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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7일 토요일

우익에서 좌익, 다시 우익으로... 한살 아기까지 살해했다

 김포군 고촌면 천등고개의 비극... 한 집안에서 12명죽임 당하기도

21.03.27 19:55l최종 업데이트 21.03.27 19:55l

 1952년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법정은 한여름 가마솥 같았다. 뜨거운 감자 같은 사건으로 재판정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피고는 당시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 치안대원과 현직 경찰로 소위 '반공애국투사'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재판을 받다니,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일동 기립." 법원 정리의 외침에 방청객들이 일어났다. 판사는 기초적인 인적사항 확인에 이어 공소사실과 관련한 본격적인 심문을 진행했다. 

"피고 〇〇〇은 수복 후 김포군 고촌면 치안대원으로 고촌공소 선교사 송해붕을 포함한 6명을 고촌지서에 구금 후 천등고개로 끌고 갔는가?" 재판장의 심문에 〇〇〇은 "고촌지서 구금은 제가 관여한 것이 아닙니다. 천등고개로 갈 때는 제일 뒤에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라고 답변했다.

"그렇다면 피고는 송해붕 외 6명을 살해할 때 현장에 없었는가?" "저는 사건 현장에 가기 전에 변이 마려워 중간에 변을 보고 가느라 살해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피고들이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것을 본 판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부역자들이 치안대로 돌변해
 

 선교사 송해붕
▲  선교사 송해붕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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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52년 6월 28일 '송해붕 외 6인 살해 및 사체유기죄'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렸다. 재판장은 피고들의 위법 사실을 논거했다. "피고 〇〇〇은 북한군 점령 시절 김포군 고촌면 조국보위원회 서기장으로, 임범일은 위원으로, 이진선(가명)은 자위대장으로, 윤흥섭은 자위대 부대장으로 각기 북한괴뢰집단에 적극 협력했던 자로..."

이게 무슨 말인가? 피고들은 북한군 점령 때인 인민공화국(인공) 시절 부역 활동을 한 이들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북한군이 물러난 후였던 당시 사회 분위기상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들 부역자들이 부역죄가 아닌 다른 부역 혐의자들을 불법적으로 살해한 죄로 법정에 섰다는 점이다. 

즉, 인민군 아래에서 김포군 고촌면의 조국보위위원회와 자위대의 중책을 맡은 이들은 인민군이 물러나고 대한민국 군·경이 수복하려 하자 처벌을 두려워 해 도리어 치안대를 조직했다. 이후에는 자신들의 부하였던 이들이나 인민군 부역과는 관계없는 주민들을 부역 혐의로 잡아들여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피고들은 국군의 9.28 수복이 임박하자 '고촌면 치안대(대장 〇〇〇)'를 조직했다. 그리고 고촌지서 선발대로 복귀한 김용창 순경 등과 함께 부역행위와 전혀 관계가 없는 송해붕을 1950년 10월 10일 고촌면사무소 양곡창고에 구금했다. 피고들은 송해붕을 10월 12일 0시경 군용전화선으로 묶어 김포경찰서 고촌지서 서쪽 1km 지점의 천등고개로 끌고 갔다. 이곳에서 피고들은 송해붕을 포함한 6명을 M1, 카빈, 권총으로 일제히 발사(약 20발)해 전원 살해한 후 방공호에 묻었다."


판사는 검사의 공소사실을 전부 인정했다. 선고가 이어졌다. "피고인 〇〇〇과 이진선을 징역 8년에, 윤흥섭을 징역 5년에, 임범일, 장장선(농민), 김용창(경찰)을 징역 2년에 처한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사건의 가해자가 실형을 선고받는 순간이었다.(1952년 6월 28일,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형사합의부, <판결문>, 형공 제351호)

변신의 귀재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사건의 가해자들이 재판을 통해 처벌받은 몇몇 사례가 있다. 충남 아산시 배방지서 유해진 지서주임이 1950년 10월 '양민 140여 명을 부역행위로 불법 살해하고 정부미 50가마를 횡령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경향신문> 1955년 1월. 오마이뉴스 2018년 2월 28일 기사에서 재인용)

경남 진영지서장은 불법살해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선고대로 집행되었다. 진영지서장 김병희는 1950년 8월 1일 낙동강변에서 강성갑 목사를 살해했는데 강성갑 목사가 이적행위를 한 일은 전혀 없었다.(홍성표, 『한얼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2020, 선인)  1951년 2월 9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제11사단이 저지른 '거창사건' 피학살자는 719명이었다. 이 사건은 전쟁 중에 공론화되어 재판이 열렸는데, 가해자 김종원은 징역 3년을, 제11사단 9연대장 오익경은 무기징역, 3대대장 한동석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판결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1년도 안 돼 이들을 특별사면했다. 군인을 인민군으로 위장해 국회 거창사건 조사반에게 총격을 가한 경남지구계엄사령관 김종원 대령은 사면 후 경찰간부로 등용됐다.


이처럼 한국전쟁기 불법 민간인학살을 저지른 이들은 주로 군인과 경찰, 우익청년단 간부들이었다. 그런데 김포군 고촌면은 달랐다. 고촌면 치안대장과 주요 간부들은 인공 시기 부역행위를 한 당사자들이었다. 그랬던 이들은 대한민국 군·경이 수복하자 처벌이 두려워 치안대를 조직하고, 숱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이들 치안대가 죽인 민간인 중 다수는 부역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고촌공소 책임자 송해붕 선교사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공 때 부역행위를 한 부역자들이 한국전쟁 발발 전에는 악명높은 우익단체였던 대한청년단 고촌면단부 간부였다는 점이다. 치안대장 〇〇〇은 대한청년단 고촌면단부 부단장, 임범일은 고촌면 신곡리 영사정동단 부단장, 이진선은 향산리 하향산동단부 총무, 윤흥섭은 고촌면단부 감찰부장이었다. 이들은 우익에서 좌익으로, 다시 우익으로 변신해 결국에는 집단학살 가해자가 되었다. 양지만을 찾아 권력을 뒤쫓은 자들이었다. 

한 살 아기가 부역을 했는가?

고촌면 치안대가 1950년 가을에 불법으로 학살한 사람들은 몇 명일까? 1기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학살된 민간인들은 최소 80명에서 최대 200명에 이른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보고서』)

"기곽도 나와." 1950년 10월 1일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 향산리 기곽도 집에 고촌면 치안대원들이 들이닥쳤다. 기곽도 집이 부역자 집안이라고 누군가 밀고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곽도 집안의 이양순(1899년생)부터 기노현(1949년생)까지 총 12명이 굴비 엮듯이 묶여 면사무소 양곡창고로 끌려갔고 그곳에 구금됐다. 두 번에 걸쳐 연행됐는데 당시 기노정(1948년생)은 양할머니의 치마 품에 숨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고촌면사무소 양곡창고에는 신곡리, 전호리, 풍곡리, 향산리 주민 80명 이상이 구금됐다. 치안대원들은 주민들을 구타하거나 고문했는데 연행자의 손을 묶은 채 거꾸로 매달아 매질하고 물고문했다.

치안대원들은 10월 11일부터 구금자들을 김포경찰서로 이송한다며 양곡창고에서 데리고 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김포경찰서로 가기 전 천등고개에서 죽음을 맞았다. 12일 새벽 0시에는 송해붕 신부와 6명이 천등고개에서 총 맞아 죽고 방공호에 묻혔다.

그로부터 며칠간 치안대원들은 최소 80명에서 최대 200명의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학살했다. 기곽도 집안에서 끌려간 12명도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 중에는 한 살 아기 기노현과 6세 기노응도 있었다. 백 번 양보해 천등고개에서 죽은 이들이 부역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한 살 아기는 무슨 죄인가. 결국 한 가족을 몰살하려는 구차한 변명이다. 아니 변명거리도 되지 못한다. 기곽도 집안에서는 총 12명이 죽었는데 이들을 가계도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2명이 학살당한 김포군 고촌면 기곽도 가계도
▲  12명이 학살당한 김포군 고촌면 기곽도 가계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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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군에서는 기곽도 집안처럼 한 가족이 몰살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김포군 하성면 마곡리 강범수 집안에서는 노인·여성·어린이를 포함해 총 37명이 학살되었다. 학살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1950년 가을 군·경 수복기와 1951년 1.4 후퇴 직전에 가족들을 싹쓸이했다. 이런 불법연행과 학살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는 집안 간의 갈등과 재산 갈취도 있었다.

가해자와 한마을에서 수십 년을 살아
 
 천등고개 앞의 기노정
▲  천등고개 앞의 기노정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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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정(74세, 경기도 김포시 고천면 향산리)은 6.25 당시 집안 할머니의 치마 속에 숨어 겨우 학살을 면했다. 아버지 기흥도(1926년생)와 어머니 황옥주(1928년생)를 포함 할머니, 큰아버지·작은아버지 가족, 삼촌 등 12명을 잃었다.

그는 졸지에 천애고아가 됐다. 거기에다 가족을 몰살한 치안대가 다시 집에 들이닥쳐 그릇과 가재도구까지 빼앗아갔다. 논에는 말뚝을 박았다. 마음 놓고 농사도 지을 수 없었다. 금관국민학교를 나와 김포농고를 졸업한 기노정은 회사나 공무원에 취업하는 걸 일찌감치 포기했다. '빨갱이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 여름 옆집 아줌마의 "이진선(가명)이 나왔다"는 소리에 기노정은 살이 떨렸다. 고촌면 치안대원이었던 이진선이 1952년 재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만기 석방된 것이다.

기노정이 마을에서 이진선을 접촉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눈을 부릎뜨고 이진선을 노려봤다. 이진선은 아버지 뻘이었지만, 아버지·엄마를 포함해 가족을 몰살시킨 집안 원수였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이진선은 머리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이진선이 마을에서 자연사할 때까지 이 고역은 반복되었다.

김포군 고촌면 민간인학살사건이 법정에 서고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전체 피해자 80~200명에 대한 사건이 아니라 송해붕을 포함한 6명 학살사건에 국한된 것이다. 대한청년단에서 부역자로 다시 치안대로 카멜레온처럼 변신해 권력의 양지만을 좇은 그들을 역사가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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