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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0일 월요일

"성수대교 붕괴 20년...아직도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합니다"


한겨레 | 작성자 박태우 기자 게시됨: 2014년 10월 21일 09시 36분 KST 업데이트됨: 2시간 전 [인터뷰] 20년전 가족, 친구, 제자를 잃은 사람들 꼭 20년 전인 1994년 10월21일 아침 7시40분께 서울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 상판 중 48m가량이 끊어지며 한강으로 무너져 내렸다. 16번 시내버스로 등교하던 무학여고 학생들과 출근길 직장인 등 32명이 숨졌다. 만연한 부실공사와 뒷전이던 안전관리가 도마에 올랐다. 당시 서울시장이 사임하고 관련 법규의 제·개정도 잇따랐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20년 동안 더 안전해졌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때와는 다르다’는 일부 낙관적 사고조차 세월호와 더불어 침몰했고, 지난 17일 판교 환풍구 붕괴 참사는 곳곳에 ‘관리되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불안을 일깨웠다. 성수대교 사고 희생자들의 친구와 가족들에게서 20년 전과 지금 얘기를 들어봤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1가 685-571번지. 한강을 따라 달리는 강변북로 옆 100㎡ 남짓한 터에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다. 성수대교 붕괴 참사 20주기를 하루 앞둔 20일 아침 8시 남색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무학여고 학생 4명과 교사 3명이 이곳을 찾았다. 찬 가을비를 맞는 위령비 앞에서 이들은 머리를 숙였다. 성수대교는 학생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너졌고 얼굴 모르는 선배 8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학여고 학생회장 진수영(17)양은 “다시는 이런 사고가 안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동행한 교사는 “위령비가 있는 곳을 무슨 섬처럼 만들어놨다. 사람들에게 ‘그냥 잊으라’고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참배를 마친 학생들은 1교시 수업에 맞춰 등굣길을 서둘렀다. 1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연합뉴스 2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께 무너져 연합뉴스 3 32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친 참사였다. 연합뉴스 4 사고 6분 후 신고가 접수됐지만, 연합뉴스 5 구조대는 1∼2시간 후 도착한 전형적인 인재(人災)로 손꼽힌다. 연합뉴스 1994년 10월21일 오전 성수대교 북단 너머에 있는 무학여고는 눈앞에 보이는 장면을 믿을 수 없었다. 1교시 시작을 앞둔 교실 텔레비전마다 전교생의 절반 가까운 학생들이 통학로로 이용하는 성수대교 중간의 상판이 통째로 무너져 내린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붕괴된 다리 상판 위에는 강남 사는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16번 시내버스와 승용차, 승합차가 한데 엉켜 있었다. 얼굴이 벌게진 교사들은 아직 등교하지 않은 학생들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학생들은 방금 전 자신이 지나온 다리가 무너져 내린 것을 믿지 못했고, 결국 등교하지 못한 8명의 친구들로 인해 학교는 눈물바다로 변했다. 1학년 2반에만 빈 책상이 3개나 나왔다. 모두 32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친 이 사고는 어느덧 20년이 흘렀지만 희생자 가족과 친구, 교사들에게 성수대교 붕괴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같은 반(1학년 2반) 친구 3명을 한꺼번에 잃은 학생은 20년 뒤 아이 둘을 둔 엄마가 돼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ㅂ(36)씨는 20일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많이 울다가 지쳐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이 안치된 병원 3곳을 돌아다니며 엉엉 울었던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ㅂ씨는 지난 20년간 성수대교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왔다. 사고 얼마 뒤 그는 성수대교 근처 한강변에 국화 한송이를 띄웠다. 1주기 추모식에도 2주기 추모식에도 참석해 친구들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고 했다. ㅂ씨는 “슬픔을 안겨준 어른들을 원망하다가 지쳤다. (살아오는 동안) 그날이 가장 힘들었다”며 당시를 힘겹게 떠올렸다. 이아무개(38)씨는 당시 무학여고 3학년이었다. “복도에서 울고 있던 후배들 기억이 또렷하다. 나도 성수대교를 건너 통학을 했다. 가끔 학교에 늦을 때면 엄마가 학교까지 태워다 주곤 했다. 그날 나도 늦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지금은 의사가 돼 있는 그와 그의 가족은 지난 20년 동안 단 한번도 성수대교 위로 지나간 적이 없다고 했다. 사고로 하나뿐인 형(당시 31)을 잃은 김학윤(48)씨의 절망과 원망은 아직도 크고 깊다. 사고 며칠 전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모여 살던 서초동 비닐하우스촌 나무 그늘 아래에서 형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 우리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가장 노릇을 했던 형은 친척이 운영하던 성수동 공장에 일을 도우러 가다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났다. 김씨는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보상 문제로 다른 유가족들과 서울시청을 찾았다가 남대문경찰서로 끌려갔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그런 상처는 낙천적이었던 김씨의 성격도 바꿔놨다고 한다. 자다가도 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밤새 술을 마시고 집 앞에 쓰러져 잠이 들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한테서 “왜 이렇게 화를 내느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그 뒤로 애써 (분노를) 감추고 살았지만 결혼도 못하고 죽은 31살 형님의 인생을 국가가 송두리째 뽑아간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김씨는 4월16일 세월호 사건을 접했다. 갈수록 늘어나는 희생자를 보며 속이 터질 것 같았다고 한다.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던 그는 정보통신(IT) 관련 직장을 그만두고, 자격증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안전 관련 업무를 찾아나섰다고 한다. 김씨는 지금 경기도 평택에서 공사현장 안전관리 업무를 하고 있다. “20년 전에 그렇게 많이 안전을 부르짖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더하면 더했지 나아진 게 없다. 대한민국 안전이 도대체 뭔지 내가 한번 체험해보자는 심정이었다”고 했다. 그런 20년 삶을 보낸 그는 ‘세월호를 이제 그만 잊자’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자식들을 잃고 진도 앞바다에 떡볶이와 피자를 갖다놓는 부모들을 보자니 마음이 아파서 뉴스를 못 보겠더라. 그분들이 원하는 건 돈이 아니고 아이들이 돌아오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사고 당시 무학여고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총각 교사는 이제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변종헌(48) 제주대 교수(윤리교육)는 “이제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 되다 보니 수학여행을 보낼 때조차 조마조마하다. 국민과 부모 모두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라고 했다. 변 교수는 “사회 전체적으로 심리적 치유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 사회는 공감 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반 친구들을 잃은 ㅂ씨도 성수대교 참사 20주기를 앞두고 판교 환풍구 붕괴 참사 등 대형 사고가 잇따르자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우리 아이가 사고를 당해 죽거나 다쳤다는 상상만 해도 눈물이 펑펑 난다. 세월호 사고 등은 안전수칙만 잘 지켰어도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는 단원고 생존 학생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일부러 잊으려고 하지 말고 충분히 울었으면 좋겠다. 일부러 즐거워할 필요도 없다. 슬프면 슬픈 대로 조금씩 나아진다.” 20년 전 후배들을 잃은 무학여고 출신 이씨는 세월호 사고를 두고 ‘왜 성수대교 사고처럼 명확한 원인과 대책이 나오지 않는지’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이씨는 “성수대교 사건 때는 다리가 왜 무너졌고, 앞으로 이런 부분들은 해결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호 사고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정부가 명확하게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20년 전 무학여고 1학년이었던 김아무개(36)씨는 인터뷰 대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애들 돌보느라 정신이 없네요. 판교 사고도 그렇고 싱크홀도 그렇고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라요. 다른 할 말은 없네요.” 더 보기:사회성수대교 20년성수대교 붕괴성수대교 참사성수대교 사망성수대교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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