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한문은 표의(表意) 문자이고 한글은 소리 나는 대로 읽는 표음(表音) 문자이기 때문에 중국의 한자는 배우지 않아도 된다며 한자 교육을 중단시킨 정치인이 있었다. 그 탓으로 요즘 한자를 모르는 젊은 세대와 소통이 안 된다고 한다. 한자가 있어야 의미가 확인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금일(今日)이 금요일이지 왜 오늘이냐? 사흘이 4일이지 왜 3일이고 나흘이 왜 4일이냐? 여자 양궁 대표팀이 올림픽에서 아홉 번이나 우승했는데 왜 9연패 했다고 기사를 잘못 썼느냐? 임시로 붙인 제목인 가제(假題)를 ‘로브스터’와 혼동하거나 안중근 의사(義士)와 병원 의사(醫師)를 같은 뜻으로 아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사과를 진심(심심 甚深-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함)으로 하지 않고 왜 할 일 없는 듯 심심하게 하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단다.  

발음 때문에 겪는 혼돈도 있다. 내가 아는 에어컨 설치 업자가 말끝마다 ‘시래기’라고 해 시래기는 무청을 말린 나물이고 에어컨 부속 기계는 실외기(室外機)라고 알려 줬다. 월남 파병이 한창이던 시절, 연인들의 연애편지 중엔 ‘이억만 리 남십자성 아래에서~’라는 구절을 많이 썼다. 편지를 훔쳐보며 도대체 월남이 얼마나 먼 곳이기에 백 리, 천 리도 아닌 이억만 리가 될까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었다. 훗날 알고 보니 이억이 아닌, 그저 멀리 떨어진 이역(異域)이었다.

성격 차이로 오랜 별거 생활을 끝낸 부부가 합치자마자 다퉜다. 그동안 개과천선(改過遷善)한 줄 알았더니 어쩜 성질이 그대로냐고 남편이 탄식하자 개과천선의 뜻을 모르는 부인이 개(犬)가 천선으로 알아듣고 "내가 개냐?"며 대들었기 때문이다. 친목 단체인 친목회(親睦會)를 침묵회(沈默會)로 발음하는 이도 있다.

‘약업신문’의 약창춘추에 칼럼을 기고하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명예교수 심창구 박사의 ‘아나무인’이라는 글을 읽었다. 아나무인은 안하무인(眼下無人), 즉 자기의 눈 아래엔 사람이 없다거나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인데 소리 나는 대로 적다 보니 국적 불명의 아나무인이 돼 버렸다고 했다.

터무니없다는 뜻의 황당무계(荒唐無稽)를 황당무게나 황당무괴로, 뼈대와 태를 바꿔 새롭게 태어난다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환골탈퇴로, 명예훼손(名譽毁損)을 명예회손으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의 상태인 사면초가(四面楚歌)를 사면초과(超過)로 잘못 적는 경우도 있다.

인감(印鑑)증명서를 인간(人間)증명서로 잘못 쓰기도 한다. 암을 발생시키는 발암물질(發癌物質)을 ‘바람물질’로 잘못 쓰면 바람 중에 섞여 있는 미세먼지를 상상하게 된다. 불안 장애인 공황장애(恐慌障碍)를 공항(空港) 장애로 잘못 쓰면 공항에만 가면 숨이 막히는 장애가 된다. 어떤 일을 치르고 난 뒤의 부작용인 후유증(後遺症)을 휴우증으로 잘못 쓰면 큰일을 치르고 난 뒤 "휴우~"하며 안도의 숨을 쉬는 상황을 연상하게 된다.

‘어이’는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을 뜻하는데 ‘어이가 없다’를 어의(語意)가 없다로, 날로달로 발전한다는 일취월장(日就月將)을 일치얼짱으로 잘못 읽기도 한다. 앞날이 깜깜하다는 뜻의 ‘막막하다’를 망막(網膜)하다로 쓰면 눈의 가장 안쪽의 시신경 그물막 질병을 연상하게 된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은 말이 안 된다는 뜻인데 사투리가 몸에 밴 정치인은 도단을 도당(盜黨), 즉 도둑의 무리로 억세게 발음하기도 한다. 한국어가 서툰 다문화가정의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이래라 저리라 잔소리하지 말라’는 말을 "일해라 절해라 하지 마세요!"라고 잘못 발음하면 명절날 며느리에게 여러 가지 일을 시켜 놓고 거기다 친척들이 오자 절까지 시켜 항의하는 꼴이 된다고 심창구 박사는 칼럼에서 지적했다. 이처럼 한글의 뜻을 제대로 살리려면 때로는 한문 혼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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