 묘 앞으로 각지에서 5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민족경제론의 스승 故 박현채 선생 20주기 묘소참배’ 추모행사를 개최했다.
기일은 8월 17일이지만 주로 모이는 이들의 연배를 고려해 한 여름 폭염을 피하는 묘수를 부렸다고 한다.
  
▲ “우리 상황에서 민족적인 것은 민중적이고 민중적인 것은 민족적일 수밖에 없습니다.”[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날 추모행사는 문국주 민주주의국민행동(민주행동) 조직위원장의 사회로 박현채 선생의 동생인 박영채 씨가 영전에 술잔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서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이 약력을 소개하고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 이사장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박현채 선생과 함께 고초를 겪었던 김금수 명예이사장은 추도사에서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지리산 빨치산) 문화부 중대장 시절에 품었던 현채 형의 이상과 목표는 희석되거나 변형되지 않은 채, 오히려 실천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었다”고 그를 기렸다.
이어 “오늘 우리는 현채 형 20주기 추모제를 맞아 현채 형 당신의 미처 이루지 못한 이상과 목표가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되살아나길 간절히 바라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바람과 다짐을 담아 현채 형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9남매의 첫째인 고인의 넷째 동생인 박영채 씨는 유족을 대표해 “큰 형님의 큰 뜻을 잊지 않고 헤아려 주어 감사하다”고 참석자들에게 인사했다.
고인의 부인과 자녀들은 지난 기일에 참배를 하고 이날 추모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 추모행사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후 서울과 광주에서 추모행사에 참석한 노희관 전남대 명예교수와 송희성 5.18민주여성회 회장,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 김영옥 범민련 중앙위원, 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 조성우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사장, 이호윤 서울대학교 민주동문회 회장 등 참석자들이 헌화하는 순서를 가졌다.
이날 하루종일 오락가락하던 빗줄기는 추모행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얌전하다가 행사가 끝나자 마자 쏟아지기 시작해 차량이 묘역을 벗어날 때까지 한동안 계속됐다.

참석자들은 20년 전 장례를 치르던 날에도 이렇게 비가 쏟아졌었다며 다시 한번 고인을 회고했다.
문국주 위원장은 올해 20주기를 맞아 늦은 감이 있지만 지난해부터 ‘박현채 기념사업회’ 설립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으며, 곧 성안해 발기인 모집 등 실무적인 준비를 거쳐 곧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내년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가칭 ‘박현채 상’ 제정에 대한 논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추도사
현채 형! 오늘 당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가족과 형과 오래도록 함께 지내며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 형을 기리기 위해 이렇게 형의 묘지 앞에 모여 섰습니다. 형이 우리 곁을 떠난 지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당신은 ‘아 박현채’하고 소리 내어 불러 보고 싶은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현채 형의 살아생전 역정이나 형이 남긴 저작에 대한 높은 평가는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서니 형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게 됩니다.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난 뒤, 한 선배의 자취방에서 여럿이 만나 쿠데타 이후의 정세변화와 앞으로의 민주민족운동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현채 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는 현채 형이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몇 년 선배쯤으로 알았지, ‘엄청난’ 경력을 지닌 사람인 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현채 형의 인상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범상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은 현채 형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현채 형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중앙정보부 취조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964년 7월 쯤 ‘인민혁명당’ 사건의 공범자 처지가 되어 한 오랏줄에 묶여 최조를 받으러 다니면서 다시 해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인연으로 현채 형과의 관계는 현채 형이 이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인연치고는 우연하지 않은, 질긴 편이었습니다.
현채 형은 모진 고문과 위압적인 취조 과정에서도 기죽거나 주눅 든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마치 자기 집 안방에서처럼 행동했습니다. 이를 테면, 담배도 음식인데 피의자들에게 음식을 굶겨서는 안 될 일이니 하루 담배 한 갑씩은 반드시 제공해야 한다고 우겨, 그 참에도 모두가 담배는 굶지 않았습니다.
정보부 취조를 마친 뒤, 검찰에 넘어와서도 취조는 정보부에서와마찬가지로 20일을 끌었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현채 형은 마치 거대 권력과의 대결이 신나는 일이라도 되는 듯 한 몸짓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검찰 취조가 거의 마무리되어갈 무렵, 담당검사가 피의자들의 인품 얘기를 늘어놓는 여유를 보였습니다. 그 때 검사가 혼잣말처럼 “당신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박현채 그 사람이 수상이 될 거야”라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감옥을 나와서 현채 형은 이 대학 저 대학에서 시간 강사 노릇을 했으며, 학문 연구와 원고 집필 그리고 민주화운동․사회운동․통일운동에 직접․간접으로 지원․지도를 계속했습니다. 특히 현채 형의 독자적인 이론 체계라고 할 수 있는 ‘민족경제론’은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 1980년의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고양된 민중운동 속에서 그 실천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현채 형은 1980년대 중반에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제기하면서 기존의 민족경제론과 국가독점자본주의 규정을 논리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현채 형의 학문적 연구와 그 성과는 어디까지나 실천을 전제로 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현채 형! 당신의 사상과 행동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형의 ‘산 생활’일 것입니다. 1969년쯤으로 기억됩니다만, 현채 형과 지식산업사 김경희 사장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현채 형은 정말 지겨울 정도로 지난날의 산 생활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현채 형은 내놓고 그런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문화부 중대장’이라는 그의 직책에 대해 내심으로는 긍지 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듯 했습니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일정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 말고도, 문화부가 정치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문화부 중대장이 품었던 꿈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현채 형은 ‘입산’하기 전인 중학교 시절부터 착취와 억압이 없는 인간해방 세상 실현을 위해 학습하고 실천해 왔음을 기회 있을 때마다 고백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문화부 중대장 시절에 품었던 현채 형의 이상과 목표는 희석 되거나 변형되지 않은 채, 오히려 실천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현채 형 20주기 추모제를 맞아 현채 형 당신의 미처 이루지 못한 이상과 목표가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되살아나길 간절히 바라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바람과 다짐을 담아 현채 형의 명복을 빕니다.
2015년 9월 5일.
김 금 수(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재배
故 박현채 선생이 걸어온 길
1934년 11월 3일 전남 화순군 동북면 독상리에서 태어남
1947년 광주수창국민학교 졸업 후 광주서중 입학,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활동 참가
1950년 10월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16세 나이에 빨치산으로 입산. 소년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이 사연은 훗날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조원제의 활동으로 묘사)
1952년 8월 하산 도중 복부관통상을 입고 토벌대에 체포, 석방
1954년 전주고등학교 3학년 편입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입학
1961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대학원 졸업. 한국농업문제연구회(회장 주석균) 간사 역임
1961년 결혼
1963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강사 시작
19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1965년 2심에서 징역 1년 선고. 출옥 이후 차명으로 신문과 잡지에 수많은 논문 발표
1971년 7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던 정윤현, 임동규, 김병태, 김정광 등이 참여한 가운데 『대중경제론 100문 100답』(대중경제연구소) 집필 주도
1978년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을 비판한 『민족경제론』(한길사) 출간
1979년 3월 남민전 관련 ‘임동규 간첩사건’(통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1980년 10.26 이후 과도정권에 대한 비판과 민주화 요구를 담은 ‘134인 지식인선언’에 참가, 5.18 이후 수사기관에서 조사받고 풀려남
1985년 『창작과비평』 제57호에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를 발표,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의 단서를 제공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자문위원 맡음
1987년 제2회 단재학술상 수상. 당시 연재 중이던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의 요청으로 수차례의 현지답사와 빨치산 경험을 상세히 들려 줌
1988년 한국사회연구소 설립
1989년 조선대하교 경제학과 교수 취임. 『민족경제론의 기초이론』 출판
1992년 정윤형과 함께 한국사회연구소 후신인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설립
1993년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 시작
1995년 8월 17일 운명(천안 공원묘역 안장)
2005년 10주기를 맞아 박현채 전집 추모문집 발간위원회 구성
2006년 6월 추모집 『아! 박현채』와 『박현채 전집』(총7권) 발간
2007년 9월 학술심포지엄 ‘지구화 시대의 민족경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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