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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9일 수요일

국가보안법, 나랑은 상관없다?

 


백남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0/12/10 [09:33]

평화이음이 월간 '민족과 통일' 12월호를 발간했습니다. 

우리사회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국가보안법, 나랑은 상관없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왠지 섬뜩한 느낌이 든다. ‘국가전복’, ‘간첩’ 같은 뭔가 무시무시한 이미지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나와는 동떨어진 법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간첩일리도 없을뿐더러 ‘내’가 국가 전복을 꿈꾼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보안법은 통일운동을 하거나 소위 ‘빨갱이’라고 불리는 진보운동가들에게나 어울릴만한 법이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국가보안법의 문제는 단순히 그 법의 조문에만 있지 않다. 국가보안법의 문제는 그 법을 ‘위반’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이 적절한가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전 국민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큰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강요하는 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은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강요한다. 

올해 1월 tvN에서 방영된 「사랑의 불시착」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당한 일이 있었다. 고발장을 제출한 기독자유당 측은 “한국의 주적인 북한은 어떤 이유로도 미화될 수 없으며, 드라마 안에서 북한군은 총칼을 겨누는 존재가 아닌 평화로운 인물로만 묘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후 「사랑의 불시착」을 제작한 방송국, 드라마 감독 및 작가, 나아가 출연한 배우들은 이전과 동일한 마음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출연을 결정할 수 있을까. 대다수의 국민적 정서와는 동떨어진 한 보수정당의 주장을 무시하고 넘긴다 하더라도 혹시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자기검열’을 끊임없이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기검열은 몇몇 유명 인사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사진사 박정근 씨는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 트위터 계정에 실린 글을 리트윗 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북한을 찬양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풍자를 위한 것이었는데도 말이다.(이후 무죄판결)

이러한 일상을 보고 있는 대다수 국민들은 자신의 말이나 간단한 글이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까 끊임없이 조심하게 된다. ‘종북’,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이성적 사고와 판단은  사라져 버리기에 더 조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종북몰이’, ‘빨갱이낙인’이 가능한 이유는 국가보안법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은 학문의 자유와 예술 창작의 자유까지 억압한다. 

과거 국책연구기관에서 북한을 연구했던 홍익표 의원은 11월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토론회에서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김일성 국가주석’이라는 표현조차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라며 자기검열의 경험을 소개했다. 

학술 논문이나 서적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금서가 된 사례는 허다하다. 

창의성이 생명이라 할 수 있는, 허구가 가미되는 예술분야라고 사정이 다르진 않다. 

국민적 도서라고 할 수 있는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는 국가보안법 문제로 끊임없이 시달려 왔다. 연주가들 사이에서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선생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행위다. 

결국 학자나 예술가도 자신의 논문과 작품을 끊임없이 검열하게 된다. 

이는 전 국민적 손실이다. 일례로 학문은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학문적 연구결과를 법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되는 순간 진실 추구라는 학문의 존립근거는 사라진다. 국민들은 진실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정치의 왜곡을 초래하는 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은 정치의 왜곡도 초래한다. 

정치란 국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정치의 중심에는 국민의 이익이 있다. 정치인의 제1판단의 근거는 국민의 이익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정치인은 국민의 이익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물론 국가보안법이 없더라도 국민의 이익만을 위해 정치활동을 하는 정치인은 드물겠지만)

특히 북한과 관련된 정책이나 기존의 틀을 깨는 진보적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치인의 판단기준은 옳고 그름이나 국민의 이익이 아니다. 종북몰이를 당하진 않겠는지, 괜히 구설수에 올라 이후 선거에서 불리하게 작용하진 않겠는지를 끊임없이 돌아보게 된다. 설령 처음에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추진하다가도 주변에서 우려의 목소리, ‘종북’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후퇴하게 된다. 

나아가 국가보안법은 진보정당 등 민중들의 정치세력화를 탄압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우리 사회에서는 다양한 계급, 계층이 존재한다. 정치란 이러한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고 조율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의 요구를 대변하는 정치세력과 정당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진정한 정치라면 민중의 요구를 대변하는 정당과 국회내 진보적 목소리는 필수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민중 정치세력, 진보정당들을 탄압하는 도구였다. 1958년에는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고, 2014년에는 통합진보당이 강제 해산됐다.   

직접적인 정당 해산이 아니더라도 국가보안법은 진보적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이나 단체들에게 빨갱이 낙인과 종북몰이를 할 수 있게 해 활동을 위축시킨다. 

결국 이는 반쪽짜리 정치를 만들고 국민의 피해로 이어진다.   

 

국가보안법의 존속은 미래세대에 대한 배신 

 

이렇게 국가보안법은 민주주의와 정치의 발전을 저해하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개개인에게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고, 반쪽짜리 정치를 만들어 낸다. 정치의 왜곡은 국민 이익 침해로 이어진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가보안법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말살한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사람들에게 무의식적 공포를 조장하고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만든다. 현재 체제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려는 생각은 탄압의 대상이 된다.  

특히 북한 사회에 대한 것이나 급진적 정책에 대한 것에 있어서는 객관적 검토나 과학적 평가는 존재할 수 없다. 오로지 ‘악’이어야 할 뿐이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여기까지 온 데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이 컸다. 사회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본주의 시스템은 사회주의에서 배울 것은 배웠다. 사회주의 제도의 장점을 나름의 방식으로 수용했다. 복지제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우리 국민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검토해 볼 기회란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미래 사회는 인간의 창의력이 더욱 중요시되는 사회다. 과학기술이 급속히 발전함에 따라 창의적 아이디어는 허황된 생각이 아니라 실제 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 창의적 사고는 미래에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우리의 사고를 제약한다. 나의 생각이 문제시 되지 않을까를 끊임없이 ‘자기검열’해야 하는 사회에서 창의적 사고, 특히 정치제도나 정책에 있어 기존의 틀을 깨는 창의적 사고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국가보안법은 미래와 공존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둔 다는 것은 미래세대에 대한 배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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