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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5일 화요일

마음속 세월호를 길어올리며

[정동칼럼] 마음속 세월호를 길어올리며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짧지 않은 미국 생활 중 텔레비전을 보다가 딱 한 번 마음이 울컥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드라마도, 다큐멘터리도 아닌 청문회 실황중계였다. 증언대에 선 미국 백악관 대테러조정관이었던 리처드 클락은 9·11 사태 진상규명 청문회 증언에 앞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9·11의 비극이 왜 일어났는지를 국민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고 또 어떻게 하면 그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될 본 청문회에 서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자리를 또 다른 이유에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본 청문회를 통해 비로소 희생자 유족들에게 직접 사과할 기회를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청 문회장에 계신 유족 여러분, 그리고 텔레비전을 통해 시청하고 계신 여러분. 여러분의 정부는 맡은 소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The government failed you). 국민들을 보호할 소임을 다하지 못했고 저 또한 그 소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실패했고, 실패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한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실패에 대해서 모든 사실들이 규명되는 과정에서 저는 여러분들의 이해와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정부라는 거대한 괴물이 시민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 수도 있다는 것은 명백한 반전이며, 누가 누구에게 왜 사과하는지 이토록 간명하게 밝히는 진정성은 사뭇 감동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당 발언이 1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회자되고, 어느 미국 드라마의 오프닝으로 쓰일 정도로 유명해진 것은 놀랍지 않다. 그러나,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감동적인 사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가 어떻게 위기에 맞서고 극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우선 나의 건망증과 둔감함과 일상에 대한 패퇴를 먼저 고백한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가 지난 월요일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불현듯 아,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이런 둔감함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 대중적 조바심, 혹은 반감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이해한다. 우리는 계층·세대 간 양극화의 문제와 국가·시민사회 간, 그리고 여러 정치세력 간의 전례 없는 갈등을 겪고 있으며,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중국의 경제적 추격과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과제가 버겁기만 하다. 세월호 사건은 최근 우리가 겪었던, 이제는 열거하기조차 벅찬 신문·방송과 인터넷을 가득 채운 수많은 공동체의 사건들 중 하나일 따름이고, 2년이 다되어 가는 시점에 새삼 옛 상처를 열어보고 ‘슬픔을 강요’하는 것이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앞서 길게 인용한 증언이 9·11이 일어난 지 3년 뒤인 2004년에 있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국가 실패(state failure)에 대한 검토와 반성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러 음모론을 믿지 않더라도 우리의 국가가 시민들의 생명을 지키고 구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며, 그 실패의 원인과 책임 소재를 우리는 아직도 모르기 때문이다. 선장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9·11 사건이 테러리스트들의 책임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앞서 인용문의 핵심어는 ‘실패’나 ‘사과’가 아니라 ‘납득’일 것이다.

전망은 아프도록 비관적이다. 민의를 대변하는 웅장한 의회 건물이 아니라 시민단체인 YWCA에서, 청문회를 시작도 하기 전에 예산은 깎이고 몇몇 위원들은 참여를 거부했다고 한다. 언론은 외면하고 댓글들은 불평하며 소위 국회의원들은 내년 총선을 바라보며 지역구의 ‘민생’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우 리는 슬픔과 공감과 분노를 그때 다 ‘지불’해 버렸으며, 마치 새로운 뉴스들이 이전 소식을 아래로 밀어내리는 타임라인처럼 마음의 바닥에 세월호가 가라앉도록 내버려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가 지금 침몰해 있는 곳은 겨울의 팽목항 앞바다가 아니라 그보다 깊고 차가운 우리 마음속 심연이 아닌가 한다. 가만히 있어도 슬픔에 모래처럼 씻겨나갈 유족들이 굳이 뭉쳐서 다시 부서지고 깨지는 것은, 그리고 청문회장에 나와서 생살을 찢는 듯한 그 순간들을 다시 견디는 이유는, 길잃은 한풀이가 아니라 너무도 단순하고 사소한 ‘납득’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오늘 마음속의 세월호를 길어올려야 할 이유 또한 이들과 슬픔과 분노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기 때문이다. 성탄과 세밑의 화려한 불빛이 너무도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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