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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31일 금요일

“80년 광주, 저항하지 못한 죄책감 평생 씻으며 살겠다”

1980년 5월20일 검열거부 주도했던 박화강 전 전남매일 기자
“나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공동사표 제출
16년간 한겨레 기자로 지역 지킨 뒤 ‘불이(不二)학당’ 열어
‘소유와 관계’ 정리하고 지친 이들을 위한 안식처 제공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2018년 08월 31일 금요일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5월18일 광주 5·18 묘역에서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37주기 기념식을 마친 뒤 고(故) 윤상원씨(1950~1980)의 묘역을 참배하면서 5월 영령들의 넋을 위로했다. 윤상원은 1980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마지막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전남도청을 지키다 숨진 시민군 대변인이었다. 윤씨는 1982년 야학 동료 박기순씨(1958~1978)의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죽어서 윤상원과 결혼한 박기순씨는 1958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1976년 전남대 사범대학에 들어가 야학을 시작했다. 1978년 5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학교로부터 강제휴학 처분을 받고, 이에 항의문을 제출하고 학교를 그만뒀다. 박씨는 곧바로 광천공단에 들불야학을 만들어 노동운동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1978년 10월 스스로도 광천공단 광동공업사에 견습공으로 취업했다. 박씨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 강사로 노동자를 가르치는 고된 생활을 이어갔다.  
1978년 12월25일 성탄절때 야학에 사용할 땔감을 구하려고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저녁에 야학 수업을 마치고 자취방에 고단한 몸을 뉘었던 박기순은 그날 밤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졌다. 불꽃처럼 살다간 박기순은 시몬느 베이유를 많이 닮았다.  
▲ 야학과 노동운동을 했던 박화강 기자의 여동생 고(故) 박기순씨(1958~1978). 사진=윤상원기념사업회
▲ 야학과 노동운동을 했던 박화강 기자의 여동생 고(故) 박기순씨(1958~1978). 사진=윤상원기념사업회
▲ 고(故) 윤상원씨의 생가에 설치된 윤상원-박기순 기념비. 사진=윤상원기념사업회
▲ 고(故) 윤상원씨의 생가에 설치된 윤상원-박기순 기념비. 사진=윤상원기념사업회
2년 뒤 5·18 항쟁이 진압되고 다시 2년 뒤 유가족들은 시민군 대변인 고 윤상원씨와 박씨의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노래 ‘임을위한행진곡’은 이 결혼식 축가로 처음 세상에 나왔다.
80년 해직기자들을 소개하는 기획기사를 쓰면서 1980년 전남매일 기자들을 뺄 순 없다. 80년 5월13일 전남매일 ‘5·13 언론자유 실천 선언’을 주도하고, 80년 5월20일 공동사직서를 주도했던 박화강 기자(71)를 만났다.  


지난 24일 전남도청 앞 찻집에서 만난 박화강 기자는 야학과 노동운동을 하다가 숨진 여동생 박기순씨 얘기부터 시작했다.  
1972년 전남매일에 입사해 사회부 기자로 현장을 누볐던 박 기자는 동생을 잃은 지 2년 뒤 5·18을 경험한다. 입사 9년차의 열혈기자였던 박 기자는 당시 전남교육청을 출입했다. 1980년 5월초부터 전남대와 조선대 등 대학가 시위가 격화됐지만 기자들은 한 줄도 제대로 담지 못했다. 박 기자는 1980년 5월12일 신문을 만든 뒤 동기 손정연·유제철 기자에게 ‘언론자유 실천 선언’ 얘기를 끄냈다. 그날 오후 선언문을 만들어 인쇄까지 마쳤다. 다음날인 5월13일 오전 9시5분, 석간 신문이 한창 제작에 열을 올리는 시간이었다. 박 기자는 편집국에서 다른 기자들의 동의를 구한 뒤 선언문을 나눠주면서 취지를 설명하자 기자들이 돌아가며 서명했다. 그날 35명이 서명한 전남매일 ‘5·13 언론자유 실천 선언’은 결의보다 반성에 더 무게를 실었다. “민중의 소리를 외면, 언론이 관제화 된 것을 반성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음을 반성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 박화강 기자가 1980년 5월 광주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정호 기자
▲ 박화강 기자가 1980년 5월 광주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정호 기자
전남대 총학생회는 다음날 전남매일 기사들의 선언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5월18일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일요일이었던 5월18일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과 계엄군의 첫 충돌이 있었다. 월요일인 5월19일 오전 금남로에선 공수부대원과 시민들의 투석전도 벌어졌다. 전남매일 기자들은 18일부터 19일 오전까지 벌어진 상황을 빠르게 작성했다. 그러나 전남매일의 기사는 그날 오전 11시10분 전남도청 검열관실에서 모두 빨간펜으로 삭제돼 되돌아왔다. 나경택 기자가 취재한 피 흘리는 시민들 사진도 거부당했다. 1979년 10월27일 비상계엄 선포 직후 전남도청 2층엔 언론검열관실이 마련돼 모든 신문과 방송의 기사를 사전검열했다.
5월19일 낮 12시30분 검열 때문에 30분 늦게 나온 19일자 전남매일 신문을 받아든 기자들은 여기저기서 신문을 패대기쳤다. 1면엔 ‘김종필, 김대중씨 등 연행조사’ 기사가, 사회면엔 ‘광주 통금 밤 9시부터’라는 제목의 기사만 실렸다. 일주일 전 ‘언론자유 실천’을 선언한 전남매일 기자들에겐 치욕이었다.  
19일 점심시간이 지나자 시민들 제보 전화가 폭주했다. 때마침 그날 오후 4시30분 첫 총상 부상자도 생겼다.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계엄군 장갑차가 군중에게 포위되자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발포해 조선대부속고등학교 김영찬군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분노한 시민들은 맨 몸으로 계엄군에 맞서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광주 시민들은 울면서 신문사에 전화했다.
19일 저녁 5시 전남매일 기자들은 긴급 기자회의를 열었다. 검열에 대한 분노와 참상을 보도하지 못한 죄책감에 휨싸인 기자들은 20일자 신문엔 검열을 거부하고 18일부터 벌어진 유혈진압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자고 결의했다. 회의를 마치자 그날 밤 7시부터 비가 내렸다. 시민들의 눈물처럼. 밤 10시가 넘도록 광주 곳곳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비를 맞으며 계엄군과 대치했다.
20일 오전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전남매일 기자들은 20일 새벽부터 비장한 마음으로 기사를 써내려갔다. 박 기자는 1면 톱기사를 ‘18·19일 이틀동안 계엄군에 학생·시민 피투성이로 끌려가’라는 제목 아래 써내려갔다. 박 기자는 첫문장을 “광주가 공포에 부들부들 떨었다. 하늘마저 우중충하더니 슬픔을 참대 못했는지 끝내 비를 쏟고 말았다. 광주시내 곳곳에서 수십 명의 시민들이 칼에 찔려 피투성이가 돼 사지를 늘어뜨린 채 개처럼 질질 끌려갔다”고 적었다.
검열을 거부하고 광고도 없이 신문을 내겠다던 전남매일 기자들의 결의는 인쇄가 시작될 20일 오전 11시30분 무렵 무산됐다. 문순태 편집부국장이 신문 조판을 확인하러 갔으나 신문사 임원진이 다 뽑아 놓은 납 활판 조판대를 엎어버린 뒤였다. 좌절한 박 기자는 사직서를 썼다. “나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고 쓴 박 기자의 사직서에 동기 손정연 기자도 동참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으로 시작하는 사직서는 ‘우리’로 고쳐져 공동 사직서가 됐다.  
▲ 박화강 기자가 작성한 전남매일 1980년 5월20일자 1면 머리기사. 조판까지 끝낸 이 기사는 끝내 인쇄되지 못했다. 사진=박화강 기자 제공
▲ 박화강 기자가 작성한 전남매일 1980년 5월20일자 1면 머리기사. 조판까지 끝낸 이 기사는 끝내 인쇄되지 못했다. 사진=박화강 기자 제공
▲ 검열 없는 신문제작에 실패한 전남매일 기자들은 1980년 5월20일 저녁 공동사직서를 냈다. 사진=박화강 기자 제공
▲ 검열 없는 신문제작에 실패한 전남매일 기자들은 1980년 5월20일 저녁 공동사직서를 냈다. 사진=박화강 기자 제공
영화 ‘택시운전사’에 나오는 최 기자(박혁권)는 당시 박화강 기자를 포함해 저항했던 전남매일 기자들을 녹여냈다.
박 기자는 “정부 발표만 나오는 신문은 더 이상 안 나오게 하는 것이 마지막 양심이라는 생각으로 사표를 썼다”고 했다. 기자들은 20일 오후 공동 사표 2만장을 인쇄해 광주 시내에 뿌렸다. 그날 밤 광주MBC 방송국이 시위대가 지른 불에 탔다. 기자들이 뭉텅 빠진 전남매일은 한동안 발행을 못했다.  
5월27일 광주가 진압되자 전두환 정권은 가만 있지 않았다. ‘1도1사’(한 광역시도에 신문사 1곳만 운영)를 밀어붙였다. 전남매일 사장이 5월20일자 공동사표를 반려했지만 신군부는 검열 없는 신문제작을 시도했던 전남매일 기자들을 추려냈다. 전남매일 편집국장은 1980년 8월6일 오후 5시 편집국에서 해고할 기자 이름을 불렀다. 제일 먼저 박화강 기자의 이름이 불렸다. 동기 손정연 기자, 문순태 편집부국장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뒤 전남매일은 전남일보로 흡수통합됐다.
▲ 문순태 전남매일 편집부국장이 당시 전남고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에게 청탁해 1980년 6월2일자 전남매일 지면에 실었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곳곳에 검열 흔적이 난무하다. 사진=박화강 기자 제공
▲ 문순태 전남매일 편집부국장이 당시 전남고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에게 청탁해 1980년 6월2일자 전남매일 지면에 실었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곳곳에 검열 흔적이 난무하다. 사진=박화강 기자 제공
해직된 박 기자는 블랙리스트로 분류돼 언론사는 물론이고 일반 회사 취업도 쉽지 않았다. 1990년 보안사령부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민간인 사찰대상자를 공개했을 때 박 기자도 539번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박 기자는 1984년 정우환경이라는 업체를 만들어 사업을 키워갔다. 하수종말처리장 등에 소독제 같은 걸 만들어 팔아 몇 년 만에 자산가치 6억 원에 직원 25명을 거느린 견실한 중소기업으로 키웠다. 박 기자는 부쩍 크진 회사 때문에 한동안 갈등했지만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기꺼이 동참했다. 이후 16년을 줄곧 한겨레 광주기자로 지역을 지켰다. 박 기자는 2004년 한겨레 경영이 어려워지자 정년 2년을 앞두고 “배는 뒤뚱거리는데, 그물 던질 힘없는 어부가 남아 있어 무엇하랴”는 이메일을 동료들에게 남기고 한겨레신문을 나왔다.
2016년 광주환경공단 이사장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박 기자는 “이유야 어쨌든 80년 광주에서 기자로서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씻기 위해 남은 평생을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박 기자는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그때 끝까지 싸웠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광주가 최종 진압되던 5월27일 새벽 나는 이불 뒤집어 쓰고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부채감을 안고 살겠다”고 했다.  
박 기자는 이런 결심으로 고향 전남 보성군 득량면 청암마을에 ‘불이(不二)학당’을 열었다. ‘둘이 아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까지 나라는 생각으로 살겠다는 뜻이다. 불이학당은 사회운동을 하다가 지친 이들을 위한 안식처를 자처한다. 이른이 넘은 박 기자는 최근 자신의 모든 소유와 관계를 정리했다. 재산을 정리해 일부는 두 자식에게, 남은 모든 재산을 불이학당과 뜻깊은 곳에 기부했다. 새로운 사람과 관계도 더는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보성에 눌러 앉았다.
▲ 1980년 5월27일 시민군이 최후까지 지키려한 옛 전남도청. 사진=이정호 기자
▲ 1980년 5월27일 시민군이 최후까지 지키려한 옛 전남도청. 사진=이정호 기자
뵙자고 했더니 박 기자는 옛 전남도청 앞 YMCA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지하철 문화전당역에 내려 찾아가면서 본 박 기자는 맞은편 도청과 옛 전남매일 자리를 묵묵히 바라보며 38년 전의 트라우마를 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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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0~27일까지 신군부의 광주학살 보도 금지에 항의하면서 검열 및 제작 거부를 벌였다가 해직당한 기자가 1000여 명에 달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보상자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지만 평생을 해직기자로 살았던 이분들은 명예회복은커녕 아직까지 제대로 된 배상조차 받지 못했다. 
80해직언론인협의회는 다음달 6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기획 세미나, 80 해직을 말한다’를 열어 1980년 언론인 해직 사건과 언론 민주화 운동을 다시 조명하고 해직 언론인들의 명예회복을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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