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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3일 토요일

"왜 나는 전향서 대신 33년 감옥을 선택했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⑫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
| 2016.04.24 08:18:51



1970년대 초 '떡봉이'를 아시나요?

1973년 8월 2일 법무부 예규 108조 '좌익 수형수 전향 공작 전담반 운영 지침' 시달과 함께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전향 공작을 직접 통제, 관리하기 시작했다. 또 중정과 법무부 등이 합동 전담반을 꾸려 대대적인 공작을 전개하기도 했다. '떡봉이'가 생긴 것도 이즈음이다.

국가는 폭력배 출신의 강력범들로 하여금 강제 전향을 지시했다. 성과에 따라선 가출소 등의 특혜가 주어졌다. 일부 장기수에 따르면 전향 공작 담당 반원은 전향서 한 장당 얼마 만큼의 수고비가 따랐다고 전한다.

떡봉이는 감방 열쇠와 '사랑몽치'라 불리는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수시로 좌익수들을 불러냈다. 그리고 국가의 동조 아래 살인적인 폭행과 고문, 학대가 이뤄졌다. 일부 수형자들은 떡봉이의 구타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1974년 좌익수 박융서는 특별사동에서 온갖 구타와 함께 바늘로 찔리는 고문을 받은 뒤 이튿날 유리창 창살에 끼어있는 유리 파편으로 자신의 동맥을 절단해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 감방 벽면에 "전향 강요 말라"는 혈서를 남기기도 했다. 박융서는 생전 동료들에게 "북에 처자식이 있어 전향을 못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방규는 박정희 정권 당시 행해진 전향 공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정희 정권은 비전향 장기수들을 상대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을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실천에 옮겼다. 고문하고 때려죽이고, 찬바람에 얼어 죽게 방치하고, 단식할 경우 강제로 밥을 먹여 죽였다. 또 고통을 못 견뎌 자살하도록 몰아갔으며, 병 들어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전향하면 약을 주겠다'고 강요하며 죽도록 내버려뒀다." 

▲ 한국 전쟁 당시 빨치산을 활동한 임방규 씨가 수감 생활에 대한 애기를 털어놓고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20년 만기 출소와 사회안전법 

이에 앞서 1972년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서 진영 간 긴장 완화가 실현됐다. 이른바 데탕트다. 닉슨 미(美) 대통령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방문하고, 국제 정치는 이데올로기보다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대화에 나선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천명한 통일과 관련한 최초의 남북 합의문이다. 하지만 "김일성이 웃으면서 뒤에선 칼을 갈고 있다"고 한 박정희의 말처럼 음지에서 행해진 전향 공작은 여전히 참혹했다.

1972년 늦여름, 대전교도소 특별사동에 수감된 임방규가 간수의 지시를 받으며 충청남도 경찰국으로 향했다. 만기 출소를 앞둔 취조였다. 보안과 경찰이 마지막으로 묻겠다며 '전향서'를 내밀었다. 임방규가 비실댔다. 
그러자 한 정보과장이 다가오더니 "허튼소리 말아라. 감옥에서도 전향하지 않은 사람이 이제 와서 전향하겠느냐"며 직원을 다그쳤다. 정보과장의 얼굴은 어딘지 낯이 익었다. 한참 기억을 떠올려보니 전북 고창에서 활동한 빨치산 출신 인사로 회문산에 있을 때 일면식이 있는 얼굴이었다. 

한국 전쟁 당시 산속 생활에 신물을 느낀 이들은 신분을 바꿔 국군에 재입대하거나 경찰이 되어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1951년 10월 빨치산 귀순자로 창설된 '보아라 부대'(지리산 지구 전투경찰사령부 사령관 직속 특별부대)가 그랬고, 군경의 회유 등으로 각지에서 활동한 '빨치산 변절자'들이 그랬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군이나 경찰에 남아 활동했다. 충남도경의 그 정보과장도 그런 인물 중 하나였던 게다.
▲ 비전향 장기수인 임방규 씨는 석방과 재수감을 반복하며 33년을 옥중에서 보냈다. 그는 취재진에게 지난날을 회고하며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커버리지(정찬대)
1972년 9월, 20년을 복역한 뒤 임방규가 출소했다. 자그마치 20년의 세월이다. 스무 살 나이에 체포돼 어느덧 마흔을 넘어섰다. 청년 임방규는 뼈만 앙상한 초췌한 모습의 중년으로 늙어 있었다.

임방규는 출소 후 서울로 올라와 페인트공이 됐다. 총을 들던 손은 솔을 들었고, 산속을 헤매던 두 발은 산업화의 상징인 콘크리트 건물 위에 서있었다. 그는 붉은 빛을 지운 채 남은 인생을 색칠했다. 가끔 철탑에 올라 산업화와 도시화의 고도성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20년간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세상은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군사 독재 정권의 폭압 정치, 도시 빈민 문제, 자본주의 논리 아래 횡행하는 부패와 사회 부조리…. 무등(無等)을 꿈꾸던 20대 청년의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1972년 10월 선포된 유신헌법으로 공포 정치를 단행한 박정희는 반유신 세력에 대한 탄압 도구로 무소불위의 긴급 조치를 악용했다. 

그리고 그 결정판이던 긴급 조치 9호 선포(1975년 5월13일)와 함께 1975년 7월16일 법률 제2769호로 제정된 사회안전법이 공포된다. 

전향을 거부한 임방규는 이 법에 따라 1976년 9월 체포돼 또 다시 청주보안감호소에 수감됐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그가 사회에 돌려보내진 지 불과 4년 만에 재입소한 것이다. 그해 4월 결혼한 임방규는 체포 당시 부인이 임신 중인 상태였다. 국가는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던 그를 결코 그냥두지 않았다.

청주보안감호소, 그리고 0.7평의 세상 

청주보안감호소는 팻말도 존재하지 않는 '비밀스런' 곳이다. 엄청난 크기의 청주교도소 옆에 외딴 섬처럼 감호소가 설치됐다. 153명의 비전향자들은 이곳에서 철통같은 감시를 받으며 생활했다. 

감방 문고리의 열쇠가 보통 하나인데 반해 청주보안감호소는 위아래 두 개가 채워졌고, 창도 일반 교도소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해 밖을 보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전향하지 않은 이들은 더 엄혹하고, 잔인하게 다뤄졌다.
여느 교도소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먹을 것은 늘 부족했다. 밥을 퍼 담는 목기에 따라 특등식부터 일, 이, 삼, 사, 오등식까지 여섯 단계로 나뉘는데, 이들은 가장 작은 양의 오등식이 주어졌다. 밥을 네 쪽으로 나누면 적당한 크기의 한입거리가 되고, 세 쪽으로 나누면 한 가득 밥술이 들어간다. 식사량이 너무 작아 이들 사이에선 '궁짝' 또는 '아스피린'이라고도 불렸다. 

▲ 순창에서 만난 김창근 씨는 10년을 복역한 끝에 자유의 몸이 됐다. 하지만 그는 1980년대 말까지 형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해야만 했다. ⓒ커버리지(정찬대)

보안감호소는 독방으로 이뤄져 있다. 일반 교도소(0.75~1평)보다 작은 0.7평 공간은 임방규가 내몰린 세상의 끝인 동시에 그가 누린 세상의 전부였다. 수감 2년 뒤 담당 검사와 마주할 때 빼고는 대부분을 독방에서 생활했다.

청주보안감호소는 담당 검사가 전향 여부를 묻고 비전향할 경우 또 다시 2년을 복역하게 된다. 10년이고, 20년이고, 그렇게 계속 2년씩 갱신되는 구조인 셈이다. 전향하지 않고선 결코 감호소 밖을 나설 수 없었다. '시계를 거꾸로 매달아도 시간은 간다'는 말은 적어도 이곳에선 통영돼지 않았다.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만큼 절망적인 것은 없다. 분단에 창살에 갇힌 이들은 그렇게 시간을 겯질렀다. 
"끝도 없이 감옥이 가둬놓고, 2년 갱신, 2년 갱신 그렇게 14년을 살았다. 전향하기 전에는 살아 나갈 수 없었다. 전향서에 사인만 하면 됐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념의 문제라기보다는 한 인간이기에 이를 더더욱 거부한 것이다." 

그 오랜 고통과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도 임방규는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이념적 사고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짐승과 같은 이들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고 싶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거부에 앞서 인간의 폭력성을 거부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고, 선이었다. 

33년 '영어(囹圄)의 몸'에서 풀려나다 

1987년 한국 사회는 커다란 혁명적 변화를 맞게 된다. 민중의 힘으로 군부독재를 끌어내렸고, 그간 움츠렸던 민주주의는 동토의 땅을 뚫고 싹을 밀어 올렸다. 그리고 민주화의 열기는 그간의 악습과 악법의 폐지를 부르짖었다. 문익환 목사 등을 중심으로 한 재야에선 사회안전법 폐지 추진위가 발족됐고, 국회에서도 이에 대한 내용의 법안이 제출됐다.
그 결과, 1989년 3월 사회안전법(이후 대체 법인 보안관찰법이 발효됨)이 폐지됐다. 그리고 법안 폐지에 따라 보안감호소에 수감된 비전향자 모두가 석방됐다. 임방규가 십오 척 담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도 법안 폐지 이후인 1989년 7월이다. 석방과 재수감을 거치며 무려 33년(22년 6개월)의 시간 동안 '영어(囹圄)의 몸'으로 지내왔다. 조국은 그를 한 평생 가둬놓고 이념과 사상을 말살시켰으며, 자그마한 육신은 짓이겨졌고 존엄은 파괴됐다.
▲ 임방규(좌) 씨와 김창근(우) 씨는 한국 전쟁 당시 회문산 등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대전형무소 특별사동 병사에 '감방 동기'로 처음 만나 서로를 알게 됐다. ⓒ커버리지(정찬대)

1976년 청주보안감호소에 재수감된 비전향자는 153명이다. 이 가운데 51명이 법안 폐지와 함께 최종 석방됐다. 86명은 모진 고문에 못 이겨 전향했고, 16명은 숭고한 이념 앞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 청주보안감호소에서 단식 투쟁하던 변형만의 경우 간수들이 고무 호스를 식도에 집어넣어 왕소금을 잔뜩 푼 소금물을 강제 급식하는 과정에서 숨을 거뒀다.

국가는 이후에도 일반 교도소에 수감된 좌익수들을 사회안전법의 대체인 보안관찰법을 통해 끝까지 옭아맸다. 1995년에는 인민군 출신 김선명 씨가 광복절 특별 사면으로 풀려나면서 자유의 몸이 됐다. 김 씨는 무려 45년을 복역, 세계 최장기수로 기록됐다. 그를 비롯해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에 의해 '마음의 고향'인 북녘으로 돌아갔다. 

좌익 사상범들은 보안 관찰 대상자로 묶여 지금도 국가의 감시를 받고 있다. 수십 년 옥고를 치른 뒤 얻은 마지막 정리의 시간도 이들에게는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 생을 마감한 뒤에야 비로소 끝날 것이다. 분담의 아픔과 처절한 고통을 맨몸으로 마주한 빨치산은 우리가 만들어낸 슬픈 역사이자 또 다른 자화상이다. 

▲ 지난 1월 임방규 씨와 김창근 씨가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손을 맞잡은 채 아무런 얘기도 하지 못했다. ⓒ커버리지(정찬대)

지난 1월 27일 취재진의 도움으로 임방규와 김창근이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손을 부여잡은 채 한참을 놓지 않았다. 풍파를 견뎌온 거친 손마디가 그간의 모진 세월을 말해줬다.

"우리가 만난 지도 꼬박 55년이 됐구만…." 
"…." 

회한이 담긴 임방규의 한 마디에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주름진 표정의 눈망울엔 어느새 한스런 탄식과 설움이 가득 차 있었다. 구순(九旬)의 세월, 굽이굽이 애달픈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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