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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7일 수요일

‘육참골단’과 ‘비굴한 조선 600년’

[다시 역사를 논한다] ⑧ 황당한 조국과 안타까운 노무현
김갑수 | 2015-05-28 11:03:3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육참골단’과 ‘비굴한 조선 600년’[다시 역사를 논한다] ⑧
황당한 조국과 안타까운 노무현
나더러 까탈스럽다고 하는 분들이 많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물고 늘어진다고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아무나 비판한다고도 한다. 오늘의 이 글도 이런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야당 정치인 편을 들어주느니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이 내 본분이며, 또한 이런 지적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좋아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사진출처: 뉴시스
“문재인, 육참골단 해야 한다. 엄정한 기준에 따라 친노건 호남이건 모든 기득권을 잘라야 한다.”
이것은 조국 교수가 새민연의 혁신을 요구하며 트위터에다 날린 말이다. 나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조금 어리둥절했다. 육참골단(肉斬骨斷)이라니? 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말이기 때문이다. 직역하면 ‘살을 베고 뼈를 자른다’는 뜻인 것 같은데 여기서 살과 뼈는 각각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친노의 살을 베고 호남의 뼈를 자른다는 것인지 아니면 새민연의 살을 베고 새누리의 뼈를 자른다는 것인지? 사실 이런 조어는 중국이건 한국이건 있을 수가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한문은 어법상 목적어가 뒤에 위치하니까 육참골단이 아니라 참육단골이라야 맞다.
살을 베고 뼈를 잘라? 왠지 사무라이 냄새가 났다. 아닌 게 아니라 이것은 일본말이었다. 그렇다면 조국 교수는 이런 말을 어디에서 본 것일까? 내 생각으로는 일본 무협지가 아닐까 한다. 프로야구에 심취해 있는 조국 교수다운 어휘 선택이다. 하지만 일단 희극이다.
그런데 희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문재인은 이 말이 멋있어 보였나 보다. 그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저 자신부터 기득권을 내려놓고 육참골단의 각오로 임하겠다.”라고 말한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조국이건 문재인이건 이 말에서 ‘살과 뼈’는 모두 친노 또는 당 기득권의 것을 의미해야 문맥이 통한다. 왜냐하면 조국은 문재인더러 ‘육참골단 해야 한다’고 했고, 문재인은 이 말을 받아 ‘육참골단의 각오로 임하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스스로 살을 베고 뼈를 자르는 무시무시한(?) 혁신을 하자는 뜻이었을 게다.
이후 조국은 ‘육참골단’과 같은 엉터리 말은 없다는 것을 지적받는다. 아마도 조국은 그때서야 책을 뒤적거려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새정치 ‘육참골단’ 제안에 공감해주셔서 감사하다.”라고 한 후, “같은 맥락에서 ‘이대도강’도 필요하다”고 슬쩍 끼어 놓았다.
이대도강(李代桃畺), 즉 오얏(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 대신 말라 죽는다는 이 말은 ‘아군의 작은 것을 희생해서(희생하더라도) 적의 큰 것을 취한다’는 의미로 중국 종횡가의 병법에 언급된 정통의 한문 어휘다. 바둑으로 치면 '사석작전'과 같은 말이니 무언가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과 정확히 부합하는 말은 아니다.
예전에 했던 말을 한번 더하기로 한다. 2012년 대선정국, 문재인 캠프에서 뛰었던 조국은 선거에서 패한 후 “조선시대 같았으면 나는 참수 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조선 문명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편견을 담은 말이다. 조선은 반대자를 무조건 참수할 수 있는 나라라는 전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조국이 역사를 책으로 공부하지 않고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알았기 때문일 거라고 추정한 바 있다. “저 놈 참하라” 이런 말 사극에 많이 나오지 않는가?
제주도 한남리에는 정씨 열녀비가 있다. 이 열녀비의 비문 기록은 『신중동국여지승람』에도 소개되어 있다. 1374년 정씨는 제주도 목마을 담당 몽골 관리의 아내였다. 그런데 방자하게도 이 몽골인들이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고려 진압군이 투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고려 군관이 정씨를 취하려 하자 정씨는 이를 거부하고 끝내 절개를 지켰다.
열녀비는 이 정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고 조선은 1530년 이를 국가서적에까지 기록해서 백성을 교화하려 했다. 이처럼 조선은 착취를 일삼는 적의 여자일지라도 칭송할 줄을 아는 미덕이 있었다. 조선은 국가보다 보편적 윤리를 더 우대했던 나라다.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나만 더하려 한다.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노무현, 2002년 대선후보 수락 연설 중에서)
조선시대가 비겁한 교훈을 가르쳤던 역사라니? 마침 한 친노 인사는 노건호가 추도식에서 행한 발언을 두둔하면서 이 말을 상기시켰다. 그는 ‘아비의 기일을 찾은 원수에게 자식이 허리 굽혀 고개 숙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비굴한 조선 600년의 역사를 청산하자는 노무현 정신을 이어받자고 논점을 확대시켰다.
나는 대관절 노건호의 추도식 발언과 조선 역사 600년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서구 사대 계몽주의 지식인들의 글을 읽어보면 재미나지만 씁쓸한 문체 현상이 나타난다. 이상하게도 조선을 무시하는 그들이 한학을 공부한 정통 조선 선비에 비해 생경하고 어려운 한문을 많이 쓴다는 점이다. 이는 이승만이 툭하면 한시를 끼적였던 심리와 비슷할 터이다.
나는 요즘 조선을 다시 공부하고 있다. 너무도 새롭고 의미가 깊어서 예정된 집필도 미루고 있다. 불현듯 조국의 뜬금없는 ‘육참골단’, 노무현의 ‘조선 600년’을 대하면서 황당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가늘 길이 없다. 대한민국의 진보연하는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조선 인식 수준은 식민지 시대 섣부른 계몽주의자들의 것에서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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