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사름이 사는 법]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
24.07.02 07:05ㅣ최종 업데이트 24.07.02 07:05
▲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 최근 <예수운동 역사와 신학>을 펴낸 김근수 소장은 언론매체에 기고하는 칼럼을 통해 집권세력의 불의와 이에 침묵하는 종교인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 황의봉
대한민국은 현재 총체적 불신 사회다. 대통령이 산유국의 꿈이 실현될 것이라고 호언해도 불과 며칠 만에 절반을 훨씬 넘는 국민이 이를 믿지 않는다[1]. 국회 청문회장에 나온 장·차관과 장군은 증인 선서를 거부해 대놓고 거짓말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개혁의 최우선 대상으로 꼽혀온 검찰은 물론 사법부마저 믿지 못하겠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진다.
무소불위 권력을 감시해야 할 언론은 '검찰의 애완견'이라는 조롱의 대상이 됐고, 최고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은 뉴스 신뢰도 꼴찌를 기록했고, 국민의 방송이라던 KBS도 신뢰도가 급전직하 중[2]이다. '진리의 전당' 대학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대통령 부인의 논문표절 심사를 2년이 넘도록 질질 끌며 결과 발표를 뭉개 온 대학의 총장은 교수와 학생들의 거부로 연임이 좌절됐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진실을 말하고 불의를 꾸짖을 '신뢰와 권위'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마지막 희망으로 종교와 성직자를 쳐다본다. 유신독재 시절 김수환 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이 민주화를 부르짖는 학생 시민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었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종교 지배층은 있을지언정 진정한 종교 지도층은 없습니다."
제주의 해방신학자 김근수는 단언했다. 이 나라 종교계를 이끄는 성직자마저도 기대할 게 없다는 말이다. 최근 <시민언론 민들레>의 칼럼과 유튜브 방송 등을 통해 윤석열 정권과 종교계를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아 온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을 만나 대통령 언행의 본질과 불의에 침묵하는 성직자,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목하는 해방신학을 화두로 대화를 나눴다.
6월 말 제주 한라수목원에서 만난 그에게 우선 해방신학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어떤 점을 중시하는지를 들어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예수가 지금 한국에 온다면 탄핵 촛불집회 나갈 것"
▲ 스승 소브리노 신부와의 재회 2018년 10월 로마교황청 바오로홀에서 거행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시성식 때 해방신학의 대가인 스승 소브리노 신부를 만났다. ⓒ 황의봉
"해방신학은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 같은 그런 신학이 아닙니다. 원래 예수가 하던 신학인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2000년을 외면당하다가 1960년대 들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메데인 주교회의(1968년 제2차 남미 주교회의)를 계기로 부활한 것입니다. 남미의 신학자들이 예수운동과 정치·경제적 상황을 연결해 예수를 관찰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 거예요. 해방신학의 요점은 교회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더 중요하다, 교회의 중심은 목사나 신부가 아니고 가난한 신도다, 개인의 죄보다는 사회악이 더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으로, 이런 기초에서 출발해 예수와 예수운동을 새롭게 보는 신학입니다.
해방신학은 남미의 현실과 깊이 관련돼 있습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가톨릭 선교사들이 남미에 진출해 토착종교를 없애고 대륙 전체를 가톨릭화 했어요. 이후 남미는 정치적으로는 왕정 혹은 독재 정부,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이 500년 이상을 지속해 온 것입니다. 남미의 가톨릭은 군사독재 정부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로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독재정권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정신교육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남미의 일부 주교와 신부, 신학자들 사이에서 가톨릭이 백성을 위로하고 고통에서 해방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억압하는 데 협조하고 있다는 각성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해방신학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평등을 겪는 세계 각 지역으로 전파돼 새로운 신학 흐름을 형성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필리핀·인도·남아프리카·미국 등지에서 그 문화와 시대에 맞게 해방신학의 아이디어를 적용하려는 노력이 생겨나 흑인 해방신학이나 여성 해방신학이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태동했습니다."
해방신학이 억눌린 사람들의 편에 서서 새로운 신학 운동으로 세계 각지에 퍼져갔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그 신학적 근거는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해방신학이 예수의 삶에서 크게 발견한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가 억압받는 가난한 사람을 위로하고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억압하는 세력에 예수가 저항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신학자들은 사랑·평화·화해·용서와 같은 단어를 많이 썼는데, 해방신학에서는 저항이란 단어를 부각했어요. 이는 없던 걸 만든 게 아닙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성전 항쟁을 하고, 당시 유다 사회의 지배층인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에 맞서 논쟁하고 다툰 것에서 권력층에 저항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지요.
예수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세력에 맞서 싸웠고, 이로 인해 정치범으로 처형됐다는 점에서 오늘날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의 정당성이라든가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가 지금 한국에 온다면 당장 탄핵 촛불집회에 나가서 마이크 잡고 대한민국의 목사 신부들 다 나와라, 40명이나 되는 주교들 나와라, 나와 함께 불의한 윤석열 정권과 싸우자, 하면서 선두에 설 것으로 저는 상상해 봅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현실로 이어졌다. 김근수 소장은 촛불집회에 예수를 떠올렸다. 그만큼 현 시국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해방신학자의 눈으로 본 윤석열 정권의 본질과 성격이 어떻길래 예수가 앞장서서 싸워야 할 대상으로 꼽았을까.
"윤석열 정권이 민주주의 이념에,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건 너무 증거가 많습니다. 윤석열 개인은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무속이나 미신에 빠졌다는 풍문도 많지만, 그걸 떠나서도 윤석열 대통령이 보여주는 여러 행동에서 천주교 신앙을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이태원 참사 후 현장에 들른 윤석열이 '여기서 그렇게 많이 죽었단 말이야' '뇌진탕 이런 게 있었겠지'라며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남의 일처럼 말하는 장면이 TV 화면에 잡혔잖아요. 또 최근 발간된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에는 이태원 사고가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는 도저히 믿기 힘든 말을 한 것으로 나오기도 했어요.
윤석열 정권이 지금까지 내놓은 정책들을 보면 하나같이 가난한 사람은 외면하고 부자들을 위한 선심만 쓰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나 참사를 당한 유가족을 무시하고 소수의 권력 주변만 챙기고 있어요. 굳이 예수의 가르침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민주사회의 기본적 가치를 무너뜨리는 반인륜적 행태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아주 가혹한 심판을 받을 게 불 보듯 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촛불집회 참석 2024년 2월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촛불집회에 민주사회를 위한 지식인 네트워크 회원들과 함께 참석했다. 가운데 빨간 모자 쓴 이가 김근수 소장. ⓒ 김근수
지난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전국 순회 시국미사를 통해 윤석열 탄핵을 거론했고, 불교 스님들도 야단법석 시국법회를 열어 탄핵을 요구했다. 윤석열 정권의 무능과 무도한 행태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지난 22대 국회의원 총선 결과로도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독재정권 하에서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돼주었던 김수환 추기경이나 지학순 주교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의 종교 지도자가 권위도, 존재감도 사라진 현실은 어디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까. '종교 지배층'이 있을 뿐이라고 개탄하는 김근수 소장의 진단을 들어보자.
"저는 한국의 종교 지배층을 지도층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사실 이분들에게 지도를 기다리는 국민들도 잘 안 보이잖아요. 그들이 각 종교에서 권력을 장악했지만, 신도들이나 일반 시민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 종교 지배층은 부처님이나 예수님 말씀을 깊이 새기고 깨달은 분들 같지 않아요.
만약에 부처님이 한국에 오시면 조계종 종회의원들이나 본사 주지들을 모아 놓고 '내가 너희들에게 언제 그렇게 가르쳤느냐'고 야단치실 것 같아요. 예수님도 한국에 오신다면 주교 신부 목사들을 향해 '너희들은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가르치면서 왜 몸소 십자가를 지지는 않느냐'고 따져 물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근수 소장은 한 기고문에서 '부드러운 예수, 사랑의 예수만 강조하고, 억압하는 강자들에 맞선 위험한 예수, 저항하는 예수는 언급을 회피하는 목사 신부들의 설교와 강론'을 비판한 적이 있다. 성직자들이 불의에 침묵하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신부나 목사가 권력의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정치적인 성향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배신했잖아요. 불의한 정권의 패악질을 보고도 모르는 체 침묵하거나 구경만 하거나 아니면 혼자 조용히 있거나 하는 것은 죄악이나 다를 바 없는 거예요.
예수도 그러셨잖아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고. 지금 한국의 종교 지배층이나 직업 종교인들이 우리 사회의 양심이요, 진실의 최후의 보루다, 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분들의 말과 삶이 국민과 신자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그런 삶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김근수 소장은 종교와 더불어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않는 것에도 강하게 비판했다. 최근 옥스퍼드대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에서 발표한 언론의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은 47개 조사대상국 중 40위, 아시아태평양 11개 주요국 가운데서는 꼴찌로 나타났다.
"수단의 성자 고 이태석 신부가 현지의 열악한 현실을 보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가 지금 세상에 오신다면 교회 성당보다 먼저 학교를 지을 것이다'. 저는 만일 예수가 지금 한국에 오신다면 학교보다 언론기관을 먼저 세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마이뉴스>나 <뉴스타파>, <시민언론 민들레>나 <뉴탐사>와 같은 시민언론·독립언론을 세워 진실을 말하고 불의한 거짓을 까발리는 작업부터 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언론이 진실을 말하면 백성들은 빛 속에서 살 것이고, 언론이 거짓을 말하면 어둠 속에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래서 기자나 언론인들이 애완견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양심의 보루라는 말을 듣도록 예수는 언론기관부터 바로 세우지 않을까 합니다. 권력에 영합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기득권 언론들의 행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 교황의 스승인 스칸노네 신부와 함께 로마 예수회 본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스승인 후앙 카를로스 스칸노네 신부와 기념촬영을 했다. 2014년 6월. ⓒ 김근수
김근수 소장은 얼마 전 그의 열 번째 저서 <예수운동 역사와 신학>을 출간했다. 이 책은 신학 인문서로는 이례적으로 2주 만에 재판을 찍었다. 예수 등장부터 요한복음이 나오기까지 예수운동 1세기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그리스도 2천 년 역사에서 공동체가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평등이 실천된 시기는 예수운동 1세기였다"라고 강조한다.
이 말은 예수 등장으로부터 2천 년이 흐른 오늘날 기독교가 이른바 '초대교회'의 정신에서 크게 멀어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근수 소장은 한국 그리스도교에 도움을 주려는 의도에서 이 책을 썼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그는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교와 성직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요즘 한국의 교회나 성당에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즉, 예수운동의 원형을 되살려보자는 것이죠. 이런 움직임에 학문적 근거를 주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1세기 예수운동의 특징은 첫째, 다양성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여러 신학적 흐름이 이때 쓰인 신약성서에 온전히 담겨 있어요. 둘째, 일치입니다. 의견이 달라도 서로 싸우거나 배척하지 않고 같은 공동체에 있으려고 많이 애썼다는 겁니다.
그리고 평등입니다. 1세기 예수운동 공동체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지식인과 평민, 남성과 여성, 주인과 노예의 사회적 차별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 이처럼 높은 수준의 평등이 실현된 공동체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늘날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어떨까요. 직업 종교인과 신도,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가장 크게는 부자가 위세를 떨치고 가난한 사람은 외면당하는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2천 년 전 예수운동의 모습과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자세히 보여줌으로써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해방신학자 김근수는 또 자신의 책에서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이라는 아름답고 고귀한 산상수훈 말씀보다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누가복음 16,13)라는 말이 예수와 성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라고 강조한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볼 만한 대목인 것 같다.
"원수사랑 이웃사랑을 말한 예수가 왜 정치범으로 죽었을까요. 그건 분명히 예수가 정치범으로 처형될 만한 어떤 행위를 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가난한 사람 이야기가 곳곳에서 나옵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어요. 또 부자를 비판하고 혼내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을 비판하거나 혼내는 대목은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웃사랑 원수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그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인 것이에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제외하고 이웃사랑이나 원수사랑은 말하지 않았거든요. 결국 가난한 사람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당시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다는 명목의 정치범으로 처형당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예수의 원래 메시지가 뒤로 물러나고 대신 죄의 용서나 화해의 이야기들이 전면에 등장해 버린 것입니다. 현대의 해방신학은 바로 이 부분을 다시 찾아내 가난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제대로 섬긴다면 돈을 버는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거나 이용할 수가 없고, 돈을 번 이후에도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내 맘대로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라고 거짓말하며 예수를 배신하고 팔아먹는 종교인도 있습니다. '돈 먼저, 하느님 그다음'을 다짐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리스도교 자체가 하느님보다 돈을 더 섬겨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는, 복음서의 이 부분에 저는 더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김근수 소장은 중남미 엘살바도르에서 저명한 해방신학자 '혼 소브리노' 신부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최초의 아시아인 제자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했던 해방신학을 공부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제가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신부가 되는 게 자연스러운 진로였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철학과로 진학했습니다. 곧바로 신학대학으로 가는 것보다는 철학을 공부한 다음에 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철학과에선 서양철학, 그중에서도 독일철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군대를 갔다 와서 1986년 광주가톨릭대에 들어갔습니다. 전주교구 소속 신학생이 되어 본격적으로 신부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게 된 것이지요. 이때가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고, 2학년 때는 6월항쟁이 벌어졌습니다. 정치적 감각이 한창 예민했던 시기에 이같은 역사적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제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현실과 연결되는 부분에 관심이 컸던 것 같습니다.
광주가톨릭대를 2년 다닌 후 '신학 공부를 더 깊이 할 기회가 닿아'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됐습니다. 마인츠 대학교 가톨릭신학과에서 신약성서를 전공했는데, 독일의 성서신학은 가난한 사람에 관해서는 잘 다루지 않는 반면, 성서를 문학 연구의 텍스트로 보는 건 매우 발달했어요. 그래서 독일에서 성서신학을 공부하는 게 학문적 연구에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성서에 많이 나오는 가난한 사람을 연구하는 데는 그렇게 우호적인 환경이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신부가 아닌 신학자의 길을 택한 이유
▲ 엘살바도르 유학시절 1997년 엘살바도르 중앙아메리카대학 로메로 대주교 동상을 배경으로 스승 소브리노 신부(왼쪽)와 기념촬영을 했다. ⓒ 김근수
독일 유학 시기에 김근수 소장은 신부의 길이 아닌 신학자의 길로 진로를 바꾼다. 그리고 해방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대변자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살았던 중남미 엘살바도르로 향한다.
"한국에서는 신학교에서 기숙사 생활하고 수업도 받고 하지만, 독일은 좀 달라요. 수업은 주립대학의 신학과로 가서 받고, 기숙사로 돌아와 사제 양성에 필요한 기도, 영성, 사제로서의 소양 훈련을 따로 받습니다. 그런데 제가 독일 유학 중에 가톨릭 성직자가 되기에는 능력과 자격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사제 독신제를 지킨다든가, 사제로서 신자들과 교류하는 친화력이나 인간적 능력, 품성에서 많이 모자란다는 걸 느끼게 된 것입니다.
독일에서 8년을 공부하고 나서 사제의 길 대신 본격적으로 신학자의 길을 걷기 위해 남미로 갔습니다. 독일에서 공부한 신약성서에다가 남미의 해방신학 관점을 연결하고 싶었어요. 어디로 갈까 알아보던 중 엘살바도르 중앙아메리카대학에서 해방신학을 가르치던 '혼 소브리노' 신부님을 찾아낸 것이지요. 현재 86세인 이분은 스페인 태생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와 미국에서 공부하셨는데, 해방신학의 대가입니다. 특히 예수가 누구인가에 관한 연구로 가장 존중받는 학자로 유명합니다. 저는 이분에게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예수를 보는 방법론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선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 문학적 표현 내지는 정신적인 결심 정도로 받아들입니다만, 남미에 가서 보니까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진짜 살해당할 수도 있고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해방신학을 지지해서 활동하다가 군사독재정권이나 갱단에 의해 살해된 신부와 주교만 해도 200명이 넘습니다. 영화로도 알려진 '로메로' 대주교가 살해당한 때가 광주 5·18 2달 전이었습니다."
김근수 소장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알현하고 자신의 저서를 증정한 바 있다. 이에 앞서 로마 교황청을 방문해 세월호 관련 자료를 교황께 전달하는 과정에서 극적인 순간을 겪기도 했다. 아직은 자세한 내막을 밝힐 시기가 아니라며 간단히 들려주는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2014년 6월 제가 로마 바티칸을 찾았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지 2달이 지난 때였지요. 그때 교황님께 드릴 여러 가지 자료와 동영상을 담은 USB 등을 가지고 갔습니다. 정말 천신만고 끝에 교황님이 머무시는 마르타 게스트 하우스 201호 책상 앞에 그 자료들이 놓일 수 있었습니다.
그 자세한 내막은 아직 한국이나 로마 교황청에 관련되는 분들이 생존해 계시기 때문에 밝힐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자료 전달 2달 후 한국에 오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쁘게 생각합니다.
당시 박근혜 정권 때였는데, 교황님이 청와대를 방문해 연설한 내용 중 '한국 정부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내정간섭에 해당할 수도 있고, 또 교황님의 외교적 언사와는 거리가 먼 충격적인 발언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게 된 배경에는 제가 전달한 자료도 일부 역할을 했을 거라는 정도만 밝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2014년 8월 18일 주한 교황청대사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하고 저서 <교황과 나>를 헌정했다. ⓒ 김근수
해방신학자 김근수는 지금까지 10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슬픈 예수> <행동하는 예수> <가난한 예수> 등 그의 전공분야인 신약성서와 해방신학 관련 해설서다. 집필에만 몰두하던 그가 최근엔 대사회적 발언을 활발히 하고 있다. 시국집회에 참석하는가 하면 언론매체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고, 유튜브 방송에도 출연 중이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 나선 배경은 무엇일까.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 가운데 제 가슴을 찌르는 대목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굶어 죽어가는데 한가하게 커피 마시며 신학 토론만 해서야 되겠느냐는 겁니다. 제가 성서를 연구하고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그런 작은 몸짓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예수의 삶과 역사를 전파하는 작업과 함께 우리 사회의 진실을 전하는 언론운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시민언론 민들레>와 <뉴탐사>에 글과 말을 보태고 있고, 또 촛불행동 집행위원회에도 참여해 가능한 한 집회에 함께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예수의 삶을 전파하는 일로는 양희삼tv '찍먹신약'에 고정출연해서 지금 마가복음을 해설하고 있고, 또 제가 만든 유튜브 '김근수 해방신약'에서는 마태복음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의 죽음, 제주 4·3에서 다시 반복된 것"
▲ 김근수 소장이 펴낸 책들 최근 10번 째 저서를 출간한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은 신약성서를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연구, 해설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 김근수
그는 2002년 제주로 이주한 이래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 강사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신학 연구를 하고 있다. 제주에서의 삶은 그의 신학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성서를 연구하다 보니 제주도 면적이 예수가 살던 갈릴래아보다 10% 정도 크더라고요. 그래서 제주도는 저에게 제2의 갈릴래아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13년에 걸친 엘살바도르 내전으로 8만 명이 숨진 그 현장을 지켜봤는데, 제주에 와서는 4·3을 통해 수만 명이 희생된 아픔의 역사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됐어요.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 군사정권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는 거대한 공동묘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기간에 엄청난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았습니까. 그중에서도 4·3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겪어야 했던 제주도에서 신학을 연구하다 보면 종교와 정치의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는 저에게 신학적 영감을 주는 그런 장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주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수난을 겪으면서 쉽게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받아온 섬이다. 제주의 아픔을 씻어주는 데 필요한 일은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신학자의 조언을 들어본다.
"제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제주 4·3이 남긴 상처의 원인 제공자 중 하나가 서북청년단과 관련된 개신교이고 영락교회이고 한경직 목사 아닙니까. 그래서 좁게는 영락교회, 넓게는 한국 개신교가 제주 4·3 희생자들과 제주도민에게 어떤 형식으로든 사죄의 표시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광주에 '남동 5·18 기념 성당'이 있듯이 제주에도 4·3 기념 성당이나 4·3 기념 교회가 있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꼭 새로 짓지 않더라도 기존의 교회나 성당에 4·3 이름을 붙여서 희생자와 유족을 위로하는 거점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제주에서 일하는 목사나 신부들이 적극적으로 이런 의사표시를 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4·3 희생자들과 예수는 바로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의 죽음이 제주 4·3에서 다시 반복된 것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어요.
독일이나 남미 같은 곳을 가보면 큰 공항이나 역과 같은 공공시설에 자그마한 교회나 성당 기도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공항은 평소에도 오가는 사람이 많고, 폭설이 내리면 승객들의 발이 묶이기도 하는데, 이곳에 공간을 임대하거나 해서 일정한 시간에 미사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고려해 봄 직합니다. 제주를 찾는 분들에게 제주의 아픈 역사를 알리고, 대화하고, 위로를 나누는 현실적인 계기를 만들어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덧붙이는 글 [1]"동해유전 발표 못 믿어" 60%... 야당 "석유게이트 점입가경" https://omn.kr/291v8
[2]'MBC 1위, 조선 꼴찌'... 세계적 보고서, 한글로 볼 수 없는 이유 https://omn.kr/294j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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